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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04. 2023

천황을 이용해 이상을 실현하려던 "마왕", 기타 잇키

사회주의자 겸 전체주의자, 극좌 겸 극우, 민중혁명가 겸 천황제 신봉자

https://youtu.be/ti8rjVtWIX8?si=vaetoJ2ONiY7gE1x

일본 제국은 헌법을 보면 알겠지만 천황주권론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다른 말로 '국체론'이라고 부르는데 당대 일본인들은 번벌 세력과 일반 국민 뿐만 아니라 이타가키 다이스케, 나카에 조민 같은 자유민권운동 계열 인사들도 이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는 천황은 국가 최고 기관일 뿐이라는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미노베 다쓰키치도 천황제 자체를 건드리진 못했다. 이렇듯 천황제는 일본 제국에 있어서 성역이었고 오늘날의 일본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해서 건드리는 것을 자제하자는 쪽이 우세하다. 그렇지만 일본의 천황제에 저항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첫번째는 바로 사회주의자들. 이들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당연하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오늘 소개할 인물이자 국체론의 핵심인 '천황의 국민'을 '국민의 천황'으로 180도 뒤집어 버린 인물, 기타 잇키(北一輝)다.


기타 잇키는 1883년 니가타 현 사도 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기타 데루지로로 그는 소년시대와 청년시대의 초기를 "절해의 고도인 사도에서 외롭게 보냈다"고 말할 정도로 불우했다. 실제로 그는 가운이 기울어가는 집안의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짊어져야 했고 한쪽 눈의 실명, 정규 교육 중단 등의 고난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방황했다. 그가 방황을 멈춘 것은 와세다 대학의 청강생으로 들어가면서 였다. 기타 잇키는 저명한 학자들의 강의를 수강하면서도 도서관에 파묻혀 살면서 사회과학 서적을 섭렵했다.


또 이 시기에 일본에선 자유민권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따라 신문과 언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고 기타 잇키도 신문에 글을 기고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때부터 그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러일전쟁에 동조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그 당시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의 상당수는 러일전쟁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기타 잇키는 이들과는 생각이 달랐다. 왜냐면 빈민의 친구인 사회주의자들이 백인의 동아시아 침략과 노예화를 알면서도 반전론을 개전하는게 아니꼬왔기 때문. 그래서 기타 잇키는 러일 개전이야말로 학대와 압박 속에서 노예 상태로 떨어지고 있는 황인종이 반격할 기회이며 열강의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제국주의로 맞서 싸울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 나는 명백하게 고백한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한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모든 것이다. 거의 종교이다. 나는 호흡을 멈추지 않는 한 포기하지 않고 사회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주장은 무가치한 나의 생애에서 최후의 호흡에 이르기까지 유일한 것이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명백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사회주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버릴 수가 없다. 아니,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단연코 제국주의를 주장한다. 나에게 제국주의의 주장은 사회주의 실현의 전제이다. 내가 사회주의를 품고 있지 않다면 제국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제국주의를 내걸고 러일 개전을 외치는 바 그 바탕에 사회주의의 이상이 있다. 나는 사회주의자이면서 제국주의자이다. "

- 기타 잇키가 사도 마이니치 신문에 10월 27일부터 9회에 걸쳐 연재한 <어허, 전쟁을 하지 말자고?> 中 -


 " 빈민의 친구일 때 나는 세상의 제국주의자의 적일 수 밖에 없고, 외국의 제국주의자의 적일 때 나는 세상의 사회주의자의 친구일 수가 없다. 사회주의자인 내가 러일 개전을 주장하는 것은 슬라브 야만족의 제국주의에 대한 정당방어다. 말하자면 부호의 잔인무도함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응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아, 사회주의자여, 어찌 부호의 제국주의에 강경하게 대처하면서 외국의 제국주의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가. 어리석구나 사회주의의 무리들. "


1906년에는 23세의 젊은 나이로 최초의 저작인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썼다. 스스로 순정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기타 잇키는 일본 학계의 외국 사회주의 직수입을 비판하며 토착사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기타는 사회주의가 일본 국가주의와 결합해 천황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것이 국가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 국민의 천황, 국민의 일본이 되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단결된 권력을 바탕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국가의 손만이 토지와 자본의 공유가 이뤄질 수 있는 길이었다. 생산과 분배의 평균, 즉 경제적 불공평을 타파하는 것이 쟁점이며 따라서 기타는 무정부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사회주의는 반드시 국가의 존재를 인정해야 만 한다고 본 것이다.


