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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16. 2023

일본 우익의 탄생, 도야마 미쓰루와 현양사(玄洋社)

일본 좌우익의 뿌리, 사이고 다카모리와 자유민권운동

일본 우익 세력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혹자는 메이지 유신 시점을 기점으로 삼지만 나는 글쎄다 싶다. 단순히 조국근대화, 부국강병을 목표로 삼았기에 우익이라고 보기에는 당대 모든 소위 문명국이라는 국가들이 모두 하는 짓이었고 1877년 세이난 전쟁 당시까지도 선진자본주의 열강을 본받아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오쿠보 도시미치 중심의 체제파에 대항하는 반체제파의 논리도 국권과 민권이 성립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개탄해서 그것을 만회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때 좌우 양익은 분리되지 않았으며 서로 전환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이난 전쟁을 기점으로 오쿠보가 걸어온 길을 이토 히로부미가 확립시켰을 때 그 전환이 가능해졌다.


이고 다카모리 등 가고시마 사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세이난 전쟁은 알다시피 대실패한 채 끝났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더 이상 무력으로 메이지 신정부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상황에서 세이난 전쟁 반란의 주축이던 신정부의 지도자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당했고 그때 메이지 신정부에 이를 갈던 이들은 새로운 방식을 찾게 되는데 궐기를 기대하며 자신을 찾아간 도야마 미쓰루에게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했던 말인 "무력보다 언론"은 반정부운동의 방향성이 무사 계급 중심의 투쟁, 무력 반란이 아닌 입헌정치 실현 요구라는 자유민권운동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라는 걸 보여준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메이지 신정부 당시 반정부운동, 참정권 운동 등을 이끌었던 자들은 대부분 세이난 전쟁, 정한론 논쟁, 사이고 다카모리와 연관이 깊은 무사 계급 출신들이라는 것. 이렇게 일본 제국의 정책에 반기를 건 운동의 깃발을 처음 올린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였다. 한편 자유민권운동 세력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나뉘게 되어서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자유민권운동 우파들은 이토 히로부미 같은 번벌 정치가들과 힘을 합치며 체제 내 정치권에 편입되었고 이들이 나중에 입헌정우회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훗날 이 입헌정우회는 요시다 시게루의 자유당, 그 뒤에는 오늘날의 일본 자민당으로 이어져 아이러니하게도 번벌과 자유민권운동 모두의 후계 세력인 입헌 리버럴 세력으로서 일본 정치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의 영웅에서 세이난 전쟁으로 역적이 된 사이고 다카모리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일본의 좌파 세력. 나카에 조민이라는 사람이 사실상 시조 격 인물이라고 볼 수 있고 이때 나카에 조민 밑에 있던 사람이 바로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인 고토쿠 슈스이였다. 이 고토쿠 슈스이는 나카에 조민의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넘어서서 반제국주의를 주창하기 시작하면서도 또 그의 반체제적 사상을 이어받았다. 일본 좌익 세력들은 사이고 다카모리를 그저 구태의연한 옛날 사람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민권은 지리(至理)다, 자유평등은 대의다"라는 나카에 조민의 사고방식이 고토쿠와 그의 평민사에 계승되어 일본에서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이 시작된 것을 보면 반체제 운동의 뿌리라는 입장에서 그 영향을 무시하기 힘들다.


즉 세이난 전쟁과 자유민권운동, 메이지 헌법 제정이라는 리버럴에 의해 근대 일본의 지배 체제가 확립되려고 했을 때 그에 대한 반체제인 좌익이 성립할 계기가 생긴 것이고 바꿔 말해 오늘날까지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입헌 리버럴과 반체제 좌익 세력 모두 세이난 전쟁 직후 생겨난 자유민권운동,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와도 연관이 있는 셈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입헌 리버럴 세력의 경우에는 이토 히로부미나 오쿠마 시게노부 등 일부 번벌과 상관 있는 세력들도 관여하긴 했지만 쨌든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일본 의회 설립 및 입헌 정치의 시초임으로 자유민권운동의 후계 세력은 맞다고도 볼 수 있다.

국권주의 사상을 제창한 도야마 미쓰루

그리고 또 하나의 자유민권운동이 낳은 아들이 바로 일본 우익이다. 자유주의랑 일본 우익의 사상이랑 대치되지 않냐고 할텐데 일본 우익의 원류이자 반체제 우익의 시조 도야마 미쓰루가 당장 자유민권운동의 간부였던 자였다. 현양사를 이끌던 그는 1880년 국회기성동맹 결성에 큰 공헌을 세웠고 지속적으로 후쿠오카, 구마모토를 축으로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면서 국회개설과 불평등조약개정 청원서를 메이지 신정부에 보내었다. 그러던 중 1881년 10월, 오쿠마 시게노부의 파면과 함께 대신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한다는 조칙이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발표되자 갑작스러운 통보에 자유민권운동은 승리했으면서도 목표 상실로 혼란을 겪었고 여기서 탄생한 게 상술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중심의 자유당이었다. 이 자유민권운동 우파는 이 기회에 체제로 편입되어 의회 내 투쟁을 지속한다.


