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문의 변에서 제1차 조슈 정벌까지
양이론 시기 조슈번은 조정의 적이 될 정도로 궁지에 몰렸었다. 조슈번의 구사카 겐즈이를 중심으로 하는 양이파들은 외국 선박을 공격하는 일을 벌였고 이들은 점점 과격해졌다. 특히 당시 수도였던 교토는 양이파의 본거지로 변해가는 중이었고 오죽하면 도막파 진영인 사쓰마번의 실권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조차도 조정의 감시와 교토의 치안 단속을 주 임무로 하는 교토 슈고쇼쿠라는 직책을 만들 것을 에도 막부에 제안할 정도였다. 막부도 이를 받아들여 아이즈번 다이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1862년 9월에 그 책임자로 취임시켰고 심지어 서양에 적대적이던 고메이 천황조차도 조슈의 양이지사들에 과격함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결국 1863년 8월 18일, 막부의 공무합체파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와 사쓰마번의 번주 시마즈 히사미쓰는 교토 조정에서 급진 양이파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시행한다. 이 사건 이후 조슈번의 다이묘 가문인 모리가는 금문경호에서 파면되고 조슈측을 지지하던 조정의 구게인 산조 사네토미를 비롯한 7명의 공경은 조정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금지당해버렸다. 또한 교토의 모리가 저택은 체류가 더 이상 허가되지 않았으며 이는 사실상 존황양이 운동의 핵심 세력인 조슈번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란에 빠진 조슈번 내부는 스후 마사노스케 같은 신중론자들과 다카스기 신사쿠 같은 급진 양이론자들이 뒤섞여서 내분에 빠지다가 과격 노선으로 전환되었고 그마저도 얼마 후 신센구미에 의해 여관에서 습격당해 양이지사들의 상당수가 사망하는 이케다야 사건이 발생해버리며 더 골치아파진다.
이케다야 사건은 쇼카손주쿠 문하생 출신자 5명을 신센구미의 칼에 잃은 조슈번이 흑화할대로 더 흑화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조슈번 양이파 세력은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동의 하에 1864년 병사들을 이끌고 천황이 거주하는 교토 근처, 그것도 궁궐의 여러 문들 중의 하나인 하마구리고몬에 집결하여 "금문의 변"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조슈의 병력이 2천명 정도였기에 유리했지만 시모노세키 포격 탓에 서구 열강의 어그로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교토에 막부측 지원으로 사쓰마번 지원군이 도착하며 적의 수는 곧 바로 약 2만명으로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조슈군은 10배의 진압군에게 반나절 만에 패하고 말았으며 양측의 전투로 교토에는 3일 밤낮으로 화재가 발생하였다. 무엇보다 긴몬의 변이 최악의 실책이 된 것은 존황을 자처하는 조슈번 병사들이 하필 교토의 교소(궁궐) 안을 향해 포격한 것으로 인해 분노한 고메이 천황이 이틀 후인 7월 20일에 막부에게 본인 스스로 "조슈정벌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조슈번에 벼르고 있던 막부는 천황의 동의도 얻었겠다 하니 대군을 모아 출전했다. 조슈정벌 총독은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츠가 맡았으며 부장은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모치아키, 참모는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맡았다. 참고로 정벌군의 병력은 대략 15만 명 정도였다. 게다가 1863년 그해에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하고 미국 상선과 프랑스, 네덜란드 군함을 포격했던 것 때문에 서구 4개국 연합군에 의해 포격 세례를 받았었기에 더더욱 엎친데 덮친 격이었다. 이에 조슈번이 고른 선택은 항복이었다. 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막부에 공순한다는 결론을 내린 후 막부군에 항복하였으며 그 직후 막부군은 철수하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간신히 벗어났던 것이다.
대신 조슈번은 3명의 가로 할복, 4명의 참모 참수, 야마구치성 파괴 및 막부에 공순 서약 등 여러 대가를 치렀다. 또한 조슈번은 사태의 원흉이었던 존황양이 세력들을 추방하기로 막부와 약속했고 이 과정에서 존황양이 세력은 권력을 상실했다. 그 후 보수속론파가 권력을 잡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865년 12월, 도망쳤던 다카스기 신사쿠가 다시 조슈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이때 조슈번 양이지사들이 지지를 얻은 이유는 이미 시모노세키 봉쇄 사건 당시부터 기병대(기헤이타이)라는 일종의 민병대를 창설하여 무사계급으로 구성되지 않아도 된다는 원칙 하에 일반인도 군사조직에 참가할 수 있게 한 것도 있었다. 이는 그동안 일본에서 무사계급 중심으로 군대가 구성되었던 룰을 깨는 파격적인 시도였으며 그 뒤 일본 군제가 평민군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연 것이었다.
