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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Oct 27. 2023

박정희, 한국식 민주주의와 근대화 보수주의 담론의 시조

대한민국 정치인-6

https://youtu.be/KWlVo8mWPJs?si=HoqZKqVyke8Y2-f6

어제는 10월 26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79년 10월 26일이 바로 박정희의 기일이자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린 날이었다는 말이다. 박정희라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크게 입장이 엇갈리는 주제이고 진영에 따라 어느 한 쪽은 공에 집중하지만 반대 진영은 과에 집중하는 등 그에 대한 평가 기준이 다소 진영논리적으로 편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또 세대적으로도 이른바 "산업화 세대"라고 불리는 고도성장기를 지내온 노년층은 박정희에 향수를 강하게 갖고 있지만 중간세대이자 운동권 시대를 살아온 4050 세대는 마냥 좋게 보이지 않는 등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세대별로도 천차만별이기도 하다.


이 글은 박정희의 업적 혹은 과오에 대해 논하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1979년 이후부터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논쟁은 보수 진영, 민주당, 진보 진영을 가리지 않고 계속 쭉 이어져왔기에 지금에 와서 논해봐야 식상할 것이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평한다 할 지라도 진영논리적 성격이 다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뭣보다 가장 큰 이유는 박정희의 정책에 대한 평가 기준이 될 자료들은 워낙에 대중 서적이나 언론 기사들로도 많이 있으니 굳이 내가 또 다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태우 편이나 김대중 편에서는 정책 얘기 위주로 다뤘지만 그건 노태우나 김대중의 정책이 대중적 관심도에서 잊혀져 있기에 한번 해본 부분이 컸고 박정희는 재임기가 대중적 관심도가 높은 전직 대통령이기에 사정이 좀 다르다.


따라서 이번 글의 핵심 주제는 박정희라는 전직 대통령의 행보에 대한 평가가 아닌 그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 철학적 기반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실제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의외로 박정희는 김대중과 함께 한국 현대사 속 정치계 인사들 중에서 옳고 그름을 떠나 꽤나 사상 철학이 확고하고 투철했던 쪽이라 한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본인 저서에서 잘 나와있으며 유신 체제는 그것의 절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박정희가 가지고 있던 사상과 철학은 그의 정치적 후계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오늘날 한국 보수 진영의 스탠스와는 정 반대로 보일 만한 요소들도 상당했다는게 박정희 사상 분석의 묘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박정희식 국가민족주의와 반자유주의 철학


" 한마디로 정치의 목적과 제도의 참다운 가치는 그 나라의 당면 과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고 원대한 국가 목표를 착실히 실현해 나가기 위해 국민의 슬기와 역량을 한데 모아 생산적인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데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어떤 명분과 이유에서든 (중략) 국민총화와 사회안정을 저해하고 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낭비를 조장하는 그러한 형태의 정치 방식은 우리가 당면한 냉엄한 현실이 도저히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

- 1978년 4월 3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諭示) 中 -


이 말은 박정희의 정치사상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의 말을 잘 들어보면 그는 정치의 목적과 제도를 국가에 대한 봉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한마디로 "국가 의식"이 정치 이전에 요구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서구적 자유주의와 박정희의 사고방식이 대치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박정희에게 국가의 목표와 당면과제는 민주적 합의가 아닌 최고통치자의 결단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상적 구상이 제대로 구체화된 게 바로 유신 헌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초월적 영도자에 의한 주권독재로서의 면모도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주권독재랑 카를 슈미트 철학의 연관성 얘기는 후술하겠다)


