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슨 Sep 18. 2023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각의 주장대로 정한론자가 아니었나?

제국 시대 일본 자유주의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이었다

https://youtu.be/-g6MYL5lOZs?si=WberxgpFAiiGux1Q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 일본 혐한 우익들이나 한국에서 이른바 일뽕 성향이 과한 애들이 그를 일방적으로 숭상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후쿠자와 유키치가 당대 일본에서 <학문의 권장>에서 "일신독립 일국독립"을 주장하면서 나름대로 진보적인 문제 의식을 가졌던 계몽운동가였던 것도 사실이고 학술 용어들을 영어에서 한자어로 번역하는데 큰 역할을 했었던 인물인 건 부정할 수 없다. 나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 근대사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도 꽤 있다고 보며 마루야마 마사오가 썼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와 후쿠자와 본인의 저서인 <문명론의 개략> 모두 읽어봤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분명 자유민권운동 진영의 대부로써 그 보수적이었던 일본 제국 사회에서 상당히 혁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고 국가의 근대화에는 자유로운 개인이 먼저 형성되는 것이 전제조건이어야 한다고 하는 등 자유주의적인 발언들을 서슴치 않았었다. <학문의 권장>에서 그는 배움을 통해 누구나 현명하고 깨어있는 자율적인 개인이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으며 위에서 언급한 "일신독립 일국독립"이라는 말은 풀어서 설명하자면 개인이 독립하여야 곧 국가도 독립될 수 있다는 것으로 자율적인 존재의 개인이 아닌 군주의 신민이던 일본 사회에서 이런 주장은 좌파적으로까지 보일 수 있었다. 물론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론의 개략>에서 만세일계 자체는 부정하지 않고 천황제 토대 하에 서양 문명을 조화시킬 걸 주장했다.


이처럼 내 개인의 후쿠자와에 대한 평가를 굳이 묻는다면 적어도 일본에서는 1만엔 화폐의 주인공이 될 가치가 없진 않다고 보긴 하는데 문제는 후쿠자와를 쉴드치는 애들이 작정하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을 진지하게 도와주려던 한일 우호의 상징(?)인 것처럼 얘기한다는 것이다. 이게 근거가 어디서 나왔나면 급진개화파 측 인물인 김옥균, 박영효와 후쿠자와 유키치 사이의 친분에서 나온 얘기였다. 실제로 김옥균의 스승이 후쿠자와였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고 또 갑신정변에 일본 자유민권운동 세력들 중 관여한 인물들이 꽤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후쿠자와 유키치였던 것은 사실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이 갑신정변에 패하고 망명한 이후로도 계속 띄워줬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이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과연 자유민권운동, 일본 자유주의 세력들이 순수한 아시아주의적 관점에 의거해서 한일 연대운동을 했는가이다. 먼저 오사카 사건을 일으켰던 자유당 좌파부터 살펴보자. 애당초 자유당이라는 정당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정한론을 주장했다가 퇴출당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나카에 조민 등이 번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세력이었다. 사이고가 세이난 전쟁의 실패로 죽은 후에도 이타가키는 여전히 그를 존경했으며 갑신정변 1년 후인 1885년 오사카 사건이라는 자유당 좌파 세력이 일으킨 해프닝도 있었다.


오사카 사건은 명목상으로는 의회 내 정당 또는 체제 보완물로서의 자유당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으킨 것으로 제국 일본의 반체제로서의 우익과 좌익의 태동의 시발점이었다. 오사카 사건은 겉으로 한반도에서 조선 내정 개혁을 실시하는 "자유민권혁명"이었으나 그것은 진짜 본질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일본의 정치개혁에 있었고 자유민권으로 인한 내치개량이 본질이며 즉 내지의 자유민권혁명으로 전환하기 위해 조선 내정 혁명을 시도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조선 개혁운동을 계기로 메이지 전제정부를 변혁하는 한편 갑신정변에서 일본이 청나라에 당한 수모를 불식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것은 히라노 요시타로의 <오이 겐타로>와 고바야시 구스오의 <자유당사>에 나온 내용이다.

