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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24. 2023

만선사관의 흐름 정리

제국 일본의 팽창 과정에서 탄생한 식민주의 근대 역사학 "만선사"

https://youtu.be/xznHixFfcvs?si=oQTsdJCNmf_XmvgX

당나라 시대 때부터 일본은 발해와의 교역을 통해 만주 지역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넘어 명나라를 정벌하는게 목표였기 때문에 만주에 대해 조사가 있었다. 18세기, 19세기에는 이미 일본에서 지역명으로 만주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었고 19세기에는 지도를 만들어 서양에 내보일 수준이 되었다. 1858년 러시아가 남하하여 흑룡강 좌안 대부분을 손에 넣자 일본에서는 러시아가 지배한 외만주를 제외한 동북 지역을 만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본에서 만주에 대한 연구가 확대되자 일몽동조론이라는 것도 생겼으며 정치사상적으로는 대륙 침략에 대한 야망이 불타 이것이 대륙병합론으로 발전하는 발판이 된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한 이후 만몽 지역에 진출한 일본은 만몽 분리주의론을 내걸고 나왔고 이때 만선사관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다. 만선사관은 조선과 만주를 하나로 묶어 보려는 역사학이며 한국의 독자적 발전을 부정하는 타율성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만주와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일본으로써는 중국을 만주에서 어떻게든 배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에 따라 1871년 병부성 육군참모국으로 시작했던 육군참모본부는 병부성이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되자 육군성 참모국이 되었고 1878년에 참모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참모본부에는 두 개의 부서를 두고 그 아래 지도, 편찬, 번역, 측량, 문고 등 다섯 개의 과를 설치했다. 참모본부는 조사사업을 통해 사전작업을 진행하였는데 나카쓰까 아키라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1879년과 80년에 가쓰라 다로 등 10여명의 장교들을 청에 파견해 현장 조사 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까지 진행했다"고 밝혔다. 나카쓰카의 지적대로 조사사업은 침략을 위해 지도를 작성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파견된 밀정들은 4개월 간 어학연수와 정탐준비를 하고 2개월은 정탐을 하고 귀국했으며 1880년 어학생으로 10명의 군인이 파견되고 곧이어 호리모토 곤조가 관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한편 참모본부 편찬과에서는 1880년 신공황 후의 조선정벌과 임나일본부설 등 고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하고 한국 고대사를 일본 고대사에 편입시키기 위해 연구를 진행했다.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1884년 입수한 일본은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해독을 마쳤다. 그리고 해설본을 공개했다. 1906년 만철이라고 불리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설립되었는데 대만 식민통치의 핵심 인사였던 고토 신페이가 초대 총재에 취임했다. 만철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만주 곳곳에 침투해가는 것을 목표로 대련과 도쿄에서 만주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또 시라토리의 요청으로 만선역사지리조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만선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만선사에 대한 연구를 지원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만선이라는 말의 용법은 만주사 및 조선사의 축약형이다. 만선사관의 아버지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1934년에 발표한 <만선사 연구 30년>이라는 글에는 시라토리는 과거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만주와 조선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연구하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만선사라는 표현이 만주 및 조선이라는 말의 축약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실제로 만선사 연구를 주도한 만선역사지리조사부의 보고서의 서명은 <만선역사지리>가 아닌 <만주역사지리>와 <조선역사지리>였고 이는 이나바 이와키치가 만주사를 담당하고 이케우치 히로시 등이 조선사 담당으로 빠지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시라토리가 말한대로 만선사라고 줄인 것에는 조선사에 대한 만주사의 큰 영향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케우치의 저작집은 <만선사연구>였지만 실제 내용은 <만선관계사연구>에 더 가까웠으며 이는 연구자들이 만주와 조선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가정 하에 만주, 조선에 대한 연구를 엮은 것으로 만주사와 조선사를 하나로 보는 만선사 체계로 집필된 것은 아니었다. 이나바의 <광해군시대 만선관계>는 광해군 시기 정치사를 조선과 명, 후금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여 고찰하였는데 이것도 따라서 만선관계사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케우치와 이나바가 쓴 "만선관계사"의 논저들은 지금이라면 조선사나 동북아시아사라고 부를텐데 그런데 이게 만선사가 된 것은 당대 일본인 연구자들이 만주사라는 틀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만선사 체계를 만들어 만몽을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조선사를 만주사와 분리시킬 수 없다는 영역에서 해석했다. 실제로 그는 조선 왕조의 설립을 여진인과의 관계에서 고찰했으며 조선사에 대한 만주사의 영향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만선사를 만들어갔다. 결론적으로 이나바는 만선불가분론을 내렸으며 거기서 만선을 하나의 역사단위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이토의 주장을 바탕으로 지나비국론을 주장하며 중국은 근대적 국민국가로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만주와 몽고는 중국 영토가 아니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만선, 만몽 사관을 체계화한 인물이었다.더 나아가 그는 조선 왕가는 대부분 만주계이며 지리적으로 일체였고 조선인의 혈통에는 고구려와 발해인, 여진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며 만선은 하나의 역사적 단위로써 불가분 관계라고 정립했다.

