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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07. 2023

중앙아시아의 북한, 투르크메니스탄의 전체주의 체제

북한 뺨치는 폐쇄 국가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해 ARABOJA

https://youtu.be/WIY1FXy9qtg?si=XLqr0GIM8C6J7DTz

현대판 폐쇄 국가하면 어떤 나라가 생각나는가? 대부분은 바로 윗동네인 북한을 떠올릴 것이고 조금 더 국제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에리트레아라는 군국주의 국가도 생각날 것이다. 이들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종합해보자면 극도의 폐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기본이며, 지도자에 대한 숭배가 일상적이고(특히 북한), 동시에 외부로부터 고립을 스스로 자처하며, 국민들을 웬만한 권위주의 국가 이상으로 사회를 군사화 시키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북한만 하더라도 위의 조건들을 모두 만족하는 21세기판 빅브라더 사회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폐쇄 국가가 북한, 에리트레아 같은 곳 외에도 하나 더 있다. 그것도 아프리카나 중동 같은 막장 사회도 아닌 중앙아시아에 말이다. 바로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곳인데 이들은 놀랍게도 이들은 별다른 내전 같은 분쟁이나 자연재해 등 인명이 수시로 죽어가는 재앙에 시달리고 있지도 않는다. 게다가 굉장한 수준의 폐쇄, 통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도 북한보다도 훨씬 국제적으로 이미지가 나쁘지 않기...보다는 그냥 관심 자체를 안 받는 편이다. 그래서 투르크메니스탄의 진면목과 실체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별 관심 거리가 못되기에 한번 각 잡고 다뤄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언제부터 지도자에 대한 개인 숭배가 시작되었을까? 놀랍게도 국가 형성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후 후임 정권이 전임자와의 사이에 단절 기간이 있었음에도 계속 개인숭배 만큼은 연속적으로 이뤄졌다. 초대 대통령 니야조프는 1991년 말 독립과 함께 "Türkmenbaşy(투르크멘의 아버지, 투르크멘바시)"로 자신을 지칭하며 국가 부흥 운동을 통한 황금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하였다. 니야조프는 투르크멘 정체성과 무슬림 문화에 기반을 둔 세속 국가 건설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소련 시기 억압받았던 관습 및 생활 양식을 부활하여 부족으로 흩어진 사회를 재통합하고 공산당을 대체할 체제를 완성하는 것에 있다. 이렇게만 보면 괜찮은 목표처럼 보이겠으나 문제는 니야조프가 그 방법으로 썼던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지도자에 대한 개인 숭배화였던 것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초대 대통령 니야조프. 그는 세상에서 가장 괴상한 독재자 중 하나였다.

투르크메니스탄은 1924년 소련에 편입되기 전까지 독립적인 민족 국가를 스스로 형성해본 적이 없던 나라였다. 왜냐면 과거부터 투르크메니스탄은 부족 중심 사회가 오랫동안 이어져왔기 때문인데 결국 이는 소련이라는 인위적인 통합이라도 추진하는 구심점이 사라지고 독립하면서 다시 부족 중심으로 분열될 조짐이 보이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니야조프에게 국가 통합과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하여 단일민족화시킬 필요성이 절실했으며 그것의 수단이 바로 지도자인 니야조프 개인에 대한 숭배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니야조프는 자신이 만든 일종의 종교 경전(?)인 <루흐나마>에서 "투르크멘 민족이"라는 표현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작업의 산물인 <루흐나마>는 투르크멘의 정체성과 니야조프 정권의 정당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 잡는 방법이기도 했다. <루흐나마>는 투르크멘 민족의 역사가 5천년이 넘게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오구즈 칸이 민족의 시조라고 내세우는데 니야조프는 단순히 이 종교경전인지 설정집인지 하는 것에서 끝내지 않았다. 대놓고 수도 아쉬하바트에 민족 영웅들의 동상을 세우거나 역사적인 장소를 재조명 및 발굴하는 사업을 국가의 최우선 순위로 두었다. 특히 1897년 제정 러시아와 싸움을 벌였던 괵테페 전투의 장소는 비록 패배했지만 투르크멘 민족의 저항 정신을 일깨웠다는 이유로 성지처럼 되었으며 그 외에도 유적지 발굴 사업들이 엄청나게 많이 진행되었다.


