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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02. 2023

일본군은 왜 괴물이 되었는가?

일본 근대화의 선봉장에서 악랄한 전범집단으로

https://youtu.be/yReO6JiLJnE?si=08sxxQG8xqyhWMmZ

우리가 일본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일단 첫번째로는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미군의 기관총 진지를 향해 무지성 돌격하는 신들린 광기에 미친 군대라는 것일 거고 또 하나는 무능하고 썩어빠져서 개판 오분 전이었던 군대라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태평양 전쟁을 다룬 작품들에서 일본군이 반자이 돌격 같은 행태를 보이던 것과 가미카제 그 자체에서 기인했을 것이며 후자는 그런 무모한 반자이 돌격을 무작정 때려박게 만드는 일본군의 상층부의 사고방식과 무다구치 렌야로 유명한 임팔 작전 같은 역대급 삽질이 이미지 형성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조차 구 일본군에 대한 인식은 멍청한 군대 쪽으로 되어 있다.


일본군이 삽질을 매우 심하게 한 조직인 것은 사실이다. 임팔작전은 말할 것도 없고 태평양 전선 곳곳에서 일본군의 뻘짓 덕분에 인명피해는 더욱 커져갔기 때문이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에게는 최소한의 병참선의 개념조차 없는 상황이었고 보급이란 적에게서 빼앗거나 현지에서 조달하는 식이었다. 하와이, 미드웨이 공략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였고 특히 육해군 합동작전은 군 내부에서 육군과 해군 사이의 관계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뤄지기 매우 힘들었다. 또 똥군기는 일본군의 상징과도 같은 것인데 덕분에 일본군의 조직 문화는 매우 폐쇄적이고 장병들은 광신적인 옥쇄를 강요당하는 와중에도 상급자에게 복종해야 할 정도로 진짜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본군이 쓰레기처럼 변한 것과 별개로, 왜 얘네가 저렇게 되었을까라는 구조적인 의문이 들었다. 당연히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형성된 조직은 아닐테니 말이다. 어쨌든 일본군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칭다오 전투, 만주사변 모두 이긴 전적이 있었고 당대에 솔직히 여기까지라도 따라올 만한 아시아 국가들은 당연히 없었다. 왜냐면 아시아 국가들은 식민지거나 반식민지였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일본군은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아는 그런 이미지로 타락해갔다는 것인데 이 글에서는 그 의문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일단 일본군은 똥군기 같은 전근대 문화와는 별개로 일본 제국이라는 나라의 근대화에 선봉장에 선 집단이었다. 이게 뭔 소리인가 하겠지만 당시 막부의 잔재 탓에 봉건적인 일본 사회에 근대화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앞장 선 주역이 다름아닌 일본군이라는 조직이었다는 얘기다. 일례로 육류 제한 규정이 메이지 신정부 이후 해제되었지만 여전히 고기를 맛보기 힘들었던 일본인들이 그나마 먹어볼 기회가 있는 곳이 바로 군대였으며 서양의 시간 관념인 분, 초 단위도 이때 도입되어 이것이 나중에는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 노동 근무 형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삼각 측량대를 통한 지도 제작도 오늘날 일본군의 악명 높은 이미지를 대표하는 육군이 선두주자였고 이외에도 시계 보는 법,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을 배우는 것이나 구두 및 양복 유통 등까지 그 당시 일본인들에게 군대란 서구 문물을 접하고 개화할 수 있는 곳이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징병제는 사실 근대적인 국민개병제보다는 참정권 같은 권리는 없고 강제로 복무하는 시스템에 가까웠던 한계는 있었다. 그렇지만 이 징병제 속에 일본인들은 3년 동안 군대로 끌려가 있는 동안 전근대인에서 근대인으로 성격이 변화해갔다. 새로운 시간관념과 근대적인 노동 근무 형태의 사회 전반으로의 확산은 물론이고 특히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일반 교육제도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일본군의 징병제는 보통교육과 기술교육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군대 생활과 군대에서 이루어진 교육을 통해 병사들은 근대화에 적합한 태도와 행동 패턴을 몸에 익히고 국가에 대한 귀속 의식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군은 메이지 시대 근대화의 촉진 매개체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또 아이러니한 점은 2차세계대전기 일본군의 극악무도한 전범 이미지와는 달리 그렇게 광신적으로 만행을 저지르고 다니지 않았다. 가령 1900년 의회단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로 파견된 일본군은 엄격한 군기를 유지하며 북경에 입성한 서구 열강 연합군이 금은을 약탈하는 와중에도 상대적으로 골동품만 챙기며 가장 적은 일탈을 저질렀고 러일전쟁과 1차세계대전 와중의 칭다오 전투에서도 전시국제법 규정 이상으로 러시아군, 독일군 포로를 대우해주기도 하였다. 물론 여순 학살 같은 만행도 일부 있었으나 전후에 일본이 청나라 측에 천 수백 명을 포로를 송환받은 것과는 달리 청나라는 겨우 11명 밖에 안돌려줬다는 점에서 청나라가 오히려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은 쪽에 더 가까웠다. 이러한 초창기 일본군의 행보는 광신적인 행동이 일상이던 쇼와기 일본군하고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보아 알 수 있는 점은 초기 일본군은 병폐가 없진 않지만 그래도 2차세계대전 당시의 막나가던 일본군과 비교해보자면 매우 양호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메이지 시절 일본군과 쇼와 시절 일본군은 내부적으로 크게 다른 조직으로 시대를 거치며 일종의 변용을 한 셈인 거다. 다르게 말하면 일본군도 처음에는 그럭저럭 기본적인 상식은 지키는 군대였다는 얘기인데 문제는 이 방향이 그대로 유지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퇴보하는 군대를 넘어 폐급 수준의 집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화의 선봉자이던 일본군이라는 조직은 어떻게 그 근대라는 시대 정신을 역행하여 퇴보시키는 집단이 되어갔을까?

