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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Sep 22. 2023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과연 파시즘 국가였나?

친 추축국 성향이면 무조건 파시즘 정권이라 볼 수 있는가?

https://youtu.be/KWlVo8mWPJs?si=NTyITuinBpDEx7Sh

파시즘이라는 사상은 굉장히 난해한 사상이다. 파시즘 연구의 대부인 로버트 팩스턴은 자신의 저서 <파시즘: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이라는 책에서 파시즘에 대해 자본주의 애덤 스미스, 공산주의의 카를 마르크스, 자유주의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확실한 시조적 사상가가 없다고 하였고 무엇보다 파시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종북몰이나 친일몰이처럼 상대방을 낙인찍기 위해 남용됨에 따라 더더욱 정확한 정의가 모호해진 상황이다. 자유주의 우파 진영에서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이 사회주의, 사민주의 이념도 파시즘이라 주장하고 반대로 극좌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2차세계대전 추축국 지도자들을 모두 파시스트로 규정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일반적인 보수 진영 인사들에게도 파시즘 딱지를 씌우며 그냥 아무말 대잔치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히틀러, 무솔리니는 물론이고 스페인의 군사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대해서도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파시스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저번에 대전기 일본 제국의 천황제 파시즘 논쟁과 여러 학자들의 입장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천황제 파시즘은 그래도 "위로부터의 파시즘"이나 "테크노-파시즘" 같이 여러 면에서 파시즘적 요소가 강했다고 볼 여지라도 있었지만, 그와 반대되게 프랑코 정권은 솔직히 말해 파시즘적이라고 볼 만한가 싶은 부분이 크다. 기껏해봐야 프랑코 정권 시기 유일당이었던 팔랑헤라는 조직이 그 근거의 전부일 것이고.


일단 프랑코가 파시스트로 평가받는 이유는 별 거 없다. 먼저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도움을 받아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이고 1936년 7월 이후 스페인 공화파를 도와 프랑코 반군에 맞서 싸우는 최초의 상징적인 반(反) 파시즘 항전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vs안티 파시즘의 구도로 당시에 여겨졌고 프랑코는 내전에서 승리한 후 20만 가량을 학살했다. 또 정권을 민주주의 세계의 경제 교류와 문화의 오염으로부터 격리하고자 하였으며 민주주의, 자유주의, 세속주의, 공산주의 등 서구 근대 세계와 연관된 이념에 맞서 1939년 4월 반 코민테른 협정에 조인해 히틀러, 무솔리니와 손잡았다. 1940년 프랑스 함락 당시에는 모로코 항구도시인 탕헤르를 손에 넣어 추축국의 전쟁에 숟가락을 얹기도 했다.

히틀러와 프랑코

그러나 제대로 나서라는 히틀러의 요구에 대해 프랑코는 지나친 대가를 요구하며 협상을 벌일 뿐이었다. 히틀러는 1940년 10월 엔다예에서 프랑코와 협상을 벌였는데 며칠 뒤 무솔리니와 만나 프랑코를 음흉한 돼지라고 지칭하며 그와 만나 아홉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느니 차라리 이를 서너 개 뽑히겠다고 할 정도였다. 결정적으로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 동안의 대규모 폭력 사태 이후로 파시즘 특유의 급진성과는 상반되는 질서와 안정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과는 맞지 않는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팔랑헤의 창립자이자 민족생디칼리스트였던 호세 안토니오 데 리베라가 1936년 공화국 군대의 발포로 사망한 후였기에 프랑코는 경쟁자도 없었다.


