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왜 지금 기시 노부스케인가?
기시 노부스케, 본명은 사토 노부스케로 아버지 친척 쪽 양자로 입적한 뒤 기시라는 성을 얻었으며총리 재임 중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다가 "안보투쟁"이 벌어졌던 일이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만주국 산업부 차관, 도조 히데키 내각 상공대신이었던 경력 탓인지 A급 전범이라는 인식(정확히는 용의자였고 불기소 받긴 했다)이 널리 퍼져있고 국내 정치적으로는 박정희와의 관계가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일본 입장에서 보자면 1957년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순방하며 배상 협정 밎ㄷ 경제 협력을 추진해 오늘날 동남아가 일본의 경제적 멀티가 되는데 큰 기여를 했었고 그가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하여 자국의 헌법을 따른다는 조건을 전제로 미국은 일본을 지킬 의무를 명시해둔 것이 지금까지도 미일동맹의 한 축으로 내려져 오고 있다.
물론 기시 노부스케는 정권 말에 안보투쟁으로 불미스럽게 하야했고 이어서 집권한 이케다 하야토는 소득배증계획을 앞세워 안보보다 경제 논리를 더 중요시하는 정책을 펼쳤다. 무엇보다 보수방류가 자민당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는 것은 적어도 21세기 이후였고 지금까지도 기시의 숙원 사업 헌법 개정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시는 일본 정치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사회와 더 나아가 일본 우익에게 유익한 자산과 과제를 제공해주는 발판이 된 것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의 주장들이었다.
먼저 기시를 거쳐 오늘날 일본의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자민당-관료-경단련이라는 대규모 카르텔을 형성하게 되었다. 기시와 혁신관료들이 대전기에 주도하던 상공성, 내각기획원 등의 기획 기구들은 통상성, 경제안정본부, 경제기획청, 경단련으로 이어졌보 여기서 퇴직 관료가 자민당에 공천받고 들어가고 관료들은 기업을 지원하고 기업은 정치자금을 내는 구조라는 55년 체제의 면모가 탄생하였다. 이 과정에서는 만주국 인맥, 혁신관료 인맥을 앞세웠던 기시 노부스케가 자민당 창당의 주역이 되고 또 그가 있는 정계를 중심으로 재계와 관료계가 유착하면서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일본식 관치경제 체제가 완성되었다. 참고로 기시의 부하였던 시이나 에쓰사부로도 이 구조를 만드는데 크게 관여했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자민당 형성 과정에서 헌법 개정, 재군비, 독립이라는 전망을 제시했으며 헌법 개정을 목표로 하는 자민당을 개헌 정당으로 발족시키고 자신이 총리에 있을 때 정부 내 헌법개정을 위한 조사를 착수하여 오늘날 자민당 헌법 개정론이 나오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미일안보조약 개정은 미국과의 쌍무적인 관계로 미일 안보를 위치시킴으로써 일본의 "자주 독립"을 실체화하려고 했다. 이로써 1950년 경찰예비대 창설 이래 보안대를 거쳐 1954년 자위대로 발족하여 2023년 현재 방위비 2%대를 향한 세계적인 전력을 지닌 군대로 성장할 밑받침이 마련되었다.
