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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25. 2023

고이즈미 신지로는 과연 멍청한 개그 캐릭터인가?

"펀쿨섹좌"는 무시해도 되는 정치인이 아니다.

https://youtu.be/-gd4qYPoZqQ?si=B7u37oIr_Tg0wIPy

" it's got to be fun, it's got to be cool. It's got to be sexy too. "
Fun하고, Cool하고. Sexy하게 대처해야 하죠.

- 기후변화의 대처법을 설명하는 고이즈미 신지로의 발언 -


아마 이 말이 고이즈미 신지로를 상징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오죽하면 "펀쿨섹좌"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이고 이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인터넷상에서도 엄청난 놀림거리가 되다 못해 하나의 밈이 되어버렸다. 공약 실현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선 아예 당당한 표정으로 "하겠습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라는 무슨 일본 소년만화에서 볼 법한 오글거리는 중2병 멘트까지 쳐버렸다. 2019년 지구온난화 대책회의에서는 "지금처럼이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지금처럼이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정신 나가버릴 듯한 발언을 하며 이럴 거면 차라리 정치인이 아니라 개그맨이나 하라는 비웃음을 한일 양국 여론 모두에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아마 고이즈미 신지로의 아버지와는 너무 괴리감이 큰 모습이기 때문이다. 신지로의 아버지는 알다시피 고이즈미 준이치로라는 자민당 내부의 파벌 정치를 와해시키고 이와 유착한 관료주의를 크게 타파하며 더 나아가 잃어버린 10년을 어느정도 극복하는데 매우 크게 기여한 총리였다. 아버지 준이치로는 아베 이전 총리 중에서 범 국민적으로 인기가 가장 높았었던 사람이었고 우정 민영화를 추진하기 위해 중의원 해산 및 재선거라는 승부수를 과감하게 던져 반대 파벌을 압살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력을 가진 수완가였다. 동시에 55년 체제 동안 비주류였던 보수 방류가 주도권을 잡고 개헌 담론을 일본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세운 자였다.

그런데 아들이라는 고이즈미 신지로는 하는 소리가 "펀쿨섹", "약속이니까" 이런 유체이탈스러운 중2병 쿨찐으로만 보일 말들을 해대니 아버지 준이치로한테 도대체 뭘 배운건가 싶을 정도의 생각이 드는 것도 뭐 이상할 것은 없다. 실제로 어떤 한국 언론 보도에서는 고이즈미 신지로라는 정치인을 일본 2세 정치인들의 무능과 세습 구조의 폐단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할 정도인 상황. 그런 주장이 설득력이 있긴 했던 건 아소 다로라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외손자인 정치인이 보였던 행태가 워낙 답이 안보이는 지경이었던 탓도 있다. 실제로 2세 정치인들이 부친이나 조부, 외조부 만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는 일본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있고 당장 미국만 봐도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다만 2세 정치인들이 마냥 무능한 도련님일 것이라는 주장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55년 체제를 끝냈으며 자민당 창당의 주역 하토야마 이치로의 아들 하토야마 유키오는 비록 지금이야 퇴물이 다 되었지만 그래도 2009년까지는 자민당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은 전력은 있었다. 가장 정치력을 잘 발휘한 2세 정치인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베 신조였는데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와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능력을 물려받아 세이와 정책연구회를 장악하고 역대 최장수 일본 총리로 재임하는 능력을 선보였다.


고이즈미 신지로를 비롯해 일본에서 2세 정치인들의 가장 큰 자산이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양날의 검이 바로 자신의 부친 or 조부, 외조부다. 고이즈미 신지로는 아버지 준이치로의 막대한 영향력을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10년대를 기점으로 아베 신조와 그의 파벌과 적극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아예 준이치로는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아베의 지원을 받는 자민당 후보를 낙선시키려고 야당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는 걸 돕기도 했을 정도였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탈원전을 주장하며 자민당의 정책을 적극 비판했고 고이케 유리코의 도쿄도지사 당선에 매우 큰 역할을 하며 아베 내각에 위기감을 조성했다.