" 국가는 프랑스 혁명의 시대의 개인주의처럼 원시적 개인을 가정하여 개인의 의지로 구 사회를 해체하고 신 국가를 조직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은 결코 원시적으로 개인으로서 존재한 적이 없으며 무덤에 들어갈 때조차 사회를 이룬다. 개인주의 혁명론은 국가를 해체하고 나아가 자유와 평등의 기초 위에 국가를 조직하려고 한다. 따라서 국가의 부정은 신국가의 건설까지는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엄숙한 과학적 기초에서 본다면 국가는 결코 개인이 자유롭게 해산, 혹은 조직할 수 있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혁명이란 국가의 의지가 시대의 진화와 더불어 사회적 세력과 함께 진화하는 것이다.

....스스로 '최고의 소유권'을 지닌 국가라는 것, 무슨 이유로 토지와 자본을 국유화하려는 사회민주주의를 질서 문란이라 하고 안녕 행복을 손상시킨다는 구실로 박해하는가? 아니! 결코 국가의 박해가 아니다. 국가라는 장갑을 벗겨내라. 자본가의 핏줄 선 철권을 똑똑히 보라. 옛날 마담 롤랑은 단두대에 올라가 자유의 상을 가르키며 아아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이 저질러지고 있단 말이냐! 라고 했다.....자유라는 이름에 취할 때 전체가 나타나 진실의 자유를 교살하고 국가주의의 목소리에 미쳐 날뛸 때 군주주의는 그 뒤에 숨어 가장 이상적인 애국자를 타격한다. "

- 기타 잇키


여기서 기타는 고토쿠 슈스이의 무정부적 사회주의를 꼬집으며 메이지의 사회주의가 자본가계급의 배격을 말하면서도 국체론을 등한시한다면 메이지 국가의 혁명 사상으로서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는 한편 만세일계 신화를 부정하면서도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이 또한 혁명 사상으로서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였다. 따라서 동시대 같은 사회주의자였던 고토쿠 슈스이는 국가를 해체하고자 하였지만 반대로 기타 잇키는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하였고 그렇기에 국가 부정을 주장하는 고토쿠 슈스이와 사회주의를 질서 문란이라는 이름을 탄압하는 지배계급 모두 비판하는 노선을 취하게 된다.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는 일본 지식인 사회에 큰 폭풍을 몰고 오며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출판 10일 만에 국헌 문란, 불온 서적이라는 이유로 정부당국에 의해 금서 처분을 받았다. 그 후 기타 잇키는 미야자기 도텐, 와다 사부로 같이 아시아 대륙으로의 국력 확장의 뜻을 품는 아시아주의 성향의 대륙낭인들과 어울려지내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쑨원을 도와 신해혁명에 참여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기타 잇키의 동료였던 쑹자오런은 북양군벌의 수장 위안스카이에 의해 암살당했고 일본 정부는 1915년 1월 산둥성의 독일 권익을 일본으로 인도할 것 등을 요구하는 이른바 '21개조 요구'를 위안스카이 정권 앞으로 보낸다. 아시아가 연대해 서구로부터의 해방을 이뤄내야 한다고 주장한 기타 잇키는 일본 정부의 처사를 비판했다.

그렇다면 기타 잇키가 지향한 일본의 올바른 외교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혁명적 외교정책으로 이것의 핵심은 영일동맹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서구 세력을 아시아에서 축출하고 압제에서 벗어난 중국은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은 중국과 다른 모든 황인종들의 독립을 보호하고 부강을 지도해야만 할 아시아의 맹주로서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21개조 요구에 중국인들은 5.4 운동과 배일운동으로 대응했고 기타는 더 이상 중국 혁명에서의 정열을 잃었다. 그리하여 기타 잇키는 일단은 우선 일본 국가개조에 집중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전향하고 <국가개조안 원리대강>이라는 책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일본 내부 활동에 뛰어들었다.


