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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21. 2023

이슬람 세계의 정치 철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정교합일 통치체제 유지를 위한 이슬람 고유의 정치이념 및 제도

https://youtu.be/BV-CPX5_5-Q?si=tq2m7mIWHquCizMa

중동 지역을 포함해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이슈들은 대부분 이슬람교와 연관성이 깊다. 특히 정교가 잘 분리되지 않은 중동 지역의 경우 보수적인 왕정 국가 뿐만 아니라 공화정의 형식을 채택한 국가들까지도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행위를 하고 있으며 당연히 법적으로 정치이념이나 국가 활동에 있어서 종교의 관여를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동 지역의 상당수 국가들은 이슬람교의 이름으로 종교단체나 정치조직을 두고 있으며 이와같이 이슬람 세계에서 종교와 정치는 평행선을 그으며 불가분의 교착 관계에 있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다른 종교에서 찾기 힘든, 이슬람교만의 "정교합일"이라는 고유의 특징에서 기인한다.


이 글은 그러한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슬람 고유의 정치이념과 제도의 철학적 기틀과 정치관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작성하게 되었다. 특히 이슬람 정치의 성격을 규정하는 여러 원리들, 칼리파제에 기초한 국가체제와 이러한 체제의 운영을 규제하는 샤리아법이라는 핵심 내용만은 오늘날까지 중동 지역에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중동 정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이슬람의 정교합일 체제


이슬람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단순한 신앙체계를 넘어서 사회생활 전반이 합일된 생활양식이고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조화로운 전체이며, 종교와 세속 쌍방을 포괄하는 신앙과 실천의 체계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사회는 누가복음 20장 25절에서 볼 수 있듯이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부분이 존재했지만 이슬람 사회는 반대로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의해 통치되는 정교일치 사회인데 따라서 이슬람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군사 등 사회의 제반 영역에 대한 고유의 사상과 이념, 규범과 제도가 존재한다. 이것이 이슬람교가 다른 종교와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그들만의 아이덴티티라고 볼 수 있겠다.


이슬람교 특유의 정교합일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형성 과정에서 생겨난 이념이고 제도였다. 애초에 어느 종교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종교 창시자가 곧 바로 종교와 더불어 국가권력을 창출한 사례는 많지 않았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기독교는 나라 잃은 유대인의 희망이던 예수가 그들에 의해 로마에 팔아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겪었으며 기원후 4세기가 되서야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다. 불교도 마찬가지로 석가모니가 인도 구석탱이 작은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음에도 국가권력을 휘둘렀던 적이 없었으며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국 역대 왕조들이나 한국의 삼국시대, 더 나아가 불교가 국교이던 고려 시대까지도 불교가 종교로 기능한 적은 있어도 실질적인 통치 이념은 유학에 더 가까웠었다. 그러니까 이슬람교의 경쟁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나 불교의 창시자들은 무함마드와는 달리 권력을 창출한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유독 무함마드를 통해 종교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출발했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신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로 출발했지만 메디나로 성천한 후에는 최고의 종교 지도자이자 공동체를 세우고 이끄는 일종의 국가통치자라는 위치도 겸하게 되었다. 이 메디나 공동체의 권력구조는 다소 단순했던 감은 있었지만 민족, 영토, 통치권 등 기간적인 권력 구조를 골고루 갖춘 국가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특히 무엇보다 무함마드는 전장에서 군사들을 총괄하는 지휘관, 또 공동체 내에서는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자의 역할도 했었다. 그런가 하면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규약이나 법령을 제정하고 각종 행정명령을 반포하며 그 집행을 감독하는 행정수반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다른 부족들이나 공동체들과 화약을 체결하는 등 명실상부한 최고위정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칼리파(영어권 표기는 칼리프)들도 무함마드의 계위자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그가 행사하던 종교와 정치 두 분야의 대권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들은 공동체를 통치하는 정신적 및 세속적 지도권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정교일치의 신념은 알라의 계시로 보증받았다. 경전 <꾸란>은 알라에 대한 복종과 현세 통치에 대한 복종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오, 믿는 자들이여, 알라께 복종하라. 그리고 알라의 사자와 너희들 가운데 권위를 지닌 자들에게 복종하라"라고 알라는 계시했다고 <꾸란>은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권위를 지닌 자들은 현세의 통치자들을 의미한다. 즉 알라께 복종하듯 무함마드와 칼리파들에게도 복종해야 하는 것이 무슬림들이 간직해야 할 신앙이라는 것이다.


