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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Dec 01. 2023

청일전쟁은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 입장에서 본 청일전쟁 개전의 기원

https://youtu.be/nf8UXk8FuJo?si=V744QrQ8CadOZgNV

1894~1895년 사이의 청일전쟁은 동북아시아의 정세 자체를 뒤엎어버린 중대한 사건이었다. 아편전쟁 이래 서구 열강들은 청나라의 이권을 침탈하며 침략 정책을 감행하고 있었고 특히 프랑스는 청불전쟁을 통해 베트남을 얻어냈지만 정작 그런 상황에서도 청나라의 동북아 지역 내에서의 지위만큼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1894년 이래 그 지위가 엎어지게 되는데 그 주축은 아편전쟁을 일으켰던 영국도, 청불전쟁을 통해 베트남을 강탈한 프랑스도, 하물며 부동항을 찾아 극동으로 남하하는 신흥 강국인 제정 러시아도 아닌 바로 일본이었다. 나는 그래서 이미 청나라의 몰락에 제대로 종지부를 찍은 사건을 하나 꼽자면 아편전쟁도 물론 있겠지만 같은 아시아 국가이자 중국인들이 더 아래로 보던 국가인 일본에게 패한 청일전쟁이 더 중요성이 크다고 본다.


한국에서 청일전쟁의 인식은 매우 간단하게도 그냥 한국이 식민지화되는 것의 시발점이었다는 것 정도로만 형성되어 있다. 또 청일전쟁을 얘기할 때 그나마 한국에서 얘기되는 부분은 갑신정변 속 톈진 조약 문제라던가 임오군란부터 갑신정변을 거쳐 쭉 이어져오던 조선 내부의 혼란 문제 정도일 것이다. 이에 누군가는 일본이 청일전쟁 개전을 안 할 수가 있었는데 굳이 한 이유를 모르겠다고도 하는데 물론 청일전쟁 당시 외부에선 겉모습상의 국력만을 보고 아무리 청나라가 망해가다고 해도 걔네가 지진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긴 하다. 그리고 또 일본이 조선에 적극적으로 침투를 도모하지 않았다면 청일 개전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던 게 현실이었다. 그러나 과연 일본에게 있어서 청일전쟁은 피할 수 있던 전쟁이었나? 이 글에서는 당시 일본이 결정한 청일전쟁이라는 강경책의 필연성과 그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로 봐야 할 것은 당시 번벌 정치 세력이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번벌과 민당의 대립이 벌어지던 중 1892년 8월, 번벌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들어섰으나 사실 번벌 세력은 통일된 정치조직이 아니었기에 이토 내각도 마찬가지였다. 조슈의 대표적 번벌 인사로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서로가 라이벌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토 내각에서는 자유당에 친화적인 무쓰 무네미쓰가 외무상이 되었고 도사 번 출신의 구 민권파였던 고토 쇼지로를 농상에 임명하는 등 자유당과 타협하는 제스처를 취했었다. 그러나 민당 세력은 의회 개설 운동을 벌인 이래, 더 기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나카에 조민이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이 행보를 보이던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번벌 세력과 대립 각을 세워왔기에 두 세력의 협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 의회 모습

게다가 이토 내각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바로 생겼는데 그게 바로 예산안 문제였다. 1892년 11월 제4의회가 개회하고 정부는 전함 2척 건조를 포함한 해군 예산과 적극적인 산업 진흥, 재해 구조 정책을 실현하는 등의 증세 동반 적극형 예산안으로 제출했다. 이에 민당 세력은 제2당이었던 입헌개진당은 물론이고 정부와 일정 부분 협치하려고 눈치 보던 자유당마저 격렬한 반정부 입장을 내놓았는데 문제는 의회에서 민당과 반(反) 번벌 세력이 우세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치외법권 폐기와 관세 자주권 회복 같은 조약 개정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자 민당 세력들은 완전한 조약 개정을 주장하며 강경 일변도의 대응을 했고 이 상황에서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증세를 외치는 번벌과 행정 비용을 절약해서 지조 경감을 하기 위한 민력휴양을 외치는 민당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1893년이 돼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토 총리는 천황의 권위에 좀 더 의지하며 중의원 해산 같은 중재가 필요한 문제를 메이지에게 맡겼다. 당시 번벌은 민당을 상대로 설득과 의회 해산, 선거 간섭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면서 계속 회유하려고 했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두 번이나 의회를 해산하는 등 사실상 헌법 정지 상태에 처할 위기가 찾아오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번벌 입장에서는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대로라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상황에 처했고 최악의 경우 정권 자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테니 말이다. 결국 내각은 그 방법을 찾게 되는데 그건 바로 국가주의를 고취하고 번벌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노선의 효용성을 입증할 만한 방법인 청나라와의 전쟁이었다.


