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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26. 2023

폴란드 20세기 초반의 정치 세력들의 구도 이해

폴란드 제2공화국 형성의 근간이 된 정치 세력들을 ARABOJA

https://youtu.be/IfWY6wktSMU?si=iSZs8MM9a4dBR00z

폴란드 제2공화국,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이다. 폴란드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사건이 있다면 바로 방산수출 계약일텐데 그거 외에는 한국과 폴란드의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2차세계대전 발발의 기원이 담겨있는 전간기 역사 중 동유럽사에 대한 것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자료 역시 의외로 많이 없는 편이고 그래서 이 글도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유럽발칸연구소 논문들이나 대중 교양서 몇개, 절판된 임지현 교수 책들 이렇게 해서 모아서 쓴 것이다.


이번 글은 체코슬로바키아 편에 이어 두번째로 전간기 동유럽 역사를 다루는 글이고 반응이 좋거나 삘이라도 받으면 시간날 때 전간기 헝가리 왕국이나 루마니아 왕국에 대한 글도 한번 써보겠다.

폴란드 사회주의 세력의 구조(Feat. 피우수트스키와 사회당을 중심으로)


강제 분할 이후, 한동안 폴란드의 민족운동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1963년 봉기의 실패로 적잖은 부유층 귀족들이 타격을 입으면서 민족운동 세력에는 자세를 낮추고 재기할 수 있는 상황을 모색하는 부류들이 남았다. 그러던 와중 1870년대와 1880년대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폴란드 민족운동의 무대는 귀족의 저택에서 성장한 도시로 옮겨갔다. 이 당시 대부분의 청년 남녀들에게는 민족해방과 사회혁명 목표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민족운동 세력에 새로 유입된 청년들은 현상유지나 과거 복고를 원하는 자들과는 손을 잡지 않는 반면 애국주의에는 공감하며 사회해방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처방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1795년에 파괴된 국가와 전혀 다른 독립국 폴란드를 원했다.

이런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곧 폴란드 사회당(Polska Partia Socjalistyczna, PPS)이라는 정당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사회당은 폴란드 인텔리겐치아들 사이에서 19세기식 혁명적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사상을 가졌고 당 강령은 "폴란드 노동계급의 정치조직으로서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을 쟁취하려는 사회당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정치적 노예제를 타파하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정권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당의 목표는 '독립 민주공화국'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목표를 밝히고 있다. 모든 사회당 문서의 말미에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의 실현이 포함되었다

또한 사회당의 주장에 따르면 독립은 오로지 민중의 지지로만 얻을 수 있었고 사회혁명은 민족해방을 포함되어야 한다는게 핵심이었다. 이와 반대로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끄는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은 어떤 형태의 민족주의도 거부했다. 이들의 목표는 오로지 국제적 사회주의 혁명 뿐이며 러시아 사회당 및 독일 사회민주당과도 긴밀하게 연대를 유지하며 자본주의의 연결고리를 공동으로 끊어내고 모든 인민의 삶을 해방시키려는 이상주의 희망을 실어갔다. 당연히 민족주의적인 사회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편으론 사회당 및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과는 차별화되는 또 다른 사회주의 세력으로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 범 유대인 노동자 동맹(Bund)가 있었다. 원래 사회당은 창당 직후부터 내부제으로 유대인 분과를 두고 있었는데 사회당 측은 유대계 노동자들이 폴란드어를 사용하는게 타당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못했고 1897년에 가서는 사회당으로부터 벗어난 독자적인 조직이 된 것이었다.


훗날 폴란드 제2공화국 수립의 주역이 되는 피우수트스키 역시 폴란드 사회당에 입당했었는데 리투아니아 지부 설립에 참여했고 극좌 성향에 가까웠으나 국제주의 노선보다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크게 보였다. 1894년에는 지하신문이자 당 기관지인 '로보트니크'를 발행해 이 신문의 주필 겸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어느덧 다음해에는 폴란드 사회당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가 당 강령을 손봐 폴란드 독립을 주요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때부터 사회당은 자신의 정적인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민족민주당의 참정권 요구 및 두마 진출이 노선과는 반대로 폭력 혁명과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선을 적극 취하게 된다. 그것의 절정이 1904, 1905년 당시의 봉기였고 그 후로도 준군사조직을 창설해 러시아 관료들을 대상으로 테러 공작을 벌이거나 군자금 확보 탈취를 위한 우편 열차 습격 등을 곳곳에서 벌였다.


