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소련이 붕괴되었고 중앙아시아 5개국 역시 신생 독립국이 되었다. 이후 수년 동안 중앙아시아 5개국들이 탈공산화를 위한 정치체제 전환을 추진하면서 구 소련 구성국들이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로 변화 및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가 막 나오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련 붕괴 이전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었던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민주정권들이 들어서고 또 유지가 되었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탈냉전의 흐름 속 자유민주주의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이상 권위주의 체제들이 이미 공산당을 맛본 곳에서 더는 기어나오지 못할 것처럼 보였었던 것도 한 몫했다.
그러나 동유럽과는 달리 구 소련 구성국들 중 자유민주적 체제로 전환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 해봐야 유럽연합과 나토에 가입한 발트 3국이 끝이다. 나머지 12개국 중 제대로 자유민주적 체제가 자리잡힌 곳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하며 이들은 민주화 단계에 따라서 나눠보자면 과도기적 단계의 우크라이나, 몰도바, 그루지야와 반(半) 권위주의 정권인 아르메니아, 그리고 그냥 권위주의 정권인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중앙아시아 5개국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커녕 같은 공산 정권 시대를 거친 동유럽 수준에도 못미친다는 말이며 이 중 몇몇 국가들은 독립과 함께 내전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가장 권위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곳이 바로 중앙아시아 5개국이다. 물론 그래도 키르기스스탄은 2005년과 2010년 시민혁명을 통해 대통령이 교체된 적이 있으니 그나마 낫다만. 그러나 카자흐스탄의 독재자 나자르바예프는 약 30년 가량 장기집권 해왔으며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카리모프 역시 201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대통령직에 앉아있었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은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보다도 훨씬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체제를 자랑하는 나라일 정도다. 그렇다면 중앙아시아의 권위주의 정권은 어떻게 유지되어 왔으며 그 과정과 전망은 어떨까? 이번 글에서는 그러한 중앙아시아의 대표국인 카자흐스탄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어느 구 소련권 국가들이 다 그렇듯이 첫 발단은 소련 말기에서 비롯되었다. 1989년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인 고르바초프는 나자르바예프를 카자흐 SSR 공산당 제1서기에 임명하였고 그리고 비슷한 시기 고르바초프는 경제개혁에 속도가 나지 않는 원인을 공산당의 중앙집권적 구조라고 판단, 강력한 개혁 정책을 위해서 1990년 3월 대통령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에 따라 소련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들 역시 대통령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때 카자흐 SSR의 지도자였던 나자르바예프는 최고회의 의장을 거쳐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나자르바예프는 장기집권한 독재자인 것은 빼박 사실이지만 그래도 카리모프나 니야조프 같은 다른 중앙아시아 독재자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이 있었는데 의회와 정부 내에서 토론의 활성화를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1991년 8월 소련 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하였고 정치적 스타로 부상한 옐친은 공산당을 불법화 시켰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나자르바예프는 공산당의 전당대회 개최를 허용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새 정부에서 직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 나자르바예프는 고르바초프 밑에서 경제개혁을 담당했던 야블린스키를 포함한 수많은 학자들을 경제고문으로 끌여들였고 국내외 경제관료들의 의견을 잘 수용하는 편이었다. 또한 개혁파 성향의 부통령이던 아산바예프에게는 아예 새로운 헌법 초안 작성을 지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신 헌법 문제로 의회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지속적으로 충돌을 빚기 시작하였고 급진적인 경제개혁 추진 논란으로 갈등이 극심해지다가 1993년 최고회의가 해산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나자르바예프 진영은 전체 177석 중 대통령이 임명한 42석+여당 의석 30석을 합쳐 총 72석을 얻었다. 다만 여기에 맹점이 하나 있었는데 의회 첫 회기까지 대통령에게 인사, 비상사태 선포, 국민투표 모두 권한이 있었다는 것이며 1995년 또 다시 의회가 해산되는 일이 벌어지자 전권을 부여받은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신 헌법 제정을 추진을 하면서 대통령 자문기구인 카자흐스탄 인민회의를 창설한다.
