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차세계대전은 전쟁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꾼 사건이었다. 유럽은 초토화되었으며 그 속에 괴물이 탄생했으니 말이다. 이 곳에서 루덴도르프의 주도 하에 총력전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다. 이것은 훗날 발전되어 투하쳅스키, 구데리안, 드골 같은 서양의 군사 전략 연구자들을 넘어 아시아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글에서는 일본 제국이 1차세계대전의 경험으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써보고자 한다.
타넨베르크 신앙과 신들린 정신주의
먼저 일본 군부는 1차세계대전기 전투 중에서도 유독 동부전선의 타넨베르크 전투에 유독 관심을 보였다. 1935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해 패전 때 대령이었던 다키야마 시노부라는 군인이 회상하기를 육군대학교에서 교관이 타넨베르크 전투의 개략과 교훈을 말해보라고 시켰다. 정석적인 대답은 용기와 결단만 있으면 수적, 물리적으로 불리해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일본은 1차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칭다오 전투에서 직접 부딪혔었다. 여기서 일본은 전쟁은 과학력과 공업 생산력, 국가로서의 종합력, 물량의 차이에서 승패가 결정되며 용기나 결단, 돌격 정신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을 분명 느낄 기회가 있었다. 실제로 '통제파'라고 불리는 나가타 데쓰잔은 이걸 계승해 고도국방국가를 계획한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 이유는 민간의 경제력 때문이었다. 러일전쟁의 펑톈 전투에서 쿠로파트킨의 제정 러시아군을 상대하면서 일본이 소비한 포탄은 33만 발이었고 이 정도도 당시 일본 경제에 큰 부담이었다. 반면 1차세계대전에서 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사용한 탄환은 3,400만 발이었고 펑톈의 100개이다. 그래서 여기서 입장이 갈린다. 통제파는 1차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갖지 못한 나라에서 가진 나라가 되어 미국과 일전을 치를 국력을 갖추고 대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본 것이다. 반면 황도파는 타넨베르크 전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지지 못한 나라는 제한된 전쟁을 하여 단기섬멸전으로 빨리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정권을 잡은 것은 통제파였다. 1차세계대전의 경험은 나가타 데쓰잔을 비롯한 일본 군부 통제파에게 있어서 가지지 못한 나라를 가진 나라로 만들어 총력전을 해야 한다는 사고를 갖게 하는 등 신들린 정신주의로 열세를 극복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황도파와는 달리 자신들은 가진 나라에 가까이 가게 하기 위한 계획과 계산, 경제 운영에 방향성을 두는 쪽으로 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통제파에는 나가타 데쓰잔을 필두로 이시와라 간지, 스즈키 데이이치 등 통제파 내부에 사회주의 계획 경제 운영을 깊이 연구하는 풍조가 전반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도파가 만든 <통수강령>과 <전투강요>는 1936년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완전히 숙청당한 후에도 수정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오히려 특수 조건 하의 상황을 가정했다는 말은 쏙 빠지고 장비가 열악하고 수가 적은 일본군이 필승의 신념만 있으면 미군을 포위섬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포위섬멸의 반대 상황에 대한 대책은 있을까? 바로 '옥쇄'였다. 섬멸전에 실패해서 불리해져도 필승의 신념만 버리지 않는다면 퇴각이나 항복이란 선택지는 있을 수 없기에 옥쇄를 한다. 결국 통제파의 대전쟁에 황도파의 옥쇄 정신이 결합되어 2차세계대전 일본의 대참사가 벌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량전으로서의 칭다오 전투
칭다오 전투는 1차세계대전 당시 중국 대륙 칭다오에서 일본군과 독일군이 싸웠던 전투다. 거대한 참호가 황폐화되고 피비린내 나던 다른 1차세계대전 속 전투와는 달리 규모도 그닥 안 컸던 탓에 한국이든 일본이든 중요성을 잘 인지하지 못하며 아마 일본인들은 쇼와 시대에 있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보다 느긋하게 치러진 그야말로 다이쇼 시대다운 전쟁이었다고 인식할 것 같다. 이는 똑같은 요새 공방전이었던 러일전쟁의 여순 전투의 처절한 기억과도 상반되는 부분. 따라서 <국방사>를 쓴 이토 마사노리는 딱히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전투였기에 특별한 교훈도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칭다오 전투는 러일전쟁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전쟁을 보여줬던 사례이기에 의미는 크다. 한마디로 러일전쟁까지의 일본군은 보병이 공격하고 포병이 지원하는 전쟁이 아니라 포병의 화력으로 정리하고 난 뒤 보병이 뒤처리를 하러 가는 형태의 전쟁이다. 따라서 화력이 강하고 포탄이 많은 쪽이 이기며 백병전이나 돌격전이 아니라 원거리에서 물량으로 압도해가는 전쟁, 즉 포병이 주(主)가 되고 보병이 종(從)이라는 것.