자유민권운동가이자 국권주의자 오이 겐타로

결과적으로 오사카 사건을 일으키면서까지 조선 독립을 부르짖던 자유당 좌파의 거두 오이 겐타로는 1899년 사회주의자 가타야마 센과 보통선거운동 단체를 만들며 진짜 개혁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었나 싶었던 행보를 보인지 얼마되지 않아서 러일전쟁 이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결탁하며 그대로 국권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민권운동의 리더인 도야마 미쓰루는 현양사를 창설하며 민권론을 국권론으로 덮어버렸고 오히려 반정부 운동의 탈을 쓰고 제국주의적 행보에 번벌보다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 이때 후쿠자와 유키치도 <통속국권론>을 통해 민권과 국권의 양립을 주장해 사실상 사이고 다카모리를 계승했고.


<신진>의 편집인 중 하나이자 훗날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자유주의 지식인으로써 나중에 3.1 운동의 취지에 대한 공감 및 조선 자치론까지 주장하는 요시노 사쿠조조차도 러일전쟁 당시에 주전론을 적극 주장했다. 당시 러시아의 극동경영은 40년 동안 지속되면서 가속 및 부동항 확보와 해외시장 확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영토를 확장해왔고 만주 점령에 사활을 걸었던 상태였다. 요시노는 만주에 대해 현재 우리나라 상공업의 커다란 시장이고 장래에는 유망한 시장이 될 것이며  만일 일본이 이 지역에서 주도권을 상실하면 우리나라 상공업 대부분이 정체하고 대단히 어려운 지경에 빠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만주의 주도권을 상실하느냐의 여부는 일본 산업의 존망의 분기점이라 주장하며 적극적인 개전론을 외치는 등 민권주의자면서 동시에 국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무단 통치를 비판하고 조선인들에게 동정적인 시선을 취하며 조금 유연하게 변했던 그였지만 그럼에도 중국에 대한 21개조 요구 같은 침탈 행위를 지지하거나 조선 지배가 일본 국익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하는 등 제국주의적 면모가 여전했다.


" 러시아가 일단 만주를 경략한다면 다음으로 조선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보전하고 제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만주로 진출하는 러시아 세력을 좌절시켜야 한다. 우리나라 상공업의 생존을 위해 만주에 부식하고 있는 러시아 세력을 반드시 무너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하루빨리 러시아의 기선을 제압하고 한국에서 무역의 권리를 장악해야 한다. "

- 러일전쟁 개전을 요구하는 요시노 사쿠조의 발언 -


얘기가 길어진 거 같으니 이제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겠다. 누구는 후쿠자와가 조선이라는 악우와 손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걸 두고 갑신정변 주모자들에 대해 조선 조정이 처한 가혹한 처벌에 마음이 아파서 그렇다고 하는데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썩었고 무능했는지는 후쿠자와의 "탈아입구론"을 쉴드칠 근거가 못되고 그냥 원래부터 후쿠자와 유키치는 주변 국가에 대한 경멸과 무시가 패시브였던 인간이라는게 그의 어록에서 잘 나타나있다. 뭐 다 떠나서 흥아론도 아니고 대놓고 탈아입구를 주장한 사람한테서 그가 주변국의 개화와 동시 번영을 진지하게 고민해줬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단편적으로밖에 못보는 거지만.

 

아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어록, 그것도 갑신정변 이전에 한 어록들이다. 갑신정변 이후에 한 말들을 먼저 말하면 무슨 갑신정변 실패 때문에 멀쩡하던 사람이 흑화했다 이 소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일단 갑신정변 이전 어록들 먼저 가져왔다. 어록 출처를 밝히자면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라는 책에서 가져왔다.


“조선은 아시아 중에서도 조그만 야만국으로 그 쪽에서 조정을 찾아와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다.”- 1875년 10월

  “조선인은 그저 완고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외국선만 발견하면 다짜고짜 발포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지난날과 같다.” - 1876년 11월

  “조선인은 미개한 백성이다. 극히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흉포하다.” - 1882년 4월

  “조선인은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우며 거만하다.” - 1882년 9월 6일.