먼저 군사 전략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보면 의외로 일본이 승리를 거두며 급부상하던 시기인 러일전쟁 때부터 불안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1909년 러일전쟁의 교훈을 살려 <보병조전>이 개정되는데 이때 일본군에게서 백병주의가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 전까지 <보병조전>은 전투의 승패가 화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규정하고 있었고 러일전쟁 때도 이 방침을 따랐으나 문제는 생산력이 딸리던 일본이 화력에서 러시아를 압도하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총검돌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백병전에서 러시아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고 이러한 이유로 일본군은 백병전의 중시, 공격 정신의 강조를 교훈으로 도출한 것이었다.


이는 일본군이 백병전에 뛰어났기에 강조한 것도, 낙후된 기술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려 한 것도 아니라 일본군이 백병전에서 고전했기에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즉 일본군이 러일전쟁에서 포탄 부족으로 고생했고 진지를 공격할 때 포병 화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 무기의 질이나 양에서는 러시아군한테 뒤지지 않았기에 요컨대 백병주의는 무기의 화력에만 의지한 나머지 공격정신이 약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강조된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훗날의 일본군은 이 백병주의를 물자와 무기가 뒤떨어져도 보충할 수 있는 정신력이 일본군의 강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물론 정신력과 사기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정신력으로 물량과 기술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정도에 이르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물론 인력 투입보다 장비 현대화에 신경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긴 했었다. 그게 1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일본에서는 "우가키 군축"이라 하여 대대적으로 군 규모를 줄이는 정책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19사단과 20사단을 설치할 때부터 군비 과잉이 보고되던 실정이었고 이때 우가키 육군대신은 군축을 하는 대신 현대화를 쓰는 방침을 정했다. 그렇게 군축으로 아낀 경비는 전차부대, 항공대, 고사포부대의 창설을 포함한 장비 근대화에 투자되었고 이게 잘 되었으면 2류 무기국이자 백병주의만 몰빵하던 일본군이 장비의 질과 화력에 집중하는 현대적인 군대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군축 후에도 1개 사단당 포병밀도는 러일전쟁 개전 당시보다도 낮은 수준이었으며 여전히 경포주의를 고집하는 태도에선 못벗어났다. 가장 포병밀도가 높았던 시기조차 야포는 1개 사단당 평균 47문 수준이었고 이렇게 된 건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포병을 군축에서 첫번째 대상으로 지목하는 바람에 포병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었다.

똥군기의 기원의 경우에는 1908년에 <군대내무서>가 하달되며 병영에 하사관을 반장으로 내무반을 설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기존의 급양반을 대체할 이 내무반에는 구체적으로 20명 전후의 병사가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단위였는데 문제는 선발된 하사관들이 병사들을 복종시킬 명목으로 강압적인 수단을 썼다는 것이다. 군 상층부에서는 중대 가족주의를 골자로 <군대내무서>를 개정하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하사관들은 이해와 도덕심에 근거한 자발적인 복종을 이끄는 "인자한 부모님"이 아닌 물리적 강제로 복종을 요구했다. 이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던 중대 가족주의는 역으로 악용되어 부대 내부의 불상사가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은밀하게 처리하는 용도로 사용된 건 덤이고.