막부에 공순하던 보수파가 물러난 이후 조슈번은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개혁을 시작한다. 먼저 시작한 것은 오무라 마스지로의 등용과 함께 시작된 게이오의 군정개혁이었다. 오무마 마스지로는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의 의견을 참고하여 기헤이타이 시절처럼 무사뿐 아니라 농민이나 정민으로부터도 병사를 모집하고 번이 급여를 부담하는 군제개혁을 단행했다. 동시에 가쓰라 고고로가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를 나가사키에 파견하여 사쓰마번을 경유해 미니에 총 4,000정, 게벨 총 3,000정을 구입하였다. 원래 조슈번은 1차 정벌 이후 외국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것이 금지당했지만 조슈와 사쓰마가 뒤에서 동맹을 체결하면서 사쓰마번이 글로버상회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조슈에 되팔이하는 방법으로 우회적인 무기 거래를 했다. 즉 조슈와 사쓰마의 거래는 국내 거래였기 때문에 막부의 규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1-1. 사쓰에이 전쟁,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보는 사쓰마와 조슈의 차이
사쓰마와 조슈, 두 집단은 알다시피 삿초동맹을 맺어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메이지 신정부를 세운 주축일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 초입부까지 일본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번벌 정치의 직접적인 뿌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둘은 앙숙이기도 했는데 일례로 조슈는 메이지 신정부 이후 일본 육군에 영향을 줬으며, 반대로 사쓰마는 해군 쪽에 영향을 줬는데 일본 제국 시기 동안 육해군 대립이 극심한 수준이었던 걸 생각하면 재미있기도 하다. 심지어 둘은 삿초동맹 맺기 직전인 제1차 조슈 정벌 때까지도 라이벌 관계를 넘어 거의 적에 가까운 수준의 대립구도를 보였다. 이렇듯 라이벌이자 애증관계이던 조슈와 사쓰마의 관계는 사실 두 번의 특징이나 전략의 차이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두 번 모두 도막파 진영에 있었던 만큼 서구 열강과 대립한 적이 있었다. 사쓰마의 경우는 사쓰에이 전쟁, 조슈는 시모노세키 해협 봉쇄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벌어진 서구 열강과의 대립에서, 최종적으로 무력충돌까지 갔음에도 사쓰마와 조슈의 대응은 꽤나 달랐다. 먼저 나마무기 마을 사건으로 영국의 공격을 받은 사쓰마의 경우 굉장히 영악하게 전략적이었다. 1863년 6월, 영국이 1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했을 때 사쓰마는 거부하고 전쟁에 돌입했다. 물론 일개 지방정부가 영국을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은 없었지만 이미 사쓰마는 근대식 군대를 가장 잘 갖춘 번 중 하나였고 어느정도 전투역량을 가진 작은 병영국가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사쓰에이 전쟁은 3일간 7척의 영국 전함과 사쓰마 해안포대 사이의 포격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은 최대한 버티면서 영국 해군이 증기선 내부 석탄의 소모량 때문에 물러나기를 기다리며 싸웠다. 결국 예상대로 영국은 물러갔고 함대 지휘관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질책 받았으며 반대로 사쓰마 번의 무사들은 천황에게 직접 칭찬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사쓰마는 의외로 영국에게 2만 5천 파운드의 배상금을 요구하겠다고 나온다. 사실 이건 사쓰마 측의 속셈이 있었는데 사쓰에이 전쟁에서 영국 무기의 우수함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기를 팔아주는 조건으로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딜을 친 것인데 문제는 돈이었다. 왜냐하면 사쓰에이 전쟁에서 사쓰마번은 모든 역량을 다 소진했었기 때문이다.