  “우리 일본은 동양의 선구자이자 우두머리로서 지나와 조선을 유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이 필요” - 1883년 1월.

  “조선의 사절이 미국에 가면서 중국인을 동반했다는 것은 거지와 천민이 함께 가는 것과 같다.” - 1883년 8월.


그리고 밑에 어록은 갑신정변 이후의 후쿠자와 유키치 어록들이다. 이때부터는 그냥 대놓고 탈아입구 이러고 있으니 눈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누가봐도 제국주의자가 한 말로 밖에 안보일 말들로 수두룩하다. 아니, 어떤 면은 이토 히로부미 같은 번벌 정치가들보다도 더 과격하다. 출처는 박해순의 <1894 일본조선침략>.


" 일본은 이웃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킬 만한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 관계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중국,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나라이므로 특별히 배려할 필요가 없다. 서양인이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처분하면 될 뿐이다. 악우와 친하게 되면 함께 악명을 면하기 어렵다. 나는 마음으로 아시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한다. "

- 탈아론 (1885년 3월 16일자 후쿠자와 유키치 사설)-

" 중국은 원래 조선을 속국시하여 늘 그 보호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경우 청원할 것까지도 없이 병력운 보내 진압에 힘을 쏟을 것이다. 만일 중국의 병력으로 조선의 내란을 진정시키고 그 정부의 자립을 돕게 되면 반도국의 전권은 더욱 그들 수중으로 들어가 조선독립의 결실을 거두는데 방해가 된다. 그 결과는 동양에서 우리 국권의 소장에도 명백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 일본사람은 미리 이에 착안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가 중요하다. 만일 한 걸음 물러나거나 혼자 먼저 나서지는 않더라도 중국정부가 원병을 보낼 경우에는 일본도 그들과 같은 수의 경력을 파병해 반드시 대등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

- 조선 동학당의 소동에 대하여 (1894년 5월 30일자, 후쿠자와 유키치 사설)

" 어떠한 방해를 받더라도 일본은 개혁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일의 추세로 보아 어떤 불이익에 빠질지 알 수 없다. 오늘에 이르러 입씨름은 무익하다. 일각이라도 빨리 지체하지 말고 결연히 중국을 적으로 삼아 우리 쪽에서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일본이 평화방침을 취한 것은 중국이 우리에게 아직 직접적인 손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다. 약소한 조선을 토벌해 딱하게도 오랫동안 그들이 물들어 있던 중국 숭배의 미몽을 타파하는데 탄환, 화약보다 나은 것이 있을 수 없다. "

- 중국, 조선 양국에 즉시 개전해야 한다 (1894년 7월 24일자, 후쿠자와 유키치 사설)

이것도 확실하자면 청일전쟁 당시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번벌은 오히려 소극적이었고 조선 개화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말하는 민당, 자유민권운동 세력이 더 적극적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나 메이지 천황은 개전에 소극적으로 나서면서(메이지는 아예 "대신들의 전쟁"이라 표현함) 청나라와 조선 공동 관리, 즉 톈진 조약 체제 유지 및 보수를 주장했지만 무쓰 무네미쓰라는 조슈, 사쓰마 양대 파벌과 적대하던 반정부운동가, 민당 출신 외무상이 적극적으로 개전 추진해서 전쟁나게 된 부분도 없진 않다. 당장 민당 세력들은 "민력휴양"을 주장하며 예산안 삭감을 주장했지만 청일전쟁 개전을 반대하지 않았고 번벌의 제국주의 노선을 효용성 측면에서 비판했지만 정작 당대 일본의 국가주의, 제국주의 흐름에는 적극적으로 편승했다.


자유당은 <자유당보>에서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기 위한 전쟁', '개화와 보수의 전쟁'이라고 주장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사신보>에 '청일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다'라는 게시글에서 청나라 사람들을 야만인이라 규정하며 일본은 문명개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전쟁 찬성 목적은 보통선거권이라는 권리 확대 및 식민지로의 민당 세력의 관료 진출이라는 부분도 있었다. 무엇보다 자유당이나 개진당 같은 민당 세력들, 더 나아가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이들은 일본이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선해 나라의 독립을 세워야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수 있다고 봤으며 그것의 수단 및 방법론에 있어서 대외침략론을 선택하였다.