칼리파들이 통치하는 공동체의 주기능은 사람들을 경전에 명시된 이슬람법에 복종시키고, 그 법에 따라 사회를 운영하는 것에 있다. 그렇게 하여 경전을 정확히 해석하고 따르며 무함마드의 어록인 <하디스>에 비추어 제반 문제를 판단 및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꾸란>, <하디스>는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나 사회 전반에 대한 원리들이 세세하게 명시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종교적 명분과 종교적 명분을 상호보조적 관계로 두어 공동체 운영의 근본이념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1,400여년간의 이슬람 역사는 곧 정교일치의 역사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그 이념의 근본만큼은 세월이 흘러도 전혀 변하지 않은 셈. 무함마드에 이어 후세의 칼리파들 또한 정치와 종교의 제반 영역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하였고 이런 체체를 이슬람 정치사 용어로 정리하자면 "칼리파제"로 볼 수 있다. 물론 칼리파제는 터키 공화국 수립 이후 직함이 완전히 폐지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조차도 사우드 가문을 자신들을 칼리파라 지칭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칼리파제가 낳은 정교합일의 통치체제의 정치관은 시대에 흐름에 따라 변화를 보이면서도 정교합일적 일원론만은 핵심을 지키고 있다.

2. 이슬람교의 정치원리의 구성


<꾸란>과 <하디스>에는 이슬람 정치가 관철해야 할 제반 원리들이 전부 명시되어 있는데 이것이 이슬람 국가들의 목적과 기능, 정치제도의 특성을 규정해줌으로써 이슬람교 정치를 국가의 최고 가치로 인정하고 있다. 이슬람 정치 원리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우선 "슈라"라는 협의제가 있다. 슈라는 무슬림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공동으로 협의하여 해결하는 협의제도인데 이슬람에서 슈라는 공동체 운영의 원칙이자 샤리아상의 의무 겸 무슬림 개개인이 간직해야 할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꾸란>은 국가의 수장을 반드시 공동체의 성원들의 협의로 선출되고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구성원들과 협의를 거친 뒤 처리해야 하며(3:159) 그리고 알라의 의지에 귀의하고 그 부름에 호응하며 공동체의 일을 서로 협의하는 자만이 무슬림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선지자이자 창시자 무함마드는 생전에 전투를 치르며 중대사가 발생할 때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슈라를 행했다. 그리하며 성문도반인 아부 후라이라는 무함마드보다 더 자주 성문도반과 협의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을 정도였고. 그리고 이 무함마드가 행한 슈라는 그 뒤를 이은 권력자들에게 정치행위의 원칙으로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대슈라를 통해 칼리파를 선출하던 4대 칼리파까지 이어진 정통 칼리파의 시대(632~661)는 자식에게 직위를 물려주는 세습제가 시작된 우마이야 왕조 시대가 시작되면서 막을 내렸다. 대신 법학자들의 집단적 협의로 입법하는 합의제인 이즈마으나 성직자인 이맘이 주도로 지역 문제를 협의하는 소슈라는 비교적 오래 존속하는 등 슈라 같은 이슬람 초기 합의제 시스템의 영향은 나름 이어가긴 했다.


슈라는 하나의 협의체로서 그 구성방법이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지만 대체로 구성원들은 독자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법학자인 "무즈타히드"들이었다. 협의에 상정되는 내용은 주로 <꾸란>이나 <하디스>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들이었는데 몇 가지를 예시로 가져오자면 음주자의 처벌, 정복지의 토지 분배 문제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다만 <꾸란>이나 <하디스>에 이미 명시되어 있어서 종교적 교리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사항이나 샤리아법에 엄연히 위배되는 사항만큼은 결코 슈라의 협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두번째 원리는 아들(정의)인데 원래 의미는 똑바름이지만 종교적, 정치사회적 의미로 보면 신 앞에서의 올바름으로 볼 수 있다. 종교적으로나 윤리, 도덕적으로나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이 명확하고 또 불의를 일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알라가 계시를 내린 목적이고 무함마드가 가진 사명이라고 믿는 무슬림들에게는 이슬람에서 정의를 정치 원리로 삼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세번째의 원리는 홀리야, 즉 자유이다. 이슬람교는 자신들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고 표방하고 있는데 이 자유 의지와 선택의 자유를 하나님(알라)이 인간에게 부여한 속성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선을 넘은 것도 자유를 가지고 한 선택이라고 보고 있는데 정확히 표현하자면 알라의 가르침을 쫓아서 낙원에 들어가든, 그렇지 못하여 처벌받고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든 인간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는게 맞을 것이다. <꾸란> 역시 종교에는 강제가 있을 수 없으며(2:256) 사람들을 강요해서는 믿을 갖게 할 수 없다(10:99)라고 신앙의 자유원리를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 뜻은 종교란 일종의 잠재적 의식형태로서 결코 강요로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4대 정통 칼리파이자 이슬람이 수니파, 시아파로 갈라지게 되는 계기를 연 알리는 원로들이 큰 아들 하산을 후계자로 옹립할 것을 요구하자 그들의 판단에 맡겼다는 일화는 워낙에 유명하다. 그러나 이슬람의 자유도 약간의 맹점 같은게 있는데 바로 교리에 따르면 이슬람법 샤리아에 의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의 절제된 자유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여전히 논란이 되는 지점이고.


