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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Dec 08. 2023

일본 초기 국가주의의 원류, 해방론(海防論)

과장된 위기의식과 대외 충돌은 어떻게 제국주의 논리로 이어졌는가?

https://youtu.be/EzjX79cuHz8?si=Eku-DaO-uPJHPbMf

도쿠가와 막부는 계속 쇄국 정책을 일관되게 고집해왔다. 물론 일본이 처음부터 문을 걸어잠근 건 아니었고 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각 지방의 다이묘들은 유럽 상인들로부터 신식 무기들을 수입하고 그 대금을 은으로 지불했었다. 이때 이런 시대적 조류를 잘 이용한 인물 중 하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고 그는 해외의 정보에 대해 밝았던 자였다. 어떤 통계를 보면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후반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철포(조총)의 보유량이 유럽보다 많았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만큼 일본인들은 해외 무역을 통해 많은 이득을 보고 있었다. 이는 도요토미 사후 집권한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얼마 못가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을 택하게 되는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번째는 바로 기독교에 대한 공포였다. 기독교가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포교된 결과 신자 수는 어느덧 30만에 달하게 되었고 그러던 와중인 1637년 규슈의 시마바라 지역에서 2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 신자들의 반란이 벌어졌다. 물론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은 기독교의 확산에 충격받은 막부가 강경책으로 전환, "기리시탄(キリシタン)"이라 불리는 기독교인들을 극형으로 다스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 때문인지 동시대에 교회당이 베이징에 버젓이 있던 청나라나 18세기 후반 양반 계층 중에서도 많은 신자가 존재하던 조선과는 달리 일본에서 기독교의 세 확장은 크게 주춤하게 되었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은 유출이었다. 16세기 내내 일본의 다이묘들은 은을 대금으로 서양의 문물을 수입해왔었는데 이 때문에 막대한 양의 은이 서양으로도 유출되었고 특히 명나라로도 유출되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비단, 차, 도자기 등 고가의 상품을 수입해오는 방식의 무역을 했는데 결국 이 과정에서 은의 유출이 매우 심각해졌다. 에도 막부 초기에 이르면 만약 이런 무역 구조가 지속된다면 명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일본의 은이 고갈될 게 뻔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고 이에 막부가 내놓은 대응책이 무역통제로의 방침 전환이었다.

그리하여 쇄국 체제를 시작한 일본은 1639년에 가서는 포르투갈선의 내항까지도 금지하게 된다. 단 예외가 있었는데 그건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트로 서부 일본에 퍼져 있는 예수회와 다르다는 걸 강조해왔고 또 포교를 하지 않고 오로지 무역에만 전념하겠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막부에 어필해왔다. 그래서 에도 막부도 이를 허용해준 것인데 대신 나가사키의 데지마 섬으로 무역 허가 장소를 한정하는 조건을 걸었다. 그 외 아시아 지역과의 무역 창구는 류큐 왕국과 사쓰마 번을 통한 명나라, 동남아시아와의 루트나 쓰시마 번과 부산 왜관을 통한 조선과의 무역 루트 등이 존재했다. 게다가 18세기에 가서는 비단, 차, 도자기 같이 조선이나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던 물품들의 국내 생산에 성공하면서 완전한 자급자족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게 150년 동안 쇄국 체제는 지속되었지만 1780년대에 들어서서 북쪽에 있는 에조치(훗카이도 일대)에 러시아인들이 출몰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상황이 바뀌게 된다.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캄차카 반도를 근거지로 삼아 오호츠크 해로 내려가던 중이었고 이것이 일본 내에서 서양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러시아가 일본 본토를 침공할 만큼 시베리아에 병력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구실로 삼기 아주 좋은 것이었다. 이때 나오게 된 주장 중 하나가 바로 <해방론(海防論)>이었다.


