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은 중일전쟁의 시발점과도 같은 사건이다. 약 3만 명의 관동군이 16만 명의 동북군을 기습하여 무장해제시키고 광대한 만주 지역을 손에 넣어 만주국을 수립한 후에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 이내 대륙 침략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 역사 속 폭주가 절정에 달하는 것의 시작이기도 했는데 그렇기에 한국사에서도 만주사변은 의미가 있다. 실제로 교육 과정에서 한국사를 배워본 적이 있으면 교과서 근현대사 파트에 만주사변을 빼놓지 않고 가리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그만큼 만주사변이라는 사건은 비록 "전쟁"이 아닌 "사변"이라 표현함에도 우리 입장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인지도가 높은 것과 별도로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해는 한국 내에서 딱히 별로 없어 보인다. 교과서 서술 내용만으로 보자면 단순히 만주를 침략할 구실이 필요했었던 관동군이 류타오후 사건을 일으키고 동북군을 공격했다고만 나오는데 정작 이 사태에서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이시와라 간지 장군 혹은 "만몽"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다 빠져있다. 물론 관동군이 침략할 구실이 필요해서 류타오후 사건을 일으킨 건 사실이 맞긴 하는데 그것만으로 설명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일본이 어떠한 경위로 국제연맹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감당하면서까지 만주사변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골랐는지 고찰해 보는 걸 주제로 삼게 되었다.
1. 만몽이란 무엇인가?(Feat. "만몽은 생명선")
1930년 12월 통상의회 개회 연설에서 정우회 소속 중의원이던 마쓰오카 요스케는 거기서 "만몽은 우리나라의 생명선이다"라는 내용의 말을 꺼냈다. 불과 만주사변 발발 9개월 전의 상황으로 당시까지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은 시데하라 기쥬로 외상의 주도 하에 영미 세력에 협조 외교를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 협조 외교를 비판하기 위해 마쓰오카 요스케는 만몽을 생명선으로 규정한 것인데 그는 여기서 만몽을 일본이라는 국가의 생존권 및 주권과 관련지어 말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과거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세웠던 주권선-이익선 개념과 마쓰오카의 생명선이 유사하다는 것인데 특히 생명선이라 표현한 것은 더 강한 호소력을 위해서였다.
이야기 시작에 앞서 만몽이란 무엇인지 알아보자면 만몽은 남만주와 동부 내몽고를 합친 지역, 즉 1932년에 세워진 만주국의 남쪽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영토 확장사를 생각해 보면 만몽이 생명선으로 떠오른 게 놀라울 수밖에 없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한반도를, 다이쇼 시대 일본은 산둥반도에 더 많이 신경을 썼기 때문에 그런데 왜 1930년대에 들어와 갑자기 만몽이 생명선으로 떠올랐을까? 한번 이 변화에 대해서부터 살펴보자
우선 만주는 정확히 만주족이 살았었던 지역이다. 그래서 만주라는 지명이 등장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나름대로 관용적인 표현으로 쓰이고 있다. 이 지역은 과거 청 지배 하에서는 동북 3성으로 분류되었고 지금도 중국에서는 동북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하여튼 러일전쟁 직후 만주는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으로 세력 범위가 나뉘었고 전후부터 양국은 만주 경영에서 협력하게 되었다. 일례로 1907년 사이온지 내각은 만주의 철도와 전신을 러시아와 일본이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 협상을 했고 그 결과 만주의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의 세력권으로 두며 제1차 러일협약의 비밀 조항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만몽의 "몽", 즉 동부 내몽고는 어디일까? 이는 1912년에 2차 사이온지 내각이 맺은 3차 러일협약에서 알 수 있다. 그 협약의 비밀 조항을 보면 베이징을 통과하는 그리니치 동경 116도 27분에서 동쪽 내몽고를 일본의 세력 범위로 서쪽 지역을 러시아의 세력 범위로 정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한마디로 베이징을 통과하는 경도를 기준 삼아 기계적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범위를 정해버린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일본은 중국에서 청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탄생하는 과도기 속 영국의 개입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 문제에 대한 협상을 이어가며 서로의 세력 범위를 인정하기 위해 공조했었는데....