구와키 다카아키라 육군 중장이 1943년에 저술한 <육군오십년사>에서는 공략전 계획 단계의 빠듯한 시점에서 작전 방침이 당초의 보병 돌격을 주로 하고 그것을 15cm 유탄포에 의한 포격으로 엄호하는 "전근대전"에서 보다 구경이 크고 파괴력이 강한 28cm 유탄포, 45년식 24cm 유탄포를 늘어세워 포격으로 칭다오 요새를 압도하는 근대전으로 전환되었다고 나와있다. 당연히 거대포를 운용하고 포격 진지를 설치하려면 공병 부대와 철도 부대의 중요성이 높아진 것이고. 45년식 24cm 유탄포는 칭다오 전투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여순 공방전 속 피해가 워낙 크다 보니 대구경포를 멀리서 마구 때려보는 방식을 썼는 것이다.
그리하여 칭다오 전투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 육군의 근대화 정도를 시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잘만 하면 육군 전반에 보병이 돌격하는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그야말로 화력의 시대로 포탄을 얼마나 투입하는가, 대포의 숫자와 성능과 포탄 보급량이 승부를 결정한다는 시대의 첨단을 달리는 인식을 분명히 얻을 계기가 될 수 있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황도파는 그렇다 쳐도 엘리트 참모장교들인 통제파들조차 야마토 정신이 서구보다 우월하다는 헛된 믿음에 갇혀 과학기술이 일본이 미국을 앞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통제파 장교들이 완성한 총력전 체제 구상
1차세계대전은 총력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전면에 등장시켰다. 총력전은 자원을 얼마만큼 동원해서 얼마만큼 조직해내느냐가 핵심인데 가령 러시아는 자원은 많지만 조직 체계가 워낙 후진적이어서 동원력이 심각한 수준이라 내부 혁명으로 먼저 무너져 백기를 들었다. 반대로 독일은 참전국 중에서 가장 조직 체계와 군사 체계가 발달된 곳이었음에도 영국이 해상을 봉쇄해버리면서 자원은 물론이고 식량마저 부족하게 되어 무너졌다. 즉 식량과 에너지라는 전략적, 경제적 자원은 총력전이라는 앞으로의 전쟁 방식에 있어서 이전보다 중요성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은 전쟁 이전부터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에 흥미를 느꼈는지라 대전이 발발하자 군부가 이끄는 자신들의 나라에 이를 적용, 루덴도르프의 주도로 '전시 사회주의'라고 총동원 체제를 완성시킨다. 오죽하면 적백내전 시기 레닌은 <좌익 소아병과 소부르주아 정신에 관해>에서 독일의 루덴도르프가 정립시킨 전시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국가통제주의적 경제 모델을 본받아야 한다면서 이를 바탕으로 전시 공산주의를 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루덴도르프의 모델은 전세계 전시 경제의 원조 격으로 취급되어 각국의 총동원 체제 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통제파들은 1차세계대전을 보면서 루덴도르프와 클라우제비츠, 하우스호퍼 같은 서구 전략가들의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특히 스즈키 데이이치 같은 일부 장교들은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저작 <빈곤 이야기>에 큰 사상적 영향을 받은 후 대장성에서 잠시 근무하며 내정에 대한 실무까지 익혔었다. 아니키나가와 이케다도 도쿄제대 경제학부에서 자본주의와 소련식 경제 모델에 대해 집중적인 토론과 공부를 한 후에야 군사 교육을 마치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레닌이 말한 것처럼 소련식 통제 경제 모델 또한 루덴도르프의 총력전 체제 구상에 의외로 영향을 받았기에 당시 통제파들이 공부하던 소련식 통제 경제 모델, 나치식 경제 모델, 루즈벨트식 뉴딜 모델 중 앞의 두 개는 사실상 루덴도르프 구상의 연장선에 있는 부분이 없진 않다.
통제파 장교들은 1차세계대전을 직접 지켜봤던 이들이다. 이미 대전 중인 1915년 가을부터 육군성은 유럽 국가들의 전쟁 교리와 총동원 체계 정책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 중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된 대상은 유럽 각국의 자원 및 병력 부족 문제였다. 고이소 구니아키 소좌는 1917년 <제국국방자원>을 제출하여 "국가총동원"과 "경제적 자급자족", "국방경제"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훗날 2차세계대전기 일본 총력전 수행의 기초를 다졌고 이게 1918년에 곧 군수공업동원법이라는 국가총동원법의 뿌리가 될 전시 상황에서의 민간 영역에 개입해 국민 동원하는 법의 제정으로 이어진다. 또한 루덴도르프가 자신의 저서 <총력전>에서 독일 패전의 근본 원인을 군사력 부족이나 전략상의 허점이 아닌 경제 기획과 대중 선전에서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일본 육군성도 비슷한 시기에 이와 유사하게 현대 전쟁의 특징을 "조직 능력의 항쟁"이라 표현했다.
