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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23. 2023

히틀러는 과연 2차"세계대전"이라 불린 전쟁을 원했는가

정말 어느 미치광이의 "세계정복"이라는 망상이 전쟁을 불러왔을까?

https://youtu.be/yWx0H5XM3qE?si=qtYiSpi9OBOeiP5W

제목이 굉장히 네오나치스럽게 보일텐데 오해를 미리 풀고 시작하자면 이 글은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이때까지 글을 써오며 나는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은 물론이고 여러 정치사회, 역사적 사안들에 대해 수정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는데 이는 "재평가"하는 대상을 무조건 옹호하며 감싸고 쉴드쳐주기 위함이 아니다. 논란이 있는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지금까지도 계속 활발히 찬반 입장을 가지고 갈리는 주제이며 한국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안을 꼽자면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재평가 논쟁은 난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며 이 글 또한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2차세계대전의 기원에 대해 분석해볼 것이다.


다 쓰고 난 다음에 내가 봐도 논조가 상당히 추축국과 히틀러에 대해 옹호적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긴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2차세계대전의 기원이라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도 하고 그만큼 굉장히 민감한 소재를 말하고 있다는 얘기. 저번에 올린 도쿄 전범재판에 관한 글과도 비슷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역사적 사건을 볼 때 선악이라는 도덕적 관념이나 휴머니즘적 관점을 웬만해선 배제하고 바라보는 것과는 별개로 추축국이라는 세력이 역사적으로 패망한 것에 대해선 동정은 커녕 지극히 당연했을 수순이라고 인식한다는 것 만큼은 분명히 하고 싶다. 어차피 추축국은 전쟁에 돌입한 시점에서 잔악한 행태를 따지기 이전에 내부적인 모순으로 인해 빠르건, 늦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체제였고 딱히 연합국보다 나을 것도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계속 반복하는 얘기지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대 추축국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한다.


우선 히틀러가 대규모 정복전쟁을 구상하고 2차세계대전을 계획적으로 벌였다는 측의 주장부터 살펴보자. 첫번째는 히틀러가 독일을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만들어 알렉산더 대왕이나 나폴레옹 같은 정복 군주처럼 되고 싶었으나 정작 전쟁을 원한 진짜 이유는 인간과 사회의 총체적 파괴이기에 그는 미치광이이자 새로운 아틸라였다는 것이다. 요건 다소 철 지난 논리고 또 다른 해석은 히틀러가 일관된 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집요함을 바탕으로 정복전쟁 계획을 실행했다는 얘기다. 히틀러는 소련을 타도하고 모든 주민을 절멸시킨 후 주인 없는 땅에 독일인들을 이주시켜 독일이 동유럽에 거대한 식민지 제국을 거느리게 하려 했다는 것인데 다만 이 해석의 문제는 만약 소련과 대규모 전쟁을 벌이는 것을 가정했다면 서유럽 국가들과 양면전선을 펼친 건 실수라고 할 수 밖에 없기에 납득이 안가는 지점이 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한 후 경제에 관여한 부분이라면 도로와 건축물의 건설에 투입하는 공공 지출 장려가 끝이었고 독일 경제 회복은 사실 민간 소비와 투자, 즉 전쟁과 관련 없는 종류의 투자가 1928, 1929년 수준으로 진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재군비도 경제 회복과 거의 관련 없었고 또 재군비는 근거 없는 신화였다. 사실상 히틀러는 경제 계획을 미리 마련하여 실시하기 보단 눈앞에 가장 가까이 있는 일을 실행했을 뿐이었다. 놀랍겠지만 히틀러는 1914년 이전 독일이 추구한 "세계 정책"을 부활시키지 않았는데 그 예가 대규모 함대 건설 계획을 수립하지 않거나 패전으로 상실한 식민지에 대한 원한 시위 및 심지어 빌헬름 2세의 3B 정책과는 달리 중동에 대한 관심조차도 안 보였던 것이었다.