문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혁명 이후 들어선 소련 정부는 과거 러일협약의 비밀조항을 폭로했고 결국 일본은 남만주와 동부 내몽고를 일본의 세력 범위로 인정해 주던 상대를 한 순간에 잃게 되었다. 물론 당시 국제법적인 관례상으로는 조약과 권익은 효력이 있었기에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맺은 조약과 그 권리, 일본이 중국 정부와 맺은 "만주에 관한 청일조약" 등은 건재했었다. 그러나 청이 무너지고 들어선 중화민국이 점점 안정되면서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도 변수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이제 일본에게는 조약상의 권리가 바뀔 위험성이 생겼다. 그 첫 번째 대상은 체결 당시부터 제대로 합의되지 않았기에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항목들인 만몽 문제가 되었다.
(만몽 문제 속 조약의 회색지대는 3장에서 보시면 될 듯하다)
2. 이미 국제 협조 체제와 갈라서기 시작했었던 후발 주자 일본
시간을 거슬러 1914년의 국제정세부터 살펴보자. 사실 1차 세계대전까지도 일본과 서구 열강은 한편이었지만 엄연히 그때부터 서로 갈라설 기미는 보이고 있었다. 당장 미국만 하더라도 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7년부터 일본이 바다 건너 습격해 온다는 전쟁 공포가 생겨났는데 이는 미국이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획득한 필리핀과 괌 같은 태평양 섬들에 일본이 진출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반대로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당시를 기점으로 그동안 자신들이 탈아입구를 지향했음에도 서구인이 될 수 없으며 서양인들에게는 그저 한낱 동양인으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1906년 일본인 학생의 공립학교 입학을 거부하는 정책과 더불어 1907년에는 일본인 이민을 배척하는 조항이 추가된 연방이민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당대 미국인들의 인식 속 일본인은 백인 국가 러시아를 무찌른 호전적인 동양 국가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1907년부터 발표된 일본의 "제국국방방침"에서 가상적국에는 러일전쟁 당시의 적이었던 러시아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프랑스 등도 포함되기 시작했다. 물론 1907년 당시부터 1918년까지는 가상적국 1순위는 러시아였고 미국 등 서구 열강들은 후순위였긴 했지만 1923년부터는 미국이 육해군 모두의 가상적국 제1순위로 지정된다. 참고로 1923년 "제국국방방침"으로부터 2년 전인 1921년에는 워싱턴 군축회의로 대표되는 국제 협조 체제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정작 이미 그때부터 일본은 미국과 다른 길을 걸으며 그들을 상대로 한 전쟁까지도 대비하고 있었다는 점이 킬포인트다.
영국도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일본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영일동맹을 내세워 참전을 했는데 문제는 영국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었다. 1902년부터 1914년까지 두 차례 개정된 영일동맹은 "동아시아와 인도 전역의 평화", "중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목적으로 두고 있는데 조문을 하나씩 살펴보면 동아시아, 인도, 중국에 대한 안전보장조약을 규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영일동맹과 일본의 대독일전은 별 상관이 없었다. 또 1914년 8월 당시 영국 입장에선 세계대전이 장기화될지 예측할 수 없었기에 그냥 일본이 동아시아 해역에서 영국 상선을 호위하는 정도로 머물기를 바랬었다. 그래서 그레이 외무장관은 일본의 참전조건으로 전쟁 범위를 중국해의 서쪽과 남쪽, 독일 조차지인 자오저우만 밖으로 확대하지 말고 특히 태평양을 넘보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은 태평양의 남양군도까지 점령하여 미국의 태평양 이권을 위협할 만큼 성장했고 또 중국 본토로 이권을 가져가며 영국의 대중 무역 이익을 감소시켰다. 따라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는 독일령 산둥반도 권익을 논하며 일본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중국에게 요구해서 이권을 챙겨간 21개 조 요구 문제 때문이었는데 오죽하면 당시 일본 전권대사였던 마쓰오카 요스케마저 정부 입장을 변호하기 힘들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 조약문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는 일본의 권익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었지만 저 당시 일본은 국제적으로 서구 열강에게 상당한 비난을 받았기에 더더욱 분노가 컸다. 특히 3.1 운동이 터지고 한국 문제까지 거론되었으니 비난은 더 거세졌다.