기시가 보기에 1948년에 제정된 일본국 헌법은 점령군 GHQ가 만든 일본 민주화의 수단으로 이전의 국가 체제와 고유의 문화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 기시가 그리던 전후 일본의 국가 모습은 점령군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에서 시작되며 헌법 개정으로 패전 이전의 국체를 회복하여 사실상의 독립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자민당 내에서 보수본류라 불리는 요시다 시게루를 뿌리로 하는 온건보수파와 대립각을 세웠고 여기서 기시는 재군비를 실현한 이후 자주헌법 제정을 통해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여 대등한 대미관계 아래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로 아시아 맹주로서의 일본을 부활시킨다는 자민당 내 보수본류와 차별화되는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적 구상은 큰 의미가 있다. 어떻게 보자면 "자주적인" 일본이라는 지금까지 내려져오는 보수방류 세력의 주장과도 맞닿아있는 것이고 아예 미국과 사생결단을 벌이던 전전의 제국 시대 일본 군부와는 달리 미일안보조약을 개정해 미일 대등화 전략과 헌법개정의 실마리를 만들면서도 미국의 불안을 고려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을 실현함으로써 주체적인 역코스 선택으로 대미관계의 불완전화를 불식시키는 듯한 더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이처럼 기시 노부스케는 대등한 미일관계의 실현 및 동시에 미국의 강요로 만들어진 헌법을 자주헌법으로 개정하여 독립에 적합한 국민정신을 환기시키게 되는 보수방류 계열 정치가들의 구상으로 이어지기에 이를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아래부터는 보수방류 세력의 이론적 토대이자 기시 노부스케의 국가주의적 가치관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기시의 출생지 조슈 번, 그리고 폭넓은 독서가 그에게 끼친 영향
기시 노부스케가 출생한 것은 야마구치 현이라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과거 막부 시절에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유신지사들을 많이 배출한 조슈 번이라는 곳이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 중 증조부 사토 신칸은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자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지주인 요시다 쇼인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이다. 사토 신칸의 영향으로 기시 노부스케는 요시다 쇼인,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기도 다카요시 등 메이지 신정부의 유신지사들에게 친밀감을 느꼈으며 자신의 증조부를 그들세게 연결하여 자각하는 과정에서 정신 세계가 형성되었다.
19세기는 에도 막부가 쇠퇴하고 혼란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특히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협박하여 막부를 개항시키고 불평등 조약을 맺는 등 외부적으로 위기에 처하자 이때 조슈 번의 지식인 요시다 쇼인은 군신일체와 황국사상으로 내우외환에 맞설 것을 주문했다. 이러한 요시다 쇼인의 사상은 조슈 번을 같은 도막 세력인 사쓰마 번과도 차별화되는, 일본 전체의 존황양이 운동을 주도하는 곳으로 만드는데 매우 커다란 기여를 하였으며 기시는 이 조슈 번의 역사적 전통을 지켜보며 커오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적 가치관이 싹 트기 시작했다.
기시는 사토 일족의 혈연공동체와 조슈의 유신적인 분위기에서 인격이 형성되었고 이에 조슈 번 다이묘 모리 가문의 전 가신이 자신의 일족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가지고 입신영달의 야심 아래 가문의 기대에 부응하려 공부를 열심히 했다. 결과적으로 기시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수석을 다툴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을 자랑하게 되었다. 진로를 앞두고 기시는 어릴 때의 꿈인 군인보다는 관료의 길을 골랐다. 당대 일본 육군은 조슈 번의 군대를 뿌리로 두고 있는 집단이었지만 기시 본인이 체력이 딸렸기도 했고 친척인 마쓰오카 요스케가 외교적으로 활약하는 것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기 때문. 이러한 배경은 기시가 관료에서 정치가로 성장해가는데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한 동기부여를 하게 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렇게만 본다면 거의 100% 군국주의자가 되었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와중에도 국내외적으로 민중이 정치적으로 진출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적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 속에서 고교를 다녔는지라 의외로 이 시기에 다양한 방면으로 독서를 했다고 한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괴테 등의 소설류와 헤겔, 니체, 칸트 등의 철학서를 읽었다고 한다. 일본 서적으로는 니시다 기타로, 나쓰메 소세키 등의 저작집과 그 외 역사책들을 읽었으며 내용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었었던 독서광이었다고 알려져있다. 이 시기 기시의 폭넓은 독서는 일생 동안 지적인 토양이 되었으며 그를 훗날 국수주의자, 광적인 우익적 사상의 소지자에 그치지 않고 현실적인 감각을 갖춘 정치가로서 국가주의 실천자가 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천황주권론자" 우에스키 신키치와 기시 노부스케
기시 노부스케는 고교 졸업 후 1917년 도쿄제국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의 참전으로 경기가 호황을 맞으며 채무국에서 채권국이 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경제호황이 인플레를 불러와 노동자와 중산층의 생활을 불안정하게 했으며 빈부격차 확대로 사회 불안이 커지고 있었다. 이게 가장 잘 드러났던 사례가 1918년의 쌀 소동으로 이때 쌀값이 폭등하면서 전국적으로 도시 하층민을 중심으로 시위와 폭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시기에 새로운 사상적 조류로 요시노 사쿠조가 주장하는 민본주의가 나왔고 비록 천황제의 한계 탓에 주권재민 원칙을 관철하지 못했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정신적인 기초를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다.
