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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20. 2023

일본 근현대 아시아주의의 기원

흥아론에서 아시아 먼로주의, 동아신질서, 대동아공영권을 거쳐 소일본주의로

https://youtu.be/gsVGf1T2Hfs?si=mxhPjo97z4B52ouO

일본에서 아시아주의는 "흥아론"이라는 발단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시초는 가쓰 가이슈라는 구 에도 막부 관료였던 이였으며 일본 자유민권운동 우파 세력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 헌정 리버럴들이 체제에 편입된 이후에 흥아론의 발달이 남은 반체제 인사들에게서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나카에 조민 등 자유민권운동 좌파들은 고토쿠 슈스이랑 일본 좌익 사회주의 계열로 이어졌고 반대로 민권론자에서 국권론자가 된 도야마 미쓰루가 중심이 된 현양사가 바로 이후 흑룡회로 발전하여 대륙낭인들을 중국으로 수출(?)하게 되었다.


흑룡회의  창립자 우치다 료헤이는 오사카 사건 당시 실제 행동에 나섰던 사람이었고 또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지자 이들을 돕는데 나서기도 했었다. 한편으로 흑룡회라는 조직이 내세운 혁명 전략은 이노우에 닛쇼 등 혈맹단에 영향을 끼쳤고 기타 잇키도 대륙낭인으로 있으면서 우치다의 영향을 받았었다. 이 흑룡회라는 조직은 한일합방 과정에서 대한제국 내 일진회 같은 친일 세력들과 손잡기도 했으며 신해혁명을 비롯해 중국 내 사회운동에도 깊게 영향을 끼쳤다. 아마 중국 국민당의 아버지 쑨원이 "대아시아주의"를 주장하게 되는 것의 근원은 일본 국권주의 성향의 대륙 낭인들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일본의 아시아주의 흐름은 일본을 넘어 동북아시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초기 흥아론에 비해 매우 크게 변질되었지만 아시아주의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제국의 프로파간다인 "대동아공영권"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일본이 패전과 함께 대일본주의에서 다시 소일본주의로 돌아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시아주의가 비록 흥아론에서 변질된 시점부터 상당히 제국주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는 바람에 이미지가 너무 망가져버리긴 했지만 이 글에서는 아시아주의를 침략을 목적으로 활용한 제국주의자, 군국주의자는 물론이고 나름 평화주의적, 진보적 신념이 있었던 아시아주의 인사들에 대해서도 같이 서술하고자 한다. 

탈아입구에 대항하는 탈구입아: 오카쿠라 덴신


이 인물은 한국에도 의외로 이름이 알려진 적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게이오 대학을 방문했을 때 강연에서 한일 연대, 우호를 강조하면서 이 인물을 인용한 것인데 국내에서 굉장한 논란이 되었다. 야권이나 일부 학계에서 이 논란에 문제를 제기할 때 한 소리는 한국을 멸시하고 식민지배에 찬동한 정한론자를 한국 대통령이 도대체 왜 대단한 위인이라도 된 것인냥 띄우냐는 것. 사실 우리나라에서 식민지배 문제로 일본과 관련된 사안이 워낙 민감한 상황이기도 하고 흑룡회 사례처럼 아시아주의자들 자체가 대외팽창과도 연결고리가 있어서 굉장히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지긴 한다.


정한론자였다는 건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 역시 그가 쓴 <일본의 각성>을 다는 아니지만 절반 가까이 읽어본 적이 있기도 하고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탈아입구론자들이나 반대의 탈구입아론자들이나 기본적으로 "국권"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꽤나 호의적이었으니까. 정한론이라는 과오와는 별개로 긍정적으로 변호해보자면 19세기에 밀려들던 서양 제국주의의 압박에 맞서서 아시아의 미학을 재발견하는 역할을 했던게 바로 덴신이었고 또 임나일본부설 비스무리한 주장을 한 것은 개소리는 맞지만 정보가 제한된 시대에 <일본서기>를 읽었으면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암튼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논란이 될 인물은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언급을 자제하는게 맞지만 크게 의미부여해서 노발대발할 이유는 없다는 거,