프랑코 정권은 "일단은" 데 리베라의 세력을 전신으로 하는 팔랑헤가 유일당이었지만 "동형 기구"가 없었던 탓에 당의 자치적 권력도 없었다. 독일이 승전을 거듭하던 1941~1942년에 팔랑헤는 당원 수가 백만 명이나 늘고 전당대회까지 열며 프랑코 정권의 기둥을 지탱해줬지만 정작 프랑코는 당에 입법권이나 행정권을 주지 않았다. 데 리베라 사후 프랑코는 기존 엘리트 계층과 연합하였고 새로운 당 지도자 에디야의 경험 부족을 사유로 파시스트의 행동을 견제했다. 그것의 시작은 팔랑헤를 파시스트와 왕당파를 다 포괄시켜 버리며 정권 어용 조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1937년 4월 에디야가 당의 독립성을 되찾으려 할 때 프랑코는 그를 체포했다. 프랑코는 1942년 이후부터는 파시즘 특유의 열광이 없는 기존의 권위주의 정권 성격으로 완전히 탈바꿈하게 되었고 팔랑헤 역시 1945년 이후로는 유일당은 커녕 색깔 없는 "시민 연합"이 되었으며 뭐 하나 주체적으로 해보지 못한 채 1970년대 이후 프랑코 정권의 종식으로 완전히 소멸된다. 프랑코 정권 내내 팔랑헤는 찬밥 신세였고 프랑코는 공산주의, 아나키즘, 자유주의에 대한 적대감이나 권위주의적 성향 이외에는 특별한 정치적 노선을 보여준 적이 없었는지라 대신에 파시즘의 색채가 거의 없는 군부, 정부 관료, 기업가, 그리고 가톨릭 교회와 카르텔을 형성해 권위주의 정권을 이끌어갔다.

팔랑헤의 당기

그렇기에 실제로 프랑코 정권 시기 스페인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파시즘보다는 "민족 가톨릭주의"였다고 생각한다. 민족 가톨릭주의란 스페인의 본질을 가톨릭에서 찾는 이데올로기였고 프랑코 정권 정치 질서의 기본 토대였다. 프랑코는 민족 가톨릭주의의 원형을 스페인 최고 전성기인 16, 17세기에서 찾았으며 당시에는 국가의 모든 정책이 프로테스탄티즘과 이슬람에 가톨릭을 옹호하는데 맞춰져 있었다. 이러한 신정주의적 시각에서 프랑코 정권의 이념적 정통성과 문화적 응집력, 더 나아가 정치적 이념까지 체계가 마련되게 된 것이었다. 1942년 당시 각료였던 이바녜스 마르틴은 바르셀로나 대학교 강의에서 종교 교육을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체제의 토대가 물질적인 문제에 있지 않음을 거듭 밝힌다. 체제는 모든 시민들의 마음과 모든 영혼들의 단호하고도 영웅적인 자질의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 운동이 추구하는 위대하고도 불가피한 정책은 교육의 기본 원리에 따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가슴에 영향을 미치는 교육 활동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운동의 의미는 상실될 것이고 체제 유지도 불가능할 것이다. "


한편 프랑코는 "국가 재건" 과업을 "가톨릭 재건" 과업과 결부시키며 가톨릭을 정치적으로 지원하여 체제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민족 가톨릭주의는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문화적, 정치적 가치를 주입시키는데 매체 역할을 했으며 교회의 통제를 받는 학교 교육은 가톨릭 교리 확산의 수단시었다. 법에 따르면 교육은 가톨릭 교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종교는 의무 과목이었다. 이를 통해 19세기 자유주의 혁명의 결과물을 파기하는가 하면서도 가톨릭 신자들이 대다수인 스페인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부분도 있었다. 이 점이 프랑코 체제를 나치즘이나 이탈리아 파시즘과 구별시켜주는 매우 색다른 특징으로 여기서 교권 파시즘이라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 것인데 앞서 말한대로 나는 프랑코 정권을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인 파시즘이라는 통일된 정치이념을 갖춘 체제였다기 보다는 군부, 정부 관료, 기업가, 가톨릭 교회 등 다양한 보수 세력들이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손 잡은 연합체적 성격의 권위주의 독재 정권이라고 인식하는 편이다.