만주사변과 일본-서구 열강 사이의 관계 악화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만주사변 당시 일본은 국제연맹이라는 서구 주도의 질서에 표면적으로나마 협조하는 국가였고 사건 이후 그걸 깨고 나가버렸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이 바로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이 서구에 적대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이미 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둘은 서로 어긋나고 있었고 때마침 만주사변이 터지니 막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제3자인 서구의 중재가 안 먹혔던 부분이 크다. 무엇보다 후술한 만몽 이익 관련 문제는 일본이 서구와 교섭하여 해결하기보단 과격하고 독단적인 방식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게 만들었다.
2-1. 만몽 문제에 대한 일본과 서구 열강 사이의 애매한 합의
일본과 서구 열강 사이의 또 다른 문제는 만몽 권익 인정이었다. 당시 외무성은 영국이 일본의 만몽 권익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여러 가지 들었다. 몇 개만 살펴보자면 1914년 남만주 양자강 비교에 이야기긴 미쳤을 때 일본의 남만주에 대한 지위를 경제적 이상으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음을 양해한 것, 1915년 영국 외무대신이 이시이 키쿠지로 대사에게 중국에서의 일본의 발전은 당연한 운명이며 특히 만주 지방에서 그러하다는 것을 언명한 것, 1919년 7월 영국 외무대신 대리가 남만주에서 일본이 특수한 지위를 점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을 언명한 것 등이 예시다. 그러나 자세히 확인하면 영국은 남만주에 대해서도, 동부 내몽고에 대해서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특수한 지위"라는 것도 사실 일본의 독점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남만주가 지리적 접근성으로 보아 특수한 이해관계라고 규정한 것에 더 가까웠다.
미국과의 이시이-런싱 협정 역시 영국과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너무 애매모호하게 된 게 훗날의 화근의 원인이 되었다. 이 이시이-런싱 협정은 일본이 만몽에 대해 다른 서구 열강보다 특별한 지위에 있다고 한 것 때문에 일본이 유리하게 해석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이를 통해 중국에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우월한 이익을 갖고 있다고 미국에게 인정시키고 싶었고 물론 런싱은 일본의 만몽에 대한 유무형 권리를 일부 인정하긴 했다. 그러나 런싱이 받아들인 특수 지위라는 것은 만몽의 역내가 불안정해질 경우 일본은 서구 열강에 비해 그 파급력이 강하고 긴박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의 이해관계를 뜻하기에 사실상 원론적인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처럼 이시이-런싱 협정으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못 얻어낸 일본은 만몽 권익을 어떻게든 서구 열강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1920년 하라 내각이 영국, 미국, 프랑스 정부 앞으로 구체적으로 대중국 차관단 사업에서 제외해야 할 철도와 그 밖의 기득권을 열거하는 각서를 송부했다. 참고로 그 제외 대상은 만몽 권익과 연관된 것들이었다. 당시 일본은 만몽을 국방 및 국민의 생존을 위한 것으로 규정하면서 일본 국민의 경제적 생존과 지대한 관계가 있는 사업에 대해서 국가안보상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서구 열강 국가들은 처음에는 반발하다가 이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긴 했으나 이후에 산둥반도 권익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게 대가를 받는 조건으로 영토 반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열강과의 만몽 권익 교섭 정국을 두고 외무성, 정부, 군부의 입장은 각각 갈리게 된다. 총리인 하라 다카시는 만몽이라는 지역의 권익에 대한 포괄적인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세부 권리만큼은 인정받았다고 평했다. 외무성은 4국 차관단 계약 이전 만몽의 특수 지위를 열국에 승인시켜온 자신들의 실적에 자신감을 드러내며 열강이 만몽 권익을 완전히 인정했다고 자축했다. 반면 군부의 경우에는 외무성이 자축하는 1920년 4국 차관단 교섭을 오히려 열강 승인의 소멸 계기로 바라보며 실패작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3개의 세력의 엇갈리는 입장은 이후의 흐름과 맞물리며 권익을 열강이 인정해주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정부가 나서지 않는 현실에 분개한 군부에 의해 폭발하게 된다.