저렇게 오구즈 칸을 민족의 영웅으로 띄운 이유는 간단한데 바로 니야조프 본인이 오구즈 칸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윗동네에서 김일성의 증조부가 제너럴 셔먼 호를 격침시켰다는 걸 박규수를 역사서에서 지우면서까지 이야기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 이를 통해 니야조프 본인을 투르크멘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 투르크멘 사회는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 유목 집단은 가부장적 사회를 구성했으며, 그 사회에서 권위자는 1인이었는데 사실 이 요소 때문에 니야조프가 쉽게 최고 통치자로 받아들여진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니야조프는 오구즈 칸이라는 투르크멘 민족이 모두 공감할 만한 공통의 역사적 인물을 만들어 내어 하나의 민족으로서 투르크멘인을 강조했고, 스스로를 오구즈 칸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으로 설정해서 투르크멘 가부장으로서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문재인의 투르크메니스탄 방문 당시

언어 정책도 투르크멘 민족 만들기에 치중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게 러시아어의 지위를 격하시킨 것이었다. 대신 소련 시기에 묻혔던 투르크멘 언어를 격상시켰으며 러시아어의 명칭들과 표현을 투르크멘식으로 다 바꿔버렸다. 더 나아가 키릴 문자가 아닌 라틴 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투르크멘 문자를 공개했으며 러시아어 방송과 간행물 발간을 다 중단시켜 버렸다. 더불어 두번째 공식 언어를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지정하였으며 비투르크멘 언어 사용자들, 특히 러시아어가 주언어인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권력에서 최대한 배제시켜 버렸다. 또한 아할 테케 부족에 힘을 실어주면서도 단일한 투르크멘으로서의 정체성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더 웃긴 건 고르쿠트 아타, 괴로글리, 막탐굴리, 오구즈 칸 같은 니야조프에게 투르크멘 정신을 계승시킨 역사적 영웅 뿐 아니라 니야조프 본인과 가족들까지 점차 우상화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인데 일례로 그의 어머니는 아이에 대한 사랑의 상징으로 떠받들어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2차대전에 참전했던 경력을 이용해서 강인한 군인의 상징으로 세운 건 덤이었고. 외부 사람이 보기에 북한의 백두 혈통 만큼이나 코미디가 따로 없는 짓거로 보이겠지만 이것도 니야조프가 투르크멘의 전통과 문화를 교묘하게 잘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루흐나마>에서는 투르크멘 민족이 조상을 공경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결국 니야조프는 전통을 이용해서 새로운 역사, 민족 영웅을 만들어 투르크메니스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슬람교도 개인 숭배에 이용되어 니야조프는 스스로 <루흐나마>가 무함마드의 삶의 원리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꾸란>을 이어받은 경전이라 강조하였고 투르크메니스탄 내 모스크들을 <꾸란>과 <루흐마나>의 내용으로 장식하였다. 이걸로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사실상 성스러운 지도자가 된 셈. 학생들은 학교에서 정규 교육과정 중 하나이자 모든 시험에 출제되는 <루흐나마>를 학습해야 했고 갑자기 건강을 이유로 공공장소에 흡연을 금지하거나(그래놓고 의료진 대량해고를 저지른 건 덤), 화폐에 자신의 초상화를 박아넣거나, 자신의 모습을 딴 동상과 <루흐나마> 조형물들을 전국에 박아놓는 등 진짜 북한이 하는 짓과 딱 똑같은 행보를 보였다. 이는 투르크멘의 민족 정체성을 만들려는 시도이긴 했으나 그 방법론이 개인 숭배였다는 점에서 중앙아시아의 부족 문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온 도시가 하얀색이다...