물론 폴란드 사회당 내부에서도 피우수트스키에 반발은 있었다. 노동 대중의 파업 투쟁에 대한 사회당 지도부의 무관심은 당의 소장파와 현장 활동가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고 급기샤 이들은 켈레스 크라우스가 중심이 되어 1906년 9차 당 대회에서 분당을 결의하고 좌파 사회당을 창당하며 피우수트스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났다. 좌파 사회당은 독립 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과 연대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은 교조적 국제주의에서 벗어나 민족적 연방 구조를 지닌 러시아 민주 국가 내에서의 여러 민족의 완전한 자치와 영토적 자치까지 포함하는 폴란드의 자치를 강령 차원에서 제시했다. 이들은 10년 후 1918년 폴란드 노동자 공산당으로 합당했다.


어쨌든 피우스트스키는 자신이 직접 사회당을 5만 5,000명의 당원을 거느린 대중정당으로 전환시켰고 그 외 3만 7,000명의 노동자가 당의 통제를 받는 노동조합의 일원일 정도로 커지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한해 동안 무려 336명의 러시아 관리를 암살했는데 '피의 수요일'이라고 알려진 1906년 8월 15일 특수작전 동안에는 러시아 경찰에게 77건의 저격을 감행해 29명을 사살하고 43명을 부상입히기도 했고 또 1912년에는 사실상 사관학교인 총포협회를 만들어 1만명 이상의 규모까지 키우며 미래의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다만 피우수트스키에게 있어서 사회개혁은 독립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예전 동료들에게 "우리는 함께 붉은 기차를 타고 여행했다. 그러나 나는 '독립'이라는 이름의 역에서 내렸다"라며 본심을 털어놓았을 정도.


한국 독립운동사와의 비유: 사회당 좌파와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은 민족해방을 추구하긴 했지만 최상위 과제는 역시 계급해방과 세계혁명이었다. 한국의 조선공산당도 민족해방을 중시했지만 소련을 종주국으로 섬기는 등 국제주의적인 노선을 보였기에 두 세력을 비교하는게 맞을 것이다. 피우수트스키는 붉은 열차를 타고 독립이라는 역에서 내렸다고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자였지만 점점 민족주의, 국가주의자로 변질되었다. 또 피우수트스키는 오직 무력만이 독립을 결정한다고 믿었고 적극적으로 무장투쟁을 벌였기에 한국 독립운동사의 민족주의 계열 무장투쟁론자들과 유사했다.