근데 여기서 사쓰마는 잔머리를 한번 더 써서 막부를 끌어들인다. 막부 대신 천황을 위해 싸웠다는 명분으로 막부가 배상금을 내야 한다는, 얼핏 보기엔 막무가내로 보일 만한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당연히 막부가 거절할 게 뻔한 요구였지만 중간에 협상으로 절충안을 마련했는데 그렇게 대납까진 못해도 빌려주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막부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는 제안인게 훗날을 위해 반항적인 번의 채권자가 되어 그들을 압박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쓰마가 그걸 굳이 갚아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고 그대로 그 돈은 착복당한다. 그리고 동시에 사쓰에이 전쟁에서 적이었던 영국과 접촉하여 그들이 프랑스 영향력 저지하는 것을 돕는 대가로 무기 교역을 확대해 많은 이득을 챙겨갔다.
반면 조슈번은 조금 다르다. 물론 조슈번도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는 서구 상선을 포격하는 짓을 벌이다가 전쟁에 말려들긴 했다. 이는 실력 행사를 통해 일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줘서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결국 미 해군 함선 한 대만으로 조슈의 근대식 군함들과 해안 포대들이 다 박살나버리고 뒤이어 프랑스 해군이 등장해 민가와 군사시설들을 초토화시켰다. 나중에 가서는 조슈번이 서양 군대에 의해 점령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번사들이 이웃한 번인 고쿠라 번에 쳐들어가 지역 일부를 점령하고 거기서 해안포대를 쌓아 저항을 이어갔다. 결과는 알다시피 서양 연합군이 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한 것이었고 이때 웃긴 건 조슈번도 사쓰마처럼 "알빠노?" 시전하면서 막부한테 배상금을 받게 하였다. 더 놀라운 것은 진짜로 서양 4개국 연합은 그 직후에 조슈가 아니라 막부한테서 300만 달러를 뜯어갔다는 것...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의 결과를 본 조정의 반응은 사쓰마, 조슈 양쪽에 다르게 나타났다. 조슈는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외세에게 패배하여 조정을 곤란에 빠트렸지만 사쓰마는 사쓰에이 전쟁에서 천황을 대신하여 일본의 자존심을 세웠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천황 납치 시도, 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조슈 번사들이 사쓰마와는 결이 좀 다른 진정성이 넘치는 광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래도 사쓰마번은 공무합체에도 어느정도 동의하고 현실적으로 딜 치는 모습도 같이 공존했지만 조슈번은 천황이 자신들에게 토벌 명령을 내리는 그 순간이 지난 후에도 막부와 아이즈번이 천황의 눈과 귀를 가린다고 믿었던 점에서 진정한 혼모노 존황양이 정신의 "정수"였다고 생각한다.
2. 제2차 조슈 정벌에서의 조슈번의 승리 과정
다시 다카스기 신사쿠를 비롯한 도막파들이 권력을 잡은 조슈번은 막부에 뺀질거리기 시작했다. 막부는 지속적으로 조슈에 간섭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조슈번은 속된 말로 "알빠노?"를 시전하며 명령을 거부했고 심지어는 번주가 출두하라는 명령마저 병을 핑계로 씹어버렸다. 이에 막부가 최후 통첩으로 10만석 삭감을 선언했지만 그마저도 무시당했고 결국 조슈-막부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으며 벌어진 사건이 바로 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이었다. 6월 7일, 막부 해군 함대가 야시로지마에 포격을 가함넌서 조슈에 대한 막부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14일에는 게이슈구치, 16일에는 세키슈구치, 17일에는 고쿠라구치에서 전투가 시작되며 육상전 또한 개시되었다.
원래 시작에 앞서 막부는 세키슈구치, 게이슈구치, 오시마구치, 고쿠라구치, 하기성 등 5개 방면으로 조슈를 공격하려 했으나 문제는 하기를 공격하기로 약속한 사쓰마 번이 뒤에서는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 번과 삿초동맹을 맺고 무기를 공급해주고 있었는지라 오지 않았다. 따라서 실제 공격은 하기를 제외한 4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서전은 6월 7일 오시마구치 전투였다. 당시 막부측 병력은 당초 2만명으로 예정되었지만 실제로는 막부의 하타모토병과 마쓰마야 번병을 합해 대략 2,000명이 전부였다. 물론 조슈 역시 병력이 약 500명 밖에 되지 않기는 했었고 오무라 마스지로는 이에 오시마구치를 원래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다가스기 신사쿠와 가쓰라 고고로가 지휘하는 기헤이타이가 출전했고 결국 막부군을 물리쳤다.