바이마르 시대 슈트레제만이 그랬듯이 히틀러는 서유럽에 관한 결정 사항에 도전하지 않았다. 심지어 프랑스에게 빼앗겼던 알자스-로렌 지방을 되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 대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결정된 사항을 받아들이며 1918년 11월 독일과 연합국 사이의 휴전조약 이후 이러한 결정을 인위적으로 무효화했던 것을 철회하길 바랄 뿐이었다. 동시에 1차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해주기 바랬었다. 그런 측면에서 히틀러는 서유럽 정복이나 전세계적인 규모의 정복 전쟁보다는 동유럽 문제에 보다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취했던 정치 전략 자체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는 척 하면서 사실상 준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현상 유지를 넘어 전쟁 이전의 강대국 지위 회복을 추구했다는 걸 근거로 침략전쟁을 처음부터 추구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일단 침략적이든 아니든 이 목표 자체는 히틀러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 당대 모든 독일 정치가들이 전부 그런 야망을 공유하고 있었다. 슈트레제만이나 1918년에 전쟁을 종결시킨 독일 사민당도 그러했다. 하지만 원상태를 되돌린다는 기준은 상당히 모호했었는데 히틀러의 경우는 영토의 회복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동맹으로 얻었었던 중부 유럽의 패권을 되찾고 군비에 대한 제한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해방"과 "지배"라는 두 가지 관념이 합쳐진 당대 독일인들의 인식은 곧 두 가지 중 어느 특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히틀러가 민족적 정의의 수호자인지 유럽의 잠재적 정복자인지가 결정되는 갈림길이기도 했고.


총력전을 꾀하는 강대국은 그 준비만으로도 붕괴 위험에 처하게 된다.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제는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만들려다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는 유럽에서 차지하던 지위를 크게 잃어 예전의 영광을 추억으로만 간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강대국이 되려는 목적은 대규모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되려는 것이지만, 강대국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싸우지 않거나 제한된 전쟁을 하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해전만 고수하며 다른 유럽 국가들이 추구하는 군사력 건설 모델을 거부하였고 이것이 강대국 지위 유지의 결정적 비결이었다. 히틀러도 그래서 독일의 장기전 능력에 대해 계속 지속적으로 고민하였다.

그런 측면을 보았을 때 히틀러는 1918년 3월 루덴도르프 공세 이전의 위치로 되돌리면 만사 OK라는 독일군 장성들보다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고 그는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교묘한 솜씨로 문제를 피해가려고 했다. 다만 영국이 해군력에 의존했던 것과 대비되게 독일은 속임수에 의존했는데 이는 히틀러가 전면전이 확대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히틀러는 총력전이라는 상황을 피하면서 총체적인 승리 요소들을 획득하기 원했고 이것이 성공을 거둔 사례가 오스트리아 합병, 뮌헨 협정 및 주데텐란트 병합이었다. 독일을 둘러싼 주변국들은 처음에 히틀러에 양보했지만 그 도가 지나치자 총력전을 선택했다. 히틀러의 패착은 이 총력전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으며 근원적으로는 독일이 강대국으로 부상할 경우의 시나리오에 대해 너무 낙관적으로만 생각하였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히틀러는 대전으로 최종적으로 파멸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목표는 독일 민족 전체를 수용할 정도 규모의 레벤스라움을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독일 민족의 위협으로 간주되는 유대인과 소련을 절멸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히틀러는 또한 새로운 4개년 계획의 초안이 담긴 1936년 8~9월 각서에서 명확히 밝히듯이 볼셰비즘을 가장 위협으로 규정하고 있고 여기서 1940년 말에 전쟁을 일으킨다고 계획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동부로의 진출이 목적이지, 서유럽과의 양면전선적 대규모 전쟁은 아니었다. 히틀러는 이것의 배경에 인구 과잉 상태로 인한 농업 생산량 정체, 특정 원료의 인공적 생산 및 대체물 문제 등을 얘기하였고 레벤스라움 확보로 이를 해결하기 전까지 국내 이용 물자를 확대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수입 대체 방안을 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는 몰라도 영국에 대해서는 히틀러가 의외로 전쟁까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는게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 1935년 6월 외무장관과 독일 해군의 반발을 묵살하고 영국과 해군 조약을 맺으며 "영국과 독일이 결합한다면 어느 열강보다도 강할 것이다."라고 했던 것. 실제로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인 에릭 핍스 경은 히틀러가 애처로울 정도로 대영제국의 안녕을 우려했다고 한 바가 있으며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에도 영국에게 평화안을 제시할 정도였다. 1938년 독일 국방군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에게 히틀러는 앵글로색슨족과 게르만족 사이의 인종적 유사성을 강조하며 영국과 전쟁을 벌이기 싫다고 하였고 1940년 나치 선전부의 언론 브리핑에서는 게르만족 대 볼셰비즘의 대결에서 영국이 편들어 줄 거라는 식으로 보도하기도 할 정도. 그러니까 히틀러는 영국이 자신이 서방 민주 국가들을 대신해서 폴란드와 동유럽에 분탕질하고 더 나아가 소련 볼셰비키들을 때리는 걸 묵인해주길 바랬던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고 폴란드 침공은 곧 서방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히틀러는 1939년에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었다. 이는 재군비의 예비 단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1936년 처칠의 추산에서는 독일의 재군비 지출이 연간 120억 마르크 규모로 평가했지만 정작 실제 수치는 50억이 안되었다. 정확히는 1939년 3월 31일에 종료된 6년 간의 회계 연도 동안 재군비에 400억 마르크가 쓰였고 전쟁 발발까지는 500억 마르크였다. 여기에는 히틀러의 안 그래도 나치 체제가 생각보다 부패한 상황 속에 지지 기반이었던 민간 생활 수준 안정 문제가 악화되어 지지율이 떨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있고 그래서 세금 증가를 거부하며 인플레이션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제국은행 총재 샤흐트가 해임된 이후에도 재군비에 재정이 신축적으로 운용될 것이라는 전망과는 달리 재정의 제한은 유지되었으며 대규모 전쟁 준비를 상정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히틀러는 레벤스라움 문제 하나하나를 점진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가능한 대규모 전쟁은 회피하고 소규모 전쟁을 펼치려 하였고 그가 계획하지 않았던 유일한 일은 폴란드 침공이 세계대전으로 번진 것 뿐이었다.