박정희식 국가주의는 민족주의와도 연동된다. 특히 국권 강탈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와서 5.16이 일어나기까지 한국 현대사는 민족 수난시대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대의 경험이 한국 민족주의와 국가민족주의로서의 특성을 극단적으로 체현한 인물로 나온게 바로 박정희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민족적 자유"라는 것을 항상 강조하던 사람이었고 1969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가의 안전보장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우리가 지켜낸 자유와 해방의 의미는 퇴색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자유"를 지켜낼 것을 주문하였다. 이러한 박정희의 자유는 비자유 민주주의와 냉전적 자유주의의 특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자유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의 또 다른 특징은 자유를 향유하는 우선적 주체가 개인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속한 민족과 국가라는 집단이라는 것도 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자유 "국민", 자유 "아시아", "세계" 자유민, 자유 "우방" 등의 표현은 이런 점을 잘 보여주는 용어다. 박정희의 논리에 따르면 개인은 본인이 속한 집단이 외부로부터 독립된 집단적 자유(자주 독립)을 누릴 때 비로소 자신의 사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박정희의 국가주의는 "민족과 국가"를 영생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국가의 영구성, 국가의 무오류성, 국가의 비도구성으로 구성된 국가주의의 신성화를 정식화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의 국가주의 사고방식과 유사한 언급을 했던 철학자로는 사회계약론의 뿌리인 홉스가 있다. 홉스는 비록 절대주의 왕권을 옹호했지만 원자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사회계약론의 기초를 다진 사람인데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자유를 "사적인 개인의 자유"가 아닌 "공공의 권리"로 규정한 바 있다. 여기서 홉스가 언급하고 긍정한 자유는 지배자에 저항할 수 있는 시민의 자유가 아니라 독립된 공동체가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누리는 자유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홉스의 이 "공공의 권리"로서의 자유는 박정희의 "민족의 자유"와 부합하는 부분이 매우 크다.


또한 민족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박정희는 "큰 자유"와 "작은 자유"를 나누었다. 1974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공산 괴뢰도당으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지키자는 체제"로 언급했으며 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작은 자유를 일시적으로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국가의 큰 자유를 위협하는 사적인 작은 자유는 당연히 박정희 재임기 동안 억압 대상이었고 1962년 세계인권선언 기념식에서 그는 사적인 자유를 부정적으로 언급한 기념사를 남겼다. 내용은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국가민족의 이익과 사회공공 복지 향상에 부합하도록 자유를 조절하여 행사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말은 즉 박정희는 근대적 서구의 자유주의가 아닌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자유를 숭상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국가의 안보와 민족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큰 자유로 정당화하는 것은 박정희에게 자유란 자연법상의 권리라기보단 실정법 테두리 안에서 전체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한도 안에서 허용하는 법실증주의적 개념이었기에 가능한 얘기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실제로 어디까지 자유를 허용하고 제한하느냐는 각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다고 규정했고 이게 한국식 민주주의의 기반 논리가 되었다. 요컨대 박정희는 추상적인 개인 차원에서의 자유와 서구식 자유주의 철학에 적대적인, 리콴유처럼 아시아적 가치를 기반에 둔 비자유 민주주의 성향의 정치가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박정희와 "쇼와 국가주의", 그리고 "반공"


박정희가 5.15 사건, 2.26 사건을 언급하며 찬사를 하자, 황용주가 "천황 절대주의자이고 국수주의자 놈들이며 그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박정희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 4.19 혁명 이후 언론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박정희가 한 말 -


박정희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 쇼와 시대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주도한 국가개조운동 같은 체제 변혁 운동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 실제로 박정희의 정치적 선배나 다름없는 사람이 만주국 산업차관 출신의 전직 일본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였고 본인 스스로 2.26 사건에서 청년장교들이 존황토간의 기치를 내걸고 궐기했던 것이 인상 깊었다고 얘기한 바 있다.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도 세계 혁명을 다루는 파트에서 메이지 유신은 꼭 짚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었고 유신 체제라는 이름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쇼와 유신이라는 국가개조운동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정희 시기의 국민교육헌장, 국기에 대한 맹세, 새마을운동 모두 일본 국가주의 운동의 영향을 일정 부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쇼와 유신 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오카와 슈메이는 국가는 최고의 도덕이고 최고선의 실현으로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의의와 가치는 바로 국가의 이상에 헌신함으로써 확립되며 따라서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저술한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도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했을 때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는 혈서를 쓰기도 했고 아마 이 시기에 박정희가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있으면서 국가주의 사상 및 유신주의적 이념에 깊게 물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963년 대통령 선거에 도전하기 위해 전역한 박정희는 전역식에서 군인의 죽음은 정의와 진리를 위해 소아(개인)을 버리는 희생정신의 극치로 군인만이 가지는 영광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이 거룩한 죽음 위에 있는 국가란 오직 정의와 진리 속에 인간의 제 권리가 보장될 때 가치로서 긍정되는 것이며 국가가 가치 구현 이전으로 돌아가 그 자체가 파멸에 직면했을 경우 혁명이 불가피하다고 하였다. 나는 이것을 보고 쇼와 시대 국가개조운동을 하던 청년장교들이 천황을 떠받들고 간신을 토벌한다는 "존황토간"이라는 구호와 상당히 유사하게 느껴졌음을 발견했다.