한편으로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고 일본군이 시베리아 출병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20만을 동원하면서까지 시베리아를 차지하려 했으나 실패한 채 철수했고 1918년 9월 일본 헌정 사상 최초의 정당내각인 하라 다카시 내각이 탄생해 1921년까지 이어진다. 또 1919년 파리 강화회의가 열려 조선의 3.1 운동, 중국의 5.4 운동으로 이어졌고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야심과 아시아 여러 민족의 저항이라는 구도가 명확해지기 시작했었다. 이러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는 일본 국내외적으로 사회변동이 극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으며 좌익의 사회주의부터 우익의 국가주의까지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나오던 시대였다.
당시 기시 노부스케가 다니던 도쿄제국대학의 흐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요시노 사쿠조를 지도자로 하는 민본주의 흐름, 또 하나는 우에스기 신키치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주의 세력이었다. 민본주의적인 학생들은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적인 의식을 가지고 신인회에 모였으며 반대로 국수주의적인 학생들은 국가 전통정신을 강조하고 국권주의를 주장하는 목요회에 결집했다. 또 헌법학계에서도 주권은 국가에게 있고 천황은 국가의 최고 기관이라는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괄설과 우에스기 신키치의 천황주권설이 서로 맞붙고 있었다.
우에스기 신키치는 미노베 다쓰키치와 논쟁을 붙으면서 국체란 유럽이나 중국과 구분되는 일본 특유의 역사와 질서 그 자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헌정질서의 핵심인 의회가 없더라도 수족을 잃은게 아니며 국체는 일본 국가 그 자체이며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가 없는 고유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민주제에 기초한 학설은 개인주의를 조장해 국체-국가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며 일본을 약소국가로 전락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우에스기에게는 "법"이란 궁극적으로는 국체-국가에 필요없는 규범 체계였다고 볼 수 있고 국가란 일본 특유의 전통을 반영한 국체와는 어디까지나 구분되는 것이었다.
이 상황에서 기시는 우에스기의 강의를 들었다가 국체론에 공감하게 되며 곧 우에스기의 집에 드나들게 되었고 목요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렇듯 기시는 유교적, 일본주의적인 가치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시와 우에스기 사이의 관계도 마냥 오래가진 못했다. 1920년 모리토 다쓰오 교수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소개하는 글을 올리고 이에 우에스기가 속한 흥국동지회에서 그를 학부 교수회에 문제를 제기해 휴직 처분하려 하자 기시는 흥국동지회의 방침에 반발하며 우에스기에 막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우에스기는 무시하였고 이걸 계기로 기시는 우에스기류의 국가주의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물론 기시는 모리토의 사상을 지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시의 생각은 흥국동지회와 우에스기 같은 단편적이고 극단적인 국가주의와는 구별되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측면이 있었다. 기시는 천황제의 국체 유지는 필요하지만 사유재산제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는 기시가 사유재산제와 국체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우에스기 같은 관념화된 국가주의는 천황 지배를 축으로 하는 일본 역사, 문화라는 추상적인 개념 조작으로 국체 관념을 양성해 국민 의식을 일원화하는데 방점을 두고 있었고 반면 기시는 이런 식의 천황제로의 절대적인 회귀를 반대하며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철저히 구체적으로 실체를 가진 국가상을 그리려고 했었기에 갈라질 수 밖에 없었다,
"국가개조법안대강" 기타 잇키와 기시 노부스케
우에스기 외에도 기시에게 큰 영향을 준 사상가라면 기타 잇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기시 본인도 비록 한번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대학시절에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사람이라고 기타를 평했다. 기타는 1906년 발표한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가 천황제 비판 때문에 금지당한 후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의 혁명 운동을 돕는다. 그러다가 기타는 오카와 슈메이가 유존사로 초청하자 1920년 귀국하게 되고 대학 졸업 직전이던 기시는 그때 기타를 만나 그의 혁명가적인 모습에 압도당했다. 기시가 훗날 스가모에 수감되어 있을 때 쓴 자서전 <나의 청춘: 성장 과정과 추억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기시는 우에스기의 극단적인 국수주의는 물론이고 천황 기관설의 미노베 다쓰키치, 민본주의의 요시노 사쿠조에게도 사상적으로 만족하지 못한 나머지 직접 유존사로 가서 기타 잇키를 만났다고 밝혔다.