6월 13일 게이슈구치에서는 막부군이 조슈군의 25배나 되는 압도적인 규모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조슈군 한 부대가 히코네군 배후를 치면서 전열이 무너지다가 다시 일전일퇴를 거듭한 끝에 막신 가쓰 가이슈가 조슈번과 교섭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고쿠라구치에서는 다카스키 신사쿠와 막부군 사령관 로쥬 오가사와라 나가미치가 맞붙었는데 오가사와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하면 항복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시모노세키 해협 중 바다의 폭이 가장 좁은 단노우라에서 기습당하여 상륙용 배가 모조리 박살난 것을 시작으로 전세 역전을 위해 파견한 일본 최대 서양식 군함인 후지산마루도 석탄운반선으로 위장한 기습에 당해 큰 피해를 입어버렸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며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나베시마번, 구루메번, 구마모토번의 출정병들은 모두 다시 자기 영지로 돌아가버리려고 했으나 오가사와라가 끝까지 거부하며 버텼다. 왜냐하면 구마모토번은 사정거리가 긴 최신식 소총을 보유한 부대들이 있었기에 가장 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카스기조차도 신중하게 지구전을 펼 정도로 막부군의 든든한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구마모토번은 나중에 가서는 아예 무단으로 철병하기도 했고 이 무렵 네 곳의 전선 중 막부군이 우세인 곳은 단 한 곳도 없었으니 사실상 막부의 패배가 예정된 상황이라 토벌군 내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오사카 성에서 사망하자 제2차 조슈정벌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었고 이 사건은 막번체제 붕괴와 메이지 유신이라는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가 되었다.
3. 조슈번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 정치적 문제
분명 조슈번은 제1차 조슈 정벌 때까지 고립된 신세에 빠져있었다. 천황, 막부, 아이즈번, 신센구미, 사쓰마번, 도사번, 구마모토번, 기타 여러 번들, 교토 주민, 영국, 네덜란드, 미국, 프랑스가 모조리 조슈의 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막부에게는 "도막"의 중심지인 조슈를 짓밟을 기회가 여러번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고 특히 조슈번은 존황 세력이면서도 천황의 신변을 위협했기 때문에 조슈 정벌에서 막부군은 각 번병들을 끌어모아서 10~15만명 가량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던 명분까지도 확보할 수 있었다. 누가봐도 조슈 정벌 당시 더 불리했던 측은 막부가 아니라 조슈번이었다.
그러나 끝내 조슈는 생존에 성공했고 더 나아가 대정봉환, 보신전쟁 승리를 거쳐 메이지 신정부의 개국 공신이 되었다. 그렇다면 조슈는 어떻게 막부를 이겼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첫번째 이유는 막부가 생각만큼 강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조슈 정벌 연합군은 15만명이나 되었지만 결집력이 없었기에 막부 입장에서도 전쟁에 자신이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그 와중에 항복 선언을 받아낸 것은 조슈 역시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들도 영국군과 시모노세키 전쟁을 치르며 그나마 있었던 근대적 인프라가 다 박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슈번이 힘을 키운 이후인 제2차 전쟁에서 막부군은 처참히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두번째 이유는 다들 잘 아는 삿초동맹의 결성 때문이다. 여기에는 탈번 낭인이던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자로서 큰 역할을 했는데 그는 당대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조슈의 라이벌이던 사쓰마를 끌어들이는 작업을 아주 잘 해냈는데 료마는 사쓰마의 막부 편과 조슈 편 사이의 딜레마를 역이용했다. 물론 조슈는 사쓰마 입장에서 라이벌이었고 시모노세키 개항 이후 서양식 무기를 도입하여 부국강병의 꿈으로 가는 신세력이었지만 그렇다고 막부를 도와 조슈를 처단하기에는 그들이 그 다음 순서로 노릴 대상이 사쓰마인 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슈를 나락으로 빠트리는데 가장 큰 일조를 했던 세력이 사쓰마였으니 섣불리 조슈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나타난 사카모토 료마라는 인물은 조슈와 사쓰마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1866년 삿초동맹(사쓰마-조슈 동맹)을 만들게 시켰고 이 삿초동맹 사이의 거래는 제2차 조슈 정벌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세번째 이유는 체제 내부에 반 막부 세력이 다수 존재했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대표적인 세력이 다름아닌 도쿠가와 가문을 보위하는 고산케였던 미토번이었다. 미토 번은 참근교대를 하지 않는 세력으로서 '천의 부쇼군'이라 불리었는데 1830년대부터 막부와 갈등을 빗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막정 개입으로 시작된 대립은 1844년 막부가 나리아키를 다이묘 자리에서 쫓아내고 1858년 쇼군 후계 문제 분쟁 때 나리아키가 처벌 받으며 정점을 찍었다. 그러다가 1860년 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불리는 사건에서 백주대낮에 막부의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를 참살하는 과정에 미토 번의 가신들이 참여한다.