3. 조약의 회색지대와 일본 입장에서 만몽이 생명선으로 인식된 이유
만몽 문제의 회색지대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일본이 남만주철도의 연선에 철도수비대를 두는 권리이고 두 번째는 만철(남만주철도)의 병행선이 될 수 있는 간선과 지선을 중국이 부설할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철도수비대를 설치할 권리와 만철의 병행선 금지 조항이 핵심이라는 건데 특히 철도수비대는 훗날 관동군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군대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 두 권리에 동의하지 않았고 애당초 러시아에게도 주지 않았기에 러시아로부터 양도되었다는 주장을 근거가 없다고 비난했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철도수비대를 두는 권리를 조약으로 체결했기 때문에 중국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하였고 또한 만철의 병행선 금지 조항은 청일조약의 비밀의정서에 적혀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회색지대는 국가 간 조약에서 흔히 있는 일이고 만주사변 전까지 일본 정부 또한 외무 관료들도 외교적 수단으로 해결하자고 생각했다. 당시 외무성 아시아 담당 국장이었던 아리타 하치로는 만몽의 권익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적은 없기에 일단은 일본 입장에서는 동북 3성의 권력자 장쉐량을 통해 만몽 권익을 경제적으로 지키면 된다고 보았다. 이는 육군 내에서 장제스에 우호적 제스처를 보내는 장쉐량을 무너뜨리고 중국으로부터 만몽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과 대치되는 주장이었다.
군부는 회색시대 문제에 어떻게 보았는가? 그냥 간단히 말해 중국이 조약으로 인정받은 일본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고 그들의 조약 침해로 일본의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규정했다. 군부가 가장 만몽 문제에 민감했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일본이 만몽에서 특수권익을 얻는 것에 가장 앞장섰던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특수 권익이라는 표현부터 군부를 중심으로 나온 말로써 "주로 조약으로 인정받고 다른 나라에서는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는 일본의 독점, 우선이 인정되는 권리이며 일본이 시설을 설치하고 경영함으로써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한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만큼 강박적으로 매달리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이 만몽의 특수 권익을 잃으면 생존권을 위협받는다고 느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만몽에 대한 일본의 투자 구조 문제였다. 먼저 만몽에 대한 일본의 투자에는 상대 지역의 공적인 기반과 사기업에 차관을 제공하는 "차관 투자", 그리고 "회사를 설립하는 투자"의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이 같은 개념으로 이루어진 대(對) 만몽 투자는 1926년의 경우 14억 203만 4,685엔이었고 이것을 투자자 비율로 보면 만철이 54%, 일본 정부 차관이 7%, 민간 차관이 1%, 법인 기업이 31%, 개인 기업이 7%로 나뉘었다. 만철과 일본 정부 투자를 합한다면 거의 60%대가 넘어간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법인 기업이 31%인데 여기에는 만철로부터 유입된 자본 약 3억 700만 엔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까지 계산한다면 만철과 일본 정부의 만몽 투자 비율은 무려 약 85%까지 치솟게 된다.
