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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03. 2023

슐리펜 계획의 문제점

1차세계대전 직전 유럽 각국들의 작전계획


비스마르크 체제의 종언과 군사 계획의 대두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의 지배적인 국제질서는 1870~1871년 보불전쟁 이후 비스마르크 재상이 공들여 만든 독일 중심의 질서인 "비스마르크 체제"였다. 비스마르크 체제의 특징을 보자면 독일의 승리 및 통일은 러시아의 암묵적 지지 속에서 이뤄졌기에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가 지속적으로 확보되어야만 했고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복수를 사전에 무력화하기 위해 그들을 고립시키려는 목적으로 타 강대국과의 화친을 주도했다. 따라서 당연히 열강들을 자극하기 위한 식민지 확보 경쟁은 되도록 자제했었는데 문제는 독일이 성장함에 따라 국내에서 정치적 도전이 뒤따르면서 비스마르크가 실각해버린다.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 주도권을 쥔 빌헬름 2세는 영국과 공격적으로 식민지 경쟁 및 건함 경쟁을 하였고 또 더 나아가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중심의 "중부유럽 정책"을 지지하면서 러시아와 관계까지 파탄났다. 게다가 1차 모로코 위기는 프랑스와 영국의 협력만 강화시켰으며 그레이트 게임이 끝나면서 영국은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해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주도하는 삼국협상은 맺었다. 결국 이런 상황은 독일의 격한 반응과 함께 군사적 비상사태 대비 태세 마련의 계기가 되었고 이것이 군비 경쟁의 연쇄반응으로 이어졌다.


1905년 1차 모로코 위기는 이것들의 연장선상에서 있었고 독일의 대(對) 프랑스 강경 외교는 무력적 위압감을 통해 프랑스의 유화적 태도를 이끌어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에 군비 경쟁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상대방 국가와의 외교에서 우위에 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강경 외교를 뒷받침할 군사력과 만약에 있을 전쟁 대비는 중요했고 이 시기에 슐리펜을 중심으로 군사 계획의 구체성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당시 독일의 불충분한 군비 상태를 고려하면 슐리펜이 전쟁을 실제로 원하진 않았을 것이라는게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러일전쟁의 참패로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불능 상태였던 시기인 만큼 예방전쟁의 최적기로 가정하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당시 유럽 국가들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근미래의 전쟁에 대해 어떠한 군사 계획을 구상했을까? 다음 문단에서는 유럽 국가들의 차기 전쟁 대비 군사계획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독일 제외 각국의 군사계획들: 오스트리아


먼저 알아볼 것은 중부유럽의 패권국 오스트리아다. 오스트리아군의 군사계획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라는 참모총장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도 점차 악화되는 전략적 상황에 맞서 예방전쟁을 지속적으로 주문을 해오던 자였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세르비아, 러시아라는 세 개의 적을 가지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는 병력과 자원이 제한적이었기에 동시에 싸우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따라서 유연성이 최대 핵심이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군사 계획은 이탈리아와 싸우는 I 플랜, 세르비아와 싸우는 B 플랜, 러시아와 싸우는 R 플랜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전시에 오스트리아군은 28개 사단으로 구성되는 A 그룹이 러시아 또는 이탈리아에 배치되고 8개 사단은 발칸 최소 그룹으로 보스니아 일대에 배치해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투입, 나머지 12개 사단의 경우에는 B 그룹으로 설정해 상황에 따라 예비대로써 발칸 or 러시아 전선에 유동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전력으로 두었다. 아마 예상대로 잘 흘러간다는 전제 하에서는 B 그룹과 최소 그룹으로 세르비아를 러시아군이 들어오기 전에 순식간에 패퇴시키는게 가능했으나 문제는 철도망이 엉망이고 운용 계획 또한 부실한다는 것.


게다가 러시아나 이탈리아 같은 주변국들이 국민소득 5%를 국방비로 썼던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재정 상태가 워낙에 좋지 않아서 3.5% 밖에 지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막상 전쟁이 벌어졌을 때 러시아 개입이 확실해졌으니 따라서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을 미루고 B 그룹 병력을 갈라치아에 B 그룹 병력을 배치해야 했으나 회첸도르프 참모총장의 단순한 세르비아 정복 욕심으로 인해 개입 소식을 듣고도 독일이 지원해줄 것이라는 행복회로 판단 하에 B 그룹의 12개 사단을 발칸에 내려보냈다. 결국 뒤늦게서야 세르비아로 간 병력 일부를 갈라치아로 보냈고 그 결과 심각하게 대패하였다.

독일 제외 각국의 군사계획들: 프랑스


프랑스군의 군사계획은 브뤼제르 장군 주도 하에 수립된 제15계획을 뿌리로 두고 있다. 이 계획에서 프랑스는 로렌 지방에 주둔하는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전면 공격해올 것을 상정하여 국경 도시 베르됭, 툴, 에피날을 중심으로 프랑스군을 배치시켰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과는 달리 선제공격보다는 침공을 유도한 다음 총반격을 개시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여기서 총반격을 위한 방안으로 영국과 함께 공동적국 독일에 대항하는 전선을 꾸리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제15계획 슐리펜 계획이 유출되면서 전략이 변경됨에 따라 폐기된다.