특히 미토번 사상가들이 만든 "미토학"은 조슈 번의 사상가이자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영향을 받은 사상이다. 천황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한 <대일본사>도 미토 번에서 편찬되었고 19세기 내우외환에 대한 방비로 천황을 국가의 핵심에 위치시켜 그 존재를 신성시하는 국체(國體)라는 관념도 미토 번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물론 미토학의 학자들은 존황이 막부의 안정을 도울 것이라 했지만 한편으로는 쇼군의 권한은 천황에게서 위임 받은 것이며 쇼군은 어디까지나 신하일 뿐이라 결론 내렸다. 이것은 막부 반대 세력에게 큰 무기가 되어 군신관계를 이용해 천황에 대한 쇼군의 불충을 명분 삼아 막부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면 쇼군의 권력은 분명 동요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핵심 세력이었단 자들이 체제를 비판한 것을 넘어 단순한 체제 균열에 그치지 않고 막부 반대 세력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리드한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 막부 비판을 자제할 수 밖에 없던 세력이 미토 번을 앞세워 막부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기에 미토번이 의도치 않게 막부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에 일조한 셈이다.
막부가 조슈를 이길 만큼 근대화를 제대로 하기 힘들었던 것도 있다고 보는데, 이건 구조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바로 쇼군이 조선의 국왕이나 청나라 황제에 비해 훨씬 권력이 약했다는 것이다. 쇼군은 군사적 패자이기에 만기친람하는 군주라는 이미지가 강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정사는 주로 로쥬나 소바오닌 등이 맡았다. 로쥬는 사실상 정부의 공식 수반이었고 쇼군이 어리거나 무능력한 시기에 정국을 주도했다. 막말기에는 더욱 그러했던게 정국도 혼란스러울 뿐더러 13년 동안 쇼군들이 제대로 정치를 못해서 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게다가 로쥬들은 다이묘로서 결정적인 결점이 있었다. 로쥬가 되면 권력을 이용해 오지에 있는 영지와 경제성이 있는 좋은 요지를 바꿔 이득을 취한 것. 이 때문에 간토와 기나이 지역은 이들 유녁 후다이번들의 영지가 마구 뒤섞여 있었다. 이렇게 되어 막부의 기둥이어야 할 로쥬를 배출하는 후다이번들이 자기 영지를 일원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고 자기 영지 내에 다른 번이나 막부의 영지를 갖고 있으며 자기 영지조차 분산된 것이다. 반면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 같은 번들은 짧게는 250년에서 길게는 500년 동안 동일한 지역을 강력하게 일원적으로 지배했는데 이걸 보면 로쥬들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걸 방증한다.