이러한 통제파들이 정립한 총력전 구상은 국가 내부에서 확고히 지지받는 담론이 되었다. 총력전 구상은 단순히 군사적인 성격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 또한 포함하고 있는 담론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통제파 장교들은 여기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을 활용하여 국민들의 생각을 그들의 방식대로 규정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는 "적자생존"이라는 사회진화론의 법칙과 같은 과학적인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며 일본이 강대국들과 같이 세계무대를 나눠 갖는데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일본 엘리트들의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파시즘 기획가에서 전후 일본의 핵심관료집단으로: 혁신관료
그동안 일본을 주도하던 관료 계층은 메이지 시대 법대를 나와서 법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위로 올라가던 전통적인 관료 계층이었다. 그들은 치열한 관료 임용 시험의 통과와 전문성 및 연공서열을 기반으로 한 승진 제도라는 관례화된 관료 경력 구조로 법적 지식과 공공성 전반을 독점한 이들이었는데 야경국가를 지향하면서 "식산흥업"이라는 정책에 따라 재계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 공장 건설과 수출 기업 육성을 더욱 활성화 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전통적인 관료 계급들은 영미법을 전공한 탓에 일본을 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무역을 통해 성장하는 해양국가로 여겼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1차세계대전의 여파로 변화가 요구되던 시대 분위기 속 통제파들이 조슈 벌을 서서히 밀어내며 위치를 다질 때쯤에 관료 계층에서도 기존의 야경국가를 관리국가로 변화시키려 하는 자들이 등장했고 1930년대 만주 침략 이후부터는 아예 정부 기관의 핵심 계층이 되어버린다. 고도국방국가를 위해 효율적인 관리 체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바로 "혁신관료"라고 불리는 신흥 관료 계층으로 전쟁, 산업, 사회의 기술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국가가 개입주의적이고 주도적으로 나서서 감독적 기능보단 관리적 기능을 하게 하자는 당시로서 신박한 비전을 제시하였다.
혁신관료들은 대부분 도쿄제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기존의 제대 법학 전공자들과는 다른 점이라면 내무성이나 대장성 같은 상위 부서들이 아니라 과학기술 분야의 하위 부서들로 들어갔던 것이다. 혁신관료 중 핵심이자 도쿄제대에서 독일법 분야 최고 인재였던 기시 노부스케는 미래에 과학기술 부서들이 핵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며 내무성 대신 농상무성에 들어갔다. 그가 나중에 회고한 내용을 보자면 기시는 자원이 부족한 일본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역입국(貿易立國)과 산업 기술 개발이 필수적이라 농상무성을 채택했다 하는데 여기서 혁신관료들 또한 통제파들처럼 자원 절대량의 중요성이라는 1차세계대전의 경험을 기반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혁신관료들은 소련식 통제경제 혹은 독일식 국가통제주의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 기시 노부스케는 대표적인 우익 법학자 우에스기 신키치의 제자로 들어가 독일법을 전공하였고 특히 1930년대에는 오쿠무라 기와오와 함께 독일로 건너가서 원조 총력전 국가의 모델을 직접 공부하기도 했다. 영미법을 전공한 미노베, 사코미즈 등도 딱히 자유주의적이지는 않았으며 젊은 날 매료되었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이론적 근거와 소련식 경제 모델의 요소들을 시험삼아 적용하여 통제경제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등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투쟁론은 거부하는 한편 이념의 개념적 도구들을 국가 기획 분야에 사용하여 총력전 체제를 뒷받침했다.
혁신관료들은 패전과 함께 몇몇이 A급 전범으로 기소당하는 등 크게 몰락했다가 전후 현상유지적 보수주의자 요시다 시게루가 물러나고 가타야마 데쓰와 아시다 히토시의 사회주의 정당이 가담한 연립정권 시대에 다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1948년 기시 노부스케는 스가모 구치소에서 석방되어 정계에 입문, 하토야마 이치로와 함께 만든 일본 민주당 간사장을 맡다가 1955년 자민당 창당 과정에 주역으로 참여한다. 이후 1957년에 드디어 총리에 올랐는데 이렇게 혁신관료 계층은 정치적 복권에 성공했다.
단순히 혁신관료 "인물"만 살아남을까? 그들이 만들어놓은 모델도 전후 일본에서 이어졌다. 대전기 혁신관료들이 주도하던 상공성, 내각기획원 등의 기획 기구들은 통상성, 경제안정본부, 경제기획청, 경단련으로 이어졌고 이때 복귀한 기시의 동료이자 전직 혁신관료 시이나 에쓰사부로를 중심으로 자민당-관료-경단련이라는 대규모 카르텔을 형성하게 된다. 여기서 퇴직 관료가 자민당에 공천받고 들어가고 관료들은 기업을 지원하고 기업은 정치자금을 내는 구조라는 55년 체제의 면모가 탄생하였고 결국 55년 체제 또한 혁신관료, 더 나아가면 1차세계대전이라는 총력전을 보고 관리국가를 꿈꾸던 제국 시절 일본 엘리트들의 사고와도 점접이 있는 셈이다.
참고 문헌:
가타야마 모리히데, <미완의 파시즘>, 가람기획, 2013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혁신관료와 일본 전시국가>, 소명출판, 2015
폴 존슨, <모던 타임스 1>, 살림, 2008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9
쿠로노 타에루,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논형, 2015
박계호, <남북전쟁의 성격에 관한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도베 료이치, <역설의 군대>, 소명출판,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