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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13. 2023

아랍 민족주의, 중동 지역 정체성의 탄생

아랍 민족주의의 흥망과 정치적 유산

https://youtu.be/fJLx9hQXV1o?si=qSEgtkqVzBv-8n1y

중동 지역에는 4대 민족주의가 있다. 바로 유대 민족주의(시오니즘), 튀르크 민족주의, 페르시아 민족주의, 그리고 아랍 민족주의 말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켐페인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서로 격돌하고 있는 중이다.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문명과 문명 사이의 단층선에서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보았는데 사실상 그게 가장 잘 맞아들어가는 지역이 바로 중동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냉전이 끝난 이후 세계가 평화로울 것이라 예측이 깨지게 된 결정적인 사건들인 걸프전, 9.11 테러도 다 중동에서 비롯되었다.


아랍 민족주의, 오늘날 아랍인의 정체성을 얘기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데올로기 아래  부족 사회이던 아랍계 주민들이 아랍인이라는 하나의 공유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훗날 아랍연맹의 창설에도 커다란 기반이 되었으니 아랍의 역사에 대해 얘기할 때 무조건 얘기해야 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지금은 비록 이슬람주의가 다소 우위에 서고 있으나 20세기 아랍 역사에서 아랍 민족주의는 많은 중동 국가들의 통치체제를 제공한 바탕이었고 같은 아랍 국가들끼리 서로 협력하는데 있어서 명분으로 사용되었던 만큼 중동 정세 이해에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아랍 민족주의의 기원은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차적으로는 오스만 제국 점령기에 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나타난 양상은 중앙정부나 지방 토후국 정부에 대항해 독립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아랍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고 한동안은 오스만 정부가 다양한 종교, 언어, 관습 등을 인정해주며 자치권을 줬는지라 그래도 피지배인인 아랍인들은 큰 불만은 없었으나 압둘 하뮈드 2세를 포함한 오스만의 지도부가 탄지마트 개혁으로 중앙집권적 변화를 추구하며 아랍 지역의 정체성과 자치권을 억압하자 그 시기를 전후하여 아랍 부흥을 꾀하는 아랍인 중심의 내셔널리즘 의식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이게 아랍 민족주의의 뿌리이다.

이 당시 아랍 민족운동은 1875년 아랍인 정당을 창당한 것을 기점으로 1913년 제1회 아랍 민족회의를 개최하고 지방자치군 양성 사업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때마침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이 독일의 편에 서자 아라비아 반도 헤자즈 지방의 메카 태수 샤리프 후세인이 영국의 지원 약속을 받고 아랍 반란군을 조직해 항쟁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아랍 반란군은 영국이 승전국이 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이후 중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전환된다. 이때부터 반식민주의와 반제국주의의 물결이 중동 지역에 번지면서 식민제국에 대한 무력항쟁이 개시된다.


좀 전에 영국과 손잡고 오스만과 싸웠는데 왜 또 그들과 싸우냐고 할텐데 그건 영국이 아랍인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프랑스랑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아랍 점령지를 위임통치령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되자 아랍 민족주의는 반식민주의적 성향이 강해지게 된다. 아랍 민족주의 목표는 아랍 민족의 독립과 국가 건설이라는 방향으로 가면서 나온게 바로 바트당이었고 그들은 인종적,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아랍 민족의 통일된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1936년 팔레스타인에서는 아민 알 후세이니를 중심으로 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6개월에 걸쳐 대규모 파업과 무장봉기를 일으키며 세를 과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1943년 오늘날 아랍 독립국가 전원인 22개국이 참가하는 아랍 연맹 결성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아랍 민족주의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시한 사건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었다. 이에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한 아랍 5개국은 건국 이틀 후 선제 기습하여 1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으나 크게 패배하고 일부 영토까지 추가로 잃었다. 1차 중동전쟁의 패배는 자신들이 주인인 땅에서 불신자들에게 패할 정도로 아랍 세계가 허약한다는 걸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는데 게다가 요르단은 1950년 인접 국가들의 반발에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UN이 분배했던 예루살렘과 서안 지역을 자국 영토로 병합히니 아랍 민족의 대의를 배반하는 등 서로 개별 국가 이익 앞에 분열되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었다.

각성한 아랍 사회에서 구세대 집권 세력에 대한 해체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리아에서는 1949년 후스니 자임 대령이 쿠데타로 집권했고 1954년까지 다섯 차례 군부 쿠데타를 겪다가 이집트랑 아랍 통합 공화국을 결성하며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못가 탈퇴하였고 이후 바트당이 집권, 하페즈 알 아사드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바샤르 알 아사드로 세습되어 이어져오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시리아의 구세대 정치인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미래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던 신흥 엘리트 계급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게 되며 완전히 몰락했다.