만선사 연구의 원류, 이나바 이와키치

또 이나바의 경력이나 저술활동을 보면 주된 연구대상이나 목직이 처음부터 끝까지 청대사, 만주사와 현대 중국이었다는게 보이는데 그렇기에 그가 조선사 연구에 집중한 시기는 조선사편찬사업 참여 15년 뿐이었다. 그래서 "만선불가분론"은 한국사 인식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정치동향에 대한 대응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고 때마침 일본이 만몽에서 세력을 확립하기 위해 이민을 보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을 이용하려고 한 사업을 펼치며 더더욱 활용되게 되었다. 즉 이나바의 "만선불가분"론은 일본의 만주 침략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인 것으로 그가 쓴 <만선불가분의 사적고찰>은 조선총독부와도 연관이 깊었다.


한편 조선사의 타율성론을 이나바 못지 않게 잘 설명한 학자로는 미시나 쇼에이가 있었는데 그는 만선사 체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시나는 남북이질설을 주장하며 고구려를 만주사로 신라와 백제를 조선사로 보는 관점을 내세웠다. 미시나가 말하길 낙랑과 고구려는 조선사의 주역이 아닌 보조역이기에 만주사이며 조선사의 진짜 주역은 어디까지나 신라와 백제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만선보다는 일선에 가까운 느낌인데 이래서 미시나의 만선사 비판은 결국 한반도의 남과 북을 각각 일본과 만주에 종속된다고 봐 타율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시나가 일선동조론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조선과 일본은 동일한 문화권이지만 두 역사를 확실히 구분한 것이다. 미시나의 목적은 결국 만주사와 조선사를 일본사의 일부로 두는 것이다.


또 미시나는 <조선사개설>에서 조선사와 만주사의 성격이 대조적이라 하였다. 미시나는 스스로 밝힌 것처럼 문화경역 탐색을 목적으로 신라의 화랑도를 연구했는데 이를 원시 한족의 미성년 남자 집회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근린제족"의 분포를 살핀 결과 한족에서 남방 인도네시아 방면에 걸친 하나의 문화강역을 떠올리며 그 문화요소 일부는 상호 동원적이라 하였다. 이는 한반도 남부지역을 동아시아 남방문화권으로 본 것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또 다르게 보면 한족과 만주는 대립된 문화권이라는 주장으로도 이어지는데 실제로 미시나는 조선반도 남부와 조선반도 북부를 포함한 만주지역이 대립되는 문화권이라고 분석했다.