보론: 폴란드 사회당이 민족주의 정당이 되어가는 과정


폴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1890년대에 이르러 뭉쳐서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을 통일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892년 11월 파리에서 열린 폴란드 사회주의자 회의에서 스와디스와프 멘델손, 비돌트 요드코 나르키에비치, 얀 스트로제스키 등 사회주의자들은 폴란드 사회당(PPS) 창당을 선언하며 폴란드의 독립이 우선이고 사회주의화는 그 다음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사회주의보단 독립이 우선이라는 폴란드 사회당의 입장이 소개되자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반발하는 자들이 있었다. 특히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러했는데 위에서 말했다시피 그들은 사회당이 독립문제와 민족문제에만 관심있으면서 정작 세계 혁명에는 관심없다고 비판하며 탈민족주의적 좌파 정당인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처럼 민족 문제, 독립 문제로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은 20세기를 앞두고 갈라졌지만 처음부터 폴란드 사회당이 민족주의적 성향이 유독 강했던 것은 아니었다. 독립 문제로 폴란드 사회당 내부에 논쟁이 생기자 이에 반발한 당원들은 사회당을 탈당해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으로 입당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폴란드 사회당은 가급적 독립문제에 대한 언급을 피해왔다. 한편 그 시기 폴란드 사회당은 노동자 그룹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는데 이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였다. 그는 지하잡지 <노동자>의 발행인이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끊임없이 발행하며 폴란드 사회당의 영향력이 노동자들에게 크게 미치게 되는 것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노동자>도 처음에는 폴란드 사회당의 방침에 따라 독립 문제에 대한 언급을 피했었다. 그러다가 1894년 10월에 발간된 <노동자>의 글에서 피우수트스키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에서 파업이 성공한 것을 예시로 들면서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국가의 독립이 우선이고 우리 노동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은 차르라고 하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 피우수트스키의 논조는 점점 더 민족적 성향을 띄기 시작했다. 그가 쓴 '러시아'라는 글은 "폴란드 노동자들의 가장 큰 적은 차르다. 우리 폴란드 노동자들은 왜 정치적 자유가 필요한지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의 일원으로서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독립된 공화국 건설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러시아 차르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때마침 타이밍 좋게 독립문제와 민족문제에 반발하던 사회당 당원들이 러시아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덕분에 1895년 6월 빌르노에서 열린 제3차 폴란드 사회당 정기회의에서 피우수트스키가 당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라이벌 관계였던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의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어 그 밑에 있던 당원들이 폴란드 사회당으로 입당한 것과 더불어 서유럽의 사회주의자들까지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의 민족적 요구에 타협했다. 이렇게 폴란드 사회당의 방침은 독립과 국가 재건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되찾는 선행조건이며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필요조건으로 정했다. 이때부터 폴란드 사회당은 독립문제와 민족문제에 목소리를 많이 냈는데 실제로 피에트키비츠라는 간부는 <차르와 노동자들>이라는 글에서 폴란드 산업과 경제에 미치는 해악을 설명하면서 러시아를 약탈 점령정부로 규정했다.

피우수트스키도 <우리의 구호>라는 글에서 러시아를 단순한 경제적 후진국이 아니라 침략정부로 규정했다. 그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는 근본적인 개선책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침략자들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폴란드의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또 그의 논문 <노예 상태>에서도 침략정부에 의한 언어, 종교, 전통 말살 정책을 얘기하며 러시아화 정책이 폴란드인들의 지적 수준 하락을 가져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로만 드모프스키와 민족민주당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폴란드 내에서는 좌익 정당이 가장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정국 속에서도 민족주의 세력들도 나름 세가 커지고 있었는데 이때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로만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민족민주당(Endecja, 엔데차)이라고 불리는 정당이었다. 이 민족민주당은 폴란드 땅에서 새로운 정치 전통을 대변했다. 민족민주당의 이념의 사상적 토대는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라는 이론이다. 사회진화론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역사를 통하여 점점 고등 사회로 발전을 향해가고 생존투쟁에서 어떤 집단이 승리하여 부상하는지 주시함으로써 발전을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생물학을 연구하던 로만 드모프스키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민족민주당은 그리하여 국가 성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문화적 통합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눈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실패가 다양성이라는 것 때문이었으며 실제로 드모프스키는 "건강하고 강력한 토대 위에 세워졌다면 국가는 항상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외래 부족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든 평화적인 방식으로든 동화시켰을 것이다. 건강한 민족은 영원히 성장하기 때문에 그 도전 또한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은 민족 통합을 위해 반유대주의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동안 폴란드계 농민들과 유대인들은 딱히 사이가 좋았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증오하는 관계도 아니었는데 이 무관심을 역동적으로 바꾸기 위해 민족민주당은 폴란드어를 구사하는 모든 로마 카톨릭 신자를 폴란드인 범주로 설정하며 공동체를 뿌리도 없이 원자화된 개인으로 해체시키는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 윤리를 거부하는 사회주의의 계략이 유대인의 음모인 것 마냥 선동했다.