네번째 정치 원리는 무싸와, 한마디로 평등이다. 유목사회에 팽배한 종족과 계층간 불평등 및 차별을 극복하는 것이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부흥을 위한 급선무였던 7세기 당시의 무함마드는 632년 별세하기 직전 고별 연설을 통해 신에 대한 경외 외에는 황인종이 흑인종이나 백인종에게 우월치 않다고 열변을 토했었다. <꾸란>에서는 "사람들아, 내가 그대들을 남녀로부터 만들었고 그대들이 서로 알 수 있게 민족과 부족으로 그대들을 만들었도다. 알라 앞에서 가장 존귀한 자는 알라를 경외하는 자이니라"라고 했는데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서로 다름은 오직 신에 대한 경외의 정도에서 나타날 뿐이지, 결코 선천적인 불평등은 있을 수 없으며 신 앞에서 만민은 평등하다는 것을 설파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현세에서 인간의 알라에 대한 경외가 어느정도인가에 따라 내세에서 차등과 우위가 결정된다는 것으로 이것은 당대 기준으로는 진보된 평등원칙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훗날 이교도에 대한 심판이라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이슬람의 국가체제도 한번 고찰해보자. 먼저 이슬람 역사 초기에 정교합일 국가체제로 출발한 것이 위에서 계속 언급했던 칼리파제였는데 선지자 무함마드의 사후 슈라를 통해 4명의 칼리파가 계승적으로 선출되면서 그들을 정점으로 한 칼리파제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칼리파제는 계위에 의한 정교합일 국가체제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체제이기도 하다. 이 제도 하에 칼리파들은 최선임자인 무함마드가 그랬던 것처럼 종교를 수호하고 현세 정치도 올바르게 펴는 이슬람 본연의 정교합일체로 국가를 운영하는 방침이 세워졌으나 문제는 칼리파제가 3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만 빛을 달했다는 것이다. 그 후 우마이야 왕조 때부터 세습제가 도입되면서 칼리파제는 다소 묻혀가기 시작했고 우마이야 왕조 시기 동안 칼리파란 이름으로 자리에 오른 최고통치자들은 종교적 사명감이 매우 부족했다. 그 결과 중앙집권적인 칼리파제는 통치력을 상실하여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해버렸고 1258년 몽골 침입으로 압바스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이런 판국은 지속되었다.


더 나아가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고 이슬람 전통 계승을 자처하며 들어선 오스만 제국은 아예 약 300년간은 칼리파라는 명칭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칼리파제를 다시 꺼내든 것은 서구 열강들이 침략 행보를 보이기 시작할 때였고 그때 오스만은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근세에 와서야 자국내 무슬림 밀레트 대표자로서의 칼리파라는 호칭을 다시 부각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오스만이 20세기에 접어든 이후 1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고 1924년에 가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지가 되던 칼리파제를 아예 폐기하는 정교분리 공화제를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1,400년간의 이슬람 정치의 이상으로 꼽히던 칼리파제는 막을 내렸고 현재까지도 보수적인 아랍 왕정 국가들조차도 칼리파제의 복원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칼리파제는 원칙상 민주주의 국가의 삼권 분립과는 공존할 수 없고 모든 권력은 칼리파 한 사람에게만 집중된다. 그래서 이게 정교합일 이슬람 국가 체제가 현대국가 체제로 아직까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이슬람 학자들은 칼리파제만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이슬람 국가를 세우기 위한 여러가지 형태의 국가체제를 고안해냈는데 이 때문이지 중동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 안에는 왕정 국가부터 이란 같은 신정 공화제를 아우르는 이슬람이라는 틀 안에서는 다양한(?) 정치 체제가 공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슬람 법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칼리파제의 기원을 바탕으로 현대 이슬람 국가가 수행해야 할 책무를 크게 종교업무와 국민권익 업무 두 가지로 나누는 작업을 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현대 이슬람 국가들은 전근대 시절의 정교합일적 국가체제의 성격과 현대적인 국가체제의 성격을 동시에 가질 수 있게 되었다.