워낙 바보 이미지가 강한 탓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고이즈미 신지로는 결코 못배운 사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컬럼비아 대학교 석사를 딸 정도의 머리는 있는 사람이고 당연히 일본 정치 구조가 인맥과 파벌에 기초한 정치공학이 지배하는 곳임을 모를 수가 없다. 그렇기에 아버지 준이치로가 자민당 내부에서 비주류, 아웃사이더였던 것도 당연히 인지했을 것이고. 상식적으로 일본에서 차기 혹은 차차기 총리 후보로 주목받는 인간이 진짜로 바보일 수가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노인네들이 지배하는 일본 정치판에서 아무리 아버지 후광이라지만 28세의 나이로 중의원이 된 시점에서 아무 생각이 없을 수가 없다. 다 떠나서 아버지 준이치로가 설령 아들 바보라 해주고 싶은대로 다 해주며 키웠다고 한들 진짜 함량미달이었으면 본인 명성에 흠집낼 각오를 하고 자기 지역구를 물려주면서까지 정치적으로 후원해줬을까?

고이즈미 신지로의 실제 행적, 그러니까 언행 말고 정책적인 것을 보면 의외로 유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날로그 시스템이 지배적인 일본에서 의회 내부의 디지털화를 중의원 개혁 실현 회의 사무국장 자격으로 추진하였고 환경대신이라는 자리에서 정치 생명 타격 없이 살아남은 것부터가 그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호사카 유지의 말마따나 환경대신의 자리는 그 유명한 후쿠시마 원전 문제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위치라서 굉장히 어려운 중책이고 아베와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후쿠시마 원전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환경대신의 자리에 고이즈미 신지로를 앉혀 정치적으로 제거할 목적이 컸다. 그런데도 고이즈미 신지로는 살아남았으며 그리고 딱 시점인 환경대신 재임기간 동안 "펀쿨섹"을 비롯해 각종 어록들이 나오게 되었다.


환경대신으로 있으면서 외부적으로는 온갖 실언들을 내뱉었지만 그럼에도 행정은 깔끔하게 잘했다. 원래 환경성 직원들은 공장 환경 검사 등으로 방문할 때 각각의 법령에 따라 신분확인증명서를 대체하는 신분증이 필요했는데 그래서 각 지자체에서는 공무원 신분증, 수질오염방지 검사신분증, 공장출입자격자 신분증 등이 각각 필요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신분증을 최대 15개씩 가지고 다녀야 했었던 상황이었고 과장급은 무려 30개가 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고이즈미 신지로는 환경대신에 부임하고 이 신분증을 1개로 다 통일시켰으며 이는 아날로그 행정의 대표국 일본에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변화였다. 본인이 젊다는 걸 무기로 삼겠다는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디지털화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젊은 나이가 좋은 쪽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日 차기 총리? 내가 만난 고이즈미 2세"라는 2018년 4월 6일자 주간조선의 기사에서 나온 바에 따르면 마이클 그린이 추구하는 ‘한·미·일 3각 군사동맹’을 넘어선 시각을 제시할 아젠다가 있었다고 하며 일본인은 영어를 못한다는 편견을 깰 정도의 미국 정책통들과 1 대 1 영어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언어 실력도 확실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한번 제대로 정치력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 모리토모 비리 사건 정국에서는 아베를 강하게 비판하며 물론 어디까지나 여론조사상이었긴 하지만 아베의 지지율을 뛰어넘는 지지를 받았던 적도 잠깐 있긴 했을 정도였다. 


고이즈미의 정치력이 또 한번 잘 나타났던게 바로 2021년 자민당 총재 선거였다. 스가 요시히데의 퇴진 과정에 관여하고 이시바 시게루와 함께 고노 다로를 지원한 것인데 이때 기시다 후미오를 지원하는 아베와 아소를 수구파로 몰아세우며 자신들을 개혁파로 포장했다. 비록 최종적으로는 기시다 후미오가 선출되었지만 고노 다로가 여론조사 결과로는 승리하면서 자민당 내 반아베 세력의 결집력이 의외로 강하다는 걸 보여줬었다. 또 기시다 내각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시바 시게루와 고노 다로가 차기 총리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라 고이즈미 신지로가 키포인트의 역할을 할 여지가 생겼다.


