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서 나오는 주장 중에 욱일기를 하켄크로이츠랑 동일선상에 둘 수 없다고 하며 대신 하는 얘기가 바로 대정익찬회기=하켄크로이츠라는 것이다. 그 논리를 살펴보자면 당시 독일의 집권 세력은 나치당이었고 그들의 상징은 하켄크로이츠였으며, 반대로 일본의 경우에는 대정익찬회가 집권하고 있으며 상징은 "익찬기"였다는 얘기다. 명목상으로 대정익찬회는 정당이라는 성격이 존재했으며 또 어찌 되었든 군부의 협력 기관이자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인 천황제 파시즘이 가장 유럽적으로 발달된 형태로 나타났던 사례일 것이다. 왜냐하면 대정익찬회가 나온게 신체제운동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일단 전범기라는 표현에 대해서 말하자면 없는 말이 맞다. 국어사전에 검색해도 나오는 말도 아니고 한국에서도 굳이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봐도 21세기 초반에 나온 용어일 것이다. "전범"도 아니고 전범"기"라는 말은 솔직히 이런 표현을 쓰는 나라가 우리나라 밖에 없고 그것도 우리조차도 그렇게까지 오래된 표현이 아니었다. 외국의 경우에 하켄크로이츠를 따로 전범기라 표현하지 않으며 욱일기를 전범기라 지칭하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2012년쯤?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 즉 학술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며 그냥 신조어 내지는 은어 정도로 보는게 맞을 것 같다.
또 나는 욱일기를 굳이 전범기로 표현해야 하나 싶긴 한게 왜냐하면 욱일기를 과거 침략전쟁의 유산으로 간주하고 항의한다면 다른 문제로도 번지기 때문. 가령 일본의 국기 일장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쓰여왔고 2차세계대전 중에도 공식적인 국기는 어디까지나 욱일기가 아니라 일장기였다. 기미가요도 일본국 시대에 들어서 새로 제정된 게 아니라 제국 시대부터 계속 불려오던 국가였다. 사실 욱일기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논리면 독일 국방군의 철십자 마크를 이어받은 독일 연방군도 똑같은 잣대로 비판받야 하며 일장기, 기미가요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일본 제국보다 더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행태를 저지른 벨기에도 여전히 콩고에서 저지른 짓을 미화하는 와중에도 지들 과거의 영광을 자랑스러워 하는데 욱일기를 금지시키는 논리면 그것도 다 때려잡아야지.
결국 그냥 욱일기를 우리가 개인적으로 반감을 품는 것을 넘어 제대로 공식적으로 항의하기에는 외교적인 문제도 있거니와, 이런 논리가 국제적으로 먹힐 만한 형편이 안되니 굳이 욱일기에 대해 취급할 거면 하켄크로이츠보다는 미국의 남부연합기 정도로 평가하는게 맞지 않을까 한다. 남부연합기도 공식적으로는 금지가 아니고 가끔 가다가 드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그것과 별도로 노예제를 찬성하던 과거의 남부연합에 치를 떠는 흑인들에게 이 깃발은 혐오 당하는데 욱일기도 민간 차원에서 반감과 공식적인 금지 및 금지 요구 사이에서 명확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본다. 게다가 욱일기를 허락해주고 있는 건 다름아닌 주일미군과 미국이라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욱일기가 아니라 대정익찬회기를 하켄크로이츠와 비벼야 한다는 주장은 솔직히 조금 억지라고 본다. 우선 하켄크로이츠는 나치당의 당기였다. 나치 시절 독일은 당국 체제로서 나치당이 정치와 행정, 그리고 전쟁까지 다 포괄하는 주체였다. 일당제 하에 특정 정당이 열광적인 대중 정치를 펼치며 총력전을 주도하는 것은 유럽형 파시즘의 특성으로 실질적으로 유럽 국가에서의 파시즘의 원천은 "정당"에서 나왔다. 2차세계대전 와중에도 나치당은 구 프로이센 융커 계층의 독일 국방군보다 위에서 전략적인 것들을 주도했으며 국방군을 불신한 나머지 무장친위대 같은 사병 조직들까지 둘 정도로 군부보다 자신의 주도권을 우선시했다. 애초부터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즘 세력이 집권한 것은 대중 정치가들이 정당이라는 수단 때문이었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반면 일본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의견 차이는 학자별로 다 달라도 그래도 마루야마 마사오나 로버트 팩스턴이나 혹은 제니스 미무라나 전부 다 서구 파시즘적인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은 실패했다고 보기 때문인데 이는 일본에서 군국주의 폭주의 주체가 정당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나마 일본에서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의 사례였던 황도파 청년장교 운동도 군부라는 수단을 통해 이뤄졌으며 이는 정당 정치에 참여해 판을 뒤엎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다. 또 다른 서구적 파시즘의 의미에 부합했었던 사례인 동방회도 금지당하고 그곳의 리더인 나카노 세이고도 연금당했는데 놀랍게도 황도파의 2.26 쿠데타를 진압하고 동방회를 금지시킨 건 통제파 장교들이었다.