유대인들은 드모프스키에 따르면 기독교 사회를 묶어주는 도덕적 결속을 저해하고 모든 재산을 그들의 수중으로 쓸어담는 목표를 향한 정치적, 경제적 체제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추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기독교 사회를 향해 두 가지 무기를 휘둘렀는데 하나는 자유롭게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민주주의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였다. 자유민주주의는 공동체를 뿌리도 없이 원자화된 개인으로 해체시켰고 빈곤을 대거 양산시켰다. 사회주의자들은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반유대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자들은 무지한 대중을 속셔 기독교 윤리를 거부하고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하려 한다는 흑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모든 사회의 유산을 무너뜨리고 나서 국제 유대인의 지배는 궁극적인 승리에 접어든다는 것이 바로 민족민주당의 핵심적인 총론이었다


이처럼 민족민주당은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했지만 전통적인 보수세력과는 거리가 가깝지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유대인들과 어울려 사는 환경에 큰 불만이 없었고 반유대주의 사상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05년까지만 해도 민족민주당은 여전히 규모가 작았지만 농촌 문맹퇴치 운동을 지원하며 교육을 통해 반유대주의를 확대하고 폴란드어 사용 켐페인을 벌임으로써 세를 확대했다. 나아가 이러한 켐페인은 1905년 왕국 내 공공기관의 폴란드어 사용이 선포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며 드모프스키의 인지도를 높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주의의 성장을 두려워 하던 기득권층은 전통적인 보수세력에서 민족민주당으로 지지를 옮기기 시작했고 지주와 공장 소유자 뿐 아니라 중간계급 전문가 집단, 상인, 수공업자들, 관료 및 성직자들도 드모프스키와 민족민주당의 지지 세력이 되었다.


드모프스키는 경쟁자 피우수트스키와는 달리 무장투쟁에서 나서기 보다는 합법적인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1906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당선된 드모프스키는 비록 러시아와 타협했다는 이유로 당원의 3분의 1을 잃었지만 반대로 유대인을 향한 적대감을 이용하여 지지자를 끌어들임으로써 이탈한 당원들을 그 이상으로 보충했다. 1912년 드모프스키는 좌파 후보에게 패배해 낙선했는데 이는 지역구인 바르샤바 주민의 약 38%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공개선거에서 더 이상 드모프스키에게 바르샤바 출마가 기회가 없음을 뜻했는데 여기서 드모프스키는 자신의 패배를 유대인의 계략으로 주장하며 반유대주의자들의 유대 기업 불매운동을 이끌었고 이것이 도시 내에서 폴란드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훼손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한국 독립운동사와의 비유: 로만 드모프스키는 독립보단 러시아 내에서 자치권 획득에 치중했다. 그래서 사회당이 불참할 때 러시아 선거에도 나와 국회의원이 되었던 것으로 이 때문에 드모프스키는 옛 지지자들로부터 러시아와 타협했다고 비난을 듣기도 했다. 이 점에서 실력양성론자 내지는 자치론자와 유사하다고 본다.

제3의 세력, 농민당


보통 정치적 지향점을 지나치게 단순한 구도로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농민의 정치세력화에 대해선 생각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농민운동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지만 예외로 폴란드 만큼은 농민 운동이 제3의 중요한 정치세력이었다. 폴란드 농민 세력은 그야말로 단순한 구도에 끼워맞출 수 없는 정치운동이었고 이들은 독립적인 자영농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세력이 농민당(Polskie Stronnictwo Ludowe, PSL)이라는 정당으로 창립 이래 정치 무대에서 주도적인 세력 가운데 하나로써 좌파, 우파 모두 어떻게든 연정 대상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세력이다.


농민당의 이데올로기는 불명확하다. 내부 세력은 크게 비토스가 이끄는 보수적이고 애국주의적인 피아스타파와 급진적인 파벌이 주도하는 해방파로 나누어진다. 그럼에도 이들의 한 가지 지향점이 있다면 바로 급변하는 시대에 직면한 독립적인 자영농의 세계를 유지하겠다는 염원이었다. 독립적인 자영농 지위를 쟁취하지 못하면 도시의 노동자나 지주의 소작농으로 살아야 했는데 특히 인구의 10%도 되지 않는 귀족들이 국토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당은 평등한 토지재산 분배를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농민운동은 거대한 단일 정치 조직이 되지 못했다. 일단 민족주의 이념이 부상하면서 1860년대부터 전국 각지에서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성공을 거두며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1895년 갈라치아에서 농민당이 창당되었을 때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정작 초기 농민운동 운동가 중 일부는 훗날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변신해버렸다. 결정적으로 피아스타파의 수장 비토스는 애국주의와 조국 독립에 농민을 동원하는 과업을 중요시여기게 되었는데 이거의 가장 큰 문제가 있다면 민족민주당이 주도하는 반유대주의 운동에 협조하기 시작했다는 것.