" 지금 대일본제국은 내우외환과 유사 이래 미증유의 국난으로 쓰러질 듯한 상황에 처해있다. 국민의 대다수는 생활의 불안에 쫓겨 하나같이 서구 제국을 파괴한 길을 배우려 하고 정권과 군권과 재권을 사사로이 이용하는자는 다만 용수(천황의 소맷자락)에 숨어 황황히 불의를 유지하려 할 따름이다. 밖으로는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모두 믿음에 상처를 입지 않은 곳이 없고 러일전쟁으로 가까스로 보전할 기회를 부여받은 이웃나라 중국마저도 일본을 배척하고 모멸하는 것으로 은혜를 갚는다. 진실로 동쪽 바다 좁쌀만 한 섬의 고립, 한걸음을 잘못 내딛으면 조종의 건국을 헛되게 할 위기, 바쿠후 말기 유신의 내우외환이 재현될 것이다. "

- <개조법안> 서언 中 -


그 당시 기타 잇키의 시국관에 의하면 일본은 썩은 뿌리에 썩은 나무를 접목시킨 것처럼 동서양이 섞인 중세 국가였다. 지배계층인 정당, 관료, 군부, 재벌은 모두 황권 뒤에 숨어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고 나라 운명이 한꺼번에 소멸될 막부 말기의 유신시대처럼 내우외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실제로 쇼와 유신의 노래 속 "재벌은 부를 자랑하며 사직의 생각은 없도다"라 구절처럼 당대 일본 정치는 정우회와 민정당의 무능에 재벌과 화족의 부패가 겹치는 상황 속에서 도호쿠 대기근으로 농촌이 붕괴되고 쇼와 공황으로 경제가 무너지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기타 잇키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2의 유신을 시급한 과제로 제기하며 <국가개조법안대강>을 썼던 것이다.


그는 헌법을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황은 국민과 함께 국가개조의 기초를 정하기 위하여 천황대권 발동에 의하여 3년간 헌법을 정지하고 양원을 해산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게 해야 한다고 봤다. 또한 천황과 국민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허물기 위해 화족제를 폐지하고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 답게 사유재산 한도도 둬야 한다고 봤다. 국민 한 가구당 소유재산 한도를 1백만엔으로 한다. 한 가구당 소유토지 한도를 시가 10만엔으로 해야 하며 사유재산 한도 초과액은 모두 국가에 납부, 개인생산업의 한도를 자본금 1000만엔으로 하고 개인생산업의 한도를 초과하는 생산업은 모두 국가가 통일적으로 경영하는게 그의 경제관이다.


또한 동시에 조선도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하나의 행정구, 즉 내선일체론을 주장했다. 일한병합으로 조선 민족이 일본 국민이 된 당연한 결과로 일본 국민의 국민권을 부여한다. 그것이 곧 일본인과 동일한 참정권의 획득이다. 일본 국민이 된 조선인에게 10년 뒤에는 우선 지방자치제를 실시해 지방 참정권을 획득하도록 하고 그런 다음 10년 뒤에 일본 국정의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정치 방침이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된 조선 민족의 입장에선 일종의 평등권 부여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박열을 포함한 일부 조선인들이 기타 잇키를 신뢰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기타 잇키는 혁명론도 볼 만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혁명은 어디까지나 국내 상황과 조건에 의해 성숙되고 추진된다. 당장 프랑스 혁명이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만 보더라도 국내 여건이 성숙되어 혁명으로 발전한 것. 따라서 미국 독립전쟁의 혁명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기타 잇키는 봤다. 혁명의 에너지에 대해서는 빈곤한 하층계급에 있지만 그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고 봤다.. 그 이유는 새로운 사상과 무관하기 때문. 그래서 하층계급에 혁명 에너지를 폭발시킬 수 있는 엘리트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기와 정열과 신념을 가지고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주체 세력은 군부 내 청년장교들로 봤다. 하층계급에 혁명 에너지가 있다는 부분은 사회주의자들과 겹치지만 혁명의 주체가 군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당시 일본 국가주의자들과 일치한다.

한편 기타 잇키가 널리 알려지며 그의 추종자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1호 추종자는 니시다 미쓰기로 그는 일본 청년장교들에게 기타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역할을 맡았고 이들이 훗날 2.26 사건의 주역인 황도파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참고로 청년장교들은 기타의 사상을 신봉하면서도 정작 그와 제대로 만난 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그의 사상이 전해진 것은 니시다 미쓰기라는 가교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기타는 <국가개조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천황의 권위를 통한 국가개조를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를 절대 천황 찬양론자로는 볼 수 없다. 기타 잇키는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에서 말했던 것처럼 국민의 천황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동시에 그의 천황관의 핵심은 의회와 고문원을 통해 민중의 의사를 올리고, 천황은 그 민의를 담는 그릇이 되고 그리고 천황이라는 그릇의 권위를 이용해 민중의 뜻을 아래로 하달, 강제하는 것이다.