얘기가 길어졌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오카쿠라 덴신은 굉장한 탈구입아론자였다. <동양의 이상>이라는 글에서는 대놓고 아시아는 하나라고 주장하며 비록 중국 문명과 인도 문명으로 나누고 있지만 눈 덮인 장벽마저도 "궁극의 보편"을 추구하는 사랑의 저 드넓은 확대를 단 한 순간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사랑이야말로 아시아 민족 모두의 공통된 사상적 유산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세계의 모든 대종교를 창시할 수 있게 하고 특수에 유의하면서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을 추구하기를 좋아하는 서양 민족들로부터 그들을 구별짓는 점이라 하였다.


오카쿠라는 아라비아의 기사도, 페르시아의 시, 중국의 윤리, 인도의 사상은 모두 고대 아시아의 평화를 이야기하고 거기서 공통의 생활이 발달하여 각 지역마다 독특한 꽃을 피우면서도 엄밀한 경계선을 그을 수 없었다고 한다. 회교를 검을 움켜쥔 마상(馬上)의 유교라고도 평했고. 일본에 대해서는 아시아 문명의 박물관 이상의 존재로써 일본의 다이묘들의 보물창고에는 송나라와 원나라의 미술품, 사본을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으며 중국 학자들이 고대 지식의 원천을 일본에서 찾고 있다고 주장하며 "일뽕"의 정수를 보여줬다.


오카쿠라 덴신은 일본 근대화시기 미술사연구의 개척자로 미술 평론을 하며 영어로 저작을 남겼다. 미술가 양성에 힘쓰면서, 보스턴 미술관의 중국, 일본미술부장 등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일본 미술 개념의 성립에 일조했다. 이렇게만 보면 근대 동아시아 미학 계열에서 업적이 매우 커다란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저서 <일본의 각성>에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다던가 한국을 식민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분명히 국수주의적인 사상가였다는 건 사실이었다. 오카쿠라는 아마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였지만 그로 인해 본인들의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더더욱 "일본의 각성"을 촉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의 원조이자 아시아 먼로주의자: 고노에 아쓰마로


우리에게는 중일전쟁을 일으킨 총리로 유명한 고노에 후미마로의 아버지이다. 한국에서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당연히 인지도는 윤석열이 언급했던 오카쿠라 덴신보다도 없는 편이다. 위키에서도 문서가 아예 없어서 고노에 후미마로 문서에 간략하게 서술이 나오거나 있어도 자세하진 않다. 그도 그럴게 고노에 아쓰마로는 1904년에 사망했는데 아들이 13살이었으니 일찍 죽은 거였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오쿠마 시게노부 같은 일본 제국주의 역사에 커다란 비중을 남겼었던 정치가들에 비하면 크게 한국하고도 얽힐 일이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고노에 아쓰마로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번벌 정부에 저항하던 귀족원 의원 정치가였다. 청일전쟁 당시에는 "지나보전"을 주장하며 기성 정당들과 대립각을 세웠고 동아동문회를 조직했다. 그는 외무성, 군 등과 연계하여 1890년 중국에다가 남경동문서원을 창설했고 의화단 사건을 계기로 정세가 급박해짐에 따라 대러강경론을 주장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특히 국민동맹회는 그 선두였다. 또 고노에는 훗카이도 개척에도 적극적이어서 개발 사업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으며 이곳을 개척하여 국방의 요지로서 동양의 요로인 훗카이도는 러시아와 아메리카가 이어지는 지점이라 표현했다. 삼국 간섭 이후부터는 중국 보전론과 함께 훗카이도, 중국을 러시아에 대항하는 일종의 방파제로 활용하자는 얘기도 했다.