3. 샤리아법은 무엇인가(Feat. 수니 4대 법학파)


샤리아라는 이슬람 율법의 경우도 이슬람만의 법 개념으로서 현대법의 일반적인 개념과는 꽤 차이가 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대법은 인간의 사회생활 질서 유지를 위한 규범 체계로서 공사의 사회적 관계만을 규제하지만 샤리아는 사회관계를 넘어서 인간의 신앙적 관계도 규제한다. 그렇기에 샤리아는 예배, 종교부금, 금식, 순례, 장례, 세정 등 종교적 신행에 대한 규범과 혼인, 상속, 징세, 친자관계, 노예와 자유민, 계약, 매매, 종교기금, 소송, 재판, 비무슬림의 권리 및 의무, 범죄, 전쟁 등 사회적 관계에 대한 규범까지 포괄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샤리아는 신과 인간의 관계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규제하는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으며, 이는 이슬람 사회가 정교합일 체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또한 현대법이 인간의 이성의 산물로 변화하는 사회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 제정되었다면 이와 반대로 샤리아는 신성한 신의 계시에 의한 불변의 것으로 예언자를 통해 계시된 신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천계법이라는 얘기라고 볼 수 있는데 따라서 공동체의 주권자나 입법자는 국가나 인간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로 보면 위법 행위는 단순히 현세에서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넘어서 신에 대한 불신과 불경으로 간주된다. 참고로 샤리아는 종교와 사회윤리도덕을 기준으로 무슬림의 행위를 외지브(의무), 하람(금기), 만두브(권유), 마크루흐(비난), 무바흐(허용) 등 5대 부류로 규범화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무슬림들은 샤리아에 입각하여 금욕적이고 철두철미한 생활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슬람의 법원(法源)은 총 4가지가 있다. 이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경전인 <꾸란>이며 114장으로 구성된 이 경전은 현세와 내세의 인간에 관한 알라의 모든 계시를 집대성한 대법전으로 사용된다. 법학자 압둘 와하브는 경전 속에 있는 부분별 관련 구절의 수는 대략 신분법 70개, 채권이나 물산권 등 민사법이 70개, 형사법이 30개, 형사소송법이 13개, 집단이나 개인의 권리에 관한 법이 10개, 국제법이 25개, 재정법이 10개 정도로 사회적 관계법 영역 전반을 포괄한다고 밝힌 적이 있었고 그 밖에 종교적 신행법에 관한 내용은 <꾸란> 전편에 널리 깔려있다. 그러나 법원의 견지에서 볼 때 경전의 내용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법적 원칙만 제시했을 뿐인데다가 무엇보다 이슬람교 형성 당시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나온 것이기에 시대적 한계도 너무나 명백하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 밖의 것은 무함마드 어록집이라고 할 수 있는 <하디스>인데 이것도 법적 준거로 많이 활용된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복잡해지면서 경전과 어록의 두 법원에서 판결의 법적 근거를 찾기가 힘들어졌고 그래서 나온게 끼야쓰와 이즈마으라는 법원이었다. 이미 발효된 법적 범례에서 유사한 사항을 찾아내어 비교 유추하거나 관행에 비추어 결정하는 것이 법원으로서의 유추였으며 이와는 달리 종종 유추를 해서도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가 생기면 이때는 법학자들이 집단적으로 협의하여 결정한다. 비록 법원 속 유추와 합의에 의한 당위성 및 효력은 이슬람 역사 초기에 많은 논란이 되었지만 8세기 말 법학자 샤피이가 최종적으로 정리하면서 마침내 <꾸란>, <하디스>, <끼야스>, <이즈마으>로 구성된 4대 법원이 확정되었다.


다만 법원이 확정되도 해석이 갈리는 건 어쩔 수 없었기에 법학자들은 계속 논쟁을 벌였고 이 속에서 탄생한게 바로 4대 법학파다. 그중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법학파는 8세기 초에 나온 이맘 아부 하니파가 이라크에서 세운 하나피파였는데 이들은 이성과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경전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개인적인 견해에 따라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유추는 처음으로 법원으로 인정하고 법적 판단에 가장 많이 적용한 파벌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튀르키예를 중심으로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집트, 카자흐스탄 등의 수니파 무슬림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퍼져있으며 그렇기에 그나마 세속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수니파이기도 하다.