결국 만몽에 대한 대부분의 투자는 국가와 연관이 있었고 그걸 담당하는 일을 한 세력 중 하나는 군부였다. 그것이 군부, 특히 관동군이 황고둔 사건을 기점으로 회색지대 문제에 온건하게 대응하는 정부를 대신해 전면적으로 나서게 된 원인이었고 적어도 관동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위해서라도 만몽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4. 군부와 만주사변
1차세계대전 덕분에 호황을 맞이했던 일본의 경제는 얼마 못 가 다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1개 조 요구를 기점으로 한 중국 내 반일 운동 때문에 중국 시장에서 영향력이 축소되기 시작하더니 1920년에는 벌써부터 주식 시장과 상품 시장이 박살 나버렸고 1923년 관동 대지진은 13만 3,000명의 인명 피해와 65억 엔의 재산 피해를 내며 불황 중에 더 경기를 악화시켰다. 결과적으로 다이쇼에서 쇼와로 연호가 바뀐 지 약 1년 만인 1927년에 대규모 금융공황이 발생하여 37개의 은행이 줄이어 휴업에 들어가 버렸다. 이 상황에서 집권한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뭐라도 해보겠다며 중단되었던 금 수출을 재개하고 산업 합리화, 긴축 재정 정책을 시행했지만 문제는 바로 세계적인 경제 대공황이 터지면서 주가와 물가가 폭락해 실업자가 갑자기 큰 폭으로 증가해 버렸다는 것이다.
정당 내각의 실패로 사회 전반에 분위기가 어두워진 상황 속에서 군부를 중심으로 한 목소리가 힘을 얻어갔다. 다음은 1930년대 당시 고마쓰초 공회당 앞을 지나가던 이시도 키요토모라는 청년이 보았던 광경에 관한 것인데 당대 일본 군부의 프로파간다가 어땠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피폐해져 있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 여러분은 5반보의 토지를 가지고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겠는가, 딸을 여학교에 다니게 할 것인가. 불가능할 것이다. (중략) 일본은 토지가 좁고 인구는 과잉이다. 이것을 좌익은 잊고 있다. 따라서 국내의 토지 소유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으로는 개혁이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외부로 눈을 돌려야 한다. 만몽의 옥토를 보라. 타인의 것을 실례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지만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계산해보면 여러분은 5반보가 아니라 일약 10정보의 지주가 될 수 있다. "
- 1930년 육군의 시국 대강연회 내용 -
연설 속의 좌익은 노농당을 가르킨다. 일찍이 소작인이 소작료 감면 요구가 중심이었던 소작 쟁의는 소좌의 연설이 이뤄진 쇼와 공황기가 되며 지주 주도에 대한 소작지 철수, 소작료 체납 일소 요구로 쟁의 발생 이유가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나 소좌의 연설 속 만몽의 옥토를 나져야 한다는 부분은 육군성이 추진하던 국방사상 보급운동의 일환이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일본의 농촌이 피폐해지고 정우회와 민정당 모두 농민의 부채에 냉담했었을 때 농산어촌의 피폐 구제를 슬로건으로 내건 집단이 바로 육군성이었다. 이 슬로건은 육군의 통제파가 1934년 10월 발행한 <국방의 본의와 그 강화의 제창>이라는 팸플릿에 실렸었다.
농촌은 일본군 징병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이었다. 일단 1930년 기준으로 일본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46.8%였으니 말 다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징집유예라는 제도가 있어서 국공립 중등학교, 고등학교, 대학 등에 다니는 사람들은 징병검사는 받아도 끌려가진 않았고 중화학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숙련 노동자도 군대에 가지 않었다. 그래서 징병 대상자는 주로 농촌에 사는 청년들이었다. 이 때문에 농촌의 위기는 곧 국가의 위기였다. 당시 일본 육군에서는 통제파와 황도파가 있었는데 황도파 중에서는 야전에 근무하는 장교들 많았고 그들은 농민 출신 병사들과 함께 생활했다. 통제파들 역시 농촌의 위기는 국가의 위기라며 관심을 가졌다.