아들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과 정반대로 아버지 아쓰마로는 동양인의 동맹을 주장했다. 1898년 1월 잡지 <태양>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동양은 인종 경쟁의 무대이고 최후의 대결은 황백 양 인종의 싸움이 될 터인데 중국인, 인도인, 일본인 모두 서양인의 적이 될 것이라고 나와있다. 재미있는 부분은 고노에가 중국을 결코 미개지가 아니고 고도의 독자적인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고 하고 있는 것인데 더 나아가서 중국 인민의 존망은 곧 일본인의 문제라고  정도였다. 고노에가 서양에 적개심을 보이는 것은 해외 시찰을 갖다가 하와이에서 이민간 일본인들이 백인 밑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중국을 근대화 시켜주는 것에 더더욱 강박을 느끼며 그 계몽의 수단으로 동아동문서원과 동아동문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중국 보전론은 당시 중국 교주만에 대한 독일의 점령이라는 서양 제국주의 침략 노골화에 대응논리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고노에 아쓰마로가 주장한 중국 보전론에는 청나라 정부 지원, 캉유웨이 등 청 조정 내부 개혁파 지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기본적인 골자는 아시아 제국 연대를 주장하지만 한편으로는 메이지 신정부의 탈아입구적 논리와도 맞닿은 부분이 있었는데 서구열강의 대아시아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세력균형론을 끌고 와서 국내에서는 중국 분할론, 일청동맹론을 포괄하는 논리로, 대외적으로는 국제협조적인 논리로 작용할 양면성이 있었다.


특히 20세기 초 고노에 지론을 바탕으로 창설된 국민동맹회는 "중국 보전론"을 발판으로 만주 문제 해결 및 대러시아 강경론을 부르짖는 여론을 주도하는 단체였다. 고노에 아쓰마로는 이토 히로부미가 주장하는 만한교환론을 비난하면서 러시아에 만주를 넘기면 중국이 서구 열강에게 분할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결론은 만주를 열강의 협동 하에 개방해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일본이 철도부설권을 얻어서 진출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쉽게 얘기하면 국민동맹회는 만주 보전=중국 보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이게 곧 러일전쟁 개전 논리로 이어졌다.


고노에 아쓰마로는 영일동맹을 주장하며 개전론을 부추켰고 가쓰라 다로 내각 성립 이후 국민동맹회를 자진 해산하고 대신 조선협회라는 조직에 입김을 행사한다. 조선협회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화 정책 바탕 제공에 꽤 구체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철도 부설, 은행 설립, 식민과 농업, 상업 등의 항목을 세워서 제안을 세부적으로 하였다. 또한 조선의 경제 문제도 철저히 조사하였고 조선 내 일본인 거류지를 조직화를 시도하여 일본 이민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이처럼 고노에의 지도력 아래 조선 협회는 조선으로의 팽창과 실제적 과제를 제시하여 향후 일제가 대조선 정책을 펼칠 만한 장을 마련해줬다.


고노에 아쓰마로는 일본 국내의 민족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정치세력화하는 것에 있어서 굉장히 역할이 컸다고도 볼 수 있다. 단순히 입을 터는 것에서 그친게 아니라 단체들까지 직접 만들고 운영해가며 대외팽창 여론을 이끌고 대륙문제에 개입할 소위 "대륙낭인"들을 대거 양성시키는 등 실천적인 활동을 매우 많이 했던 사람이다. 이때의 대외팽창론은 훗날 아들 고노에 후미마로가 이어받는 것은 덤이었고. 아울러 동인종 동맹론, 중국 보전론, 동문동종론 등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이데올로기들을 완성시켜 이것이 1930~1940년대 이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폭주로 나타나게 되는 원흉이었다.