그 후에 1908년 라크루아가 만든 작전계획이 바로 16계획이다. 벨기에를 통과해올 가능성을 어느정도 반영한 계획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 발발 후 독일군이 2개 군 병력이 아르덴 삼림을 통과한 후 뫼즈 강은 건너지 않고 세당을 거쳐서 베르됭을 향해 남진할 것으로 추정하는 등 실제 독일 측의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또 라크루아는 철도를 통한 새로운 기동군을 창설하여 기존 병력의 2배를 확보하고자 하였고 따라서 16계획은 프랑스군은 동원 및 배치가 독일보다 2일 느리기에 따라서 반격을 통해 퇴치에 전력을 다한다는 구상이 바탕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쟁 발발 1년 전 1913년이 되어 조프르 장군의 주도 하에 17계획으로 발전한다. 무한 공격이라는 공격 강화 교리 사상에 입각한 이 계획은 소위 "엘랑 비탈"로 대표되는 병사들의 정신력과 기율의 강화 같은 정신적 요소의 중요성을 포함하고 있는데 당시 프랑스군의 사기가 바닥이이었기에 더더욱 이런 교리가 아마 나온 것일거다. 그러나 전술적 수준에서의 병사 개개인의 자세 강화를 위해 개발된 무한 공격 사상의 취지와 무색하게 전략적인 교리 수준과 혼동되는 바람에 개전 초기 프랑스군에게 은근 지장을 초래했다.


17계획은 결국은 오산이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예상보다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조프르는 이 지역 방어를 신경쓰지 못했다. 조프르는 독일군이 벨기에를 사전 공격하는 걸 아예 예상 못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프랑스군이 먼저 벨기에를 선점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었기에 공격 방향을 로렌으로 바꾸었다. 특히 프랑스군 내부에서도 측면 포위 공격에 대해 크게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바뀌지 못했다. 게다가 프랑스는 자신들이 소유한 4,000문 가량의 75mm 포는 독일의 77mm보다 우수했지만 독일이 보유한 다른 155mm 곡사포나 소형 박격포, 기관총에 밀리는 등 중화기 경기 사상 때문에 무기 체계의 발단은 물론이고 전술 교리 개발도 더뎠다.

독일 제외 각국의 군사계획들: 러시아와 영국


러시아는 워낙에 20세기 초부터 일본과의 전쟁과 국내의 혁명 탓에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1909년에 가서는 동원계획 18호 수립하는 등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이전 계획은 예비군을 집결시키고 주된 위협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투입한다는 조항이었음에도 그래도 공격적이었으나 1910년에 들어서 보다 수세적으로 변한다. 동원계획 19호는 독일이 주적이라는 것을 임명하고 전시에 러시아령 폴란드 지역 대부분을 넘기고 후퇴한다는 방침이 있었다. 결국 서부지구 사령관들의 분노로 19호는 타협하여 오스트리아를 겨냥한 변형 A, 독일을 겨냥해 주력을 투입하는 B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또 러시아가 추진했던 대프로그램은 1917년까지 5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로써 유럽 전면전에 대한 러시아 참모부의 종합적인 준비가 다 들어가있다. 특히 러시아 참모부가 신경쓴 것은 신속한 동원이었고 그러기 위해 육군을 재조직했다. 그리고 대프로그램은 19호 계획의 수정판이기도 했는데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발발 시 동원 개시일 20일 만에 러시아군이 전투를 개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러시아와 동맹 관계였던 프랑스는 이를 느리다고 지적했고 이것이 양국 군사협력의 딜레마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의 전면전 발발 시에도 다른 국가보다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깊이 참여하거나 조금만 참여하는 것 사이에서 조율이 가능했기 때문.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나 오스트리아는 바다로 된 국경선에 의해 보호받는 혜택을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본토 육군이 겨우 6개 사단 밖에 없던 영국이 취한 군사계획이란 해군이 신속하게 원정군의 수송을 지원한 후 독일 함대를 결정적인 전투로 유인해내는 것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1914년 8월까지도 영국은 원정군이 어느 곳으로 출전할지 프랑스군에 제대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았으며 공동 작전에 대한 언질조차도 1912년에서야 들었다.

독일의 군사계획: 슐리펜 계획


1866년, 1871년에 각각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을 승리로 이끈 몰트케 장군은 독일이 앞으로의 전쟁에서 그런 승리를 또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그의 참모총장 재임 기간 동안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 맞춰 수비적인 군사 전략을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이 기조는 1891년 슐리펜 장군이 몰트케 기본 구상의 수정을 선언하면서 바뀌게 되었는데 여기서 주된 목표가 러시아가 아닌 프랑스로 변경 및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배치 병력을 각각 8 대 1 비율로의 변경 방침을 세웠다.