물론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서구적 파시즘 원리에 입각한 단일정당 체제를 만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그러한 사례였는데 1940년 총리직에 복귀한 그는 "신체제 운동"을 실시한다. 고노에 총리는 파시즘 기획에 능력이 있던 기시 노부스케와 호시노 나오키를 만주국에서 본토로 소환하였는데 그들은 과거 파시즘 연구단체 쇼와연구회 발족에 기여한 적이 있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분명 군부를 억제할 생각은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기가 군부에 끌려다니지 않고 정치를 주도하기 위해서였으며, 쇼와연구회 때부터 고노에와 친분이 있던 야베 테이지의 변호와는 달리 실상은 고노에 후미마로야말로 대중적 지지를 받는 정당을 기반으로 하는 나치식 일당독재를 수립하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대정익찬회의 본부
가령 1940년대 초반 일본에서 파시즘, 나치즘 지지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군부가 아닌 민간인들이었고 1938년 봄부터 단일 정당 구성 논의가 나오자 혁신관료들은 입헌민정당, 입헌정우회, 사회대중당, 민간 우익들을 빅텐트로 모아서 다 해산시킨 뒤 대일본당으로 결집시키는 급진적인 구상을 내놓기도 했었다. 그 중 하나였던 가메이 칸이치로는 단일 정당을 통한 구체적인 세계관 확립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주국 협화회라는 실험을 바탕으로 나치당을 모델로 한 단일 파시즘 정당 구성이라는 신체제 운동의 방향성을 확립했다. 야베 테이지 같은 쇼와연구회 인사들은 아예 나치 독일의 "일국 일당" 원칙으로 전위 조직을 구성해 정당의 정강, 정치, 행정 전반을 관할해 천황과 일본 국민조직 사이의 매개 역할을 할 것을 주장했을 정도.
그러나 고노에 후미마로는 독일, 이탈리아와는 달리 일본은 천황제 사회였기에 대중의 지지를 직접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판단, 1940년 8월 신체제 운동은 "내각 지원 체제" 확립 및 국민조직 창설을 목표로 하여 그해 10월 12일 대정익찬회를 발족시킨다. 결과적으로 역시나 새 조직은 통제하기 어렵고 지나치게 관료적인 대중조직으로서 중앙집권적 리더쉽의 부재로 뚜렷한 권한도 없었다. 당장 대정익찬회의 지역 지부들은 내무성의 행정 네트워크에 주도는 커녕 편입되어 버렸고 군부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주도권 잡으려 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여기서 일본의 파시즘은 결국 "미완의 파시즘"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며 대정익찬회는 1945년 해산되기 전까지 나치당 같은 유일당 지위는 누려보지 못한 채 그저 행정 보조 기관, 군부 어용 기관 처지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기에 일본에서 군국주의 폭주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것은 대정익찬회가 아니었고 따라서 나치당하고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제 몸통은 어용 기관인 대정익찬회가 아니라 쇼와 육군, 즉 일본군이라고 본다. 이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는데 일본에서 전체주의 흐름이 가속화되는 것에는 파시스트 정당들이 아닌 군부의 장교들이 항상 중심에 있었다. 간혹 기타 잇키와 오카와 슈메이를 예로 들며 일본의 민간 우익 진영에도 파시즘 운동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타는 <국가개조법안대강>에서 혁명의 주체를 분명 청년장교들이라고 명시했고 그 민간 우익들이 손잡았던 대상이 바로 군인들이었다. 당장 정당 정치 속에서 대중을 휘어잡아 어쨌든 의회제 하에 집권한 히틀러와는 달리 일본의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은 사쿠라회 사건, 혈맹단 테러, 하마구치 총리 암살, 5.15 사건처럼 군부와 손잡고 정치적 테러 및 쿠데타적 수단에 의존하는 방식이었다.