당시 일본은 기타의 시국관처럼 썩은 뿌리에 썩은 나무를 접목시킨 것처럼 동서양이 섞인 중세 국가였다. 지배계층인 정당, 관료, 군부, 재벌은 모두 황권 뒤에 숨어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고 나라 운명이 한꺼번에 소멸될 막부 말기의 유신시대처럼 내우외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시 노부스케 역시 그런 상황 속에서 메이지 신정부 수립의 한 축이던 구 조슈 번을 고향으로 둔 한 사람의 엘리트로써 이런 현실에 분개하였기에 기타 잇키를 찾아갔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제2의 유신을 꿈꾸던 마음은 기타 잇키나, 기시 노부스케나 둘다 같았을테니까 말이다.
그 후로도 기시는 기타가 쓴 <국가개조법안대강>을 읽고 밤새워 필사할 정도로 감명받았다. 이 책에는 일본 개조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헌법 정지, 귀족원 중의원 해산 및 전국 계엄령 발표, 화족제 폐지, 치안경찰법 신문조례법 폐지로 국민 자유 회복, 황실 재산을 국가로 귀속, 사유재산 제한, 대자본 국유화, 1일 8시간 노동 등의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 기타는 이 책에서 일본 국민은 평등, 자유로운 국민으로서 인권을 보장받는다는 국민 인권 옹호 주장을 하는가 하면서도 국가의 개전 권리를 적극 옹호하며 오스트레일리아와 극동 시베리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할 것을 주장했다.
기시는 기타의 사상에서 받은 영향에 대하여 "<국가개조법안대강>은 처음에 사회주의자였던 기타 잇키의 국가사회주의적인 생각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 혁신을 우리 국체와 연결시킨 것으로 당시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매우 가까웠고 조직적이고 구체적이었다"며 회고했다. 기타의 사회주의론이 기시의 국가론에 영향을 미쳤음은 제국주의적인 사회주의론과 겹치는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기시가 상공성의 혁신관료로 통제경제의 기수가 되고 그 뒤 대외팽창론에 동조하여 만주국 경영에 실력을 발휘, 나아긴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전쟁 수행을 도운 족적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을 관철시킨 것이다.
다만 기타 잇키와 기시 노부스케의 차이가 있다면 국체론에 대한 입장이었다. 천황제 자체를 경멸하면서 천황은 어디까지나 국가 개조를 위한 도구로만 인식했던 기타와는 달리 기시의 국체옹호는 변하지 않았으며 기시가 전쟁 전과 도중에 걸쳐 화족제 폐지, 궁내성 개혁, 사유재산 제한을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체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도 기시는 맹목적으로 천황제를 옹호하던 우에스기와는 달리 국체를 신성화하거나 관념화시키는 것과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대아시아주의자" 오카와 슈메이와 기시 노부스케
우에스기, 기타 못지않게 기시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한명 더 있는데 바로 오카와 슈메이이다. 오카와 슈메이는 영국 지배 하의 인도의 참상을 목격한 후 1916년 11월 <인도에서의 국민적 운동의 현상과 유래>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대아시아주의 논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오카와는 영국의 심한 박해와 억압으로 인도가 어떻게 황폐화되고, 또 어떻게 영국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는지 얘기하면서 최종적으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같은 아시아인 인도를 얼마나 지원했는가를 논증하며 마무리지었다.