일본주의의 원류 지식인: 오카와 슈메이


기타 잇키와 함께 황도파 청년장교 운동의 핵심이었던 사람이다. 도쿄 전범재판에 A급 전범 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정신병 문제로 풀려나기도 했으며 동지였던 기타가 사형당한 후에도 군부에게 동원되어 태평양 전쟁 내내 대미 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도쿄 제국대학 철학과에 다닐 때부터 인도 철학에 심취했던 오카와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당하며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그때부터 아시아주의 사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주체가 될 일본이 먼저 자급자족 경제영역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오카와 슈메이는 국수주의 사상가였다. 일본이라는 국가는 투쟁주의, 국가주의, 이상주의, 정신주의를 생명으로 하는 야마토 다미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일본 정신의 뿌리는 동양 문명의 바탕인 유교와 불교였다. 그는 정반대 성격의 불교와 유교 사상을 조화시켜 높은 이상을 추구하면서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 균형을 이루는 일본 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일본 정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은 서양의 물질 문명과 동양의 정신 문명을 통합시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으로 동서양 문명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은 일본 민족의 "천부의 사명"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주체가 일본이었나? 오카와 슈메이는 동양은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찬란한 문명을 꽃 피웠지만 대부분이 식민지나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자연스럽게 서양으로부터의 해방은 아시아 민족의 공통 목표이자 시대 정신이 되었다. 왜 일본인지를 보자면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세계사의 흐름을 읽고 성공적으로 부국강병을 이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굴욕과 분열, 비참함 속에서 잠자고 있던 아시아 여러 민족들을 각성시키는 사명을 완수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카와가 민간 우익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다이쇼에서 쇼와 초기로 그 시기 일본이 쇠락한 원인에 대해 그는 서양 숭배가 문제라고 단호히 지적했다. 물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의 물질 문명을 수용하며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러일전쟁 이후 무비판적인 서양 숭배가 지속되면서 위기가 몰려왔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서양화로 인해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개인주의, 향락주의 등 국가를 부정하는 사상들이 먹구름처럼 일본을 둘러싸게 되었다는 것. 그 중에서도 서양화의 폐단이 가장 심한 것으로 꼽은 건 정당정치와 자본주의 경제였는데 정당은 당리당락에 몰두하고 재벌이 축재만을 추구함에 따라 국민이 곤궁해지고 결국 국가의 운명이 위험해졌다고 오카와는 분노했다.


따라서 오카와 슈메이는 기타 잇키가 그랬듯이 제2의 유신을 주장한다. 군민일체 원리에 따라 천황과 국민을 가로막는 특권 계급을 제거하고 천황친정으로 돌아가야 하며 "쇼와 유신"의 주도 세력은 소수의 애국지사와 군부의 청년장교들이라고 했다. 군인들의 기원인 무사계급은 천황에 충성을 바치는 이들로써 사익보단 국익을 추구했고 그렇기에 막부 말기와 같은 일본 정신을 계승한 군인들과 애국지사들이 기존 질서를 쿠데타로 붕괴시켜야 한다는 것. 오카와는 실제로 이러한 신념 아래 군부의 쿠데타나 정치 테러 시도에 여러차례 가담하기도 했었다.

민본주의자이자 조선 자치론자: 요시노 사쿠조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원류인 사람을 왜 오카와 슈메이, 고노에 아쓰마로 같은 군국주의자들과 같이 넣냐고 할텐데 이 글은 일본 군국주의자를 소개하기 보단 아시아주의자들을 얘기하는 글이고 요시노 사쿠조도 자유주의자였지만 어쨌든 아시아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면이 있긴 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시노 사쿠조는 제국주의의 한계를 벗지 못했다는 비판이 많이 제기되긴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하다. 러일전쟁 때 적극적으로 찬동한 지식인 중 하나였고 이시바시 단잔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제국의 팽창 근본 자체에 대해서 문제 제기는 안했으니까.


