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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24. 2023

후티 반군은 무엇인가?

남북통일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와 예멘 내전 이야기

https://youtu.be/c_KGSO0MBcc?si=8yP-1MZdIMnWRZp3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전황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시리아 지역, 헤즈볼라가 점령 중인 레바논 남부로 번지고 있는 가운데 얼마 전 홍해에 있는 미 해군 구축함이 이스라엘로 향하던 순항 미사일 3기와 드론들을 격추했다. 미 국방부는 해당 미사일과 드론들은 홍해를 따라 이스라엘 내부의 목표물을 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는데 사건의 범인으로 예멘의 후티 반군이라는 무장 단체를 지목했다. 이 후티 반군이라는 곳은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함께 이란 대외전략의 첨병 노릇을 하는 무장단체로 평가받기에 만약 사실이라면 이미 개판날대로 나버린 중동 정세가 심각하게 더 꼬여버릴 것이다. 무엇보다 예멘은 얼마 전에 이란-사우디 간의 화해로 내전 종식을 앞뒀기에 그 타격은 특히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글은 중동 정세 시리즈를 연재하는 김에 후티 반군이라는 조직에 대해 다뤄볼 거고 그러기 위해서 예멘의 역사와 상황 또한 자세히 설명해볼 것이다. 먼저 예멘이라는 국가는 아라비아 반도 남쪽에 위치해있다. 면적은 약 52만 8천km²로 한반도보다 큰 편이다. 동서쪽은 높은 산맥이 가로막고 중부에는 광활한 사막이 펼쳐져 있으며 홍해, 인도양과도 접해있다. 지리적으로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의 중간지점에 있어서 무역로 역할을 하기에도 좋은 편이다. 그랬기에 1517년 오스만 제국은 이 지역을 자국 영토로 병합하기 위해 침공했다. 예멘 지역은 지속되는 인접 국가들의 침략으로 부족 국가 형태로 나뉘어졌고 북부에는 시아파 세력인 자이디파가, 남부에서는 수니파 세력인 샤피이파가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다. 이들의 교리는 큰 차이가 없었으나 라시드 왕조를 설립한 자이디파의 이맘이 샤피이파를 차별해 이때부터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던 와중 1839년 인도 대륙으로 이동하기 위한 항로의 중간기지 건설에 관심을 기울인 영국은 함대를 파견해 예멘 남부의 중심지인 아덴을 점령했다. 이후 아덴은 세계적인 정유공장과 교역항으로서의 역할을 했고 해군기지로도 사용되었다. 거기에 더해 영국 입장에서 아덴항은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 인도양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였으니 당연히 중요한 곳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1904년부터 영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남부 지역을 얻어내 식민지로 삼았는데 이러면서 예멘은 두 나라로 갈라지게 된다. 하지만 얼마 못가 오스만 제국은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했고 북예멘은 자이디파 인사인 이맘 아흐마드 통치하는 곳으로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될 수 있었다. 반면 남예멘은 여전히 영국의 식민지로 남아있는 상태로 남아있었다.

이맘 야흐마드는 남예멘을 언젠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영토로 여겼다. 실제로 남예멘에서는 영국의 식민 지배에 맞서 무장 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들은 북예멘의 지원을 받으면서 게릴라 전을 이끌어 갔다. 그러던 중 이맘 야흐마드가 1962년에 사망했고 아랍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이 상황에서 왕정 잔당들은 저항을 선포하였고 결국 내전이 벌어진다. 이때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만의 군주제 국가들은 예멘 왕정세력들을 지원했고 반대로 이집트 같은 아랍 민족주의 국가들은 공화정을 지원하며 사실상 중동 지역의 대리 국제전 양상으로 번져간다.