슐리펜은 칸나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한니발의 구상을 본따서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를 쳐서 왼쪽을 배후에서 포위 후 파리 단기 점령을 목표로 하는 군사계획을 수립했다. 1905년 말 슐리펜은 퇴임에 발 맞춰서 종합적인 작전 구상을 담은 비망록을 후임 참모총장에게 전달하였고 이것이 바로 "슐리펜 계획"이었다. 맨 위 문단에서 말한 것처럼 슐리펜 당시는 독일이 세계정책과 모로코 위기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되던 시기였고 따라서 예방전쟁이 논의되던 타이밍이어서 슐리펜이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있다.


게다가 이때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당분간 전쟁을 할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슐리펜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러시아군에게서 승기를 잡고 다시 서부전선에 병력을 집중시킨다면 프랑스를 6주 안에 패퇴시키고 난 뒤에 다시 동부전선에 병력을 보내어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보았다. 벨기에 침공의 경우에는 중립국이라 영국의 개입이 예상되는 문제가 있어서 우려가 존재했으나 어차피 독일 군부는 영국 지상군을 상당히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슐리펜 계획(+몰트케 계획)의 문제점


이것부터 말하고 들어가자면 애초부터 슐리펜 계획은 세계대전으로 번질 위험성이 너무나 컸던 구상이었다. 슐리펜 계획은 독일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경우 프랑스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이기 때문이며 양쪽 모두와 동시에 전쟁을 벌일 경우 패할 것이 자명했다. 그래도 다행히 러시아의 동원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소수 병력만 동부전선에다가 갖다 놓고 프랑스를 먼저 패퇴시킨 후에 러시아와 전면전을 한다는 가정이 가능했다. 그러나 문제는 설령 전쟁이 다른 강대국 개입 없는 국지화될 방식으로 시작된다 하더라도 슐리펜 계획의 원리대로라면 프랑스를 반드시 먼저 칠 수 밖에 없어서 사정과 상관 없이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게다가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를 칠려면 거의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우회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1839년 런던에서 맺은 국제조약상 벨기에의 중립 조항을 침해해 영국의 개입도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여기서 반론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면 이미 영독관계가 파탄난 시점인지라 중립국 침범과 무관하게 영국이 프랑스를 도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도 컸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슐리펜은 영국 지상군을 꽤 저평가했고 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한데 문제는 영국의 지원 의미가 지상군 직접 파병 뿐 아니라 프랑스 항전 의지와 지속력도 있었다. 그리고 슐리펜은 이걸 간과했다.


또 슐리펜이 실책을 저지른 부분이라면 러시아군이 쉽게 무너질 거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한 직후 러시아는 분명 더 이상 장기전을 할 능력 자체가 없어졌지만 1914년 시점에서는 상당히 회복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패퇴까지 6주면 가능하다는 것도 지나친 자만심이었고 러시아군의 공세를 꺾기 위해 오스트리아군과 어떻게 협력할 지에 대한 구상도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전쟁 발발 직후 오스트리아가 독일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R 플랜보다 B 플랜을 우선시하자 독일 당국조차도 당황했을 정도.


가장 커다란 비현실성은 다름이 아니라 계획이 요구하는 병력 규모가 당시 독일군보다 현격하게 크다는 것이다. 슐리펜 계획은 전체 동원 병력 96개 사단으로 상정했지만 정작 당시 독일군은 72개 사단이 끝이었기에 계획보다 24개 사단이 더 부족했다. 뭣보다 슐리펜 포함 독일 군부는 외무성이나 재국 재상 같은 민간 기구와 협의를 제대로 하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쟁성조차도 1912년에서야 처음으로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 전시 첫번째 대상이었던 배트만 홀베크 역시 슐리펜 계획의 기본 골자만 대충 알고 있었고 군부로부터 공식 보고받은 적이 없었을 정도.


여담으로 우리는 슐리펜 계획을 말하면서 두 가지를 섞어 말하고 있다. 본래 의미에서의 슐리펜 계획은 1905년에 슐리펜 장군이 작성한 비망록이고 다른 하나는 (소)몰트케가 1914년에 이 슐리펜 계획을 바탕으로 만든 실제 1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의 작전 계획이다. 그래서 시각에 따라 슐리펜이 만든 계획은 전략 구상 수준이기에 몰트케 계획으로 부르는게 더 적합하다고는 하나 더 중요한 사실은 개전 당시 독일 군부는 본인들 스스로 슐리펜 계획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참고 문헌:


박상섭, <1차 세계대전의 기원: 패권 경쟁의 격화와 제국체제의 해체>, 아카넷, 2014

박상섭, <근대국가와 전쟁 >, 나남, 1996

존 키건, <1차세계대전사>, 청아람미디어, 2016

마이클 히키 외, <제1차 세계대전 :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플래닛미디어, 2008

김정섭, <낙엽이 지기 전에: 1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 Mi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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