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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05. 2023

스탈린의 대숙청은 과연 무차별적인 테러였는가?

NEP, 농업 집단화, 공업화, 관료주의, 그리고 대숙청

https://youtu.be/n8TCyszwyWE?si=mN1bXODet4Sukooh

스탈린하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대숙청"일 것이다. 무고한 소련 인민들을 부농이나 부르주아로 몰아서 굴라그로 데려가고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시키는 등의 마치 반정부 작가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서 나왔던 그런 냉혈한 이미지가 스탈린 시대 소련을 대표하는 대중들의 인식일 것이다. 사실 어느정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스탈린이 실제로 냉혈한 성격에 무자비한 판단을 내린 것도 팩트고 특히 우리 입장에서 스탈린은 일제를 피해 연해주에 있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도 모자라 북한 정권 수립을 지원한 원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이 비판을 받는 걸 내가 이해 못하는 건 아니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러나 그런 이미지가 너무 고착화되었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강철의 대원수" 스탈린의 이미지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악행이 과장된 측면도 있다. 2,000만명 이상을 학살한 지도자라는 등의 얘기가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루돌프 럼멜, 티머시 스나이더 등 서구의 학자들이 이런 인식이 형성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2천만 학살설은 글 뒷부분에서 좀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자. 아무튼 이 학살설과 스탈린의 악행 과장의 근거로 사용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1930년대 동안의 대숙청이라고 볼 수 있으며 결론부터 말해 대숙청의 결과가 소련 내부에 안좋은 영향을 가져온 측면이 있다는 것과 잔인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과는 별개로 대숙청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과장된 것 만큼은 사실이라 할 수 있겠다.


우선 대숙청 실행의 원인을 알려면 조금 더 거슬러 가서 소련 건국 초기, 즉 레닌 시절에 있었던 신경제 정책(NEP)부터 파악해야 한다. 1921년 10차 당대회에서 통과된 신경제 정책으로 레닌은 경제영역에서 자본주의 요소를 받아들이고 사회주의 경제로의 재편을 미뤘었다. 이러한 신경제 정책은 대규모 중화학 공업 및 국제 무역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 민간 자본가의 생산 수단 소유권을 허락했다. 실제로 신경제 정책 시기 동안 은행과 대규모 산업체는 국유화 되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소매업이나 작은 기업들은 개인 또는 협동조합에 맡겨졌고 농민들은 다시 농산물을 시장에 팔 수 있었다. 이런 변화는 사실 공산주의의 기본 원리와는 맞지 않는 면이 있었지만 전시공산주의로 인해 크론슈타트 반란이 일어나는 등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불신 여론이 존재했기에 적당한 미봉책으로 사용된 측면이 있었다.

레닌 시기 소련의 포스터

그러나 신경제 정책은 문제점도 많았다. 물론 초기에는 도시에서 소규모 기업이나 상거래 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들도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얼마 안가 스탈린이 집권할 시기에 이르면 도시는 가난한 반면 농촌은 지나치게 부유해졌다. 혁명의 주역인 노동자들은 관료가 되거나 공장 관리자가 되지만 나머지 일반 도시민들은 가난했으며 특히 신흥 자본가들, 즉 네프맨이라 불리는 이들이 도시에서 두드러진다. 반면 농촌은 적백내전과 네프를 거치며 부유해졌다. 귀족들이 소유하던 땅을 나눠가졌으니 말이다. 레닌은 농민을 부유하게 만들면 새로운 수요자가 되니까 경제에 활력이 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농촌은 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시기의 고통을 겪었기에 곡물을 창고에 쌓아두는 방식을 선택했고 자급자족 하면서 도시의 공산품을 사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는 볼셰비키들이 농민을 "쿨라그"로 분류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레닌 사후 트로츠키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이 집권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있을 때쯤인 1927년에 때마침 영국에서 소련과 단교를 하여 당 내부가 패닉에 빠지는 상태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당시 소련 언론이 서구 열강이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준비한다는 실제적인 증거가 없었음에도 수개월 동안 전쟁 불안을 부추키며 부르주아 지배 타도를 명분으로 한 "문화혁명"을 했다고 지적하는데 물론 그때 서구 열강이 직접 군사적으로 위협을 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소련 입장에서 보자면 적백내전 당시 서구 열강의 개입과 백군에 대한 지원으로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던 적이 있었던 만큼 확실히 영국이 갑자기 단교해버리는 것에서 PTSD가 발동되지 않는게 더 이상할 수 있다.