" 전 일본의 국민은 냉정한 마음으로...어떻게 대일본제국을 개조할 것인지 근본을 확립하고 국가를 통틀어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국론을 정하며 전 일본 국민이 대동단결하여 끝내 천황 대권의 발동을 주청함으로써 천황을 받들어 국가 개조의 근기(根基)를 완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


얼핏 보기에 2.26 사건 당시 대어심(천황의 마음)을 기다리는 청년 장교들의 발상과 비슷해보이겠지만 성격은 다르다. 기타의 생각에 따르면 천황은 국가의 지배 기관이고 그 이름을 이용하여 "천황을 받들어" 국가개조를 하자는 얘기였다. 즉 한마디로 천황은 어디까지나 국가 개조를 위한 도구로만 인식했다는 것. 하지만 정작 기타의 추종자들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전혀 받들지 못했다. 황도파 청년장교들은 2.26 사건 때 히로히토 천황이 진압 측으로 돌아서자 바로 물러서거나 할복 자살했으며 1호 추종자인 니시다 미쓰기조차 2.26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하기 직전에 기타 잇키에게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고 죽자고 했다. 물론 기타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며 끝내 천황을 냉소하며 죽어갔고 훗날 일본 극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기타 잇키의 저작에서 악마적인 오만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실제로 기타는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에서 만세일계, 가부장 국가, 군신일치론 등을 비판했으며 주권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 한 국민에 지나지 않는 천황과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국민으로 조직된 국가에 있다고 봤다. 이 말을 해석하자면 천황과 국민은 국가의 하나의 분자일 뿐, 누구도 국가의 권리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국가라는 역사적 계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인류사회는 법리상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분자는 갱신되지만 국가 자체는 갱신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라는 얘기다. 천황도 국민도 다 같이 국가에 봉사하는 평등한 기관인 이상 현대 국가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중심 윤리는 고대나 중세에서 볼 수 있었던 충군이 아니라 애국이라는 것이다. 구노 오사무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기타는 이토 히로부미의 헌법 속 천황의 국민을 국민의 천황으로 바꾸어 국민을 주체로 천황을 객체로 역전시켰다.

벗이여, 혁명의 이름에 전율하는가?
그것은 계집애나 할 짓이라네
양심은 어떠한 상전과도 더불어 살 수 없으니
자본가도
지주도
차르도
카이저도
그리고 ・・・・ (말할 필요도 없다)
영하일섬, 가슴에서 가슴에
죄악의 세상을 뒤집는
지진과 같이
대장부 이렇게 이 세상에 살리라

- 기타 잇키, <혁명의 노래(革命の歌)> -


비록 극우 진영과 행보를 같이 했고 2.26 사건이라는 군국주의 광풍의 정점을 찍은 사건에서 죽었던 기타 잇키지만 극좌파 이상으로 불온(?)하고 급진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사후에 아이러니하게도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 저작이 읽히며 추앙받기 시작했다. 텔아비브 공항 테러 사건의 범인 오카모토 고조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기타 잇키를 꼽았으며 전후 일본 진보학계를 대표하는 인사 중 하나인 타케우치 요시미는 무능한 사회주의보다 유능한 파시스트를 유산으로 뒀음이 더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기타 잇키를 상당히 고평가하였다.


기타의 유산은 전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왜냐면 <개조법안>의 70%가 전후 헌법에서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미시마는 <국가개조법안대강>을 읽고 제5권 노동자의 권리는 지금 읽어도 진보적이며 8시간 노동제, 순익 2분의 1 노동자에게 배당, 노동자의 경영 참여, 유년 노동 금지나 부인 노동에 대해 웬만한 사회주의 국가보다 진보적인 정책이라고 했는데 전후 일본 정부가 제국 시절과는 달리 정부 개입을 긍정하는 수정자본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상당부분이 실현되었다. 기타 잇키의 동생 기타 레이키치는 전후 중의원에 당선되었고 전전 제국 시대 기타 잇키를 추종한 나머지 직접 강연하는 곳까지 갔었던 대학생인 기시 노부스케는 훗날 "쇼와의 요괴"로써 총리가 되었는데 비록 기타 본인은 2.26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 유산은 계승되어 지금까지 좌우 양쪽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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