내전은 이슬람 종교판사인 이르야니가 집권하면서 끝나게 되었고 1962년부터 시작되어 8년 동안 계속된 내전은 약 15만 명에 달하는 피해 규모를 발생시켰다. 이르야니는 균형 외교를 펼치는 한편 경제 발전에 주력했지만 곧 이어 구 공화정의 군부 잔당들이 부족 세력들과 연합하여 1974년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쫓겨나 망명가게 된다. 하지만 1977년 하마디가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아흐마드 가쉬미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는데 그도 얼마 못가서 남예멘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우편폭탄에 당해 목숨을 잃었다. 가쉬미 사망 이후로는 살레 중령이 의회의 추대로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래도 이때부터 조금 안정되기 시작한다.


한편 남예멘 지역에서는 영국이 남아라비아 연방을 설립하며 버텼지만 분리주의자들인 민족해방전선이 끈질기게 테러와 사보타주 공작을 벌이며 저항했고 1967년 영국이 철수하면서 민족해방전선을 중심으로 한 예멘 인민민주공화국, 즉 남예멘이 설립된다. 남예멘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친소 성향을 강하게 보였고 실제로 아덴항과 소코트라 섬을 소련군의 군사기지로 제공하였다. 사우디가 지원하는 북예멘과는 1972년 국경전쟁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벌어진 것을 시작으로 1979년에는 또 한번도 맞붙는 등 관계가 악화일로를 달려왔다. 물론 도중에 협정을 맺는 등 개선 시도는 있었지만 남북한급의 적대관계는 아니라 할 지라도 마냥 관계가 좋진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서 냉전이 완화되는 분위기 속 남북예멘 모두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의 석유가 발견되어 둘은 서로 통일 논의가 시작되었고 1990년까지 일사천리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통일 특성상 바로 남북예멘의 기득권 갈등 및 군대 통합 문제로 인해 1994년부터 남북의 무력충돌이 다시 시작되었다. 1994년 남북 무력충돌은 살레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지만 2,000명 가량의 희생자를 발생시켰고 수니파, 시아파 갈등도 심해졌다. 마침내 2004년에 이르어서는 또 다시 내전으로 빠지게 되었고 그 상황에서 나온 무장단체 중 하나가 바로 오늘 설명할 "후티 반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후티 반군의 기원은 후세인 바드르 앗딘 알 후티라는 창립자의 이름에서 나왔다. 그는 원래 북부 예멘에서 자이드파 자치권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다. 자이드파는 이란의 주류 시아파인 12이맘파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시아파 종파이며 80년대 사우디의 북예멘 내 와하비즘 확대 지원에 맞서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자는 운동을 한 이가 바로 후세인 알 후티였다. 자이드파 운동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살레 정권을 미국 괴뢰 정권이라 비판하며 무장단체화하게 되는데 발단은 후세인 알 후티가 주도한 반미, 반정부 시위를 정부가 강경하게 진압한 사건이었다. 이때 정부군은 800여명에 이르는 자이드파를 체포했고 이 참극 속에서 후티 반군이라는 무장단체가 등장하게 된다.