이집트에서는 1차 중동전쟁 패배로 인한 분위기 속에서 1954년 군사 혁명으로 파루크 왕정이 폐지되고 나세르가 집권해 공화정이 실시되었다. 새 지도자 나세르는 사회적, 경제적 병폐의 상징인 왕정을 타도하고 성공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뤘다. 또 나세르는 유산 계급에 대한 직접적이고 강도 높은 개혁을 시도하였고 아랍 사회주의 또는 대중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리하여 수에즈 운하를 시작으로 이집트 산업체의 80%가 국유화되었으며 대지주의 2백 페단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지시키고 나머지 토지를 정부가 사들인 다음 농민들이 감당해낼 수 있는 가격으로 최고 5페단까지 분할 매각하는 등 사회 혁명 노선으로 아랍 민족주의를 공고히 하였다. 


이라크에서는 1958년 왕정이 쿠데타로 붕괴되었으며 1968년 바트당이 집권하고 이후 사담 후세인의 독재로 이어졌다. 예멘은 남북으로 나눠져서 남예멘에는 공산 정권이 들어섰다. 한편 리비아에서는 나세르의 후계자인 카다피가 들어서며 자마히리야 체제라는 독특한 독재적 직접민주주의 체제를 선보였고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생산이 괄목할 정도로 향상되어 1970년 2만 7000톤이던 밀 생산이 1983년에는 21만 3000톤으로 늘었으며 1981~1985년 사이 5개년 개발계획으로 산업 생산이 연간 22.6% 성장하고 산업생산품 수출이 연간 2.4% 늘면서 성과를 내보이며 중동전쟁 이후 아랍 민족주의가 완전히 몰락한 상황에서도 그래도 2011년 아랍의 봄 이전까지는 유지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건국은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 등의 나라에서 혁명으로 구세대가 몰락하고 공화정이 세워지는데 나름대로 영향을 줬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당시 아랍 지역 전체는 아랍 민족주의 열풍으로 덮여가고 있었으며 이 속에서 1964년 PLO도 결성된다. 이스라엘과 서방 국가들에 맞선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 근대화 노선은 이슬람주의의 흐름을 차단했으며 아랍 민족주의가 압도적으로 아랍세계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아랍 민족주의 노선은 제2세계의 대표 열강인 소련으로부터 후원받기 유리한 체제였기에 대외정책을 펴기 수월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주의의 대부였던 사이드 쿠틉이 죽고 난 뒤 쇠퇴한 것은 이슬람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아랍 민족주의였다.

1967년 6일 전쟁은 아랍 민족주의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골란고원은 이스라엘에게 넘어가버렸는데 참으로 아랍인들에게 치욕스러웠던 이 전쟁은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이던 아랍민족주의에 찬물을 끼얹게 되었다. 이어서 1970년대 동안 나세르의 사망, 요르단 정부군의 PLO 공격 사태와 검은 9월단 등장, 끝에는 온갖 아랍의 모순이 증층적으로 결합한 레바논 내전이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중동은 아랍 민족끼리 다투거나 수니파와 시아파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지경에 이르었으며 사실상 이 분열로 아랍 민족주의는 종언을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민족주의와 근대화를 앞세우며 집권한 각국의 세속주의 정권이 물론 구세대 정권보다는 사회 개혁이나 경제 정책에서는 유능했지만 점차 독재 정권이 되어갔으며 이에 실망한 아랍인들이 아랍 민족주의에 등을 돌리며 아랍 민족주의와 근대화 운동은 힘을 잃고 무슬림들은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그 틈 사이에서 예전 이슬람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가 돌기 시작하여 세속주의 독재자 안와르 사다트가 통치하는 이집트와 구세대 와하비즘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슬람주의가 서서히 힘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랍 민족주의는 유산은 크다. 아랍 통합 공화국 시도 같이 실패한 사례나 아랍 연맹 외에도 유산이 있는데 바로 바트당이라는 정당이다.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조직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집권 여당이기도 했고 아랍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경제에 관심을 가지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1940년 시리아 출신 아랍 민족주의자 미셸 아플라크가 만들면서 시작했는데 아플라크는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1947년 200명의 당원이 있던 바트당은 미셸 아플라크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면서 아랍 통합,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실현을 완전히 내걸게 되었으며 이후 시리아, 이라크 양국에서 집권에도 성공한다. 물론 얼마 못가서 양국의 바트당 지부는 분리되어 독립된 조직이 되었고 아랍 통일 사상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시리아에서는 아사드 정권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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