반공의 경우 박정희 정권의 아예 국시인 구호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발족할 때나 유신 체제를 선포할 때나 박정희가 항상 앞세웠던 논리는 공산주의 침략자들로 인한 안보적 위기였으며 그렇기에 부패하고 무능한 야당에게 나라를 맡겨둘 수 없다는 얘기였다. 어느나라나 보수주의자들은 질서 보호를 강조하지만 한국 보수주의는 특히 북한과 대치 중인 분단국가라는 상황에서 유달리 반공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박정희를 비롯해 한국 보수주의 진영이 지나칠 정도로 반공과 국가안보를 강조했음에도 오랫동안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국민들에게 암묵적 동의를 얻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신이 절정에 이르면서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등의 퇴폐적인 풍습으로 지목된 것들도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단속되는 일이 생겼다. 동시에 1968년 청와대 무장공비 습격 사건이 벌어지면서 향토 예비군이 창설되고 각 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로 구성된 학도호국단도 생겨났다. 이는 점차 일반 학교들로도 확산되어 갔고 "총력안보의 생활화"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방불케 하는 안보의 일상화가 진행되었다. 학도호국단, 향토예비군, 민방위대를 중심으로 확대되어가던 군사문화는 제4공화국 시대 동안 한국 사회가 병영사회화되는 것에 크게 일조했으며 이 작업의 기원은 박정희 본인의 정치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카를 슈미트의 주권독재론과 유신 헌법


유신헌법 제53조

①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외교·국방·경제·재정·사법등 국정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②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③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를 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④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⑤긴급조치의 원인이 소멸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⑥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긴급조치의 해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으며,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


독일의 법학자인 카를 슈미트와 1970년대 한국의 유신 헌법, 얼핏 보기엔 전혀 연관성이 없어보일 것이다. 왜냐면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시대의 사람이며 한국과는 아예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신헌법을 읽어보면 의외로 슈미트 철학의 냄새를 강하게 맡을 수가 있다. 당장 전문의 "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문구는 정치적 통일체인 국가의 국민적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우적관계를 형상화하고 유신헌법이 예외상태에서의 "정치적 결단"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를 하나 들자면 정권이 주도하는 조국의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이나 개인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따라 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셈.


유신 헌법이나 슈미트의 철학이나 "권위가 법을 만든다"라는 문제의식 하에 출발했으며 그렇기에 유신 헌법상의 대통령 지위 및 권한은 <정치신학> 속 주권자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유신 체제 하에 대통령은 이론적으로 입법, 사법, 행정 3권 행사가 모두 가능한 권력이 집중된 구조인 것으로 실제로 유신헌법 기초 설계자인 갈봉근 교수는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은 영도적 권력에서 나온다고 하였는데 이는 히틀러 총통의 권한을 정치적 지도에 두는 카를 슈미트의 입장과 대동소이하다. 그는 또한 처음부터 국가적 존립과 같은 위기의식, 국가의 통일과 같은 목적의식에서 대통령에게 권한을 집중하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권력의 인격화를 결과하게 함으로써, 제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어서 영도적 권력을 확립케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신 헌법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바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이다. 유신 헌법 제53조는 긴급조치권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는 모든 사법적 심사대상에서 제외될 뿐 아니라 국회의 사후추인권도 필요없게 해준다. 또 이러한 긴급조치권 역시 슈미트의 "비상 명령"과도 매우 유사한 논리를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긴급조치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 제48조나 프랑스의 비상대권 이상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한마디로 유신 헌법 치하의 대통령은 법률 제정, 헌법적 효력, 헌법 개정 권한 등 사실상 무제한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유신 헌법은 특히 헌법적 구속요건에 의해 발동되는 계엄령 선포 등 위임독재를 넘어서 헌법 그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주권독재를 제도화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카를 슈미트는 바이마르 헌법 재48조가 주권독재를 인정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그 조항의 적극적 내지 포괄적 해석을 통해 대통령의 주권적 독재의 가능성과 헌법 개정의 시도가 가능함을, 즉 바이마르 헌법은 비상시기에 대통령 권한을 무제한으로 부여했다고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슈미트는 대통령 주권 독재를 산출하는 정치적 정당성의 최종심급으로서의 헌법제정권력에 대해서는 결정을 보지 못했다. 왜냐면 대통령은 국민의 대표이지, 헌법을 산출하는 헌법제정권력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딜레마 속에서 독일은 결국 히틀러의 개인독재로 귀결되었고 유신 체제는 정치적 난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꺼낸게 통일주체국민회의 창설이었다.