가와카미 소로쿠,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청일전쟁 개전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을 한 명 더 꼽자면 무쓰 무네미쓰가 대표적이다. 무쓰는 당시 외상이었던 사람이고 우리에게는 을미사변에서 미우라 공사와 함께 민비를 시해한 원흉으로도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본래 번벌 세력보다는 반정부 운동 쪽에 몸담았던 자였는지라 내각에서도 민당과 번벌의 중개자 역할을 했었고 서구와의 불평등 조약 개정 문제를 담당했었다. 그러나 무쓰 외상은 개정 교섭에서 실수를 거듭했다는 비판을 대외경파 세력들에게 받았는데 특히 무쓰는 대놓고 경육파의 배외주의에 맞설 것을 선언하다가 의회가 2주간 정회를 명령받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위기에 몰린 이토 내각, 특히 그중에서도 조약 개정 문제로 국내에서 비판을 받던 무쓰 입장에서는 대외경파를 무력화시키고 굴복시키기 위해선 조약 개정을 실현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 지도부의 대표 인사인 이토 히로부미 총리,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 무쓰 무네미쓰 외무상

무쓰 무네미쓰는 1893년 제국의회 연설에서 "조약 개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필경 우리나라의 진보, 우리나라의 개화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아시아에서 특별한 문명, 강력한 국가라는 것을 외국에 알려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열강과의 조약 개정을 위해서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특별한 문명과 군사력을 갖춘 증거를 열강의 눈에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청일전쟁 발발을 전후로 영일통상항해조약이 조인되었는데 이때 영국 외상 킴벌리 경은 이 조약이 일본에게 있어서 청국의 대병을 패주 시키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이후부터 조약 개정 교섭이 더욱 거세게 힘을 받는 바람에 1897년에 걸쳐 치외법권 철폐를 골자로 한 새로운 조약들이 서구 국가들과 줄줄이 조인되어 일본은 마침내 구미와 대등한 주권 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쓰 외상뿐만 아니라 이토 내각에게 있어서 반정부 세력을 누르는 것과 함께 조약 개정으로 "탈아입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청일 개전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던 것이다.


물론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는 처음부터 개전 측 입장까지는 아니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톈진조약에 따라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한반도로 출병하여 충돌 위험이 놓아졌던 시점에서 이토 총리는 출병 목적을 청일 협조 체제를 유지 및 청과 교섭해 조선 내정 개혁을 통해 그곳을 청일 양국의 공통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을 분명 방침으로 정했었다.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 역시 조선에 파견하는 참모장교에게 "우리 공사관, 영사관 및 제국 신민 보호를 위해 출병한 것이며 아군과 청군의 충돌은 어디까지나 피하도록 하라"라고 훈시했었다. 당장 제국 일본의 국가원수였던 메이지 천황만 하더라도 개전은 본인의 뜻이 아니며 대신들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상주함에 따라 이를 허락했다, 즉 "대신들의 전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러나 공사관과 재류 일본인부터 보호하는 것을 골자로 출병을 계획했던 당초의 내각 방침과는 달리 이미 내각 내부에서는 개전을 위한 움직임들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6월 2일 각의에서 무쓰 외상은 "조선에 대한 권력의 평균 유지"를 위해 출병을 결정했다고 했으며 다른 각료들의 상당수는 출병을 조선에서의 청나라와의 패권 경쟁에 이용할 생각이었다. 가령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은 신문에서 대청 강경론이 게재되고 의용병 송출 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될 때부터 개전론을 즉각 수용하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전주를 점령한 농민군이 관군과 화약을 맺고 물러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대규모 출병을 준비 중이던 이토 내각에게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는데 당시 무쓰 외상은 6월 11일부 오토리 공사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보람도 없이 귀국할 수는 없으니 어떠한 성과를 거두어 가겠다"라고 한 바 있다.

청일전쟁 당시를 묘사한 그림

이토 히로부미는 초기 교섭에서는 청일이 공동으로 조선을 내정개혁하는 안을 내세웠고 실제로 왕봉조 주일 청 공사와 단독으로 회담해 내란 종결 후 양국군을 철수한다는 조건으로 협의를 했다. 그러나 6월 15일 각의에서 이토 총리의 청일 협조론이 뒤집히게 되는데 원흉은 역시나 무쓰 외상이었다. 여기서 무쓰는 일본군을 철군시키지 않은 상태로 조선의 내정 개혁에 대해 청과 협의를 하고 청이 내정 개혁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일본 단독으로 내정 개혁을 진행할 것을 주장했다. 놀랍게도 이 주장은 각의에서 승인되었는데 이는 이토 총리가 왕 공사와 회담한 내용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청나라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항목이었고. 그렇다면 왜 무쓰의 최종적으로 제안은 승인되었는가?


