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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28. 2023

헝가리의 혁명과 반혁명, 그리고 호르티 제독의 몰락까지

다사다난했었던 헝가리의 전간기 역사

https://youtu.be/Lz7AAZt7uR8?si=M80bWLuLT_XZ2Qwv

1918년 10월 27일 오스트리아가 항복을 선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4년 3개월 만이었다. 보름 뒤인 11월 11일 독일 역시 연합국과의 휴전 조약에 조인하면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모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개전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는 1916년 11월 21일 86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서 당시 29살에 불과했던 종손자 카를 1세가 합스부르크가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임과 동시에 헝가리의 군주 카로이 4세이기도 했다. 1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동맹국 진영 국가들은 위기에 처했다. 우선 독일은 제국 체제의 붕괴와 함께 로자 룩셈부르크와 볼프강 카프 같은 반공화국 세력의 난동으로 혼란에 빠졌으며 오스트리아도 헝가리와의 이중제국 체제를 상실했다. 터키도 그리스와의 전쟁과 왕정 붕괴라는 혼란을 겪었다.


또 세심한 배려 없이 설정된 국경선은 주요 도로망과 철도망이 서로 적대적인 국가의 국경을 따라 이어지는 것은 물론 국경으로 단절되는 현상을 만들어 사회 간접 자본 시설들이 무력화 되었다.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할 트리아농 조약의 결과 헝가리는 사지가 짤려나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또 이 조약은 경계 설정이 민족을 경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모순된 인위적 경계 설정으로 헝가리인들에게는 너무 가혹하고 불공평했다. 거기다가 1918년 11월 정전 이후로도 헝가리 내 이민족들은 연합국의 보호 아래 자신들의 영토를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고 남쪽에서는 세르비아군과 루마니아군이 북상하여 제국의 남쪽 영토를 점령하기에 이르었다.

헝가리 공산주의 지도자 벨라 쿤

이런 분열을 막기 위해 미할리 카롤리라는 귀족 출신 정치가가 나와서 개혁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개혁을 통해 헝가리 내 이민족들이 광범위한 자치를 누리는 가운데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연합국의 적개심은 완화될 것이고 옛 영토도 조만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내대봤다. 그러나 이는 곧 헛된 희망임이 드러났는데 바로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루마니아군이 트란실바니아의 넓은 평원을 점령해버리고 계속 진군할 태세였기 때문. 카롤리는 프랑스에게 루마니아군이 철군할 수 있게 설득했지만 실패하고 말았고 1919년 3월 말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 출신 사회주의 지식인 벨라 쿤이 이끄는 공산당 세력에게 부다페스트가 넘어가고 말았다.


벨라 쿤 정부는 헝가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연합국보단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의지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쿤 정부는 슬로바키아 점령 지역의 일부를 되찾는 한편 급진적인 좌파 정책들을 펼쳐나갔고 1919년 5월에는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6월 25일에는 아예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선언하기에 이르었다. 영토 해체와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전례없는 위기를 맞은 헝가리 기득권층은 영토 해체보단 사회주의자들에게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그리하여 헝가리 동남부의 세게드에 우파 인사들이 모여서 헝가리 국민군(Nemzeti Hadsereg)을 조직했다. 수장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군 제독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 중장이었다. 그는 1917년 5월 14일 아드리아 해 오트란토 해협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연합군 해군을 대파하여 명성을 떨친 경력있는 자들이었다.

왕 없는 왕국의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

1919년 4월 23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루마니아군이 헝가리 동부를 침공하면서 헝가리-루마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헝가리군은 대패했고 루마니아군은 티서강 동쪽을 점령했다. 7월 17일 헝가리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일부 전선에서 루마니아군을 밀어내기도 했지만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헝가리군이 퇴각하자 7월 29일 루마니아군이 티서강을 건너 8월 3일 루세스쿠 장군이 지휘하는 제4여단 제6기병연대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점령했다. 쿤은 오스트리아를 통해 소련으로 달아났고 쿤 정권은 붕괴되었다.


루마니아군은 연합국의 압력으로 헝가리와 휴전 협정을 체결한 후 1920년 2월 25일까지 헝가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물론 빈손으로 떠난 것은 아니었다. 대량의 산업 설비와 철도 차량의 절반, 가축의 30%, 수레 3만 5천대분의 식량과 사료를 헝가리 전역에서 탈탈 털어갔다. 이는 1916년 참전하면서 명분으로 걸었던 조건 그 이상이었으며 또 루마니아 병사들은 과거 독일과 헝가리 병사들이 점령지 루마니아에서 행했던 잔학 행위 이상의 횡포를 부렸다.