한국 독립운동사에 딱히 잘 맞아들어가는 세력이 없어서 패스.

맺음말: 피우수트스키의 승리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당도, 민족민주당도, 농민당도 아닌 피우수트스키가 이겼다. 1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비스와 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대승리를 거둬 순식간에 국민적인 영웅으로 떠올랐고 나루토비치 초대 대통령이 순식간에 암살당하고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1926년 5월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당은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 당시 총파업을 일으키며 대놓고 지지를 선언했지만 정작 사나차 정권이 들어선 이후 영관급 장교들이 외교와 내정을 주도하면서 '대령정권'이 되어 사회당은 자연스럽게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피우수트스키 세력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옛 사회당 동료들은 중도좌파 연합을 결성하고 투쟁을 개시했다. 이들은 1930년 여름 독재 타도를 위한 대중운동을 시작했는데 피우수트스키는 이에 매우 강경하게 맞섰다. 정계 정화를 위한 명분으로 18개 정당의 당수가 체포되어 브제시치 요새에 투옥되었고 요제프 베크 대령을 비롯한 영관급 장교단은 피우수트스키의 묵인 하에 '정권 협력을 위한 초당파적 연합'(BBWR)을 만들면서 총선을 조작 및 독재 체제를 강홰해갔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베레자 카르투스카에 정치범 수용소까지 설치되어 3천명 이상의 재소자가 갇히기도 했었다.


외교적으로 피우수트스키는 우방국인 프랑스에 예지 포토츠키 백작을 밀사로 파견해 재무장 조짐이 있는 독일에 맞서 프랑스가 폴란드와 공동 군사행동을 할 것인지 여부를 물어봤다. 그러나 아직 1차세계대전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프랑스는 이를 거절했으며 이로써 예방전쟁으로 독일을 꺾을 수 있던 기회는 날라갔다. 결국 1934년 1월 26일, 폴란드는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프랑스의 예방전쟁 거절과 양국 간 무역전쟁으로 인한 경제 타격 등이 원인으로 작용했고 히틀러는 이를 통해 가장 먼저 공격해야 될 적(당시 독일 내부에 폴란드에 대한 적개심은 많았음)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합리적인 집권자라는 인상을 널리 퍼트릴 수 있었다. 동시에 피우수트스키는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연장하며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 추구를 이뤄내려고 했다. 그래서 히틀러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독일-폴란드 동맹을 제안했을 때에도 피우수트스키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히틀러와의 만남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독일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낀 폴란드의 지정학적 위치상 중립은 이상에 불과했다는 한계는 있었다.


그래도 피우수트스키는 나름대로 유능한 지도자였다고 보여진다. 폴란드의 독립에 있어서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이고 또한 독립 직후에도 커져가던 볼셰비키와 공산주의의 확산을 더 이상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냈다는 것도 커다란 공로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유대인에 대한 탄압도 타 유럽 국가보다 훨씬 덜했고. 다만 1920년대 이후 펼쳐졌던 잔혹한 독재와 주변국을 적으로 돌려 고립을 자초하는 외교는 과오라는 점에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영웅이자 악인이라는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볼 수 있고 그렇게 하여 19세기 극후반에 시작된 폴란드 정치의 사회당vs사회민주당vs민족민주당vs농민당의 구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것은 그 네 정당 중 누구도 아닌 오로지 피우수트스키의 혼자였다.


무엇보다 그의 시신은 폴란드의 옛 왕들이 묻혀있는 크라코프의 바벨 대성당 지하실에 안장되었고 오늘날까지 바르샤바에 가장 큰 광장 이름이 피우수트스키 광장일 만큼 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존경심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그리고 이는 20세기 폴란드 정치사에서 최종승자가 피우수트스키였다는 걸 잘 보여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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