그 답은 청일전쟁 개전에 대한 연구서이자 다카하시 히데나오가 쓴 <일청전쟁을 향한 길>에서 나와있다. 본문 내용을 보면 이토 내각이 대청 협조에서 대청 개전 방침으로 바꾼 것은 바로 일본 국내에 철군을 반대하는 강력한 다수의 여론 때문이라고 나와있다. 즉 정권 내부의 강경파인 가와카미 참모차장이나 무쓰 외상 등 개전을 바라는 세력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 여론 자체가 개전론으로 확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근데 여기에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존재한다. 그건 당시에 대외경파들 뿐만 아니라 자유민권운동 계열의 자유당, 언론 매체 역시 개전론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 9월에 예정된 총선거를 위해 정당 각파가 대외 강경론을 겨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이토 내각은 철군에 착수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개전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에 놓여있었다.


청일전쟁은 흔히 당시 정부를 이끌던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번벌 세력의 책임만으로 규정되곤 하는데, 그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민당과 개전론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일본 민권파의 기원은 이타가키 다이스케, 가타오카 겐키치 등의 사족들이 이끌던 조직으로 초창기 그들의 선결 과제는 국회 개설보다는 조약 개정이었다. 즉 불평등조약을 강요받아 국가의 주권이 침해되었기에 그걸 먼저 해결하고 난 뒤에 국회를 개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일본에서는 민권파나 반정부 세력이라 할지라 외교, 군사에 한해서는 후쿠자와나 야마가타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자유, 민주의 이상 이전에 국권을 먼저 확립하자는 게 주요 주장이었다. 과격하게 이야기하자면 민당은 사쓰마, 조슈 번벌의 정부 요직 독점 및 정부 예산 낭비를 비판한다는 점만 빼면 국가 전략의 근본은 번벌과 다를 바 없었다고 봐야 한다

민당 세력의 연설

결과적으로 민당 세력은 청일전쟁으로 큰 이득을 보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 민당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의회 덕분이라고 규정하였는데 그 근거는 의회가 정부를 향해 절약을 요구하는 한편 관료의 낭비와 해군의 비리를 강력하게 비난했기에 예산을 절약해 그 돈으로 군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일본 국내의 선거권 측면에서도 청일전쟁은 이득이었는데 이는 일본 제국군 참모본부가 공식적으로 편찬한 <전사>에 따르면 1894년 7월 25일부터 11월 18일까지 육군 전사자는 1만 3,488명, 부상자는 28만 5,853명이었기 때문이다. 뭣보다 보통 이 정도의 사망자가 있으면 변화가 있기 마련이니까.

근대에 등장한 국민 국가는 시민군, 즉 납세와 국가를 위한 복무라는 의무를 다하면 참정권을 부여는 순서로 이어졌다. 프랑스혁명 당시의 시민군도 그렇게 하여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진 것이었고 이처럼 마키아벨리의 사고 아래에서는 의무와 권리는 같이 움직인다. 징병제가 지금에서야 많은 비판을 받지만 역사적으로 보통선거권이 제정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한 제도임은 부정 못할 거다. 일본 역시 그러했다. 청일전쟁 2년 후인 1897년에 나카무라 다하치로와 기노시타 나오에 등은 보통선거기성동맹회를 조직했다. 그때까지 일본은 제한선거였다. 제1회 총선거는 1890년에 있었는데 국세 15엔 이상을 납입하는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어졌다. 그리고 7년 후에 보통선거기성동맹회가 결성된 것이다. 갑자기 보통선거가 필요하다고 언제 깨닫게 되었을까?