이윽고 1995년 4월 예정대로 국민투표가 치러져 카자흐스탄 인민회의 안건은 통과되었고 같은 해 8월 절대 다수인 90%대의 지지를 얻어 나자르바예프 헌법이라 불리는 신 헌법이 통과되었다. 이 신 헌법은 중앙정부와 대통령의 행정 주도권, 즉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강화시켜 입법부와 사법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비록 대통령에게 입법권은 없으나 상하 양원에서 의원의 3분의 2가 찬성할 경우 1년 동안 행사가 가능하며 합동총회에서 4분의 3이 찬성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회에서 탄핵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또 대통령은 총리와 상원의원 7명의 임명이 가능해졌고. 무엇보다 이 신헌법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소련식 단원제 최고회의가 폐지되고 상하원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신 헌법이 통과된 이후 나자르바예프는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당기면서 반정부 인사들을 투옥하였고 정부 개편 작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게 된다. 1992년 19개였던 정부부처는 1998년 12개로 축소되었고 근무 인원도 25%나 감축되었다. 이는 카자흐스탄이 구 소련 당시처럼 관료 시스템이 너무 방대하게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행정기구 축소가 불가피했다. 1997년에는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수도를 이전하였는데 이때 1만명이 직장을 떠나게 되었으며 지방행정기관은 19개에서 14개로 감축해 5,000명의 국가공무원들을 해임시키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단행된다.
이때부터 나자르바예프의 독재 행보도 본격화되기 시작하는데 그 첫번째 조치는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던 지방 신문과 라디오들을 폐간하고 그 자리에 나자르바예프의 딸인 나자르바예바가 운영자로 있는 국영 방송인 하바르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해서 언론보도를 장악한 것이었다. 두 사위인 알리예프와 쿨리바예프는 각각 세무조사국의 수장, 국영석유회사인 "카자흐 오일"의 부회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나자르바예프의 친인척들이 권력 핵심부로 대거 진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1998년에는 조기 대선을 위해 헌법을 한번 더 뜯어고쳤다.
이 헌법 개정으로 상원인 세나트는 4년에서 6년으로, 하원인 마질리스는 4년에서 5년으로 늘었고 정당의 당선득표율 하한선이 10%에서 7%로 하향조정 되면서 신인의 진출은 더욱 어려워 졌다. 비례대표 또한 10명이나 증가했으며 대통령 임기는 5년에서 7년으로 연장, 대통령 출마 가능 연령 상향선인 65세는 철폐되었다. 참고로 상향선 철폐는 나자르바예프 본인이 1940년생이기에 했던 것이다. 2002년에는 정당법을 개정해 정당 창당 요건을 5만명의 당원으로 규정했고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정당 창당을 금지시켰다. 한편 야당은 이 시기 동안 민주적 선택으로 모여서 나자르바예프 정권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이에 야당을 분열시키는 공작을 하는 술수도 자행되었다. 아예 야당 인사들의 의문사 사건들도 벌어졌을 정도.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2005년 대선도 나자르바예프의 승리로 끝났다. 이 대선은 워낙에 문제가 많았다고 평가받는 선거였는데 시작 전부터 18명의 후보 중 5명은 카자흐어 미숙으로, 6명은 필요한 수만큼의 서명 부족으로, 2명은 자진 사퇴로 결국 5명만이 최종 후보로 선출되었다. 여당 측 후보는 당연히 나자르바예프였고 야당 연합은 투야크바이 후보였다. 대선 결과는 역시나 91%의 득표율로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재선되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여당인 오탄당은 다른 당을 합병시키며 더욱 규모가 커져갔다. 그리고 2007년에는 마침내 임기 제한까지 철폐시키고 2010년 초대 대통령 면책특권법까지 제정하며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장기집권 체제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자르바예프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장기 집권을 구축하였는가? 우선 첫번째 이유는 소련 시대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한 것 때문이었다. 카자흐스탄은 토착 민족이 40% 밖에 되지 않는 지역으로서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보다는 연방을 유지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이에 따라 공산당 세력을 끌여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그리하여 소련 시대의 지배 엘리트 계층은 카자흐스탄 독립 이후에도 계속 쭉 이어져왔으며 카자흐 국민들 또한 소련의 정치적 전통 및 국가 온정주의에 호의적이었던 탓에 별 다른 불만이 사회에서 한동안 표출되지 않았던 것도 있다. 이렇게 구축된 중앙집권적 체제는 지방 엘리트를 임명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통제할 권한까지 갖추게 하였다.