2004년부터 2010년 정전협상 때 까지 정부군과 후티 반군의 충돌로 인해 북부 예멘에만 무려 30만 명에 이르는 내부 난민이 발생하였다. 이는 사우디가 이끄는 수니파와 이란의 시아파라는 국제전, 대리전의 성격으로 발전되는 것의 시초다. 또 통일 이후 소외 대상이던 남예멘에서는 남부운동을 결성하여 남예멘 독립투쟁이 2011년 아랍의 봄을 기점으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알카에다 아라비아 반도지부도 무장단체를 창설하여 내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부족주의의 폐단과 살레 정권의 무능한 독재로 예멘의 통합은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되었고 2015년에 내전이 국제전이 되며 예멘 전체가 혼돈의 카오스가 된다. 이 사이에 낀 예멘 국민들은 현재까지 예멘 내전으로 700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했으며 인구의 60%에 해당하는 1천 700만명에 대한 식량 수급이 불안정한 상태일 정도로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혼돈의 카오스가 된 배경을 좀 더 설명하자면 살레가 물러나고 하디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후티 반군은 정부와 협상에 나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본인들의 지역자치를 침해하는 등 여러가지 조건들에서 본인들에게 손해라고 판단해 2014년 7월 유류보조금 삭감 조치가 민심을 자극한 걸 빌미로 반정부 여론을 일으켜 협상을 파토냈고 이어서 자기들을 탄압했던 살레와 손잡고 하디를 쫓아냈다. 이에 하디는 국외로 탈출하여 사우디군의 개입을 불러왔고 2015년 3월 26일 마침내 예멘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예멘 내전은 겉으로만 보면 하디가 이끄는 합법적 예멘 정부군과 이를 무력으로 수도 사나에서 내쫓은 후티 반군 간 내전에 알카에다가 꼽사리 끼는 구도로 진행되는 내전이지만 실상은 하디 정부를 지원하는 사우디, 아랍 에미리트 등 걸프 국가들과 이란을 비롯한 시아파 세력을 중심으로 한 국제전 겸 대리전이다.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예멘 내전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인한 수니파 세계와 시아파 갈등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것. 2017년 5월 트럼프의 사우디 방문 당시 사우디 국왕인 살만과 왕세자 빈 살만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 현재까지 이란 정권은 전 세계 테러를 이끌어왔고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이 시작되기 전 300년간 우리나라는 테러나 극단주의를 모르고 살아왔다"며 이란이 중동의 무슬림 세계를 테러와 혼돈의 도가니에 빠트렸다고 지적한 바가 있는데 이게 예멘 분쟁 격화 당시 나왔었던 말임을 생각해보면 결국 예멘 내전의 본질은 이란 혁명 이래 사우디와 이란 간의 종파적 대립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 매우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후티 반군은 예멘 정부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받는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시아파vs수니파 싸움 구도를 적극 활용했다.


원래 중동에서는 수니파가 다수고 사우디가 정세를 주도하는 느낌이 강했었다. 애초에 아랍연맹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사우디니까 말이다. 그러나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고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시아파 세력의 "초승달" 루트가 완성된 것이다. 특히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벌어졌을 때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은 시리아를 아랍연맹에서 축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친이란 성향의 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반군들에 대한 대규모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러시아군의 개입과 이란 혁명수비대의 지원, 시아파 민병대의 확장 등으로 인해 아사드 정권은 10년 간 내전 속에서도 생존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를 도왔던 이란은 중동 세계에서 입지가 매우 커졌다.


이렇게 사우디는 21세기 이후 중동의 흐름이 자신들이 아닌 이란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못한 상황이 연달아 벌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친이란 후티 반군의 존재는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초승달 루트 외에도 사우디 본토의 바로 남쪽에 이란 및 시아파 세력의 거점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건 단순히 이란과의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패권 경쟁의 문제를 떠나서 직접적인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세자 빈 살만은 수많은 비판 속에서도 예멘 내전에 사우디군을 개입하게 된 것이었으며 이란vs사우디라는 중동의 국제전 속에서 평화 협상이 진행 중인 지금까지 약 1만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다만 사우디의 적극적인 개입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듯하다. 예멘 내전에 사우디군은 오합지졸 그 자체였는데 얘네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 동안 전 세계 무기 수입의 11%를 차지할 만큼 국방에 엄청난 투자를 한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기만 한 셈이다. 사우디군의 졸전이 어느정도냐면 실전 경험을 앞세운 후티 반군의 공격에 제대로 된 전술도 없이 싸우다가 장비부터 탄약, 문서까지 다 후티 반군에게 노획당하게 만드는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예멘 내전을 통틀어 후티 반군을 제대로 제압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역으로 드론 공격에 본토가 당한 적이 있는 수준이다. 그 결과 후티 반군은 현재까지 통일 이전 북예멘 전체 영토에 필적하는 영역을 통제하는 지경에 이르었으며 이쯤되면 하마스 같은 무장 반군이라기 보다는 정규군에 가깝다. 실제로 이란의 지원을 받긴 했어도 반군이라면 꿈을 꿀 수도 없는 순항 미사일, 탄도 미사일로 군함까지 격추하는게 후티 반군의 진짜 실력.