로쥬에는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후다이번 중 중급 규모 번 다이묘가 임명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나오는데 아무리 로쥬가 쇼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 해도 고작 5~10만 석 규모의 번 출신 로쥬들이 100만 석 규모의 도자마번 다이묘들이나 수십만석 규모이 신번 다이묘들을 상대로 리더쉽을 발휘하기 쉬울까? 실제로 로쥬의 격도 종4위라 수십만 석 규모의 번 다이묘들보다 낮았기에 실권에 비해 높지 않았다. 일례로 안세이의 대옥으로 일본 열도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은 이이 나오스케도 항의하러 온 미토 번 다이묘 도쿠가와 나리아키 앞에 엎드려 예를 표했다. 결국 쇼군이 전제 권력으로서 강하게 근대화를 밀고 나갈 만큼의 권한이 부족했던 것과 막부 권력의 핵심인 로쥬가 중소 규모의 번 출신으로 임명하는 관례가 있었기에 막부의 개혁은 체계적이고 중앙집권적으로 이뤄질 수 없었으며 당연히 조슈번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 조슈번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 군사적 문제
군사적인 이유로는 뛰어난 지휘관 문제도 있지만 아무래도 막부군보다 훨씬 근대화되어 있는 군제 탓도 컸다. 특히 막부군의 주력 소총인 게벨 총보다 조슈군의 주력 소총인 미니에 총은 성능이 더 발전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산병전략을 택하는 것도 가능했다. 정확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게벨총은 전장식 소총의 구버전인 전장식 활강총이었던 반면 조슈군이 사용한 미니에 총은 총열 안쪽의 총강에 나선형 홈이 파져있는 전장식 "라이플"이었다. 당시 실험 결과에 따르면 미니에 총은 200야드 밖의 물체에 대해 80% 정도의 명중률을 가졌지만 게벨 총은 그 절반인 42%였고 300야드 밖의 경우에는 미니에 총 55%, 게벨 총 16%를 기록했다. 즉 조슈군의 장비가 비교적 신식이었다는 얘기.
총기 성능의 문제는 보병 전술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일례로 나폴레옹 전쟁 무렵에 전열보병들은 열에 맞춰 머스켓을 들고 전투대형에 맞추어 걸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무모해보이겠지만 이는 총의 사거리와 명중률이 낮기에 이렇게 횡대로 조밀한 진영을 짜서 싸워야 일제사격으로 화망을 형성해 낮은 성능을 보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막부는 1853년 흑선 내항 이후 네덜란드로부터 대량의 게벨 총을 구입하고 일본 국내에서도 생산하여 보급했으나 정작 게벨 총을 수입할 무렵인 1853년 당시 크림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미니에 총의 일종인 엔필드 총을 쓰고 있었기에 당연히 막부군의 게벨 총은 구닥다리 총이며, 또 그에 따라 전술도 시대착오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조슈는 사쓰마번의 중개로 영국 무기상 글로버를 통해 대량의 미니에 총을 구입했다. 때문에 막부군의 게벨 총보다 사거리도 길고 명중률도 높았는진다 조슈군은 막부군 사거리 밖에서 산개하여 공격하는 산병전술이 가능했었다. 실제로 당시 전투에서 막븐군은 자신들이 가진 게벨 총의 사정거리 바깥에서 흩어져 숨어서 공격하는 적과 싸워야 했으니 열세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슈군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는 장비 차이가 병력 수의 차이를 뒤집은 것이었다. 물론 1860년대 기준 서양에서는 새로운 후장식 소총인 스나이더 총이 보급되었기 때문에 전장식 미니에 총인 엔필드 총 역시 서구 기준으로는 구식이었지만 무기 상인들 입장에서는 창고에 박힌 총들을 일본에다 팔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구조적으로도 막부군은 근대화를 진행했지만 전근대식 군대에서 한계를 못벗었다. 막부군 내부는 장교단이 상급무사들이고 사병들은 평민이나 하급무사인 구조였는데 이러다 보니 통일성과 단결력은 떨어졌으며 충성심도 크게 부족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막부군은 전장식 소총의 한계와 낮은 사기, 몇몇 번들의 출병 거부 및 이탈 때문에 조슈 정벌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이처럼 동시대 조슈번의 기헤이타이와 비교했을 때 막부군의 구조는 근대적인 평민군이라기보단 무사 계급이 중심이 되는 전근대 봉건 군대에 가까웠다. 재미있는 점은 막부군은 프랑스군을 롤모델로 삼고 개혁한 반면 사쓰마의 경우 영국이 모델이었고 조슈의 경우 원래 영국을 집중적으로 파다가 훗날 신정부 수립 이후에 일본 제국군 육군 창설 이후부터는 독일을 모델로 삼기 시작했다는 부분이다. 결국 훗날의 메이지 유신은 각 웅번에서 벌였던 실험의 확장판이었다는 셈.