유신 헌법의 설계자들은 대통령과 의회라는 주권 대표 기구가 있음에 긴급조치를 통한 대통령 독재와 더불어 주권적 수임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었다.  이는 헌법제정권력을 항구적으로 제도화하기 위함이었으며 물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출권이 주어져 박정희 1인의 종신 집권을 제도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단지 특정인을 안정적으로 대통령으로 선출하는게 목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할 필요도 없이 제5공화국처럼 간선제로 체육관 선거하면 그만이었다. 또한 단순히 집권세력의 통일성과 안정성을 키울 목적이라면 남미 군사정권들처럼 군사평의회 설치하는 걸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유신 체제가 국민이 직접 선출하며 약 2,000~5,000명의 정원을 가진 대의제로서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헌법 최고주권기관으로 명시했다는 것은 곧 카를 슈미트가 말한 주권독재론의 최고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인민의 헌법제정권력의 문제를 "정치신학"의 논리가 아니라 정치적 정당성 창출의 제도화를 통해 결정을 보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그 용어와 내용에서 모두 슈미트가 말하는 인민의 헌법제정권력으로서의 주권기관의 형식을 체현하고 있다. 가령 "통일주체"라는 표현은 슈미트의 민주주의 정의, 즉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동일성에 기반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라는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의 가장 긴급한 목표를 기준으로 결단을 강제하는 주권자적 지위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권독재의 문제의식에서 중요한 점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헌법상으로 대통령, 의회, 법원 등 전통적인 3권보다 우위에 놓인 최고주권기관이라는 사실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 권력에 복속되어 있긴 하였으나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뽑고, 무엇보다 항구적인 헌법제정 권한을 지녔다는 점에서 유신헌법은 슈미트의 헌법정치이론의 정치문법 내에서 슈미트의 발상을 계승 후 뛰어넘으려는 제도적 혁신을 시행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근대화 보수주의와 진보적, 보수적 이중 성격


원래 유럽의 보수주의는 프랑스 혁명 당시만 해도 근대 정신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1848년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대두되면서 기존의 질서와 사유재산제를 보호하기 위해 보수주의는 근대 정신을 일부 수용하여 고전적 자유주의에 수렴하는 현대 보수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반면 해방 후 집권한 한국의 보수주의 진영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구하기 위해 산업화 계획을 시행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이를 위한 정당화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이 점에서 구한말 위정척사파가 19세기 초 유럽 보수주의와 유사했다면 해방 후 한국 보수주의 진영은 제한적이나마 현대 보수주의와 유사한 셈이었다.


근대화 보수주의는 서구 근대사상사적 맥락에서는 형용모순이지만 한국과 같은 비서구 신생 독립국에서는 가능하고 불가피했다. 서구 보수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제한적 정부를 지지한 것과는 달리 한국의 근대화 보수주의는 국가 주도에 의한 위로부터의 경제개발을 추구했고 이에 따라 광범위한 국가의 시장 개입이 시행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신생 국가들의 "서구 따라잡기" 전략의 일환으로서 하나의 생존 전략이었고 지금까지도 국민의힘을 비롯한 한국 보수 진영이 여전히 국가개입적, 국가주의적 면모가 남아있는 것에는 이때 확립된 근대화 보수주의의 영향이 컸다.