그럼에도 조선 문제에 꽤나 관심이 있었던 사람인 건 사실이다. 요시노 사쿠조는 "조선문제는 가까운 장래에 국내정치의 가장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만큼 조선인에 대한 자치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고 무단적 동화정책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3.1 운동이 벌어지고 조선총독부가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자 대놓고 악정이라고 표현하면서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은 한반도 곳곳에 왜 반일 정서가 가득한지 반성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요시노는 19세기의 약육강식을 버리고 20세기의 도의와 인도주의의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을 주문한다. 요시노 사쿠조가 조선 문제에 대안으로 제시한 대책은 첫번째가 조선인과 일본인의 혼합교육이었고 이것으로 조선인들이 느끼는 소외감이 덜할 것이라 생각했다. 또 하나는 무단통치인데 군인 총독을 폐지하고 문관을 총독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군인 총독은 결국 개혁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인데 정작 일제시대 내내 조선 총독들은 전부 군인들이었다. 세번째는 동화정책을 폐지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언론통제를 완화하여 어느정도 보도의 자유를 줘야 한다는 얘기였다.


요시노 사쿠조의 문제 의식을 긍정적으로 보자면 3.1 운동에 대해 정부나 대다수의 언론, 지식인들이 침묵하거나 외부의 선동으로 몰아갈 때 문제의 핵심 직면을 요구하며 식민정책을 강하게 비판해 정부와 국민의 자기반성을 이끌어내려 했다는 용기 만큼은 대단했다. 또한 합병한 지 10년이 지나며 조선은 일본의 한 부분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될 때 조선인을 독자의 문명을 가진 하나의 민족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이와 대조되게 21개조 요구 같은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탈 행위를 지지한다거나 조선인의 최종요구가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한 자주독립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일본 제국 시대 지식인의 한계였다. 결국 이 지점이 요시노 사쿠조 또한 안으로는 민주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라는 메이지 신정부 이래 일본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가졌던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걸 의미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군국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아시아주의와 연관성이 있기에 넣었다.

"일본의 히틀러": 나카노 세이고


나카노 세이고는 현양사의 거점이던 후쿠오카에서 아시아주의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자랐고 번벌을 공격하는 언론인이 되는 과정에서 신해혁명 지지 국면, 제1차 호헌운동 등에서 활약했다. 1913년 8월에는 경성특파원으로 조선으로 건너가서 1915년 2월까지 체류했는데 이때 쓴 게 <내가 본 만선>이라는 글이었다. 나카노 세이고는 소일본주의에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조선을 계속 영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정 혁신 후 제국주의라는 사고방식이 굉장히 강했던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는 훗날 파시스트로 변한 후에도 이 기조는 유지된다.


나카노 세이고는 조선인을 일본 본토 관리로 임용하고 무단적 억압으로 식민지가 유지되지 못할테니 참정권을 승인하여 차라리 그들의 정치사상을 순조롭게 발달시켜 함께 제국을 위해 공헌하는 수단으로서 식민지의회 및 제국의회 조선인 대표단을 두자고 주장했다. 나카노 세이고는 총독부의 특권자본 보호 정책이나 헌병 및 일본인의 횡포에 부정적이었고 통치의 지도정신으로서 관치주의와 감독주의, 간섭주의를 자치주의와 지도주의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관료적 동화정책 대신 국민적 동화정책을 주장했다.


3.1 운동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조선과 내지의 차별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문화통치에 문제를 제기했었던 것도 나카노 세이고였다. 제국헌법을 조선에 시행하고 조선인들에게 일본 신민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평등하게 부여하라는 것으로 특히 중의원 선거권, 피선거권을 부여하고 관리의 평등 임용도 내세웠다. 심지어 총리대신도 육군대신도 대학총장도 대은행가도 대의사도 능력이 있는 조선인이 그 지위를 얻는데 있어서 장애가 있어서 안된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조선의 독립에 대해선 극구 반대하며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로 남아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 일본의 강약약강 태도도 문제지만 조선 독립운동도 백색인종에 놀아나는 짓이라며 양비론을 펼치기도 했다. 나카노 세이고는 의원으로 재직하며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인종차별 철폐 결의안 부결, 영미 세력의 산둥 문제 개입 등에 대해 반서구적, 아시아주의적 의견을 많이 냈었던 사람인데 정작 본인도 강약약강 사고의 한계가 남아있었다.


