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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24. 2023

인도네시아식 탈식민 체제,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

인도네시아판 "우리식 사회주의", "제한적 민주주의"

https://youtu.be/ZHNkXrs3siQ?si=MO8L6n_-E24nUxZQ

1940년대 2차세계대전 시기 일본군의 점령과 1945~1949년 사이의 독립전쟁을 거쳐서 인도네시아는 마침내 독립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독립전쟁으로 인해 쫓겨난 네덜란드 식민당국이 그들의 독립을 인정했을 당시 인도네시아 지도층은 서구에서 교육받은 엘리트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권력분립, 의회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 정치 체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독립 초기부터 인도네시아는 지속적인 내부 반란과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며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는 1955년 첫 총선 이후에도 개선될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인도네시아 내부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독립영웅인 수카르노가 있었다.


물론 건국 초기 인도네시아의 성과는 결코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1955년 반둥회의의 성공적 개최는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능력과 제3세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미소 양극 체제로 구성된 기존 국제질서에 도입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비록 완만하기는 하지만 거시경제, 특히 수출에서 성장세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내부적으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자바에서 우세를 점한 반면 이슬람 정당이 자바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우세를 점함으로써 종교, 이념에 따른 지역적 대립 구도가 명확해졌고 내각이 너무 잦은 수준으로 교체되는 등 정국의 불안정성이 꽤나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 혼란 상태가 시급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것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중이었고.


당시 수카르노는 서구식 자유주의 모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서구의 정치제도는 인도네시아 고유의 민족적 특성과 문화에 잘 맞지 않는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는 총선 이후부터 자유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뜻을 같이 하는 세력들을 모아서 정치체제 개편을 위한 이론적, 정치적 작업을 개시했다. 1957년 이후부터 수카르노는 국민적인 지도자로서 전통적, 카리스마적 권위를 행사하며 단합을 위한 정치적 동원을 해 나갔는데 이때 수카르노 정권이 내건 핵심적인 구호는 민족정체성과 "우리식 사회주의"였다. 즉 이 시기에 수카르노는 독립전쟁 시기를 상기시키는 "혁명"을 강조함으로써 1960년대 동안 인도네시아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교도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수카르노는 군부 엘리트와 좌익 정치인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즐기던 지도자였다. 나수티온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네덜란드 식민당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그렇기에 탈식민화라는 중대한 시기에서 제한적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수카르노는 군부와 손잡고 서구식 자유주의 모델을 맹종하는 1949년 의회민주주의 헌법에서 인도네시아 전통에 부합하는 교도민주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한 것이다. 이 교도민주주의라는 표현은 누군가가 지도하는 민주주의라는 뜻으로 한국 건국 초기의 일민주의, 북한의 주체사상처럼 제3세계주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인식해도 된다.


수카르노의 이러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구상은 "Konsepsi(concept)"라 명명된 1957년 2월의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인도네시아가 서구식 민주주의라는 잘못된 시스템을 받아들인 실수를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상호 협력 내각을 제안했는데 이는 선거에서 의미 있는 득표율을 기록한 모든 정당들이 내각에 참여하여 서로 협력하자는 얘기였다. 특히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인은 모두가 가족임을 역설하면서 협의를 통한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 주장했으며 또 비록 많은 정치 세력들이 싫어하는 정당이지만 그럼에도 선거에서 600만 표를 얻을 정도로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공산당 역시 반드시 내각에 포함시킬 것을 강변했다.


같은 해 독립기념일에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전통에 지도자 없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맞지 않기 때문에 지도자가 이끄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 민주주의는 개인, 집단, 정당이 중심이 아니라 집단적, 국가 중심적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7월에 구성된 국가위원회를 소개하면서 인도네시아 내 기업가,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종교지도자 등 각각의 직능집단들이 참여할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한동안 명목상의 국가지도자였던 수카르노가 이 기구를 이끌고 전면에 나서며 본격적인 국가 운영의 기반 토대를 닦겠다고 한 것이나 다름 없는 선언이었다. 특히 당시 일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상황이었는지라 인도네시아 통합의 상징적인 존재이던 수카르노가 현실 정치를 독주하게 되는 배경이 확실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1959년 7월 5일, 마침내 수카르노는 대통령령을 통해 국민에게 부여받은 임무와 혁명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의회를 해산하고 1945년 독립전쟁 당시의 헌법을 국가 운영 체계의 기틀로 삼을 것을 선언했다. 이 대통령령을 구체화한 것이 독립기념일 선언이었는데 이 연설에서 수카르노는 지난 의회민주주의 10년 동안의 시간 낭비가 혁명의 실패를 초래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1945년 체제로 돌아가야 하며, 즉 그때 헌법을 바탕으로 의회가 아닌 대통령이 실권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당장 정당정치가 금지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시기에 정당의 숫자가 10개 정도로 줄어들었으며 살아남은 각 정당도 혁명의 대의를 따른다는 조건 하에 존속을 허가받았다.