https://www.aljazeera.com/sports/2023/10/12/yemen-national-football-team-war-2026-world-cup-qualifiers

내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시간은 흘러갔고 2023년도에 이르어 이란과 사우디의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며 예멘 내전도 종전될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2026년 월드컵 예선을 위해 예멘 국가대표팀이 사우디에 가서 스리랑카랑 경기를 하는 일이 있었는데 협상으로 내전이 끝날 기미가 보이는 현 상황에서 예멘인들에게 아마 뜻깊은 일이다. 실제로 전직 예멘 국가대표팀 선수였던 알 주리키는 "비록 가까운 시일 내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예멘에서 국가대표팀이 안전하게 뛸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아직까지 협상은 지켜봐야 알겠지만 확실한 건 2019년 후티 반군이 사우디 석유 시설에 드론 공격을 감행하여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에 비한다면 상황이 좋아졌다고는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지면서 이란은 후티 반군에게 하마스를 지원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런 맥락에서 이번에 순항 미사일을 날린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예멘과 이스라엘 사이에 거리가 꽤 크게 벌어져 있는데다가 하마스, 헤즈볼라와도 싸우기 벅찬 이스라엘이 작정하고 예멘까지 쳐들어가서 후티 반군이랑 싸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스라엘과 예멘 사이에 있는 사우디가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예멘으로까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확전되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대신에 이란 대외전략의 첨병 노릇을 하는 후티 반군이 뒤에서 하마스를 지원하는 것은 100% 확실하며 이스라엘도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할 거고.

또한 설령 평화 협상으로 내전이 종전이 된다고 할 지라도 통일된 국가를 가져본 역사가 짧은 예멘이 안정될 가능성은 나는 매우 회의적으로 본다. IS는 크게 위축되었지만 여전히 알카에다 아라비아 지부는 존재하는 상황이고 남부과도위원회라는 이름의 구 남예멘 잔당들도 예멘 정부와 일시적 동맹 관계를 맺고 세를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예멘 사회의 가장 특성인 부족주의의 이해관계는 여전한 상태. 그리고 후티 반군 또한 와하비즘 계열이 아닐 뿐이지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 자체는 그래도 좀 세속적인 면이 있는 같은 시아파인 헤즈볼라나 시리아 아사드 정권보다 훨씬 강한 편이며 후티 반군의 점령지에서 히잡을 벗고 다니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현 시점에서 후티 반군이 북예멘 지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정규군에 준하는 실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유대인에게 저주를! 이슬람에 승리를!"라는 구호로 볼 때 결국 몇십년 전의 아랍 민족주의보다도 더 퇴보된 신정 국가라는 점에서 특별히 더 나은 비전을 가지고 통치를 할 거라고 보진 않는다.


예멘은 고대 시절에 로마로 향하는 향신료 무역으로 번성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멘에게서 옛 부흥기 역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실패한 국가가 갖추고 있는 모든 요소들만 보일 뿐이다. 21세기 이후로는 종파 갈등의 대리전을 치르는 지역으로 변해 전국토가 황폐화되어 안 그래도 부족주의인 사회는 종파 정체성으로 더욱 분열되었다. 이는 예멘이 독립 이래 제대로 비전을 제시하여 국민 통합을 하려 애쓰는 지도자가 없었을 뿐더러 특히 통일이라는 중대한 분기점 속에서 대통령이었던 살레가 사우디, 미국, 후티 반군 사이에서 자기 권력만 지키기 바빴던 나머지 나라를 파탄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멘 내전의 교훈은 통일의 대표적 실패 사례인 만큼 우리에게도 통일이라는 중대한 시점에 지도자가 권력에만 집착할 경우에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을 때 외세에 어떻게 휘둘리는지 똑똑히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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