로버트 팩스턴도 언급했고 위에서도 상술했듯이 프랑코는 정권 중반기에 교묘한 수를 써 팔랑헤당을 파시스트들과 전통적 왕당파를 모두 포함하는, 특성이 전혀 없는 우산조직 '팔랑헤 에스파뇰라 트라디시오날리스타 이 데 훈타스 데 오펜시바 나시오날 신디칼리스타'(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 Sindicalista)로 끌어넣어서 그나마 남아있던 파시즘 물까지 다 빼버린다. 조직의 수장은 '프랑코 주변의 장식품이나 다름없는 무능함'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였고. 1950년대를 기점으로 프랑코보다는 관료 계층이 정책을 이끌어 가면서 극도의 전체주의성도 다소 누그러지게 되었고 교권 파시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1967년에는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였다. 심지어 프랑코가 죽기 몇년 전에는 가톨릭교의 원수인 공산주의자들을 스페인 내전에서 죽어라 박멸하려 했던 것과 대비되게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을 정도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군 진영 병사들

https://youtu.be/Wpq74iU6Bkg?si=YcC2UMOl-sigMIVA

프랑코 정권의 성격에 대한 논쟁 중 히네르라는 학자는 프랑코를 두고 "근대 전제"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즉 쉽게 말해 보수 연합 세력이 군대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옆나라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체제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 것.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근대 전제른 계급 지배적 특성을 지니기에 피지배 계급 동원이나 사생활 간섭에 호소하지 않으며 따라서 근대 전제는 군사 독재 혹은 부르주아 독재라고 한다. 또 근대 전제는 체제 유지를 위해 행정 통제나 가신 그룹에 대한 국가 자원 배분 방식을 택하고 저항을 중화시키기 위해 선별적 억압과 선전 메커니즘을 사용한다는 것.


또 일부 인사들은 프랑코 체제 시기를 경제 정책의 근본을 바꿔 이전의 농업 사회로부터 이후의 산업 사회로 전이를 시작한 1959년의 경제 안정화 계획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기도 하고 페인의 경우는 또 다른 구분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페인은 프랑코 체제의 변화를 준파시스트적 단계(1936~1945), 민족 가톨릭주의 중심의 코포라티즘 단계(1945~1957), 관료제적 권위주의 단계(1957~1975)의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이런 부분으로 보자면 프랑코 정권은 한 가지 성격만을 지닌 획일적인 체제는 아니었으며 체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체적인 상황 변화를 고려하는게 중요한 지점이 있다.


여담으로 이 얘기를 하자면 프랑코 정권이 파시즘 정권은 아니어도 대신 소위 "대중 독재"라고 불리는 체제와는 접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프랑코 신화"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언론을 통해 주입되어 나름대로 대중에게서 자발적인 지지 또는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냈다. 1940년대 초 스페인의 주요 테마는 억압과 질병, 기아, 암시장, 전쟁이었다. 내전이라는 참상을 겪은지 얼마 안되었던 상황 속에서 어찌저찌 하여 프랑코 정권은 결국 2차세계대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특히 1943년 3월 스페인이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대두되었다가 종식된 걸 기점으로 혼돈에 질서를 부여해주고 스페인을 국제 분쟁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거의 모든 계층의 스페인 국민이 프랑코를 지원하게 되었다고 영국 대리 대사 바우커가 1944년 11월에 본국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물론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 당시부터 '청소'에 가까운 대량 학살과 사상적 색출, 탄압을 수시로 벌였으며 이는 파시즘의 원조였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보다도 훨씬 더 무자비하고 잔인한 행보였다. 그렇지만 어쨌든 1940년대를 기점으로 "프랑코 평화 신화"가 스페인에 형성되면서 안정적 생활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의 욕망이 일상 생활의 파괴와 폭력, 분열이라는 과거의 이미지에 맞서 성공했던 것도 있다. 그 과정에서 프랑코 정권은 정권 참여 계층이 아닌 계층까지 포함하여 광범위한 사회 계층에 민족주의 정서를 불어넣었고 물론 여기에는 체제 차원에서의 통신 수단의 조작과 공식적인 선전 활동 등으로 정당화 공작을 했었던 탓도 있었다.