5. 조슈번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 경제적 문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려면 흑선내항 이전인 덴포 대기근 시기부터 봐볼 필요가 있다. 우선 덴포 대기근이란 1833년에 시작되어 1839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특히 1835~1837년은 흉작이 매우 심하였다. 도처에서 굶어죽거나 전염병으로 죽는 참상이 벌어졌는데 장부에 따르면 오늘날 이와테현 지역에서만 122,284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전국적인 수치는 아마 이것보다 훨씬 높았을게 뻔하다. 기근으로 아사자가 늘어나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 반란인 "잇키"가 빈번하게 벌어지기 시작했고 한편 외부적으로는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맥없이 무너지며 서구 열강의 접근이 눈 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덴포 대기근을 전후하여 막부는 물론이고 각 번에서도 활발하게 개혁을 추진하였고 이것이 막말기 근대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 조슈번의 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번정개혁을 위해 무라타 세이후를 등용하였다. 이 당시 조슈번의 채무액은 8만관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는데 이는 조슈번 연간 수입액의 약 22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그리하여 막중한 개혁 임무를 가지고 직책을 받은 무라타는 일단 번의 재정수입부터 늘리기 위해 4만석 규모의 새로운 농토를 개간하거나 쌀 증산을 장려했다. 그 밖에 350헥타르 규모의 염전을 개발하여 36만석의 소금을 생산하였으며 소금, 종이, 밀납의 생난을 장려하고 그 생산물을 번에서 전매함으로써 많은 이득을 올렸다. 나아가 시리아시 쇼이치로 등의 상인을 등용하여 시모노세키에 번이 운영하는 상사를 맡겨 상업적인 수익도 같이 챙겼다. 조슈번은 이러한 개혁을 통해 번의 채무를 크게 줄였는데 실제로 1842년이 되서는 벌써 3만관의 부채를 갚은 후였다.
한편 무라타는 1843년 조슈번이 가진 채무의 원리금을 매년 3%씩 37개년에 걸쳐 모두 상환하는 정책도 실시하였다. 원금과 이자를 합하여 매년 3%씩 37년을 상환하면 원리금을 합한 총상환액이 111%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사실상 이자를 떼먹겠다고 하는 선언이나 다름 없는데 또 번사 채무도 번의 채무를 상환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즉 번사들의 채무도 그 원리금을 37년 동안 3%씩 상환토록 하였으니 번사들에게도 사실상 모든 이자를 탕감해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무라타 세이후의 번정개혁의 결과 조슈번은 생산력이 증대되고 재정이 충실해졌으며 이는 막말기에 도막 운동, 존황양이 운동을 하여 막부로부터 탄압받는 와중에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근간이 되었다.
6. 다른 관점으로 보기: 그렇다면 과연 막부는 무능하였는가?
에도 막부의 마지막이 보신전쟁으로 무너지는 것이고 일본 사회에서 유신지사들이 존경의 대상이다 보니 막말기 막부는 아예 무능했다는 인식도 다소 존재하는 편이다. 그러나 과연 에도 막부의 근대화가 한계점이 명백히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무능한 정책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이 든다. 당장 막부는 명분론에 치우쳐 양이를 하겠다며 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과격세력과는 선 그으며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넣지 않으면서 가급적 개국을 늦춰 외세에 대처할 시간을 벌려고 노력했었다. 어찌 보면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도 대외정책의 기조만큼은 흔들림 없이 잘 잡은 것이다.
특히 막부가 네덜란드 교관을 초청해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를 차린 것은 훗날 일본 해군의 근간이 되었다. 이때 항해술, 운용술, 조선학, 조선 포술 실습, 선구의 운용, 측량 실습, 고급수학, 증기기관학, 총포훈련, 외국어, 고수훈련, 각종 해군 용어 등 전문교육을 받은 전습원들은 각 번 또는 막부로 돌아가 근대 해군에 대한 기초를 쌓았고 이때 배출된 걸출한 실력자 중 하나가 바로 가쓰 가이슈와 에노모토 다케아키였다. 그 외에도 막부는 몇백년 간 이어온 대선건조금지령을 폐지하여 막부 뿐만 아니린 각 번들에서도 근대식 군함을 건조할 수 있게 했으며 이러한 개혁 시도는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나가사키를 통해 수입된 각종 서적을 바탕으로 일본인 스스로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구현해보자는 의지도 반영된 것이었다.