니야조프의 기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투르크메니스탄에 새로 지어는 모든 건물을 하얀 대리석으로 건설하도록 명령했는데 그 결과 실제로 투르크메니스탄의 수도 아쉬하바드는 온통 하얀색의 건물로 가득차 있었다. 이는 오로지 니야조프 한 사람의 발언이 낳은 결과였다. 이외에도 자신의 카레이싱을 위해 도로를 항상 비워둬야 하며 2005년에는 국민의 예술성과 가창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립싱크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한 가지 니야조프가 벌인 재미있는 기행이 더 있는데 그건 바로 자신이 멜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매년 8월 둘째 주 일요일을 '멜론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북한하고 상당히 닮아있다고 계속 이 글에서 말해왔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우연의 일치는 아니고 니야조프 본인이 대통령 취임 직후에 평양에 가서 직접 1인 독재 방식을 보고 배웠기에 저리 된 거다.


이런 미친 놈이 도대체 어떻게 정권을 유지한 것인가 싶기도 할 것이다. 북한의 김씨 일가만 해도 워낙 독보적인게 김일성을 따라하려 했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어떤 꼴이 났는지만 봐도 말이다. 그러나 개인숭배를 지향하는 꼴통인 것은 둘째 치더라도 니야조프는 적어도 한 국가의 지도자로써 능력 만큼은 있긴 했다. 최소한 니야조프는 구 소련 지역 다른 국가의 엘리트들과는 달리 겉으로는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있었기에 반부패 켐페인을 하면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고 부패한 관료들을 질책하는 장면을 그대로 TV에 내보내서 부패에 맞서 싸우는 청렴한 지도자로 자신을 포장하기도 했다. 뭣보다 애초에 투르크멘인들은 유목 생활을 했었던 만큼 전통적 가부장제에서 오랫동안 살아왔었는지라 니야조프가 저러는 것도 기존의 가부장제가 국가적 단위로 확대되었구나 하고 순응하기에 너무 좋은 정서가 깔려있었다.


니야조프가 그래도 럭키 김씨 일가인 이유를 하나 더 꼽자면 경제 정책의 성과가 없진 않았기 때문도 있다. 물론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가 오면서 1인당 GDP가 감소하는 등 휘청거리기도 했으나 1998년부터 다시 성장세에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부터 민영기업 확대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는데 2001년에 이르어 18,000개를 달성, 즉 전체의 72%까지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1인당 GDP도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계속 증가하였으며 이때 중국이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는 투르크메니스탄은 양잠업, 비단 산업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고 중국 측과 수요가 맞아 들어가게 되면서 성공한 부분도 컸다. 더 의외인 점은 북한 김씨 일가나 또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인 우즈베키스탄의 독재자였던 이슬람 카리모프와는 달리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량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걸 넘어서 사형제를 폐지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1인당 GDP도 2003년부터 계속 증가하여 2006년이 되서는 6,500 달러를 돌파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투르크메니스탄 국민들이 니야조프를 지지했던 것은 바로 구 소련 시절의 복지 제도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니야조프 정권은 천연가스 수출로 번 돈의 일부를 보조금 형태로 국민들에게 지급하거나 석유, 가스, 소금을 비롯한 기본 생필품을 무료로 공급하는 체계를 소련이 망한 상황에서도 지속해왔었다. 동시에 상수도, 전기, 가스 세금도 면제해줬었고. 이런 니야조프 정권의 정책 덕분에 투르크메니스탄의 국민들은 음식과 옷 같은 생필품은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서 다른 제3세계 국가들처럼 굶거나 아사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이런 걸 보면 니야조프가 미친 놈처럼 보여도 최소한 민생은 구 소련 출신 국가들의 지도자 중에서는 잘 챙긴 사람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현충원을 참배하는 베르디무하메도프