이유는 랴오닝반도를 삼국간섭 때문에 돌려준 것에 있다. 당시 선거권자 45만 명이 중의원 300명을 뽑았는데 그렇기에 더더욱 실망이 컸다. <국민의 친구>라는 잡지를 발간하는 사상가 도쿠토미 소호는 민권론자였음에도 삼국간섭에서 만큼은 국권론의 행보를 보였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에서는 시국 관련 운동이 번창했는데 게다가 러시아와 대립 구도가 명확해지면서 전쟁이 나면 징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군대 가는데 참정권이 없는 건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즉 청일전쟁에서 1만 4,000명이 전사했고 전쟁이 시작되면 징병돼 죽게 되기에 선거권이 있어야 한다고 느낀 것이다. 거기에 더해 사람들은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돌려준 정부의 정책이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느낀 것이다. 일본이 전쟁에 강해도 외교에 약하고 정부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국민이 피 흘려 얻은 것을 돌려준 상황은 선거권이 없기 때문이다고 느낀 것이다. 그 점에서 청일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후에 민당과 민권론자들이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 육군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마지막으로 알아볼 것은 조슈 번벌 세력의 또 다른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관련된 주권선-이익선 개념의 문제다. 1889년 당시 빈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슈타인을 만난 야마가타가 얻어간 개념이 권세 강역', '이익 강역'을 일본의 사정에 맞게 알기 쉽게 바꿔놓은 주권선-이익선이었는데 그에 따르면 우선 주권선은 주권이 미치는 국토의 범위를 의미하고 그 국토의 존망에 관계된 외국의 상태가 이익선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슈타인은 이때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게 일본의 이익선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조선을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반드시 떼어놓아야만 동해로 남하하는 제정 러시아가 원산 일대에 항구를 만들어서 그곳을 극동함대 기지로 삼아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맥락에서 한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슈타인이 최종적으로 내려준 결론은 조선을 즉시 점령하지는 말고 대신 영국, 러시아, 청, 독일, 프랑스 등에 승인을 받아 수에즈 운하처럼 두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주권선-이익선 개념은 미국의 애치슨 라인이나 중국의 도련선 개념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결국 메이지 신정부의 지도자는 슈타인의 조언을 듣고서는 장기적으로 대국 러시아가 중국의 만주를 침략하고 한반도에 진출할 것이라 보았고 그러므로 러시아가 만주를 넘어 한반도로 내려오기 전에 선수를 쳐서 조선을 이익선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자리 잡아 버렸다. 이것은 과잉방어 혹은 적극적 팽창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야마가타는 일본군의 방침을 1880년대를 기점으로 주권선을 방어하기 위해 그 외곽의 이익선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세워 러일전쟁까지 지속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의 현실에서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해 한반도에 진출한다 해도 조선이라는 국가가 버티고 있는 데다가 그곳에는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기에 일본이 선택한 대응책은 조선 정부에 대한 침투를 강화하는 한편 러시아에 앞서 청나라부터 조선에서 축출해 버리는 것이었다. 이 구상이 현실화된 게 바로 청일전쟁인 것이고 또 러일전쟁에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메이지 신정부의 한 축인 야마가타가 세운 장기적인 전략 관점에서 보면 청일전쟁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예정된 전쟁"이었던 셈이다.

시모노세키 조약

이처럼 청일전쟁 개전을 일본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모순들을 한번 해결할 수 있는 대응책이기도 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번벌 정부와 야마가타 등의 군부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방법으로서 전쟁은 하나의 돌파구라는 매력적인 선택지였고 일본 국민들도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거치며 조선과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기에 여론의 동의도 얻을 수 있었다. 민당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민력휴양을 주장하며 예산을 삭감하는 등 군비 팽창에 다소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이를 주도하는 번벌에 대항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정작 제국주의적 침략 노선의 근본만큼은 번벌이나 민당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당대 민당은 국권이 있어야 민권도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로 전쟁을 선동하였고 이를 통해 국내에 보통선거운동을 확대하는 한편 새로 만들 식민지에 민당 계열 관료들을 보내 정권에서 영향력을 키울 전략까지 다 꾸미고 있었다. 즉 청일전쟁은 일본 근대사에 있어서 제국 일본을 구성하던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모두 맞아 들어가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스타트를 끊은 사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일전쟁은 단순히 우발적으로 조선에 출병한 청나라군을 일본군이 공격해서 벌어진 사건으로만 볼 수 없다. "탈아입구"하여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던 일본의 상황으로 보아 언젠가는 기존 동아시아의 패권국인 청나라를 누르고 한반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터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전쟁이었으며 당연히 그러다 보니 전후 질서 구상이 없었던 탓에 막상 전쟁이 끝나니까 우왕좌왕하다가 삼국간섭, 아관파천으로 그나마 얻어낼 이익마저 바로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취한 극단적 선택이 그 유명한 을미사변인 것이고. 아무튼 청일전쟁의 기원은 복잡한 맥락으로 얽혀있으며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되어버린 이유를 알기 위해선 일본에게 있어서 청일전쟁이 어떠한 의의를 갖는지도 고찰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읽기 귀찮은 사람들을 위해 세줄 요약하자면


1. 당시 이토 내각은 위기 상태였기에 돌파구가 필요했고

2. 무쓰의 입장에서는 조약 개정의 문제를 위해, 민당에게는 영향력 확대를 위해 국권론을 조장하고 있었기에 전쟁이 필요했고

3. 야마가타를 비롯한 군부에게는 주권선의 안전을 위한 이익선 확보를 위해 전쟁이 필연적이었기에 전쟁을 두고 당시 일본 사회를 구성하던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p.s. 일본의 입장에서 청일전쟁의 기원을 분석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자면 이 글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를 정당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참고 문헌: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4

조경달, <근대 조선과 일본>, 열린책들, 2015

하라다 게이이치, <청일·러일전쟁>, 어문학사, 2012

무쓰 무네미쓰, <건건록: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비록>, 논형, 2021

오타니 다다시, <청일전쟁: 국민의 탄생>, 오월의봄, 2018

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서해문집, 2018

와다 하루키, <러일전쟁 1: 기원과 개전>, 한길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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