다시 히틀러가 대전을 기획했다는 주장의 근거를 보자면 재군비가 1936년 이후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1938~1939년 시기 독일은 국민 총생산의 15%를 군비에 지출하였고 영국도 똑같았다. 이건 뮌헨 협정 탓에 오히려 삭감된 것이다. 1940년까지도 영국의 항공기 생산은 독일을 많이 앞섰다.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북동부의 라 페르테 부근 전선 배치도를 보자면 프랑스 94개 사단, 벨기에군 22개 사단, 영국군 10개 사단, 네덜란드군 10개 사단 포함 연합군은 총 136개 사단 배치하였다 반면 독일군은 전체 157개 사단 중 136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크게 차이나지 않는 상황이었다는 말인데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군 장비가 더 질적으로 우세한 측면이 있을 정도였다.


"호스바흐 메모"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여기에는 괴링, 레더 등이 히틀러의 곁에 앉아 침략 계획을 같이 승인했다는 것이라고 나와있는데 독일의 전쟁 목적이 세계의 권력 장악이라는 부분에 크게 회의가 있다. 레벤스라움과 유사한 구상은 베트만 홀베크 같은 1차대전 시절 정치가들도 추구했던 것이며 히틀러가 동쪽에서의 레벤스라움만 주장한 것은 어쩌면 서부 지역으로의 확장 및 세계정책을 주장했었던 다른 독일 제국주의자들보다도 온건했던 부분이 있다. 히틀러는 확실하게 서유럽보다 소련을 패배시키는 것이 더 쉽다고 판단했으며 이를 통해 서구 문명의 수호자로 인정받아 자신이 동유럽이라는 당연히 누려서 될 권리 정도는 취하는 걸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보았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이어지는 히틀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여기에만 목매지 않은 채 지나친 욕심을 품었다는 것에 있다. 그는 다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 오면 리스크가 있더라도 거부하지 않았다. 일례로 프랑스를 굴복시킨 이후에 이전에 하지 않겠다고 한 선언을 뒤엎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병합시키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하려던 대로 벨기에와 북동부 프랑스의 공업 지대를 덤으로 거져먹었다. 1940년 여름에는 영국에 화해 제스처를 보내며 대영제국의 권리를 보장해준다고 하였지만 한편으로 히틀러는 이라크, 이집트를 독일 영역으로 요구하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 히틀러는 마냥 서유럽에서 현상 유지를 하고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패권을 장악한다는 방식을 무조건 고수하진 않은 부분도 크다. 여기서 히틀러라는 추상적인 정치가는 비스마르크와 같은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뛰어난 수완가가 되지 못한 채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할 지 미리 생각하지 안하고 흘러가는대로, 그리고 되는대로 눈 앞의 이득을 찾는데에만 열을 올리는 부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2차세계대전은 이러한 요소들이 맞물려 발생한 비극이었다. 적어도 히틀러가 1939년 9월 시점에서 세계대전급 전쟁을 기획했다는 것은 오바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당시 히틀러는 주데텐 지역에 대한 침공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며 1939년이 되어서야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지역들을 정복할 정도로 뮌헨 협정에 실망한 상황이었고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시대의 평화"로 유명한 체임벌린 수상의 성과였다. 체임벌린에 대한 내 평가는 밑에서 추신으로 밝히겠지만 아무튼 당시로써 독일은 아틸라 같은 세계정복이라는 야망을 꿈꿨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세계대전급의 서유럽과 동유럽을 넘어 범 지구적인 장기전, 대규모 전쟁을 벌일 능력이 없었으며 침략자였던 히틀러 본인조차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 만큼 2차세계대전으로 사태가 악화된 것에는 미리 계획된 측면보다는 베르사유 체제의 모순 속에서 여러가지 실수들이 겹치며 종합적으로 폭발하여 세계 전쟁으로 확대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같이 보면 좋은 자료: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454