그러다가 2006년 니야조프가 갑자기 사망하였고 이어서 집권한 것은 베르디무하메도프라는 지도자였다. 초기에 그는 <루흐나마> 강요 분위기를 금지하고 니야조프 집권기에 세워진 동상을 철거하는 등 얼핏 보기에 개혁 성향이 아닌가 생각이 드는 지점이 있던 대통령이었으나 실상은 정 반대였다. 도시를 오가는 모든 차를 흰색으로 바꾸라고 명령한 것은 물론이고, 니야조프가 '멜론의 날'을 지정했던 것처럼 베르디무하메도프는 개를 좋아해 '개의 날'을 국경일로 지정해 전 국민이 쉬는 날로 정하기도 할 정도였다. 전국적으로 니야조프 우상화를 금지하고 전임자의 흔적을 지우며 <루흐나마>조차도 대통령 취임 선서에서 빼던게 후계자 겸 2대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디무하메도프였지만 그도 결국은 니야조프와 다른 방식으로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던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도 베르디무하메도프도 니야조프와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민생 안정 능력은 있었던 독재자이긴 했다. 베르디무하메도프 정권은 니야조프의 기조를 계승하면서도 개방적인 경제 정책을 펼쳤는데 덕분에 2000년 이후로 연평균 10%대의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또 러시아에게 집중되었던 자원 수출이 중국, 이란으로도 범위가 확대되었으며 화폐 개혁, 금융 시스템에 대한 경제 개혁 정책이 실시되어 외국인 직접 투자가 전임 정권 시절에 비해 확실히 급증한 게 티가 날 정도였다. 무엇보다 복지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향상 작업이 시작되어 니야조프 시기 동안 수혜층이 줄었던 연금제도가 개선되어 국민들의 혜택 범위가 크게 늘어났으며 국가 재정에서 교육, 보건, 사회 서비스 등에 대한 지출은 꾸준히 증가하여 니야조프 때보다 삶의 질이 더 좋아졌으면 졌지, 결코 악화되진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전임자 니야조프의 우상화 작업을 폐지하고 다당제를 도입하며 개혁적인 행보를 보이던 2010년 전후 시점이 베르디무하메도프에게는 자신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던 시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2007년도 당시만 해도 정치범 문제에 강경히 나왔던 베르디무하메도프가 그래도 이 정도로 후퇴해서 야당 권한 키워주고 민간 신문 창설 허용해주는게 개과천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오히려 민주적 개혁을 전면에 앞세우고 배후에서 국정장악 능력을 키우려는 기만 전술에 가까웠다. 실제로 저 시기에도 투르크메니스탄이 반체제, 인권 운동가들에게 공갈과 살해 협박을 일삼는 "최악의 인권 탄압국"로 분류되는 통계가 상당수였다.

투르크메니스탄의 통제, 폐쇄 강도는 다른 곳도 아니고 북한에 비교될 만한 수준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임자 니야조프 격하와 함께 베르디무하메도프의 우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본인의 초상화를 만들어 곳곳에 뿌린 것을 시작으로 야나르다그 동상 건설, 2015년에는 아예 말을 탄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황금 동상을 만들면서 전임자의 개인숭배를 청출어람하는 행보까지 선보였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니야조프의 오프라인 숭배(?)와는 달리 인터넷 매체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투르크메니스탄 외교부 웹사이트만 해도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국제뉴스(라 쓰고 베르디무하메도프 홍보)를 보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베르디무하메도프가 겉으로 보기엔 니야조프보다 개혁파 정치인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과는 달리 실상은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1인 독재를 전임자보다 더 공고히 하는데 성공한 럭키 김정은인 셈.


2022년 베르디무하메도프는 대통령직에서 사퇴하는 대신 아들인 세르다르에게 세습하면서 상원인 인민평의회의 의장을 역임해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투르크메니스탄의 국민들은 외국여행을 통제받고 있으며 외국인 학자가 국가 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제재하고 있는 상황이며 신문과 TV, 거리 곳곳과 모든 가정집, 교통수단, 심지어는 비행기에까지 대통령의 사진을 걸어두어야 하는 규정은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당연히 방송국, 언론사 모두 국영으로 운영되며 광고 또한 국영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상태이며 자국민들의 해외소식을 접하지 못하도록 개인 가정에서 위성방송을 시청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모자라 VPN까지 다 금지 대상인 실정이다.