해방론의 선구자센다이 번 출신 하야시 시헤이와 사가 번 출신 고가 세이리 등을 중심으로 한 자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각자 차이가 좀 있었지만 대체로 러시아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1860년에 러시아가 베이징 조약으로 얻은 연해주에 블라디보스토크라는 거점을 만들었기에 일본 내 러시아 위협론은 더욱 힘을 얻었다. 하야시 시헤이는 <해국병담(海國兵談)>에서 러시아가 캄차카를 다 차지했기에 서쪽으로 눈을 돌려 에조치 동쪽의 지시마(쿠릴 열도)를 선에 넣으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국방 위기를 주장한 하야시 시헤이는 저서가 출판되자마자 발매 금지 처분을 받고 유형에 처해졌으며 막부의 간조부교 도야마 가게미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 근년 이적(서양)의 배가 종종 일본에 나타나는데 이들이 전쟁을 일으켜 일본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항해술에 능한 이적이라고 해도 수만 리의 큰 파도를 넘어 와 전투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사람들이 이선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난학자들이 퍼뜨리는 근거없는 소문 때문이다. 하야시 시헤이 같은 자들은 논할 가치도 없는 이런 해독을 유포한 최악의 인간이다. 지금 일본에 오는 이선은 모두 해적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 각지를 두루 다니며 해안 지방을 습격하여 아무것이나 그곳의 물건을 약탈할 정도이니 두려워할 만하지 않다. "

아이자와 야스시의 경우도 <신론>에서 일본에 대한 서양의 침략위기를 강조하면서 서양의 출현을 안이하게 보는 논자들에 대해 일일히 반박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남하를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 설립이 목적이라고 했으며 서양의 선박은 방심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서양이 침략할 경우 일본은 정예군대는 커녕 200년 이상 실전경험이 없이 평화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에 대응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게다가 얼마 후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해방론자들의 주장은 더욱 힘을 얻었고 막부와 각 번들도 해방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초기 해방론의 담론은 실현의 위한 조건부터 막대한 재정 소요, 막번체제에서의 탈피, 역직체계의 변화, 가신단 계층구조 변화 등 기존 질서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들이 많았기에 곧 내정개혁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해방론이 대두된 것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만 해도 에도막부의 주 구성원이 무사 계층인 것, 국제안보상의 고립감 등이 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열도라는 불리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의외로 18세기 이흔 세계 지리에 대해 일본의 관리들이나 지식인들을 상세하게 지도를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일본열도가 방어에 매우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하야시 시헤이의 말대로 열도라는 조건은 예전에는 바다가 일종의 장애물이라서 외침을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이제는 항해술의 발달로 바다를 육지처럼 다니기에 사방에서 침입해 올 수 있는 악조건으로 변해버린 후였다. 게다가 수도인 에도 부근의 에도가 지금의 도쿄 만 깊숙이 위치하고 있는 항구라는 점도 문제였는데 이 때문에 서양 선박이 작정하면 에도를 봉쇄하는 것도 가능했다. 만약 에도 만 입구가 막히면 에도로의 각 지방의 물자 보급이 끊기고 격심한 혼란에 빠질텐데 이는 조선의 한성이나 청나라 베이징 같이 내륙 운하 혹은 육상 수송으로 물자를 보급할 수 있는 도시와는 특성 자체가 달랐다.


해방론은 앞서 언급했듯이 내정개혁론과도 결합했다. 해방론의 시조인 하야시 시헤이의 <해국병담>은 서양 침략에 맞설 수 있는 군사 기술 등 테크놀로지에 대한 기술이 대부분인 군사기술서인 것에 비해 19세기로 넘어간 이후의 해방론은 국방능력 향상을 위해 내정개혁을 촉구하는 소위 "내정개혁론"으로 전환되었다. 즉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 국방 능력 향상을 넘어 사회체제 자체를 혁신하여 사회 전체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19세기 동안 거국일치, 합국일치 등의 구호가 빈번히 등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며 해방론이 내정개혁론과 결부된 대표 사례로는 막부의 천보개혁이 있다. 이렇듯 해방론은 내정개혁론과 연결되면서 해방의 성공을 위해서 기존의 막번체제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 사회체제를 요구하는 사상의 출현을 자극하였고 이 시기 해방론에 촉발되어 등장한 내정개혁론들의 주장들은 일본 초기 국가주의의 구성요소들을 거의 대부분 갖추고 있기에 일본 우익 사상의 맹아라 평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신론>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자기정체성의 상징이던 태양과 관련된 것들을 보여주고 있고 일본은 천일지사(天日之嗣)가 통치한다는 의식이 드러나 있다. 이 태양 이미지는 훗날 히노마루(일장기), 욱일기 등으로 이어지는 등 일본 내셔널리즘의 상징에도 영향을 끼쳤고. 따라서 <신론>은 수많은 해방론 저서들과는 달리 실제 군사학적인 논의는 전혀 없고 어떻게 하면 국내 인심을 통합하여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체화시킬 수 있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신론>은 국가의 통일성 강화와 인민의 통합이 목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신토 국교화 정책, 교육 칙어 등 국민도덕사상에까디 영향을 줬다. 또 재미있는 점은 <신론>은 만세일계 천황 존재 이유를 들어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게 막말기 존황양이 세력의 성전이 되는 것까지 이어진다.