교도민주주의 실시에 따른 정부 운영 체제에서의 변화를 보자면 협의-합의제가 도입된 게 가장 큰 변화였다. 합의제는 궁극적으로 만장일치를 목표로 하는 것인데 물론 현실정치에서 이게 쉽지 않았던 상황상 이를 보완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최종결정에서는 대통령의 "지도"를 도입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겉으로는 상의를 위한 평등한 협의제 정도로 보이겠지만 현실적인 상황 특성상 대통령의 권한과 결정권이 나름 큰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수카르노 본인이 대통령을 국가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가족국가, 협의제, 수장에 의한 최종 결정은 수카르노와 그의 측근들이 인도네시아의 전통 문화에서 발견한 요소였는데 이것은 교도민주주의가 서구에서 "수입"된 체제가 아닌 "인도네시아식 민주주의"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 가지 의외인 점은 인도네시아의 전통만 교도민주주의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중국식 정치모델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일단 당시 인도네시아는 제3세계를 대표하는 비동맹주의 국가로서 중립 포지션에 있었지만 많은 인도네시아의 지식인들이 중국을 이상향으로 생각했음은 분명했고 일례로 1951년 중국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언론인 바리운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새로운 민주주의", 그리고 "일하는 민주주의"라고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구체적인 "일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 내용은 중국 정치 체제의 특성은 모든 계급의 단결 및 조화에 있고 민중 정부 밑에서 민중이 민중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나? 아무튼 "일하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비록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분명 수카르노가 구상한 "일하는 내각"의 모티브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교도민주주의 체제는 "혁명의 이상"이 목표였다. 누차 얘기했지만 수카르노는 1945년 시절의 정신, 즉 독립전쟁 당시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어필하면서 민족의 통합과 자주라는 맥락의 일관성을 이어갔다. 따라서 교도민주주의의 "정치 선언"에 담긴 혁명의 핵심 요소들만 해도 1. 인도네시아 전역의 정치 통합, 2. 경제 발전, 3. 아시아-아프리카 협력을 통한 제3세계 중심의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이 있는데 이게 사실상 탈식민화 시대 인도네시아라는 국가의 주요 목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또 실제로도 성과가 다소 존재했는데 당장 1955년 반둥 회의 개최를 통해 미국 중심의 제1세계, 소련 중심의 제2세계 밖에 없던 국제질서에 제3세계라는 새로운 존재를 각인시키는데 인도네시아가 앞장섰기 때문이다.


수카르노의 경제 구상 속에는 경제적으로는 약간 버마나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와 비슷하다고 볼 만한 여지가 존재했었기도 하다. "정치 선언"에서 발표된 8개년 개발계획은 모두를 위한 물질적 복지와 병행하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기본 토대로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보여 주었던 높은 경제 성장으로 보여준 계획 경제의 성공 탓에 인도네시아 지도자인 수카르노가 계획 경제의 큰 매력을 갖게 되었어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수카르노 임기 내내 인도네시아는 독립과 자주를 강조하는 노선에 따라 외국 자본(특히 네덜란드 기업) 국유화, 반서구 정책 등 반제국주의 혹은 경제민족주의에 입각한 정책들을 일관되게 펼쳐왔는데 한편으로는 이 때문에 외자유치 실패로 경제 침체 탈출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또 문화민족주의를 정의와 번영을 안정적으로 구축해주는 수단으로 표현했다. 문화를 정치적 안정의 수단으로 보는 이해방식은 근대적이고 엘리트적인 고급문화와 그들이 통치하고 대변해야 할 인도네시아 인민들의 문화 사이에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수카르노가 말하는 통일된 민족문화는 무엇인가? 이 선언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의 특성을 토착문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견은 받아들여졌지만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지칭하는가였다. 일부는 외부에서 식민지화를 시도하기 이전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누구는 전통가족이나 마을 공동체, 게릴라 조직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보다 도구적인 관점에서 개발에 유용한 현재 문화를 참고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그러나 그럼에도 이들의 의견에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존재했는데 바로 인도네시아의 정치문화가 카리스마형 지도자와 연관성이 크다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와 촌락에서의 정치 구조는 자비롭고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에 의한 통치체제라는 인도네시아 고유의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모델로 삼게 되었다. 한마디로 지도자와 국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이에 비유한 것으로 이렇듯 교도민주주의 시기 정치문화 요소들은 엘리트 내부의 이념적인 갈등을 줄이고 비록 권위주의적인 방식이지만 인도네시아 엘리트와 인민대중들 간의 보다 폭넓은 소통을 하는 데 적극 활용되었다.