오카와 슈메이는 그야말로 본연의 의미에서의 국수주의 사상가였다. 그가 본 일본이라는 나라는 투쟁주의, 국가주의, 이상주의, 정신주의를 생명으로 하는 야마토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그 정신의 기원은 동양 문명의 바탕인 유교와 불교였다.그에게 원대한 목표란 정반대 성격의 불교와 유교 사상을 조화시켜 높은 이상을 추구하면서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 균형을 이루는 일본 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는데 결론적으로 일본 정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은 서양의 물질 문명과 동양의 정신 문명을 통합시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으로 동서양 문명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은 일본 민족의 "천부의 사명"이었다.
이러한 연구로 만철 총재 고토 신페이의 인정을 받아 오카와는 만철에 입사했다. 다음해 오카와는 쇼와 유신 운동의 모체인 유존사를 창설하였고 동시에 만철 동아경제조사국의 편집과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가 기시 노부스케가 오카와 슈메이를 만났었던 시점이었으며 훗날 기시가 만주국에 가는 것도 오카와 슈메이와의 교제 속에서 받은 영향도 컸었다. 1936년에 기시가 제국 본토의 상공성에서 만주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때 본인 스스로가 오카와의 대아시아주의에 감명받은 부분이 크기에 자진해서 가는 부분도 있다고 인정했다. 이렇게 기시는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론에 이어 오카와의 대외팽창론에도 깊숙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기타 잇키는 초창기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였고 그의 혁명론은 사회주의자들의 논리와도 유사한 점이 많았는데 오카와 슈메이도 사회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두 명은 1930년대 청년장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둘을 존경한 기시 노부스케도 기타 잇키, 오카와 슈메이식 천황제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그 말은 즉 그의 국가통제론 속에는 사회주의가 조금이나마 혼재되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시는 전후 정계에 들어가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일본 사회당에 입당하려는 시도도 하였으며 총리 재임 중에는 사회당의 정책을 카피해 국민연금제도를 포함해 사회보험제도 확립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기시 사상에는 사회주의적인 면모가 아예 없다고는 볼 수 없다.
맺음말: 기시 노부스케의 유산은 아직까지 내려오고 있다
사진보고 다 예상했겠지만 아베 신조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다. 아베의 성장 과정을 보면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보다는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영향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아베는 성인이 되고 정치권에 입문한 후에도 본인을 소개할 일이 생기면 항상 아베 신타로의 아들이 아니라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라고 밝혔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아베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멘토는 외할아버지였던 것이며 실제로 정치에 들어온 후 아베는 기시의 가치관을 계승하면서도 오늘날 일본에 맞게 바꿔서 적용시켰다.
따라서 일본 제국 시대 사람이 아니었던 아베는 기시와는 달리 당대 일본 우익 특유의 급진성은 딱히 강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점령군이 만든 헌법에서 탈피해 개헌을 통한 자주국가 완성이라는 기시가 패전 당시부터 총리 재임을 거쳐 죽을 때까지 꿈꿨던 그 숙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달려왔었다.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시절을 거치며 슬슬 헌법 개정론이 힘을 얻기 시작하던 자민당은 기시의 외손자 아베가 2012년 민주당을 제치고 재집권에 성공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면서 보통국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비록 그 본인인 아베는 허망하게 죽었지만 후임자 기시다 후미오도 방위비를 2%로 올리는 등 기시 노부스케가 만들어놓은 정치적 유산은 세이와 정책연구회를 거쳐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더 나아가 지금 일본 사회의 담론까지 장악하게 되며 기시가 꿈꾸던 점령군이 만든 국체로부터의 탈피는 차근차근 진행되기 시작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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