한동안 활동을 중단하던 도야마 미쓰루는 민권 대신 이젠 국권을 꺼내든다. 1889년 막말에 체결된 불평등조약 개정반대운동이 벌어지자 도야마 미쓰루는 주권 손상, 치외법권 철폐가 힘든 상황, 내정간섭 빌미 제공 등을 명분으로 투쟁을 벌였고 결국 내상 겸 장상 마쓰카타 마사요시와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해 담판하였고 그럼에도 개정 단행 방침이 꺾이지 않자 구루시마라는 부하를 시켜 교섭 담당 관료인 오쿠마 시게노부를 테러하였다. 이때부터 도야마 미쓰루는 민권에서 국권확장을 더 중대한 목표로 삼기 시작했었던 것이고 현양사는 제1회 의회 선거 기간 도중 자유당, 입헌개진당 등 민당 세력들과 칼과 목도로 패싸움까지 벌였다. 덕분에 자신들의 기반인 후쿠오카에서는 9석 가운데 8석을 획득했다.


시점을 조금 이전으로 돌아가서 사실 의회 선거 이전에 현양사의 외부로의 확장 사업은 시작되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경찰이 감시하는 가운데 80명이 상인이나 관리로 변장해 부산으로 향했으나 도착했을 때는 청나라군이 반란을 진압해버린 후여서 원대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도 이 일로 국내여론을 민권신장에서 국권확장으로 돌리는 목적 만큼은 완수하는데 성공했고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이 일본 정부에게 골칫거리 취급받고 있음에도 그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또 동양학관이라는 어학학교를 설립해 국권주의자 인재 육성에도 나섰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을 때 현양사는 조선 반도에서 은밀히 활동해온 대륙낭인들과 접촉하여 개입하기로 마음 먹었고 본격적인 활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조달하고 동지들을 규합하며 판을 크게 벌릴 계획을 세웠다. 가와카미 소로쿠 육군 참모차장의 동의까지 얻은 그들은 마침내 "천우협"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부산으로 건너가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전국 각지에서 게릴라 식 활동과 폭력을 일삼았고 이것이 그들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더 나아가 대륙으로 진출하게 되는 분기점이었다.

현양사의 후계 세력, 흑룡회

이후에도 현양사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만주의군이라는 부대를 편성해 참전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혁명을 꿈꾸는 쑨원 같은 중국 반정부운동가들과 접촉하기도 했다. 이 둘을 연결해준 것은 미야자키 도텐이라는 인물로 미야자키는 중국 혁명은 서구열강의 식민지가 되고 있는 아시아 해방으로 이어진다는 쑨원의 사상에 크게 경도되어 있었다. 중국 혁명에 깊게 관여한 미야자키 도텐은 <33년의 꿈>에서 도야마가 상당한 금전을 제공해줬고 가장 의지할 만한 대상이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1911년 신해혁명에 성공한 쑨원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난 인물 중에는 도야마도 있었다.


이후에도 위안스카이의 배반으로 위기에 처한 쑨원의 은신처를 마련하는 작업에도 도야마 미쓰루는 심혈을 기울여 도왔으며 쑨원이 병사 이전 방일한 자리인 1924년 11월에도 도야마와는 꼭 만났었다. 그리고 며칠 뒤 쑨원은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 연설을 하며 앞으로 일본이 서양 패도의 개가 될 지, 아니면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지 일본 국민이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도야마 미쓰루는 활동가들과 군, 정계, 관계, 재계 사이에서 브로커 역할을 유효하게 하며 아시아주의 사상과 우익의 거두로 활약하였고 1944년 10월 5일, 90세를 끝으로 사망한다.


결국 일본 우익, 그 중에서도 입헌 리버럴적 보수가 아닌 본의미 그대로의 우익은 자유민권운동의 흐름 속에서 탄생하였고 이는 메이지 신정부의 근대화 노선에 "민족"과 "전통"으로서 반발한 국권주의가 뿌리였다. 1880년경부터 점차 내정적 과제인 민권론에서 벗어나 일본이 직면한 대외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했고 곧 현양사의 활동은 도야마의 부하였던 우치다 료헤이가 계승해 흑룡회로 이어졌다. 일본 우익의 원류인 국권주의자들은 "흥아론"을 내세워 일본이 아시아와 결별해야만 미래가 있다는 메이지 신정부, 자유민권운동 우파에 맞서 서구 대 아시아라는 발상을 내세워 일본을 동양의 맹주로 만들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메이지 시대 일본 국권주의자들의 사상은 1930년대 쇼와 유신 운동에도 나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전후 GHQ가 도야마의 제자 우치다 료헤이가 만든 흑룡회를 초국가주의 단체로 분류할 정도였으니 일본 군국주의의 흐름과도 접점이 컸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일본 내 국가주의의 흐름을 이어받은 사람 중 일부가 자민당 내 보수방류에도 가담하였고 또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우익들은 좌익, 입헌 리버럴들과 마찬가지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기점으로 뿌리가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각각 도야마 미쓰루, 나카에 조민,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으로 분화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기에 일본 좌우익은 사실상 세계보편적 좌우익과 구분되는 특수한 집단이라 봐도 무방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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