그 시점에서 소련 지도부는 중공업을 키워야겠다는 강박이 생겼다. 왜냐면 1927년 당시 소련의 공업화 수준은 기껏 해봐야 포르투갈 수준이었기 때문. 따라서 스탈린은 보병 수보다는 기갑 부대를 집중적으로 키워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낮은 중공업 생산량을 극복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소련에 중공업에 투자할 만큼의 재원이 없었다는 것이고 서구 자본가들은 투자해줄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내놓은 방안이 소련 내부에 존재하는 재원인 농민들의 곡물을 모아서 국제 시장에서 파는 플란이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기계류와 부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산업화의 초석을 닦게 하는 것이었다.

부농의 식량을 털어가는 소련 당국 관계자들과 네프맨에 대한 노경덕 교수의 설명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농민들이 과연 순순히 곡식을 내놓을 것인가였다. 이에 스탈린은 곡물 강제 공출을 실시했고 이 과정에서 신경제 정책 속 천대받던 도시의 실업자들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뜯어갔다. 당연히 농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당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지만 정작 스탈린은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이 부분이 레닌 이상으로 스탈린이 더 냉혈한임을 보여주는 면모이기도 하고. 당내에서조차 반발이 극심했지만 이제와서 이 작업을 중단하고 산업화 목표를 수정하기에는 낮은 중공업 수준으로 외세의 개입을 막기란 불가능했기에 큰 딜레마였다.


결국 이 딜레마의 해결책은 더 강경한 방안인 강제 공출을 넘어서 아예 농업 자체를 집단화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특히 공산주의 사상적 관점에서도 단순히 곡물을 거두는 강제 공출과는 달리 집단하는 토지라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권 폐지, 즉 국유화라는 사회주의적 정책이었기에 집단화라는 것은 곡물 좀 뜯어가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 단계에서 사회주의 단계로의 진보를 뜻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 입장에서는 이게 강제공출보다 더 재앙인 정책이었는데 토지라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권이 있으면 곡물을 다시 채울 수 있지만 이제는 그조차 없어졌의니 말이다. 소련 당국은 빼앗간다는게 아니라 공유한다고 했지만 농민들 입장에선 그게 정상적인 답변으로 들릴 리가 있나? 이후 농촌은 완전히 무너져 갔으며 신경제 당시와는 반대로 산업 도시가 농촌 출신 이주민을 빨아들였다.


농업 집단화가 어느정도 진행되자 1929년부터 1차 5개년 계획이 채택되게 된다. 1차 5개년 계획 시행 기간 동안 소련은 시설 투자 위주의 철강 산업에 초점을 맞췄고 트랙터 공장도 대폭 늘려 전시에 전차 공장으로 전환시킬 만한 여건을 만드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특히 1차 5개년 계획 시기가 더욱 중요한 지점이라면 드디어 소련이 완전히 보급과 분배 조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마치 건국 초기 전시공산주의 시기처럼 국가가 도시의 경제, 분배, 거래 체계를 거의 장악했고 네프맨들은 투기 혐의로 체포되어 사적 영역은 대폭 축소되었다. 또 1930년대 초에 이르면 수공업자나 소매상인들마저 폐업 또는 국가감독협동조합 강제 가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게 된 것은 덤이고.

스탈린 시절 5개년 계획 관련 통계들

1932년에 시작된 2차 5개년 계획부터는 본격적인 공업 생산으로 이어졌고 이 또한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소련 정부 공식 발표 수치이긴 하지만 1차인 1928~1932년 사이에 총산업생산량이 2배로 늘었고 그 다음 5개년 계획 기간에 추가로 2배가 늘었다고 한다. 1928~1940년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참고로 약 17%. 다만 이 17%라는 수치는 소련 정부 자료라 다소 부풀려진 감이 있는지라 서구 학계에서는 대체로 10%대 초반 내외로 보고 있다. 그 외에도 사회복지 제도가 생각보다 미비했던 것과 그나마 있던 제도들도 핵심 산업 노동자 등 특권 집단만 누릴 수 있는 등의 문제점도 상당했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석유, 석탄, 운송용 트럭과 트랙터의 생산지수가 1차 계획 끝날 무렵부터 독소전쟁 발발 이전까지 급격히 증가하고 완전 고용이 달성되었다는 부분에서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대처라는 공업화 시작의 원래 목표는 대충 달성했다고 봐도 된다.


그러나 농업 집단화는 대실패로 끝났다. 이 집단화 덕분에 수십 년 동안의 소련 농업의 발전이 가로막히면서 도시 지역의 식량 부족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스탈린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를 비롯해 남러시아 지역, 카자흐스탄의 파괴적인 대기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나는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제노사이드를 벌일려고 대기근을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인데 왜냐면 농민을 죽이려 했다기보다 봄 파종까지 생존할 수 있는 양만 남기고 최대한 확보하려 하다가 그 양의 기준이 모호해서 저 꼴이 난 거라고 보기 때문. 어쨌든 스탈린은 지방 관료들에게 최대한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관료들에게 식량을 빼앗긴 농민이 속이는게 아니라 진짜 더 없다는 걸 눈치챈 게 너무 늦었고 한참 후에야 국가 창고에 넣어둔 양곡을 다시 농촌으로 보냈지만 결국 500백만 단위의 기아 사망자가 나온, 인위적인 학살보다는 인도 지역의 기근 같은 정책의 대실패 사례라고 본다.