한편 혁명이 진압된 이후 국민군의 감시 하에 선거가 진행되었다. 결과는 당연히 호르티 제독의 압승으로 나왔지만 정작 호르티 제독은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측근들은 총리의 임명과 해임, 의회 해산권, 군대의 지휘권이 부여해줬고 그제서야 호르티 제독은 섭정직을 받기로 했다. 카를 1세는 여러번 복위 시도를 했지만 호르티에게 막혀 실패했고 덕분에 헝가리는 왕 없는 입헌군주국이라는 독특한 체제를 얻게 되었다. 호르티 제독은 총리의 인사권, 의회 해산권, 군 지휘권을 모두 가진 섭정의 자리에 올라 왕 없는 왕국의 지도자가 되었고 왕국을 자처하면서도 옛 왕가의 복귀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1차세계대전의 패배로 영토 해체라는 최악의 위기를 맞은 헝가리

헝가리는 다른 참전국들보다도 심각한 영토 손실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의 경우보다 심했다. 전쟁 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 통치자로서 제국의 절반을 차지했다. 이때 헝가리에서는 남슬라브어를 비롯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등 여러 언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헝가리어 사용자가 가장 큰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구성하던 각 민족들의 독립을 불러왔고 또 몰락시켰다.


1920년 6월 4일, 트리아농 조약이 맺어졌다. 여기서 헝가리는 영토의 70%를, 국민의 60%를 상실하게 되었다. 즉 오스트리아로 4천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29만 2천명의 주민이, 체코슬로바키아로 6만 3천 킬로미터의 영토와 350만의 주민이, 루마니아로 10만 2천 제곱킬로미터와 350만 주민이,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로 2만 천 제곱킬로미터와 160만의 주민을 내줬다. 트리아농 조약의 근본 원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신하여 여러 독립 민족 국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게만 이 원칙이 철저히 지켜져 두 나라는 단일 민족국가화 한 대신에 엄청난 규모의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들이 주변국에서 소수민족화 된 것이었다.

영토 상실은 경제 기반도 와해시켰다. 헝가리는 새로운 국경 설정으로 인해 삼림은 16%만을, 철도망은 38%만을, 그리고 식품 산업 시설은 56%만 보유하게 되었다. 이 결과 거의 모든 자원과 기계류는 다시 수입해야 할 상뢍에 처했으며 농업과 식품 산업은 계속 수출 지향적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백만의 헝가리인이 헝가리 국경 밖에서 타 민족 국가에 귀속되게 된 것은 부당했다. 덕분에 수백만의 헝가리인들은 강제적인 동화의 위협과 차별에 시달리면서 헝가리인들의 민족주의는 강해졌다.

따라서 호르티 제독이 해야 할 것은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에 있었다. 우선 첫 10년은 주로 헝가리 경제와 정치 체제를 안정화하는 데 소비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호르티는 점점 더 많은 통제권을 갖게 되었고 귤라 굄뵈스라는 반동적 성향을 가진 장교 출신 정치가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는 트리아농 조약 개정에 대한 지지를 구하고 대공황에 시달린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무역 거래를 추진하는 등 국제 문제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특히 독일, 이탈리아와 무역협정을 맺으며 추축국 결성의 기초를 다지는데 앞장섰다.


그 결과 히틀러와 독일의 도움으로 이전 헝가리 지역(헝가리 인구가 있는)의 일부를 되찾기도 하였다. 또 재무장 계획을 수립하여 앞으로의 6년에 걸쳐서 육군을 21개 보병사단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정작 전쟁 직전까지 병력 수가 10만명에 미달하는 수치를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뮌헨 협정에서 헝가리는 슬로바키아 남부와 우크라이나계 다수의 루테니아 지역을 병합하며 "숟가락 얹기"를 성공적으로 하였고 전쟁 도중에는 독일의 협력으로 루마니아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북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바스카 지방을 되찾으며 완전히 트리아농 조약을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공짜는 아니었다. 헝가리는 대신에 추축국의 일원으로 2차세계대전에 참전, 그것도 독일과 소련이 사생결단을 벌이고 있는 동부전선에 참전해야 했는데 문제는 결과적으로 1942년 모스크바 공방전을 끝으로 독일의 진격이 중단되면서 전세를 뒤집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 1930년대 반유대주의자인 굄뵈스를 총리로 임명한 전적이 있었던 호르티 제독이지만 의외로 홀로코스트에는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와는 달리 그다지 적극적이진 않았다. 대신 헝가리군에 징집하여 노동 대대로 배속해 지뢰 제거 임무를 시켰고 이는 어쨌든 독일이 감행하는 모험에 편승해 옛 지역을 되찾기 위한 헝가리 정부 사명의 일환이었다.


그마저도 결국 1944년 호르티 제독이 독일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독일을 버리고 소련과 비밀협상을 하게 되었다. 이를 알아차린 독일은 헝가리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호르티의 자리에 살러시 페렌츠라는 파시스트 지도자와 화살십자당이라는 정당을 내세워 위성국을 수립해버렸다. 그 후로 헝가리는 홀로코스트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국가가 되었고 1945년 3월, 소련군에 의해 살러시 페렌츠가 끌여내려질 때까지 1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화살십자당은 10,000명에서 15,000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그 후 헝가리에는 소련군의 지원 하에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졌고 1989년까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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