두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다. 나자르바예프 정권은 민영화 과정에서는 일부 엘리트 계층에게 이권을 분배해줘서 집권층에 충성하게 하는 한편으로 소련 붕괴로 극심한 경제 위기에 시달리던 카자흐스탄의 경제성장을 주도해 생활수준을 향상시켜 국민적인 지지까지도 챙겼다. 1991년 말부터 1993년 초까지 6,000여개의 기업이 민영화 되었는데 나자르바예프의 측근들을 비롯한 집권 엘리트들도 이 과정에 관여하여 이권을 챙겨갔고 그 결과 카자흐스탄의 부정부패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정경유착을 하면서 얻은 의외의 이익이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헤쳐먹게 된 집권 엘리트들이 나자르바예프 정권과 권위주의 체제 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충성을 보이며 정권 기반 자체는 더 강해진 아이러니함이었다.
집권 엘리트 뿐 아니라 국민적인 생활도 안정시키며 지지를 크게 얻은 것도 있었다. 2000년대 동안 카자흐스탄은 연평균 10%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매년 7% 수준으로 물가를 안정시켰다. 이러한 카자흐스탄의 개발독재 체제는 CIS(독립국가연합) 회원국 중 가장 성공적인 체제 이행을 선보인 것이라 평가받고 있는데 그래서 2000년대부터 국제유가 상승, 가스 및 비철금속 같은 주요 수출품 가격의 회복세를 틈 타 2007년까지 연평균 10%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던 것이었다. 물론 다음해 금융위기로 다소 꺾이긴 했으나 나자르바예프 재임기 동안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해외직접투자를 받는 부국으로 꼽히게 되었고 구 소련 국가 중 러시아 다음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경제성장에 따라 국제적 위상도 높아져서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을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2017년에는 수도 아스타나가 엑스포 개최지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세번째는 중앙아시아의 고유한 특성인 씨족 문화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종족 정체성이나 종교 정체성보다도 씨족 정체성이 훨씬 중요한 곳인데 이 씨족 문화는 친족관계가 핵심으로 기능하여 수평적, 수직적 네트워크로 확장되게 구성되어 있다. 카자흐스탄도 예외는 아니어서 나자르바예프 역시 자기 측근들을 핵심 요직에 기용하였으며 에너지를 통제하는 카즈무나이가스까지 그들에게 이권을 분배해줬다. 나자르바예프의 장녀의 경우에는 아예 국영방송인 하바르 뉴스를 포함해 주요 방송 3개를 차지하는 대주주이며 심지어 라디오 분야에까지 손을 대기도 했었다.
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유목 문화가 자리잡은 곳이었는데 여기서 씨족, 부족주의 성향이 생겨났었다. 물론 소련 시절에 유목 생활은 사실상 사리지고 정착화되어 시민화 되었지만 그럼에도 유목이 없는 상황에서도 씨족, 부족의 잔재는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소련 중앙정부는 부족들을 어떻게든 통합시키려 애썼지만 카자흐 SSR에서는 3대 부족 중 하나인 대쥬즈가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대부분 갖고 있었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1991년 독립 이후 카자흐스탄의 지도자가 된 나자르바예프는 부족으로 국가가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한편으로 기존에 존재해오던 유목전통 문화를 구 소련의 유산인 스탈린식 중앙집권 시스템에 결합시켰고 이것으로 인해 부족주의는 사라지지만 대신 족벌주의가 형성되게 된다.
물론 그래도 카자흐스탄은 외국인 투자 여건이 여타 중앙아시아 국가들보다 잘 되어 있는 만큼 우즈베키스탄에 비하면 씨족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는 축에 속하긴 한다. 그리고 중동 국가들과는 달리 종교 정체성 만큼은 확실하게 선을 긋는 곳이고. 가령 카자흐스탄은 건국과 함께 종교의 자유를 지금까지 헌법에다가 명시하고 있으며 2001년에는 교황이 방문하기도 했다. 9.11 테러와 종교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시점인 2003년과 2006년에는 세계 종교인 대회를 개최하여 다민족 국가인 특성을 활용해 이슬람교와 종교의 화합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것이 카자흐스탄이 씨족 사회이면서도 중동과는 달리 다민족 간의 특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조성되어 사회 분위기와 정권의 안정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다.