일본 군국주의 시작을 알린 건 관동군의 폭주였다.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은 일본에서 누가봐도 실패했으니까 둘째치고 위로부터의 파시즘, 즉 통제파 및 관동군과 관련된 사안만 봐도 침략전쟁의 주체는 대정익찬회가 아니라 군부였다는 사실이 뻔히 나온다. 1931년 만주사변이 대표적인 예시이고 그 이전에 있었던 1928년 황고둔 사건이라는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을 관동군이 폭사시킨 사건이 군부가 침략전쟁을 주도하게 되는 것의 시발점이었다. 기나긴 침략전쟁의 서막을 알린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1937년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것도 관동군의 참모장교들이었다. 태평양전쟁 역시 도고 시게노리 같은 외무성의 민간 관료들이 반대했음에도 육군성 내부의 강한 주장 때문에 이뤄진 것을 보면 일본의 침략전쟁사를 따져봤을 때 그 어디에도 군부와 관동군은 항상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말하면 전시 일본에 군부 출신이 아닌 지도자가 더 많았다며 회피하려 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물론 어느정도 사실인 면도 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 고이소 구니아키 등이 대표적인 예시인데 근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총리가 군인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평화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는데다가 그 민간 총리들이 있을 때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전쟁 수행에 관한 업무들은 죄다 군부의 권한이었다. 일본 제국 헌법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고 명시되어 있던 상황상 군부는 내각으로부터 독립된 권한을 가지고 멋대로 침략행위를 중일전쟁 이전부터 저질러왔었고 그게 황고둔 사건, 만주사변이었다. 평시에도 이런데 전시에는 더더욱 군부의 권한이 올라갈 수 밖에 없을 뿐더러 2.26 사건 이후로 민간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자신들을 협박하는 군인들에게 함부로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일본 총력전 체제의 뿌리, 나가타 데쓰잔 군무국장
쉽게 얘기하자면 일본에서 군부가 지배하게 된 것은 1차세계대전 속 독일 제국의 모습과도 유사한 부분이 크다. 통제파의 아버지 나가타 데쓰잔이 <육군 팸플릿>을 비롯해 총력전 구상을 만들면서 가장 참고한 사례가 1차대전 시절 전시 독일의 루덴도르프의 총동원 체제이기도 했고 메이지 헌법 제정 과정에서 가장 많이 참고한 모델이 바로 독일 제국 헌법이었다. 그리고 그 독일 제국도 대전 후반기로 가면 갈 수록 빌헬름 2세와 의회 정치 속 정당들을 밀어내고 루덴도르프라는 새로운 군부 실권자가 주도하여 국가를 총괄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도 소책자 <좌익 소아병과 소부르주아 정신에 관해>에서 독일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인 "전시사회주의"를 본받아 소비에트 경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고. 어쨌든 루덴도르프가 걸었던 총력전 체제의 길은 전체주의 모델의 귀감이 되었고 일본도 마찬가지였다는 얘기.
결론을 내리자면 대정익찬회기=하켄크로이츠는 엄연히 틀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정익찬회는 나치당과 같은 단일정당이자 국가를 주도하는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단 한번도 누려보지 못했으며전쟁 초반부터 판을 하나하나 다 설계하고 주도적인 위치였던 나치당과는 달리 대정익찬회는 1940년에 창립되어 이미 군부가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켜 침략전쟁 행위를 시작한 후에야 들어섰기 때문이다. 욱일기로 맨날 반일 감정 물타기하는게 싫을 수야 있고 뭐 일각에서 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 뇌절 수준이긴 한데 그것과 별개로 욱일기 까는 사람들을 까는 사람들도 대정익찬회기=하켄크로이츠 드립을 쳐대는 걸 보면 수준이 비슷해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종합해보자면 일본의 침략전쟁을 주도한 것은 대정익찬회가 아니라 군부였고 그 군부의 상징이 욱일기였다는 점은 팩트다. 그래서 너도 욱일기에 발작하는 근첩이냐, 라고 보일텐데 난 별로 그런 거 신경쓰지도 않고 태양 무늬까지 일제 잔재 드립치는 거 보면 역할 때도 가끔 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냉정하게 보았을 때 욱일기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 외부에서 관철될 현실적인 가능성은 아예 없다시피하기에 그것까지 고려해서 욱일기에는 크게 과민반응하는 걸 자제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일본하고의 과거사 문제를 대응할 때 가장 좋은 태도란 깃발 문양 같은 디자인 따위에 집중하기 보단 은연 중에 깔려있는 사상을 비판하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깔 때 범죄 행위가 단편적인 상징인 욱일기에서 나온게 아니라 팔굉일우, 대동아공영권 이런 내면 사고의부분을 깊숙이 파고드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