비시 프랑스의 지도자였던 필리프 페탱

그리고 일반적인 인식상으로는 2차세계대전이 단순히 파시즘vs반 파시즘 전쟁으로 여겨지다 보니 추축국 지도자들은 전부 파시스트 정권이었을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던데 실제로는 조금 달랐다. 크비슬링 같이 독일이 위성국에 파시스트 성향 지도자를 앉혔던 사례도 물론 있지만 의외로 추축국이나 나치 독일 위성국 중에서는 파시즘하고 거리가 있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시가 비시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인데 이 사람은 파시즘 특유의 정서와는 거리가 먼 전통적인 엘리트 군인이었다. 물론 자크 도리오 같은 명확한 파시스트가 비시 프랑스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엘리트들은 전통적 지배 계급들이었다.


헝가리의 호르티 미클로시의 경우를 보자면 이 사람도 파시스트는 아니었다. 물론 귤라 굄뵈스 대위 같이 전투적인 민족주의적 혁신 운동과 대중 동원을 결합한 정치를 펼치며 반유대주의적 선동을 일삼던 이도 호르티 섭정 밑에서 총리직을 하긴 했으나 호르티 제독이나 당대 헝가리는 파시즘 국가는 아니었다. 일례로 헝가리 파시즘 정당인 화살십자당을 이끌었던 전직 참모 장교 살러시 페렌츠는 선거 낙선 이후 당이 불법화 되면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나서기 보다는 모호한 철학에 몰두하며 골방지기가 되었다. 화살십자당이 헝가리의 집권 세력이 된 건 정확히 1944년 대전 말 호르티 제독이 소련과 강화 협상을 시도하자 독일군이 그를 끌어내리고 페렌츠를 지도자로 내세우면서부터이다.

헝가리의 호르티 제독과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장군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정권은 집권 과정에서 철위대, 즉 대천사 미카엘 군단이라고 불리는 반유대주의 성향의 파시스트들과도 손잡았고 또 추축국의 편에 서서 독소전쟁에 전투 병력을 파병했지만 협력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1940년 11월 안토네스쿠가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만난 것에 힘을 얻어 철위대가 난동을 피우며 학살극을 벌이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안토네스쿠는 의외로 봉기를 진압했다. 히틀러도 이를 방관했고 결국 코드레아누를 계승한 몇몇 철위대 지도부만 독일로 피신시켜 만일의 상황 시 안토네스쿠를 견제할 보험용으로 사용할 여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정권은 2차세계대전 내내 독일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추축국 중 하나였고 유대인 학살에도 크게 관여한 나라였다.


아무튼 사실 파시즘이라는 것 자체는 매우 모호하며 특히 사회주의 이념 자체를 파시즘 타령하는 하이에크 같은 우파 자유주의자들이나 스탈린주의 도그마에 갇혀버린 극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 수사로서 너무 많이 남발된 용어이기에 의미 자체가 변질된 부분도 있다. 천황제 파시즘이야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쳐주더라도 프랑코나 기타 추축국 지도자들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식의 블루팀 레드팀 논리 같은 발상을 하는 건 단편적으로만 보인다. 프랑코 정권도 이 때문에 스페인 내전이 파시즘 세력vs반 파시즘 세력의 이른바 "성전"이었고 또 히틀러,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아 집권했으며 팔랑헤가 유일당이었다는 걸 근거로 무조건 파시즘 정권이라고만 여겨지는 거고.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하기도 했었던 조지 오웰이 쓴 글의 표현에는 프랑코의 반란에 대해 "파시즘을 강요하려는 기도였다기보다는 봉건주의를 복원하려는 기도"였다는 언급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파시즘 정권보다는 봉건적 군사독재 정부가 통치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점차 관료주의적인 권위주의 독재 정권으로 변해갔다는 쪽이 더 정확하게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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