그 외에도 공업화의 외적 성장 뒤에는 그늘이 더 있었다. 애초에 전쟁 대비를 목적으로 산업 개발을 시작했던 만큼 소련의 계획 경제는 행정적 지시를 하달하는 고위 관료나 당원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일종의 명령 경제 구조로 변해가는게 불가피했고 따라서 핵심적인 경제 활동이라 할 만한 생산, 분배, 투자 모두 국가의 명령으로 이루어져서 자연스레 정책 추진 주도자들의 입김이 너무 쎄졌다. 물론 급속한 군수 공업화를 이루는데 그만큼 효율적인 방법도 없긴 하다만 대신 명령자들의 담합, 부패, 축재 등 여러 부작용들이 나타나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한편 1930년대 중반부터 대외 위기가 벌어졌다. 히틀러가 팽창하고 일본 군부가 만주 국경 너머를 넘보며 깔짝되는 것은 물론이고 파시즘을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잡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상황인 만큼 스탈린은 산업화로 중앙 행정력이 강화된 상황을 이용해 대외 위기 대처에 앞서 결속을 강화하고 안에서부터 갉아먹히는 걸 막기 위해 내부 사회 단속을 나설 필요가 생겼고 스탈린은 대숙청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등 과거의 경쟁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얼핏 보기에 대숙청은 단순하게 정적들 때려잡는 독재자의 폭압으로만 보이겠고 당연히 소련 정권의 안위가 이런 숙청의 핵심이었지만 단순히 안위가 정적들 뿐만 흔드는게 아니라고 스탈린은 보고 있었다. 바로 소련 정부가 외세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대비하는 노력에 방해되는 이들 역시 숙청의 표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명령경제 체제를 통해 권력을 쌓은 부패 국가 공무원들이 두번째 타깃이 되었고 비밀경찰의 수사가 진행되어 수많은 인물들이 처벌받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이 잡혀가는 일들도 빈번하였으며 숙청의 방식이 시베리아의 굴라그로 끌고 가서 최소 몇십년부터 최대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시키는 것이었던 만큼 잔인한 면이 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아야 할 점은 대숙청이 당시의 권력층인 당원과 공무원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부패, 무책임, 과업 완수 실패 등이 주요 근거였다는 부분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서방 미디어의 이미지처럼 선량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 테러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대숙청은 혁명 이후 관료들을 겨냥한 숙청이었고 이는 대규모 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사회 모순이 발생하고 제3세계의 관료 집단 비리 만큼이나 당대 소련의 관료 집단 부패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소련 계획경제 속에서 물자조달 비리나 서류조작들이 넘치는게 일상이었다. 물론 숙청 과정에서 스탈린의 정적도 같이 희생되었지만 대숙청의 진짜 목표가 관료주의 타파였다는 점을 보면 폴 포트식 무차별적 학살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루돌프 럼멜의 학살 관련 통계. 애초에 소련 인구를 감안하면 타노스가 아닌 이상 몇천만 단위의 학살은 불가능하다.

이렇듯 대숙청은 대중적인 이미지처럼 광기에 찌든 학살극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현재에 와서 일부 사례들이 많이 과장되어 부풀려진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숙청으로 희생된 인구는 100만명 정도였고 농업 집단화 같은 정책적 오류로 인해 기근으로 희생된 인구는 500만명 정도로 보는게 맞다. 럼멜 같은 네오콘 학자들의 경우에는 스탈린 시절에 인구가 수천만 단위로 학살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곤 하는데 애초에 스탈린 시대 소련 인구는 1억 6천에서 9천 사이였다. 만약 진짜 럼멜 말대로 스탈린이 "학살"한 인구가, 그것도 대숙청 시기에 저렇게 수천만 단위로 죽였다면(스탈린 이후로는 소련에서 피바람이 딱히 크게 분 적이 없었다) 그 전에 소련 경제가 파탄나지 않았을까? 당장 독일이 전쟁 와중에도 홀로코스트를 하면서 유대인 500~600만명을 가스실에 넣고 죽인 것도 엄청난 행정력과 비용을 소모했던 것을 생각해보라.