산스크리트어로 다섯 가지 원리라는 뜻을 가진 단어인 빤짜실라(pancasila)는 수카르노가 강조한 교도민주주의의 핵심 철학이자 부자와 가난한 자, 이슬람교와 기독교, 토착민과 화교를 결합시키기 위해 발표되었다. 이 다섯 가지 원리는 유일 신에 대한 믿음, 민족주의, 인도주의, 사회정의, 민주주의로 구성되었는데 수카르노는 촌락에서처럼 국가 또한 투표적 행위가 아닌 협의를 통해 이끌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민대중은 협동과 관용의 정신으로 활기차야 하며 이는 서구식 민주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경쟁 원리와는 상반된 노선이었다. 수카르노의 추종자들은 빤짜실라를 인도네시아 신생국가에 지혜롭게 적용해야 할 유토피아 이데올로기로 간주하였고 수카르노는 대중 연설에서 빤짜실라의 근간으로 서구 제국주의와 외국 자본의 수탈에 저항하기 위해 반제국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유신론, 전통주의, 근대주의를 혼합한 사회민주주의를 최종적인 결론으로 제시했다. 그리하여 나온 인도네시아판 "우리식 사회주의"인 마르하엔주의는 사회적으로는 유신론적이면서도 경제 체제는 경제적 집산주의를 바탕으로 하기에 국영기업은 이 체제 아래에서 경제의 주축이었으며 모든 산업 부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 국영기업은 정부 예산과 은행권의 지원을 받게 되는 구조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여전히 수카르노의 아이덴티티로 남아있는 유산 중 바로 그가 제기한 "제3세계"라는 개념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수카르노는 신흥 세력인 제3세계를 기존 제국주의 열강 중심의 제1세계와 대비되면서 소련 중심의 제3세계와도 구별되는 개념으로써 제시하면서 미소 양극 체제에 협조하지 않는 비동맹 국가들을 포함하는 세계 질서를 지향했다. 그러나 정권이 군부 엘리트보다 공산당 쪽에 보다 기울면서부터는 미국의 지역 반란 개입 문제, 말레이시아와의 군사적 대립 관계 형성하며 탈서구화의 길이 점차 가속화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제1세계를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반동세력으로 규정하며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공산당이 정권 내부에서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고 이는 훗날 군부에 의해 수카르노 정권이 축출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어 교도민주주의 체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교도민주주의는 1967년 반공 독재자인 수하르토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사실상 끝나게 되었고 수하르토 임기 내내 구질서의 상징으로 격하당했었다. 수하르토는 교도민주주의에 대해 인도네시아 헌법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했는데 그래도 처음에는 수카르노를 대놓고 비판하진 않았지만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로는 얄짤 없어졌다. 이로써 공산당과 군부를 동시에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여 정권의 균형을 유지하려던 수카르노의 실험은 실패하였고 반공 성향의 수하르토의 집권과 함께 정책은 180도 바뀌었다. 수하르토 정권 시기 동안 노동자, 농민의 정치적 참여와 발언권은 크게 제한되었으며 극단적인 친서구 외교로 전환함에 따라 반서구/반제국주의 노선은 폐기되었다. 또한 수하르토는 "혁명" 대신 "개발"이라는 구호를 앞세웠는데 이 때문에 전임자의 반자본주의 노선을 완전히 폐기하고 국가 주도의 경제개발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과연 수하르토 체제는 교도민주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이 없었을까? 당장 일단 애초부터 군부는 수카르노 정권을 보위하는 한 축이었던 만큼 어쨌든 쿠데타 전까지는 교도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자였다. 그렇기에 이들은 교도민주주의의 유산들을 상당 부분 계승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가령 1945년 헌법과 같은 강력한 대통령제를 비롯해 중앙(수도) 중심의 권력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었고 또 가족, 통합, 기능, 조화 같은 수카르노 시대의 정치적 구호들도 바뀐 게 없었다. 또한 수카르노가 구상한 직능집단 체제는 수하르토 시기에는 집권 여당의 기능을 했으며 오늘날 민주화 이후의 인도네시아 정당 제도에도 큰 영향을 줬다. 요컨대 "혁명"이라는 목표는 사라졌지만 그에 수반된 다른 구호들이 자리를 메꿨으며 수카르노가 혁명을 위해 고안한 시스템들은 신임 수하르토 정권의 개발과 안정이라는 목표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수카르노는 1965년 9월 30일 정변 후부터 1967년 군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물러날 때까지 식물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내용의 표현을 연설 중에 많이 사용하였다. 그런 부분에서 보면 혁명을 지향한 정치가의 유산이 역설적으로 반혁명적이고 반공적인 지도자의 통치 방식에 계승되었다는 부분으로 볼 때 아이러니함이 느껴지면서도 역사의 연속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참고 문헌:


여운경, <1950-60년대 인도네시아의 정치 변화와 수카르노의 “혁명”>, 동양사학회, 동양사학연구 (139), 2017

박은홍, <탈식민체제로서의 ‘우리식 사회주의’의 식민성: 수카르노와 네윈 시기의 혁명노선을 중심으로>, 민주사회정책연구원,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8), 2015

박은홍, <‘제3세계주의’와 ‘아시아적 가치’의 혼종성: 동남아시아 맥락에서의 탈식민주의적 관점>, 민주사회정책연구원,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18), 2010

강영순, <수까르노와 이승만: 제 2차 세계 대전 후 건국 지도자 비교>, 동남아연구소, 동남아연구 21(3), 2015

배동선,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아모르문디,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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