그러니 일본 자유주의자들이 평화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이웃나라의 문명개화를 바래서 개화운동을 도와준다고 연합한 게 아니었다. 실제로 중국 국민당의 설립자 쑨원은 신해혁명 과정에서 일본의 자유주의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의 후원을 받았고 대아시아주의를 주장하며 친일적 성향을 보였지만 그 일본의 중국 개화(?)에 대해 해준 거라고는 21개조 요구를 내세워 반일 감정만 폭발시켜 5.4 운동이 일어나게 만든 것 뿐이었다. 결국 일본의 실체를 깨달은 쑨원이 소련과 코민테른 쪽으로 방향을 선회, 1차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 지원받는 장쭤린의 봉천군벌과 싸우게 되었고 이로써 일본이 말하는 대동아의 이상과 이웃나라의 개화 지원의 실체가 다 드러나게 되었다.


오히려 근대 일본 인물들 중에서 진짜 주변국과의 연대를 주장한 아시아주의자를 찾을 거면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대놓고 사대주의 주장한 탈아입구론자나 오이 겐타로 같은 이들보다는 막말기의 가쓰 가이슈나 전전 쇼와 시대의 기타 잇키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막부 시절 관료였던 가쓰 가이슈는 메이지 신정부 이후로도 대놓고 청일전쟁에 대해 반대를 표명하고 조선에 대해 과거에 일본에 문명을 전파해준 스승이라 말하기도 했으며 기타 잇키는 신해혁명을 돕던 대륙낭인 시절부터 일본의 21개조 요구 같은 침탈적 행보를 비판하였으며 조선인에 대해서도 내지인과 동등한 권리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만주사변을 일으켰던 이시와라 간지조차도 만주와 조선, 대만을 독립시켜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하는 등 군국주의자면서도 최소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이웃나라에 대한 경멸적 태도는 덜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분명 사상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 평균보다는 확실하게 진보된 시각을 보유하고 있던 계몽운동가였다. 학술용어들의 일본제 한자어 번역을 주도했다는 것이나 최소한 초기 행보, 그러니까 <문명론의 개략>이나 <학문의 권장>을 쓸 때까지의 모습 만큼은 나름 긍정적으로 볼 만하다 생각하고 마루야마 마사오도 이 점을 높게 보는 것일 거다. 그래서 1만엔 화폐에 싣건 말건 그거야 일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난 일본인들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업적들을 발굴하는 건 나쁘게 보진 않는다. 그야 학문적으로는 일본 입장에서는 잘한 부분이 크니까 말이다.


근데 그것과 별개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을 사랑했는데 조선 조정 때문에 탈아론을 발표했을 뿐이지 정한론자는 아니었다는 식으로 억지 쉴드를 치고 있는 반응들이 넷상에서 종종 나오고 심지어 언론 기사에까지 나오는 걸 보면 참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후쿠자와 이 양반은 일본에서도 계몽운동가로서의 삶인 전기와 흑화한 민중경멸론자로서의 후기가 평이 크게 엇갈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어찌 되었건 주변국에 대해 극도의 경멸감을 가졌었던 사람이라는게 다 기록에 남아있는데 애써 부정하는 건 그냥 솔직히 까놓고 말해 일뽕짓으로 밖에 안보인다. 정작 후쿠자와와 손잡았었던 적이 있는 갑신정변의 주모자 중 하나인 김옥균은 필요에 따라 청나라 이홍장과도 교섭하려 하는 등 일본을 사대하지 않고 조선의 자주권을 먼저 고려한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자가 맞다. 대놓고 조선을 아래로 둬야 한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갑신정변 이전부터 이웃나라에 대한 경멸을 보여오던 사람이었다. 그냥 다 떠나서 애초에 서양 사대주의자였던 인간이 조선 개화에 호의적일 거라 보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