http://aladin.kr/p/Le52b


P.S.


보론적인 얘기를 하자면 독일과 협상하여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넘겼다는 이유로 체임벌린에 대한 인식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말을 중심으로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개판인 상황인데 뭐 그가 실책을 저지른 부분은 크지만 필요 이상으로 까인다고 본다. 1920~1930년대에 국가 예산에서 약 10~15% 정도를 차지했던 영국의 군비가 1936년부터 급상승하여 1939년에 오면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는데 체임벌린이 이렇게 재무장을 한 덕분에 영국이 독일하고 싸움에서 어느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도 있다. 체임벌린 당시인 뮌헨협정 직전에는 스페인 게르니카 공습 방식이라면 독일 공군이 2~3주면 영국인 50만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추정치까지 나오며 영연방 국가들마저 전쟁에 나서지 않겠다고 할 정도인 상황이었다. 더욱이 1차세계대전에서 동맹이었던 소련, 일본, 이탈리아는 모두 영국에 맞서는 적국이 된 상태였던 건 덤이고.


강경 대독론자이자 2차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뮌헨 협정에서의 체임벌린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는 사실 자신이 영국 수상이었더라도 같은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고 은밀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 역시 1945년 2월 패전을 앞두고 1938년에 전쟁을 시작했었어야 했다고 후회했었다. 뮌헨 협정 직전 영국 외무부는 영국의 재무장에는 최소 2년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는데 게다가 독일에 맞서 다른 열강과 연합하기에는 당시에 미국은 대공황 극복으로, 소련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도울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 뮌헨 협정으로 시간을 벌고 그 틈으로 공군력도 확장해 1938년 대비 1940년 영국 공군력은 10배나 강화되었고 대피소도 크게 늘었다. 이처럼 뮌헨 협상이 벌어둔 1년여의 시간 동안 준비한 레이더망, 공군력, 대피시설 등으로 영국은 전쟁에서 방어가 가능했다.


어쨌든 당시의 기준으로는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많은 범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고 특히 1차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기억이 지배적인 국민 정서 속에서 현상 유지라는 어려운 방안을 선택하는게 불가피했다. 그래서 일단 지금 전쟁하면 더 큰 일난다는 걸 인지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강구하면서도 한편으로 시간을 벌어 재무장을 준비하던게 체임벌린의 정책이었다. 그렇기에 체임벌린은 독일이 폴란드 침공한 이후에도 내각을 유지할  있었고 그가 물러난 건 처칠이 주도한 노르웨이 작전 실패 책임 뒤집어쓰면서부터다. 정작 그 처칠은 갈리폴리에서 대차게 말아먹은 전적이 있던 사람이었지만...


물론 이와 별개로 체임벌린이 전력을 쏟아부은 대독일 정책이 결국 2차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고 독일군의 전력에 대한 정보 수집에 실패해 너무 과대평가한 측면도 있었던 부분은 과오라면 과오이다. 그럼에도 내 생각을 말하자면 그가 1940년 눈을 감으면서 "뮌헨이 없었다면 우리는 전쟁에 졌을 것이다. 역사가의 평가가 결코 두렵지 않다" 유언을 남긴 것처럼 어쨌든 구시대적인 사람이었을지언정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은 분명하다고 보며 전후 영국인들과 처칠을 비롯한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과오는 덮고 자랑스러운 대독항전 역사만 띄우려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되어 지나치게 억까 당해 심히 저평가받는 부분도 없진 않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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