투르크메니스탄은 비자를 받기 위한 개인, 단체 여행 비용이 하루에 200~400달러로 매우 비싼 편인데 그것도 모자라 입국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하루종일 현지 투어가이드와 함께 여행을 해야 한다. 그래서 2019년도 투르크메니스탄에 온 관광객은 단 14,438명 수준에서 끝났다. 투르크메니스탄에 갔다온 어느 여행 유튜버가 말하길 도시는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매우 깨끗하게 정리정돈된 상태인데 사람을 마주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건 어떤 면에서는 북한의 평양보다 더한 수준이다. 특히 민주주의 지수와 언론자유 지수에서는  투르크메니스탄이 기록한 순위는 북한,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에리트레아랑 비슷한 급으로 분류된다. 코로나 환자 0명 드립칠 때부터 이 국가는 스스로 정보 통제하는 폐쇄적인 국가라고 스스로 밝힌 셈이었으니.

투르크메니스탄의 국기

니야조프와 베르디무하메도프, 이 두 독재자는 스스로 적법성을 나타내기 위해 정치기구를 잘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베르디무하메도프는 니야조프보다도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방법을 더 영악하게 잘했는데 2008년 헌법 개정을 통해 할크 마슬라하티를 폐지하여 의회의 권한을 강화시킨 것이다. 의회의 권한 강화가 중요한 점은 대통령이 정치 개혁에 앞장선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으면서도 의회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충성하고 있는 상황이 변치 않는다는 걸 이용해 막강한 권력을 유지 및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 베르디무하메도프는 형식적인 개혁을 통해 자신의 권위에 민주성과 합법성을 부여한 것은 전임자보다도 훨씬 더 머리를 영악하게 잘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니야조프조차도 못했던 아들로의 권력 세습까지 이어냈으니 더더욱.


그래서 투르크메니스탄은 경제 통계의 신빙성 문제도 있고 해서 교류 문제에 있어서 100% 믿을 만하지는 않다고 본다. 다만 그래도 한국과의 교류에서 장점이 있다면 경제적 차원에서 보면 IMF 체제에도 가입되지 않아서 국가부도의 위험성이 비교적 적은 편이고 명목상의 1인당 GDP 또한 7,500 달러를 기록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카자흐스탄에 이어 2위의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 통계 조작 얘기가 나오다 보니 거품이 많이 끼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어서 뭐라 말하기가 조금 그렇고 그럼에도 정부와 체제의 안정성 자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수준의 통제 사회 덕분에 꽤나 높은 건 사실이다. 우리는 이러한 투르크메니스탄의 블루오션 및 높은 경제 성장 전망이라는 "명"과 극도의 폐쇄 국가라는 "암"을 정확히 분석하고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확실한 우호국의 교두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오현진 외, <투르크메니스탄의 개인숭배: 니야조프와 베르디무하메도프 간 연속성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평화연구소, 문화와 정치 9(2), 2022

이지은, <투르크메니스탄 권위주의체제 연구>,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아시아문화연구 22, 2011

성동기, <유목문화가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독재체제 형성에 미친 영향 분석>, 한국슬라브.유라시아학회, 2022

황영삼, <부족 갈등에서 통합에 이르는 과정과 잠재적 문제: 투르크멘 민족의 경우>,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러시아연구 28(2), 2018

조정원, <투르크메니스탄의 경제 발전 정책과투르크메니스탄 - 중국 경제 협력>, 중앙대학교 외국학연구소, 외국학연구 (43), 2018

김영식, <투르크메니스탄의 체제전환과 경제발전>, 중앙대학교 외국학연구소, 외국학연구 (17), 2011


https://diverseasia.snu.ac.kr/?p=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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