<농산어촌의 피폐 구제가 가장 중요한 정책이다>라는 육군 팸플릿은 통제파 군인 나가타 데쓰잔이 육군성 군무국장에 있을 때 작성했다. 이 팸플릿은 전쟁을 창조의 아버지, 문화의 어머니라 소개한다. 또 국방은 군비 증강 뿐 아니라 국가의 생성과 발전의 기본 활력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국민의 생활을 꼽으면서 '국민 생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하고 그 중에서도 근로자의 생활 보장, 농산어촌의 피폐 구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적었다. 정우회의 선거 슬로건에는 농민 구제, 국민 보건, 노동 정책 항목이 없던 것에 비해 육군의 정책은 굉장했다. 1934년 1월 <정치적 비상사태 발발에 대처하는 대책 요강>에서 농민의 구제 항목에는 의무교육기 국고 부담, 비료 판매 국영화, 농산물 가격 유지, 경작권 보호 등이 있었다. 노동 문제에 관해서는 노동조합법 제정, 적정한 노동쟁의 조정기구 설치 등이 있었다. 이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 계층은 정치, 사회 변혁을 위해 군부에 기대를 걸고 그들의 직접적인 행동을 바라게 되었다.
물론 군부의 진짜 목적은 국민 생활 보호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미래에 벌어질 총력전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도록 국민들을 조직화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 중심의 의회정치를 무너뜨려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렇게 하여 외교와 안보 등 국정 전반을 바꿔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특히나 자급자족 생활권을 위해서 만주는 반드시 일본의 영역 안에 완전하게 편입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군부의 시대 진단으로는 1차세계대전의 유산인 총력전의 시대가 대두되는 상황 속 섬나라인 일본이 버틸려면 자원이 풍부하면서도 소련과 중국을 북방에서 막아내는 국방의 핵심기지인 "생명선" 만몽을 먼저 영유하는게 필수 조건이었던 셈이다.
4-2. 이시와라 간지(Feat. 세계최종전쟁론)
만주사변 하면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을 한 명 꼽자면 바로 주모자인 이시와라 간지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1889년에 태어나 관동군의 참모장교로 근무했던 그는 같이 근무한 내무관료였던 다케베 로쿠조의 회고에 따르면 늘 짖궃었고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쾌할했는데 동시에 선동적인 면도 많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상당히 괴짜같은 사람으로 보일거고 훗날 일본 군부 내에서 찍혀 아웃사이더가 되지만 그래도 육군유년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군대학교에서도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천황으로부터 군도를 하사받기도 할 정도로 당대에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오던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 만주사변을 처음부터 꾸미고 실행에 옮겼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또 의외인 것은 자신이 참모본부 작전부장이었을 때 일어난 중일전쟁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태평양전쟁 중에는 도조 히데키 총리를 비판하는 언행들을 이어가다가 탄압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예 도조를 향해 사상은 커녕 생각 자체가 없는 인간이라고 평할 정도. 이미 전쟁이 벌어진 후에는 짤린 이후였던 덕분인지 전후에는 도쿄 전범재판에 증인으로는 불려갔지만 이타가키 세이지로, 무토 아키라, 기무라 헤이타로 등의 다른 관동군 참모 출신들과는 달리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만주사변의 주범임에도 지금까지도 평가가 생각보다는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은 편이다. 여러모로 흥미로우면서도 복합적인 면이 공존하는 인물인 셈.
아무튼 이시와라가 어떠한 생각으로 만주사변을 계획했는지는 본인이 쓴 책 <세계최종전쟁론>에 잘 서술되어 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이때까지 일본이 대만, 조선, 만주, 중국에서 타 민족을 경시해왔음을 지적하면서 이에 깊은 반성을 하여 쇼와 유신을 통해 동아연맹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동아시아 여러 민족들이 서양에 비해 과학 기술이 뒤쳐지기에 정신력, 도의력으로 제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원칙의 시작점을 만주사변으로 삼았는데 이시와라는 만주국의 건국 정신인 민족협화를 일종의 실험장을 삼아 동아시아 각 국가들의 진정한 결합을 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게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지만 이시와라는 의외로 동아연맹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만주와 조선, 대만을 독립국으로 두고 대등한 동맹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즉 이 얘기는 만주사변으로 인한 만주국의 건국은 이시와라 본인의 이상과도 맞닿아 있다는 말이다.