실제로 어디까지나 정권 유지가 가장 큰 목적이었겠지만, 나자르바예프는 사회를 흔들만한 극단주의를 통합을 명목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이슬람 극단주의가 성장하고 2014년 한 보고서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의 구성원 중 80%가 젊은 세대고 10%가 청소년이라고 분석이 나올 정도로 카자흐 내부에서도 이슬람주의 운동이 일어나며 2011년부터는 테러까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나자르바예프는 최대 소수민족인 러시아계의 수치를 40%에서 20%로 대폭 낮추는 등 민족주의적 통제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특히 때마침 나온 이슬람 극단주의는 정적 탄압 명분으로 쓰기 좋아 이것도 써먹히게 된 것이었다.
2019년 3월 20일, 갑작스럽게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이 퇴임하여 영원할 것 같았던 카자흐스탄의 1인 종신집권 체제가 끝났다. 물론 그냥 순순히 물러난 것은 아나고 임기 중에 헌법 개정을 통해 자신의 퇴임 이후에도 자신이 주요 권력 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난 뒤에 내려온 거다. 한마디로 말해 나자르바예프는 퇴임 후에도 국민회의 의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종신 의장, 헌법위원회 종신 위원직, 심지어 여당인 누르오탄의 대표직까지 가지고 상왕 노릇을 계속 해왔던 것이다. 당연히 2대 대통령이자 후임자인 토카예프 정권의 권한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이지 실세는 여전히 나자르바예프일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2022년까지는.
2022년 카자흐스탄의 역사에 길이남을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30년 장기집권 후에도 상왕 노릇하던 나자르바예프가 완전히 몰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물가상승률이 9%인 상황에서 2022년 새해에 LPG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고 가격 상한제를 폐지하였는데 약 50텡케이던 LPG 가격이 120텡케로 급상승하는 참사가 벌어졌고 이 때문에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것이었다. 시위대의 화살은 상왕인 나자르바예프를 향했고 토카예프는 이를 계기로 나자르바예프의 국가안보회의 의장직을 박탈하고 곧 이어 민족회의 의장, 국부로서의 특혜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내놨다. 나자르바예프를 국가안보회의에서 쫓아낸 이후에야 토카예프 대통령은 직접 본인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폭력 시위 참여자를 테러리스트, 이슬람 극단주의자, 쿠데타 세력으로 규정하여 CSTO에는 평화유지군 파견을 요청해 자기 주도로 시위를 진압했다.
신임 정권 토카예프는 시위에 대해서는 강경 기조였지만 나자르바예프 만큼은 이 기회에 확실하게 누르고자 하였다. 마시모프 위원장을 반역 혐의로 체포한 것을 시작으로 나자르바예프의 막내 딸 알리야의 남편 디마시 도사노프를 국영 석유 운송업체인 카즈트란스오일 회장직에서 사퇴시켰다. 또 사위 중 하나인 샤립바예프는 국영 가스관 업체인 카자크가즈 회장직에서 사임해야만 했고 다른 사위인 티무르 쿨리바예프 역시 카자흐스탄 상공회의소 소장직에서 물러났다. 나자르바예프 본인의 형제 쪽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볼라트 나자르바예프는 자신이 운영하던 비트코인 채굴장과 도매시장을 모두 폐쇄당하는 조치를 겪어야만 했다. 막내딸 알리야의 중고 자동차 업체는 토카예프 정권의 독과점 방지 기조에 따라 국유화 되었고.
나자르바예프가 대표직에서 사임한 후 여당이었던 누르오탄은 "아마나트"로 개명되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카자흐어로 "선조의 언약", "미래세대로의 위임"을 뜻한다. 또한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 퇴임 이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이름인 누르술탄으로 개명한 수도명을 다시 아스타나로 회귀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토카예프 대통령은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의 국내외 정책을 계승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면서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과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즉 이는 카자흐스탄의 차기 정권이 나자르바예프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걷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었다.