그 다음으로 생겨난 것은 이맘 말리크 이븐 아나스가 메디나에서 결성한 말리키파다. 당시 메디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발원지이자 중심지로 이슬람 전통과 관행이 잘 보존되어온 고장이었는데 이맘 말리크는 <하디스>수집의 대가였기에 메디나의 전통과 구전되는 하디스에 준하여 법 이론을 발전시켰다. 세번째 법학파는 말리크의 수제자 샤피이가 이끈 샤피이파인데 샤피이는 하니피파, 말리키파 모두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815년 이집트 카이로 건너가서 전승을 위주로 하는 말리키파와 이성을 중시하는 하나피파의 법학을 절충해서 독자적인 새 법학체계를 세웠다. 샤피이는 하나피파가 즐겨 사용하는 유추를 최소화하고 말리키파의 중심 체계를 이루는 메디나 전통과 관행 중에 오직 하디스만을 골라 법원으로 채택하였다. 참고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 동남아시아의 무슬림 상당수가 샤피이파에 속한다고 보면 편하다.


마지막은 샤피이의 제자인 아흐마드 이븐 한발이 만든 한발리파인데 아마 수니 4대 법학파 중 가장 보수적인 곳이 여기일 것이다. 이븐 한발은 앞의 세 파가 유추와 합의를 법원으로 채택한 것을 반대하면서 오직 경전과 하디스만을 법원으로 인정하는 법학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성을 적용하여 인위적인 것이 출현하면 그만큼 순수한 진리에서 멀어지는 위험성이 있다고 역설하면서 비록 확실성 검증에서 약한 하디스라는 판시할 것일지라도 이성에 의한 법원보다는 진리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한발리파는 유추나 합의에 의한 법원을 부정하고 경직된 법학만을 고집했다는 얘기이며 어느 정도로 경직되었는지 예시를 들자면 이븐 한발은 무함마드가 수박을 먹어도 좋다고 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평생 수박을 안 먹었을 수준이니 말 다했다. 한발리파는 현재는 와하브파와 살라프파로 계승되고 있는데 와하브파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아라비아 반도에 주로 분포하며 살라프파는 우리가 아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이미지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그렇지만 4대 법학파의 본질적인 측면은 별반 차이가 없으며 단지 법 구성의 특성 때문에 서로 세부적인 측면에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4대 법학파는 서로를 향해 정통 법학파로 인정하고 있으며 대체로 10세기에 들어와서 법학자들은 인간의 행위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하였으며 최종 결정을 내려졌다고 판단하여 향후 종교법에 대해 독자적인 법 견해를 세우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4대 법학파가 이슬람 사회의 법무를 맡고 있으며 무슬림들은 누구든 상관 없이 산드시 이 네 파벌 중 한 곳에 소속되어 자파의 법적 판단을 따를 수 밖에 없다.


이상은 무슬림 중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의 법체계에 관한 이야기였고 이 문단에서는 소수파인 시아파에 대해서도 살짝이나마 얘기해보려고 한다. 시아파 역시 <꾸란>과 <하디스>를 경전으로 삼는 건 사실 수니파와 똑같은 모습인데 다만 <하디스>의 해석과 적용 및 채택에 있어서 만큼은 수니파와 구별되는 시아파만의 특징이 아주 잘 드러난다. 바로 합의제 법원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이맘(시아파 교권의 수장, 수니파의 이맘과 의미가 조금 틀림)의 역할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고지도자인 이맘은 법 해석과 판단의 신성한 권리를 갖고 있는 무오류의 절대적 권위자이기 때문인데 시아파들은 꾸란을 해석할 자격은 무함마드와 알리의 정통 후계자들에게만 있다고 본다. 시아파의 파벌은 크게는 12이맘파, 이스마일파, 드루즈파 등으로 갈려져 있으며 특히 마흐디라는 구세주가 내려와 구원할 것이라는 부분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그것과도 의외로 비슷한 면이 있다.


(지하드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해석이 너무 천차만별이라 그냥 넣지 않기로 결정했다.)


참고 문헌:


정수일, <이슬람문명>, 창작과비평사, 2002

김용선, <코란의 이해>, 민음사, 1990

김용선, <이슬람사>, 명문당, 2012

김용선, <코란: 국내 최초 한글 완역본>, 명문단, 2002

최영길, <꾸란해설>, 짓다, 1989

최영길, <아랍에서 출발한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 세창출판사, 2014

김상태 외 엮음. <중동의 새로운 이해>, 오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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