그래서 고이즈미 신지로는 바보 정치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바보 같은 언행들을 자꾸 내뱉는가라는 의문이 들텐데 간단하다. 일종의 "흥선대원군 전략"인데 사실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가지만 시진핑도 국가주석이 되기 전까지는 중앙권력에 대한 관심을 크게 내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반대로 다나카 가쿠에이의 딸 다나카 마키코는 초재선 의원이라는 자기의 분수도 모르고 아버지 정치 스타일 따라한다고 막 설치다가 자민당에서 쫓겨나서 그대로 정치 생명 자체가 끝장나버렸다. 고이즈미 신지로도 이걸 바라지는 않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적당히 바보 연기를 하는 것이다. 가령 2018년 총재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를 지지하여 아베파의 집중 견제를 받게 되었던 경험이 있을테니 고이즈미 신지로도 지금 당장은 무조건 아버지가 했던 방식으로 당내 주류 세력에게 들이받을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이즈미 신지로 화법을 보면 꽤 특이한 특징이 있는데 정치생명에 크게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는 적당히 수위 조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보는 신뢰성에 문제가 가는 등의 리스크는 있지만 일단 발언 및 아내 타키가와 크리스텔의 노력으로 신지로라는 정치인 자체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것에는 크게 성공했으며 실언들이긴 해도 도가 지나치지는 않기 때문에 정치적 생명은 유지가 가능하다. 또 언들은 대체로 2019~2020년 사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집중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다 전략적으로 계산하고, 또 자기가 최소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서 하는 발언들인 것을 알 수가 있다. 한편으로는 논란이 될 수 있는 주제, 즉 위안부 같은 사안들에 대해서는 일부로 유체이탈마냥 회피하는 대답만 반복하는데 이것도 당장 튀는 바람에 온갖 곳에서 다 견제를 받는 상황을 바라지 않는 신지로 입장에서는 현명한 선택이긴 하다.


고이즈미 신지로는 실제로도 엄청난 견제를 받고 있다. 앞서 말한 아베가 환경대신으로 보내서 정치적 생명 자체를 끊어버릴 틈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며 고노 다로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기시다 후미오가 그를 사실상 좌천성 인사 발령을 내리기도 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 고이즈미 신지로가 자기 아버지처럼 대놓고 싸움을 건다는 것은 스스로 정치적 자살을 하는 행위일 뿐이기에 정치인으로서 명확한 포지션을 드러내서 책임을 지거나 적을 만드는 일은 아주 교묘하게 피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화제가 될 법한 이상한 소리로 인지도를 올리고 아내 타키가와 크리스텔을 내세워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어오는 방식으로 일단 본심을 숨기고 경력을 키워가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고이즈미 신지로의 선택이 어쩌면 현실적으로 올바른 선택인 것이 동일선상의 비교는 어렵지만 청년 정치인의 대표 실패 사례인 이준석의 행보가 그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신지로는 최대한 "상갓집의 개"를 코스프레하며 발톱을 숨기며 일격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준석은 그와는 정 반대로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나왔다. 윤석열이 국민의힘으로 입당하기 전부터 공격해왔으며 그 이후로도 당내 중진들한테 한 치의 양보나 타협도 없이 치고박고 싸우며 그들이 앙심을 품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대선, 지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하면서 이준석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게 되자 국민의힘의 윤핵관, 친윤 중진들은 자신들의 입지에 공격적으로 나오는 이준석을 그대로 토사구팽해버렸다. 현재 이준석의 정치 행보는 매우 불투명하게 되었고 그에 비해 고이즈미 신지로는 한직으로 밀려났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기회를 잡을 여건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자민당 자체가 기시다 내각의 혼란과 통일교 유착 논란 등으로 크게 변화의 조짐이 생긴 상황이고 현직 총리 기시다 후미오의 총리직 유지 여부가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기시다에 의해 좌천된 고이즈미 신지로가 어떠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며 킹메이커 역할을 할 지가 관건이 되었고.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고이즈미 신지로는 엄연히 야스쿠니 신사에 공개적으로 참배한 적이 있는 정치인이다. 그런 만큼 고이즈미 신지로가 그냥 개그 소재로 소비되는 한낱 바보 정치인으로 비웃기 보다는 그의 행보를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 더 옳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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