결국 내무반으로 대표되는 병영 생활은 프라이버시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적 제재가 다반사였다. 군사 조직 특성상 규율이나 복종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문제는 그러한 것이 지나친 걸 넘어 악용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고 중대 가족주의는 이걸 막기보단 제한을 용인하는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따라서 안 그래도 징병제 시행 초기부터 심했던 병역 기피는 갈 수록 더해지면서 피할 수 있다면 파하고 싶은 의무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으며 징병 검사에서 검사관을 매수해서 징집을 모면하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상류층의 대다수는 병역을 어떻게든 빼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며 결국 군대에 끌려간 것은 제국 인구의 상당수이자 하층민이던 지방 농민의 자제들이었다.


일본군의 정신주의에는 백병주의로 대표되는 <보병조전> 못지 않게 큰 영향을 끼친게 있었는데 바로 황도파의 아버지 오바타 도시로가 남긴 유산이다. 오바타의 전쟁관은 통제파와는 달리 갖지 못한 나라에 걸맞는 방위 전쟁을 주장했는데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1차세계대전의 타넨베르크 전투처럼 정신력으로 무장하면 장비가 열악하고 수가 적어도 포위섬멸이 가능하다는 전형적인 정신주의 논리이다. 그런데 황도파가 2,26 사건으로 박살난 이후에도 이 논리는 의외로 일본군에서 계속 유지되었고 오히려 특수 조건 하의 상황을 가정했다는 오바타의 원래 주장은 쏙 빠진 채 장비가 열악하고 수가 적은 일본군이 필승의 신념만 있으면 부족한 자원을 메꾸며 미군을 포위섬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버리게 된 것이었다.


오히려 오바타가 남긴 <통수강령>과 <전투강요>는 원래의 논리나 신들린 정신주의 그 이상으로 더 이상해졌는데 거기서 나온 개념이 "옥쇄"이다. 오바타는 1차세계대전 당시의 타넨베르크 전투를 모델로 한정적인 단기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보았고 그 이상이 "포위섬멸"이었는데 그 포위섬멸이 실패하고 열세의 입장에 내몰리더라도 퇴각을 거부하며 필승의 신념을 가진 채 죽을 때까지 싸우는게 바로 일본군이 오바타의 논리를 변형한 "옥쇄"였다. 이 옥쇄의 대표 사례가 반자이 돌격이며 자살로 생각되더라도 전쟁이 살아있어서 어디서 무엇이 일어날지 최후의 최후까지 모른다는 신념 하에 돌격을 계속하면 어딘가 국면이 역전될지도 모른다는게 논리적 기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국력의 한계 때문에 열강의 장비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일본군은 그 결함과 열세를 보충하기 위해 왕성한 정신력과 훈련을 강조했고 그 결과가 남들에게는 뻘짓으로 보이지만 본인들은 성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벌이는 무모한 짓이 된 것이다. 그리고 저런 식의 광신적인 정신주의 행태가 전군에 다 퍼졌던 것은 상층부부터 자율성 없이 그저 주어진 명령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는 문화였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1939년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에서 소련군에게 관동군이 대패한 이후 연구위원회가 창설되어 무기와 전술 개선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쓰며 변화를 시도하는가 했지만 서류 창고에 그대로 썩히게 되었다. 상층부의 분노를 대놓고 사서 짤린 것도 아니고 단지 돈 아낄려는 심산으로 그런게 더 어이없는 포인트


자세히 설명하자면 기존의 전투 방식이 이길 수 없는 건 분명했지만 비용이 더 중요하기에 당분간 근본적인 변화가 없어도 어떻게든 될 거다라는 자기 딴에는 합리적인 계산으로 결정된 건데 애초에 승리를 추구하는 군사 조직이 돈 아낀다고 통하지 않는 전투 방식 고집하는 건 사실 말이 안되는 일이다. 결국 이건 일본 군부의 상층부가 현장의 실정과 적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 한마디로 말해 자기 객관화가 불가능한 책상물림들이기에 저런 참사가 벌어진 거라고만 밖에 볼 수 없다. 즉 짧은 성공에 도취되어 현실에 안주한 나머지 어떠한 변화도 거부하다 못해 더욱 퇴보를 한 아이러니한 사례인 것.


이처럼 일본군은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근대 일본의 신화의 탄생시킨 주역이지만 그 신화를 망치고 자국을 패망으로 이끈 것 또한 그 자신들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분명 패망의 시발점인 2차세계대전 때까지도 일본군의 군사적 역량은 결코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부조리와 경직된 구조는 승리를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군대라는 특성이 무색하게 조직 자체를 점점 교조화시켜 갔으며 그 끝판왕은 진주만 공습 전 총력전 연구소의 보고서 결과를 무시하고 전쟁을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렇게 한 때 아시아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군대인 일본군은 순식간에 몰락한 것을 넘어 오늘날에는 최악의 전범, 무능, 민폐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히며 같은 추축국 군대인 독일 국방군 이상의 안좋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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