신라 화랑도의 기원을 남방 문화에서 찾은 미시나 쇼에이

미시나는 이나바의 만선사 체계를 부정하였다. 그는 조선반도를 남북으로 나눠 서로 다른 역사로 보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미시나는 일본사의 기원을 해명하기 위해 조선사를 연구한 것이었고 특히 조선반도 남부를 조선사라고 한 이유는 고대 일본의 남선경영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 문화경역을 구상한 것. 그래서 만선보다는 일선을 내세웠으나 정작 미시나는 만선사에 짝을 이루는 일선사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시나의 연구는 일본문화의 진보를 근거로 삼는 일제의 대외 침략 정당화 소지가 다분하였고 이에 미시나는 이나바와 같은 만선사 체계는 부정했지만 제국의 필요에 따른 만선의 가능성을 긍정하며 사실상 현재주의적 관점에서 민족사에서 국가사로의 전환을 모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만선사에 저항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그 중 역사학자 푸쓰녠은 만선사에 맞서 동북사를 제창했다. 그는 강소와 복건이 중국의 영토이듯이 동북 또한 자고 이래 중국의 영토라 했으며 동북의 (고)조선은 은상의 후예이고 동북지역의 선사유적들이 북중국의 앙소문화와 인류학적으로 유사하다고 지적하며 동북은 북중국과 기원이 똑같다고 밝혔다. 또 <동북사강>에서는 중국의 역대 왕조가 군현 등을 설치해 동북지역을 직접 지배함으로써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지역 모두가 사실상 중국 역대 왕조에 예속되었다 주장했다. 진위푸도 푸쓰녠과 마찬가지로 중화주의적 관점에서 동북사를 내걸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만주는 부족명이기에 지역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진위푸는 또 동북지역에는 크게 한족, 만주족, 몽고족이 거주하며 한족들은 연나라 장군 진개가 요동을 개척할 때 이주했다는 이나바 이와키치의 주장과는 달리 선사시대 때부터 고고인류학적으로 볼 때 한족의 영역이었음을 주장했다. 고구려에 대해서도 부여에서 나온 국가이기에 중화민족의 일부라 얘기한 바 있다. 그리고 이건 오늘날 동북공정의 주된 근거가 된다.

만몽문화론을 주장한 친일파 육당 최남선

의외로 한국에서도 만선사관 논쟁에 참여한 학자가 있었다. 우리에게는 친일파로 유명한 최남선이 대표 사례였다. 최남선은 친일파가 되기 이전부터 한말 일제시기 고구려, 발해 시대를 민족사의 최전성기로 보며 만주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을 계승해 동양학의 관점에서 아시아 북방문화에 관심을 두었다. 1940년 전후한 시기에 최남선은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가 되면서 만몽관계 글들을 여러 개 발표하였고 이때 나온게 <만몽문화론>이었다. 그는 만몽은 중국과 분리되어 존재해온 독자적인 역사를 가졌다고 말하며  만주와 몽고 신강 고원을 무대로 한 퉁구스 계열과 몽골, 유사 몽골계 민족의 활동의 소산이 만몽 문화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신석기-청동기 시대 동아시아는 요동, 산동, 하남, 감숙을 잇는 북중국 일대를 중심으로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문화권과 유목, 수렵,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북방 문화권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최남선은 지리, 민족적인 측면에서 만몽지역과 중국이 구별된다고 보았고 이러한 구분은 이미 신석기 시대 이래의 것이었다고 보았다. 신석기시대 중국과 동북지역의 문화, 인종적 공통성을 주장한 푸쓰녠과는 주장을 달리 했으며 만몽의 공통적 신화로서 동명설화를 근원으로 하는 난생형 천자강림설화에 주목했다. 그러나 은의 국조설하가 이와 공통의 모티브를 갖고 있는 점에서 은과 예맥의 종족적 연계를 구하려는 푸쓰녠의 견해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또 최남선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동(중국), 서(서장), 남(중국), 북(만몽)의 대립으로 파악하였고 후자를 중시했는데 양자의 투쟁 뿐만 아니라 북방의 여러 민족과 그 문화가 중국의 민족과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파악했다. 이로써 최남선은 중국 문화의 독자성, 독창성을 부정하고 대신 독자적인 만몽문화를 주장해 만주국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에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렇듯 만선사관은 일제의 식민지배 및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출발한 것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만선사라는 것이 결국에는 만주와 조선은 물론이고 몽골, 중국 등 대륙 세력들의 역학관계와 상관성을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 일본의 역사를 대륙의 역사적 전개와 대륙 내부의 세력 간 역학관계에 참여시키는 것에 있다. 즉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의 무대를 중국이 아닌 일본으로 옮기며 대륙과의 끊임없는 교섭 과정으로서의 동아시아 일본 역사를 서술하며 대륙의 역사적 전개에 관여하며 국위를 떨친 강대한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식민주의 역사학과으로서 만선사관은 침략성과 근대 역사학 속성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구조였다. 또 민족주의적 단군 신앙이 친일화되어 가고 아이러니하게도 자치론자이자 친일파 최남선이 불함문화론을 주장하며 남긴 결과물이 오늘날 환단고기에도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 만선사관으로 중국과 만주를 분리시키려 했었던 일본의 시도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주장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꼴이 되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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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우, <만선사, 그 형성과 지속>, 사회평론아카데미, 2022

이나바 이와키치, <만주사통론>, 한국학술정보, 2014

최남선, <불함문화론 살만교차기>, 경인문화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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