재미있는 건 버크를 비롯해 서구의 보수주의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전통을 중시하며 점진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했지만 한국의 근대화 보수주의는 과거의 역사적 과오에서 비롯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급진적인 근대화를 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근대화 보수주의는 "조국 근대화"라는 급진적 개혁을 통한 고도 산업화와 풍요로운 사회 등 밝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건 어떤 면에서 서구식 보수주의보다는 19세기 유럽 진보사상과 더 비슷하다고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비전은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민족중흥"이라는 용어가 나왔고 신라의 화랑정신, 단군 성조, 고구려의 용맹과 기개, 세종대왕의 한글 창시가 강조됨에 따라 근대화 보수주의가 진보적 전망과 복고적 비전을 한데 아우르게 되었다.


박정희의 진보적인 면은 1967년 서울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그는 승리는 과거의 잔재를 떨쳐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 표현했다. 또한 1969년에 어느 연설에서는 온갖 전통적이고 수구적이고 낡은 것이 급속도로 근대화되어 변화하고 있는 당시 상황을 매우 긍정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정희에게 현재라는 시점은 서구 보수주의의 자랑스러운 전통의 권위를 보존하고 확충하여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진행되어온 과거가 도달한 가장 최근 지점이 아니라 진보주의에서처럼 장차 도달해야 할 원대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미래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박정희는 기존 정치질서의 보수를 강하게 주장하는 또 다른 성향도 있었다. 그는 민주화를 위해 반정부운동을 전개하는 학생들의 급진성을 비판하면서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전형적인 보수주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고 또 정국의 안정 없이는 경제발전도 없다면서 급진적인 변혁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선을 그은 바가 있다. 이어서 농민들을 위한 쌀값인상이 노동자들의 노임 인상을 가져오고 이로인해 공산품의 물가앙등이 초래됨으로써 결국 농민들이 손해본다는 예를 들어서 자신의 반대 논리를 설파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박정희의 근대화 보수주의는 서구적 관점에서 보자면 진보적, 보수적 요소가 혼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맺음말: 대한민국 정치에서의 비자유민주주의, 근대화 보수주의 담론의 선구자


박정희는 죽은지 몇십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보수 진영에서는 가장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이라 할 수 있으며 반공과 근대화,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한 박정희식 보수주의는 그의 사후 한국 보수주의 정치의 전개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물론 김종필이 사망하고 김기춘이 감옥간 이후에는 한국 정치에 실질적으로 박정희 세력의 계승자라 할 만한 존재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한국 보수정당의 주 지지층인 노년층과 TK 지역이 박정희에 강한 향수를 보이고 있는 산업화 세대인 만큼 그의 유산은 여전하다고 볼 여지가 있다.


다만 21세기 이후 뉴라이트 세력이 등장하고 한국 보수진영이 우파 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와 박정희의 유산을 동시에 잡으려고 하다 보니 인지부조화가 심하게 오고 있는 중이다. 위에서 계속 말했지만 박정희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사상에 적대감을 가지고 일본의 2.26 사건에 영향을 받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사람이었으며 나치 법학자 카를 슈미트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신 헌법, 국가주의와 더불어 민족주의의 강조 등 뉴라이트의 이념과는 애초에 공존할 수가 없는 대통령이었다. 저번에 이범석과 족청이 대한민국 초창기 국가 형성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는 글도 썼었다시피 한국 현대사에서 자유주의 우파 경제 논리 따질려면 보수 쪽부터 까여야 할 요소가 훨씬 많은 건 덤이고.


한국 사회에서 정치 얘기를 할 때 박정희에 관한 주제는 항상 불판이 열릴 정도로 뜨거운 감자다. 그러나 그에 비해 박정희가 무슨 정치 철학을 가졌으며 어떠한 사상적 기반이 있었고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의 장이 열리지 않는 것 같다. 10.26 사건 혹은 박정희 사망 44주년을 맞이 하여 정치적 진영논리 잣대로의 싸움만 하는 걸 넘어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평가의 장도 마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참고 문헌:


박정희, <평설 국가와 혁명과 나>, 기파랑, 2017

박정희,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기파랑, 2017

카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살림, 2012

카를 슈미트, <정치신학: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그린비, 2010

강정인,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 아카넷,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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