<신론>은 어떻게 민을 장악해 일본이라는 국가에 포섭시킬 것인지에 대한 해법으로 천황과 민을 친밀하게 하여 민이 천황에 존경과 충성심을 갖게 만들어 일체화시키는 것은 제안했다. 당시 일본의 정치권력은 에도에 있는 막부가 장악하고 있었고 천황은 권력에서 멀리 떨어지다 못해 교토 밖에서는 존재조차도 알려지지도 못했었다. 심지어 천황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민속신앙과 관련된 존재로 인식했지, 그것을 일본 국가의 상징이며 정치적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으로는 전혀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신론>의 저자 아이자와가 이러한 것들을 바꾸고 진정으로 서구의 위협으로부터 열도의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천황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전 구성원이 하나가 되어 서양세력에 맞서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라고 보았으며 이와 같이 해방론은 일본의 초기 국가주의 속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국가적 상징을 창출하여 민을 국가와 일체화하는 시도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론 속 위기의식은 천황과 백성의 일체화라는 제국 일본의 정체성 뿐만 아니라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해외로의 팽창 주장이 나오는 것에도 영향을 줬다. 일례로 해방론이 나올 때쯤인 18세기 말 난학자인 혼다 도시아키는 캄차카를 중심으로 당시 활성화되어 있던 북방 교역권을 일본이 장악하여 러시아의 침입을 막고 무역 국가로 변신히니 영국에 비견되는 세계 제일의 대양국이 되는 걸 목표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침략론까지는 아니었지만 19세기 초로 가면 사토 노부히로를 시작으로 적극적인 군사적, 정치적 해외 팽창론이 나오기 시작한다. 사토 노부히로는 훗날 100년 뒤인 1930년대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도 인기를 끄는 인물로 일본이 선택받는 국가이기에 세계를 제패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에는 헛소리나 망상으로 치부받았었던 그의 주장에 따르면 먼저 조선과 만주를 정복하고 뒤이어 중국을 침략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놀랍게도 이 주장은 훗날 한일합방을 시작으로 만주사변, 중일전쟁까지 일본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는 나비효과로 번진다.


" 만주인은 조급하며 지략이 부족하고, 지나인은 나약하고 비겁하여 겁이 많다. 그러니 조금만 놀랄 일이 있어도 꼭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구원하려고 할 것이다. 많은 인원이 자꾸 동원되면 인력은 피폐해지고 재정은 고갈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지나의 수도인 베이징에서 만주 해안까지 왕복하는 길에는 사막이 펼쳐져 있고 산과 계곡은 매우 험난힌다. 반면 황국(일본)이 이것(만주)을 정벌하는 길은 겨우 160~170리의 해상이므로 순풍에 돛을 달면 하룻밤에 그 해안에 도달한다.

.....황국이 달단(만주)을 취하고 이 오랑캐를 잘 다스려 이 무리로 하여금 남쪽으로 향하게 한다면 지나국이 강성하다 해도 어찌 저항할 수 있겠는가. 버러지 같은 만주 오랑캐도 지나를 취한 바 있다. 하물며 황국의 병량(兵糧)과 대총(大銃), 화약의 신성한 위력으로 그 뒤를 잇지 못하겠는가. 십수 년만에 지나 전국을 통일할 것은 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다. "