에도 막부에 유능한 인재들은 많았다. 아베 마사히로(1819~1857)라는 정치가가 대표적인 예인데 비록 페리 제독에 굴복하여 개항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그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23세의 나이에 로쥬에 취임한 마시히로는 15년 동안 막부 개혁을 담당하며 해방괘라는 부서를 중심으로 인재들을 등용했다. 서양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던게 막부의 인재들이었기에 무모한 양이 주장이 안나왔던 것이며 이미 서양과 세계의 정세를 알던 막부 역인들은 근대화가 숙명임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 밖에도 앞서 언급한 가쓰 가이슈와 에노모토 다케아키 역시 막신이었지만 메이지 신정부 이후에도 계속 등용될 정도로 능력만큼은 확실했던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에도 막부는 개혁에 있어서 결코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급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전력을 다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서구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긴 했으나 그들은 외교적, 군사적, 경제적 압박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훗날의 육해군 육성의 근간이 된 고부쇼와 해군조련소를 창설하고 경제, 교육, 산업,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추진했다. 일례로 막부는 개항 이전 1842년 "이국선무이념타불령"을 폐지하고 "신수급여령"을 내렸는데 이는 그들이 개국을 현실로 받아들일 정도로 국제정세에 마냥 어둡진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이미 나라가 열릴 대로 열린 1860년 이후에도 양이론을 부르짖던 과격파 행동주의자들은 테러리스트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정의를 수행한다는 미명으로 교토에서도 불을 지르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했으며 어쩌면 혁명에 성공한 사쓰마, 조슈의 지도자들은 테러리스트에 편승했거나 그들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한 기회주의자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정도 수준의 인물들인 메이지의 유신지사들이 감당해낼 수 있었던 근대국가로의 개혁조치라면 뛰어난 행정조직과 훌륭한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기존의 막부도 만약 삿초동맹이 없었고 시간만 좀 벌었더라면 감당해 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일리는 있다고 본다.
앞에서 막부의 근대화 정책이 한계가 명백했다고 지적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재임할 때까지도 에도 막부의 정치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단행하자 많은 정치세력들은 막부의 리더쉽을 재평가했다. 당시 사쓰마와 조슈는 대정봉환을 이용해서 무력을 통해 막부를 타도할 계획을 세웠으나 예상 외로 받아들이며 실패했다. 또 삿초동맹이 꾸민 왕정복고 쿠데타가 하필 대정봉환을 협의하기 위해 다이묘들이 교토로 모이던 시점이었는지라 이걸 이용해서 사쓰마와 조슈를 역으로 고립시키는 전략적인 행보도 보였다. 신정부에 가담한 오와리 번은 오히려 요시노부에게 정권 참여를 촉구할 정도로 대정봉환 이후 생길 차기 정권에서의 요시노부의 역할론은 기정사실화되고 있었으며 막부가 조적이 된 것은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막부군이 군사 도발을 하고 이에 사쓰마와 조슈가 기다렸다는 듯이 천황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면서부터이다.
그래서 제2차 조슈 정벌에서 깨졌던 막부군이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라는 새로운 유능한 쇼군을 맞이 하면서 보신전쟁 발발 약 1년 전 쯤에는 2만명이 넘는 병력과 48개 대대를 보유한 서구식 군대로 변하게 된다. 또한 프랑스 군사고문단을 초빙하기도 했는데 이 군사고문단에게 지도를 받을 부대인 '전습대(덴슈타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고 전습대에게 지급할 무기로 당시 프랑스제 최신 무기였던 샤스포 소총이 일본에 수입되었다. 전습대는 주로 상급무사들 위주의 인적 구성이었고 연대가 최대 단위였던 다른 막부군 부대와는 달리 전습대는 대대가 최대 단위였다고 한다. 이마저도 조슈의 기헤이타이와는 달리 무사 계급 중심 부대라는 한계는 못벗었지만 요시노부의 게이오 군제개혁 탓에 조금이나마 인적 자질 문제는 개선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막부가 계속 존치되었으면 무조건 실패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수라고 본다.
메이지 예찬론에서 벗어나 막말기 막부에 대한 재평가론이 스멀스멀 나오는 현재 일본에서는 일각의 주장이긴 하다만 만약 막부가 하급 무사들의 테러와 군사 쿠데타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서양세력의 압박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면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침략전쟁 끝에 일본이 파멸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역사에 불필요한 "만약~"이긴 하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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