이후 나카노 세이고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몰락함에 따라 친군부 입장으로 전환하여 군국주의적 단체들을 이끌었고 히틀러, 무솔리니와 회견을 가진 후에는 강한 파시스트가 되었다.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대정익찬회의 총무도 지냈었다. 그러나 대정익찬회가 유일당이 아닌 행정 보조 기관으로 전락함에 따라 도조 히데키한테 들이받고 탈퇴 후 동방회로써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1942년 선거에서 3% 득표율을 기록하자 군부에 의해 가택연금 당하기도 했다. 얼마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외 인물: 하시모토 긴고로와 이시바시 단잔


한 명은 도쿄 전범재판 기소자, 한 명은 침략전쟁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 총리였던 두 인물을 단지 아시아주의와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나란히 두니까 조금 많이 이상하게 보이긴 한데 문단으로 나누기엔 그 정도 분량은 안 나올 거 같아서 대충 이 정도로 쪼갠다.


1. 하시모토 긴고로


1990년 6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터키 우호 100주년 연회에서 주일 대사가 우호의 상징으로 꺼냈던 인물이 바로 하시모토 긴고로 중좌였다. 하시모토 중좌는 1927년 터키 대사관 소속 주재 무관이었고 아타튀르크 케말 대통령과 직접 대면이 가능할 정도의 위치였다. 그는 일개 연대장에서 열강의 분할 지배에 저항해 터키 공화국을 건설한 국부 아타튀르크 대통령을 존경했으며 그 외에도 트로츠키 일파와도 교류했었다.

1930년 9월 하시모토는 비밀 결사인 사쿠라회를 조직했고 1931년 3월 우카키 가즈시게 육군상을 추대하려고 쿠데타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물론 실패했고 그럼에도 만주사변 전에 관동군 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지로와 만난 독단 행동 촉구 및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해 6월에는 만주사변에 호응해 아라키 사다오 내각 설립을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대좌 신분으로 중근신 처분을 받았다.

2.26 사건 이후 숙군 인사가 된 하시모토 긴고로는 예비역 신분으로 대일본청년당을 창당했고 중일전쟁 발발로 소집 명령을 받아 13연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전시에 익찬정치회 의원으로 태평양전쟁 개전에 대해 선전했으며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지목되어 종신형 판결을 받고 1955년 가출소되기 전까지 복역했다. 가출소 2년 후 폐암으로 사망.


2. 이시바시 단잔


3.1 운동 후 1919년 5월 15일 <동양경제신보>에 기고한 '선인(鮮人)폭동에 대한 이해'라는 글에서 이시바시 단잔은 어느 민족이라도 식민지배 당하는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고 조선인의 반항을 제거하려면 그들을 자치민족으로 만들어주면 된다는 당대 요시노 사쿠조보다 훨씬 진보적인 주장을 펼쳤다. 1921년 3월에 기고한 글에서는 조선, 대만, 사할린을 버릴 각오를 하고 중국, 시베리아에 대한 간섭을 중단해야 한다는 매우 파격적인 소일본주의론을 내세웠다.

전후 자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하토야마 이치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지만 건강 문제로 취임 2개월 만에 사퇴했다. 퇴임 후에도 일본과 미국, 중국, 소련 간 평화동맹 구상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존 운동을 펼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참고 문헌:


박영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의 국제질서관과 제국 일본의 전쟁원인>, 현대일본학회, 2018

박훈 외, <일본 우익의 어제와 오늘>, 동북아역사재단, 2008

김명인 외, <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 창비, 2010

마쓰모토 겐이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 문학과지성사, 2009

마쓰오 다카요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소명출판, 2012

한상일, <쇼와 유신: 성공한 쿠데타인가 실패한 쿠데타인가>, 까치, 2018

한상일, <제국의 시선; 일본의 자유주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와 조선문제>, 새물결, 2004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글항아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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