카자흐스탄 시위가 진압되고 난 뒤 토카예프의 개혁 정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새로운 카자흐스탄: 개혁과 현대화의 길"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이 기조는 대통령 권력 제한, 입법부 개편, 선거제도 개선, 정당 체제 발전을 위한 기회 확대, 선거제도 현대화, 사법부 독립성 강화, 행정구역 구조 개선, 언론 자유 확대, 지방자치의 탈집중화 등 광범위한 정치개혁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은 2022년 6월 국민투표를 거쳐 77.18%의 찬성표를 얻어 헌법 개정이 되며 점차 단계적으로 현실화 되어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토카예프가 기존의 헌법에서 가장 문제로 지적한 것은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이 지방정부와 지방의회 의원들을 임명, 해임할 정도로 막대한 권한을 지녔다는 점이었는데 이것은 대통령 임명 가능 의원 수의 감축과 폐지된 헌법재판소 재설치, 인권 보호를 위한 행정감사관의 권한 강화 등의 대책으로 해결하였다.
그 외에도 대통령의 임기를 기존 5년 연임 가능에서 7년 단임으로 제한하는 법안도 제출되었고 여기에는 7년 단임을 통한 장기집권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려는 목적과 향후 권력투쟁으로 당선이 불확실한 2024년 대선보다는 앞당겨서 2022년에 당선되는 걸로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는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면모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나자르바예프가 집권기에 대통령 권한 및 임기 제한 문제에 관해 여러차례 헌법 개정이 시도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2029년 전에 연임이나 중임을 위한 또 한번의 헌법 개정이 시도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카자흐스탄 정세를 관찰해야 할 것이다. 뭣보다 상하원이 모두 여당일 경우에 대통령이 국민투표 없이 헌법 개정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기도 하고.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를 계기로 토카예프 정권은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다. 나자르바예프의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특혜를 박탈하면서 현직 대통령의 실질적인 권한을 어느정도 유지시키는 작업을 완수했는데 그 일환이 나자르바예프의 권력 기반인 헌법위원회를 폐지하고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인 헌법재판소를 복원한 것이었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81.3%로 선거에서 또 한번 당선되어 2029년까지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2022년 이후의 정치개혁은 권력 구조 개편을 통해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토카예프 대통령의 기존 권력 복점 구조를 해체하며 토카예프 대통령 중심의 권력 구조를 형성한 것이 "진짜" 본질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카자흐스탄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민주화된 적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전에 비해 다소 개혁이 이뤄진 부분이 많긴 하지만 어쨌든 반정부 시위는 토카예프에 의해 테러리스트,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몰리며 러시아 및 CSTO 평화유지군의 개입으로 진압당했으며 대통령의 권한이 축소되었음에도 여전히 대통령은 상원 의원을 임명할 수 있으며 의회는 대부분이 여당인 아마나트당이 장악하고 있어서 야당이 성장할 여지가 여전히 별로 없는 상황이다. 사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반정부 시위 이후 토카예프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흐름에 대해서 정부가 국내 갈등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담론을 형성하여 무력 진압을 정당화하고 갈등이 있던 지역 내 자원을 통제 및 정치 구조를 개편하여 결과적으로 권력을 강화하는 작업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토카예프 정권의 앞으로의 관건은 사실 민주화라기보단 나자르바예프 이래 카자흐스탄에서 지속되어온 사회경제적 불평등, 사회안전망의 부재와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게다가 2022년 대선에 나오면서 토카예프 본인이 공정 국가, 공정 경제, 공정 사회를 선거 슬로건으로 내걸어 보다 구체적인 정치, 경제 개혁을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니 더욱 중요할 것이고. 코로나 19 때부터 경기가 침체되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러시아에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 카자흐스탄이 입을 타격에 어찌 대응할 것인지 등 토카예프 입장에서 정말 지금 난제들이 워낙 많은데 어쩌면 상왕 나자르바예프를 몰아낸 것보다 더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카자흐스탄과 토카예프 정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구조적인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경제 구조를 개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는다면 설령 민주화가 된다 해도 제2, 3의 2022년 반정부 시위 같은 일이 또 벌어질 수도 있다.
2022년 반정부 시위는 30년 동안 정치를 독점한 엘리트 계층이 변화하지 않았던 카자흐스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주화 사이의 과도기에 있는 토카예프 정권은 국민들과 정권을 지탱하는 엘리트, 그리고 이 지역의 기존의 패권국인 러시아와도 새로운 합의점을 찾아 잠재적 블루오션인 중앙아시아의 성장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이 주목되는 바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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