이렇게 얘기하면 그래서 대숙청이 잘한 거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어디까지나 대중적인 이미지인 무차별 테러극이 아니었다는 것이지 대숙청으로 인한 악영향은 의외로 꽤 많았다. 대숙청 이후 당, 정부, 군 등 모든 기관의 고위 지도부는 스탈린에게 충성심이 강한 초보자들로 채워졌는데 1939년 역사 기록물을 보면 관료 집단이 대대적으로 파괴당하는 바람에 직책 중에 공석이 많아 빈자리 메울 사람을 필사적으로 모집했건만 거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기도 했다. 물론 1년이 지나니까 다시 제자리로 서서히 돌아오긴 했지만 그 사이의 공백은 일부 지역에선 더 크게 느껴졌다. 일례로 투르크메니스탄 SSR에서는 대숙청으로 인한 공백이 너무 심각해서 지역당 지부가 몇개월 동안 중앙위원회 없이 보내야 했을 정도였다.

적백내전 당시 붉은군대 기병들

또 군사적으로 종심작전교리를 구축한 투하쳅스키를 사형해버리고 그 외 부됸니 원수, 블류헤르, 로코솝스키 등 유능한 고위 장교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후 4년간 독일의 침공이 임박할 때까지 대략 75,000~80,000명에 이르는 장교 가운데 적어도 30,000명이 투옥되었으며 심지어 5명의 원수 가운데 3명이 포함되어 있는 수준으로 다 짤라버렸다. 그래놓고 보로실로프 같은 아첨하는 정치군인들을 곁에 등용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이러한 군 내부의 대숙청은 1941년 전쟁 시작 직후까지도 지속되었으며 다 떠나서 반역자를 선별한 기준 자체가 너무 모호했다. 결국 유일한 기준이라고 해봐야 스탈린의 권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인물들이 끝이었을 뿐이고 그마저도 투옥된 장교 가운데 15%가 훗날 전시에 복권된 것을 보면 관료주의 타파를 명목으로 한 대숙청의 군 내부 물갈이는 소련군에 더 악영향만 끼쳤다.


투하쳅스키 사후 그의 기계화 부대 편성 교리의 발전은 그대로 정체되었고 전체적으로 보면 대숙청 이후 소련군의 기계화 부대에 대한 개념과 전력 구조는 1936년 절정에 달했던 시기보다 훨씬 더 초보적이며 의욕이 떨어진 단계까지 퇴보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1939년 겨울전쟁에서 아무런 동계전투에 대비 없이 소련군을 무작정 진군시킨 병크에서 잘 드러난다. 핀란드군의 만네르하임 방어선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었고 군 상층부가 유능한 장군보다 정치군인 밖에 없었던 소련군은 전쟁 중에 언제나 예측 가능한 공격만을 반복했었는데 결국 국력 차이 버프로 이기긴 했으나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대숙청의 후폭풍으로 인한 군 내부의 공백은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때 그대로 기습 한 방에 당하며 모스크바 인근까지 밀리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대숙청은 악행들이 비교적 과장되어 알려진 면은 있지만 그것과 별도로 소련 입장에서 딱히 긍정적인 영향만 끼쳤다고 보기엔 무리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부패 공무원이든 당원이든 70~100만 가량이 폭압적인 방식으로 희생된 것은 사실인데다가 행정적, 군사적으로는 공백이 심해졌다는 점에서 특히 소련군 분야에서는 겨울전쟁에서의 추태나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대응으로 보아 제대로 악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이 그렇게 대숙청으로 관료주의를 때려부쉈다고는 하지만 정작 스탈린이 사라지고 나니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해 1980년대에 와서는 연방 붕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될 만큼 매우 심각한 병폐가 되었는데 이는 1930년대 동안의 급속한 공업화와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한계 역시 만만치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참고 문헌:


노경덕, <세계노동운동사 특강;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그 진실과 왜곡>, 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11

노경덕, <서기국과 스탈린의 권력 장악 문제-비판적 재검토, 1922-1927>,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제90호, 2017

노경덕, <사료로 읽는 서양사 5: 현대편>, 책과함께, 2022

노경덕, <스탈린-트로츠키 권력투쟁 재고: 좌우파의 경제 이념과 관련하여, 1923-1927>,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史叢(사총) 제89호, 2016

E.H 카, <러시아 혁명: 1917-1929>, 이데아, 2017

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혁명: 1917-1938>, 사계절, 2017

쉴라 피츠패트릭, <아주 짧은 소련사>, 롤러코스터, 2023

데이비드 M. 글랜츠 외, <독소 전쟁사 1941~1945: 붉은 군대는 어떻게 히틀러를 막았는가>, 열린책들, 2007

이정하, <1930년대 소련 군부 숙청의 원인 ― 적군(赤軍) 기병 지휘관의 이력 분석을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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