한 가지 더 살펴볼 점은 이시와라 간지가 30년 내로 동서양의 세계최종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이시와라가 주장했던 동아연맹도 세계최종전쟁에 대한 대비라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편하다. 어찌되었든 30년 내외에 최종전이 벌어질 것이라 하였던게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20년 안에 동양을 대표하는 동아연맹의 생산능력을 서양문명에 필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건 당연한 전제 조건인데 이것도 이시와라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었다. 서양 문명과 맞붙을 동아연맹의 생산능력을 키우기 위한 생산기지가 바로 만주였던 것이고 따라서 이시와라에게 만주사변을 통한 만주국 설립이라는 행위는 자신의 이상이자 동아연맹의 근간이 될 동아시아 협력의 실험장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세계최종전쟁 수행을 위해 생산능력의 토대를 닦을 병참기지라는 양면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시와라의 구상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전혀 없었다. 군부에서 쫓겨난 이후로 이시와라는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을 사과하고 점령지에서 철수 후 동아시아 각국과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조선에 조선인들이 주도하는 정부를 세우게 해줘야 한다는 등 누가보면 평화주의자로 보일 법한 말들도 하고 다니며 사실상 반군부 인사가 되었지만 결국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의견은 수용되지 않았다. 패전 이후로는 일본이 앞으로 헌법 9조를 중시하여 세계최종전쟁을 막는 일을 해야 한다거나 중국과 항상 협력해야 한다는 등 침략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사실상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만주국에 대해서는 "나는 마음에 그리던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건국을 했지만 다른 일본인들에 의해 꿈이 짓밟혔고 그 때문에 내가 만주에 살던 중국인들에게 했던 약속을 배신하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쟁범죄자다"라고 하며 동아연맹이라는 순수한 이상(?)이 짓밟힌 것에 대해 괴로운 심정을 보였다.
5. 에필로그: 그렇다고 국제연맹 탈퇴를...?
이건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지만 당시 일본은 자신들의 주장을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으면 국제연맹을 탈퇴하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진심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군부의 눈치를 보느라 겉으로 강경책을 주장하긴 했었는데 예를 들자면 1932년 6월 14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양대 정당인 정우회와 민정당이 만주국 승인 결의를 만장일치로 가결시킨 것이다. 이 무렵 리턴 조사단이 만주사변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는 중이었음에도 일본에서 미리 만주국 승인 결의를 한 것이나 다름 없는 행동이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일본 의회가 강경책을 지지했다는 인식이 한동안 널리 퍼져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강경했던 정우회의 속내가 밝혀지고 있다. 전후 일본 헌법 9조 문구 수정을 실시한 외교관 출신 정치가인 아시다 히토시는 당시 정우회 소속으로 정우회 기관지인 <정우> 1932년 11월호에 "일본 정부가 9월 15일 만주국을 국가로 승인했다"는 글을 썼다. 여기서 아시다는 국제연맹 조사단이 일본의 주장을 무시하고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낸 상황에서 일본이 그 보고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국제연맹의 규약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시다가 국제연맹의 규약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시다는 국제연맹에 탈퇴할 것이라고 떠들 필요도 없이 단지 권고에 응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기만 해도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겉으로 강경론을 주장하는 정당도 속으로는 수위 조절을 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국제연맹 탈퇴 당시 외상이었던 우치다 야스야도 1932년 8월 25일 만주국 승인 문제에 대해 중의원에서 답변하면서 나라긴 초토화되는 한이 있어도 만주 문제의 양보는 없다고 강조했지만 최근 들어와서 밝혀지기를 당시에 우치다는 만주국 문제로 일본이 강하게 나오면 중국 장제스 정권 내 대일유화파가 직접 협상에 나올 것이라는 계산으로 그런 식의 대응을 했다고 한다. 이 계산이 마냥 틀리지만은 않았던 부분은 당시 장제스 정권이 국내의 공산당 타도를 1순위 목표로 삼았던 것과 또 일부러 주일 공사를 불러서 "일본과 제휴한다"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이것을 보면 우치다 야스야 외상의 정책은 전쟁을 각오하고 한 것이 아니라 중국 정부의 유화책을 염두에 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래서 1933년 1월 19일 우치다는 쇼와 천황에게 "이제 큰 고비를 넘겼기에 굳이 국제연맹을 탈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라는 보고까지 올렸다.
만주사변 문제의 일본측 전권대사였던 마쓰오카 요스케도 "만몽은 우리나라의 생명선"이라고 하고 훗날 나치 독일, 이탈리아와의 방공협정을 맺는 주축이 되었다는 점에서 강경파로 비난받지만 그럼에도 당시까지는 수위를 나름대로 조절했었다. 마쓰오카는 우치다 외상의 "초토 외교"를 비판하는 전보를 보내며 만사는 8할 정도에서 참는 게 좋겠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가 타협파에 가까운 면도 있었다는 걸 뜻한다. 정확히 마쓰오카가 말한 타협은 영국이 일본에 제안한 두 개의 유화책으로 하나는 국제연맹 화해위원회 심의에서 미국과 소련 등까지 포함해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과 일본 두 나라도 당사자로서 화해위원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비록 강하게 나갔음에도 내심 중국의 타협 요청을 기다리던 일본 정부였지만 그 기대는 곧 바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외부에서 압력을 가한 것도 아니고 일본 정부의 통제에 있어야 할 육군이 사고를 쳐버린 것이었다. 바로 1933년 2월 육군이 만주국의 남쪽,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 중국의 러허성을 침공하는 "러허사변"을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육군은 만주국을 독립시키고 대충 구색을 갖추고 있었는데 만주사변에서 패주한 장쉐량의 동북군이 러허성으로 들어가 계속 저항하고 있으니 만주국의 안전을 위해 소탕해준다며 러허성으로 쳐들어간 것이었다. 가뜩이나 1931년에 만주사변이 벌어지고 1932년 1월에 상하이 사변까지 벌어지면서 추가 제소까지 당하는 상황이었는데 더 나아가 중국 영토로 침공해 러허사변까지 벌였으니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
러허사변을 계기로 일본은 이제는 국제연맹에서 징계로는 안 끝나고 제명까지 각오해야 할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리는 뒤늦게나마 러허사변을 중지할 것을 군통수권자인 천황에게 요청했지만 중간에 막혀버렸고 할 수 없이 사이토 총리는 2월 20일 각의에서 국제연맹 탈퇴 결정을 내린다. 이틀 후 마쓰오카 요스케 전권대사는 국제연맹 총회 회의장에서 퇴장하였고 3월 27일 국제연맹 탈퇴 조서가 공표되었다. 강경한 태도로 상대방의 협상 테이블 참석을 유도했었던게 당시 일본 지도부였지만 육군이 꾸민 러허사변은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또 전쟁을 꾸민다고 판단하게 만들었고 이는 곧 국제연맹으로부터 제명과 경제 제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탈퇴하는 연쇄반응으로 이어진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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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요코,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만몽 권익이란 무엇이었는가?>, 어문학사, 2012
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서해문집, 2018
이시와라 간지, <세계최종전쟁론>, 길찾기, 2015
쿠로노 타에루,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논형, 2015
권성욱,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미지북스, 2015
도베 료이치, <역설의 군대; 근대 일본군의 기이한 변용>, 소명출판, 2020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 육군>, 글항아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