사토의 주장을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조선의 충청도로 쳐들어가 이를 기반으로 중국의 발해만을 공격하고 다른 부대는 류큐에서 출발해 대만을 거쳐 저장 성에 쳐들어가며, 천황도 규슈의 구마모토로부터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난징을 침략한다는 구체적인 진격 루트까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명나라 황족의 후손을 찾아내어 상공으로 봉해 인심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구상도 있었다. 누가봐도 굉장히 황당한 주장이고 망상에 가까웠던 이야기였는데 실제로도 그의 주장은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1930년대 일본이 군국주의화 되면서 대륙 침략을 감행하자 사토 노부히로가 꿈꾸던 이상은 약간이지만 현실에 접목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초기 국가주의가 해방론의 후계 사상인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는데, 그게 바로 19세기에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나온 요시다 쇼인이었다. 물론 19세기 사람이니 해방론의 원류는 아니고 이후의 존황양이 사상과 결합한 경우이긴 하나 요시다 쇼인의 사상은 앞서 언급한 해방론 계통의 <신론>, 사토 노부히로 등이 갖추고 있는 요소들을 더욱 발전시켜 존황양이 사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신론>이 일본을 세계의 중심으로 칭한 것처럼 미토 학의 계승자 요시다 쇼인 역시 일본이 역성혁명으로 임금으로 바뀌는 중국,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끌어온 "신의 나라"임을 강조하면서 그렇기에 독자적이고 우월하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신성한 존재인 천황은 세상 어떠한 것보다 앞서있는 초월적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요시다 쇼인은 "진구황후가 조선을 정벌했다"는 이야기가 담긴 <고사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곧 주변국가들을 정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아래에서 인용한 요시다 쇼인의 해외팽창론 관련 어록을 보면 사토 노부히로와도 굉장히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더 다듬어진 듯한 인상도 받을 수 있다.


" 에조치(훗카이도)를 개간하고 캄차카, 오호츠크 해를 탈취하고 류큐(오키나와)도 점령해 그 영주들을 에도로 불러들여야 한다. 또 옛날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일본에 공납을 바치도록 하고, 북쪽으로는 만주 땅을 얻고 남쪽으로는 타이완, 필리핀(루손)을 손에 넣어 일본의 진취적인 기상을 보여줘야 한다. "(소름 돋게도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의 점령지와 거의 일치한다.)


" 오스트레일리아는 여러 국가가 앞 다퉈 얻으려고 한다. - 만약 일본이 이곳을 손에 넣으면 분명히 큰 이익이 될 것이다. -조선은 옛날에 일본에 속해 있었지만 지금은 거들먹거리고 있다.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


" 삼한이나 임나 등과는(한반도와는) 땅이 떨어져있지만 일본과 서로 대치하고 있는 형세이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올 것이고 우리가 공격하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습격할 것이니 장래에 예측할 수 없는 근심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한반도를 합병해야 하는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각자였다. "


" 조선, 만주에 진출할 때 다케시마는 첫 번째 발판이다. "


이렇게 해방론은 내정개혁론으로 1차적으로 변화를 하고 2차적으로 해외팽창론으로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막말기 지식인들은 해방론, 내정개혁론, 해외팽창론 이 세 개를 왜 결부시켰을까? 일단 냉정히 말해 러시아가 당시 일본에 식민지화를 시도할 야욕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에조치 부근에 대외위기가 있었는지는 솔직히 매우 의심스럽고 근거도 없다. 당장 아이자와 야스시가 <신론>을 썼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이나 관료들은 서양 선박의 출몰을 대외 무역과 관련된 것이지 군사적 위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거세게 공격했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에도 막부 시절에는 러시아가 에조치 분쟁도 대화로 해결했고 메이지 신정부 수립 이후로도 러시아 위협론은 계속 나돌았던 떡밥이었지만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일본 대표로 가서 러시아 외무성과 교섭했을 때 사할린은 러시아에게 넘어가는 조건으로 대신에 일본에게 쿠릴 열도 일부를 넘겨주며 군사적 위협은 커녕 원만하게 해결해줬다. 따라서 초기 국가주의의 기초가 된 해방론의 위기의식은 엄밀히 말해 과장 혹은 인위적으로 조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진심으로 서양과 전쟁을 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요시다 쇼인만 해도 당장은 서구 세력에 맞서는 것보단 일단 한걸음 물러나되 조선과 만주 등에서 서양 세력에게 빼앗긴 이익을 채우며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그 외 해방론자들도 단지 이런 충돌을 이용해서 위기의식을 조장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체제를 개혁하려는 목적이 훨씬 컸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양이론은 전략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술책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그토록 신속히 양이 노선을 폐기하고 서구식 근대화 노선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위기의식의 과장과 대외 충돌을 이용한 국내체제 개혁이라는 구상은 제국 일본 시대를 관통하여 대외 침략전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전쟁을 통한 내정혁신이라는 1930년대 이후의 군국주의 논리로도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박훈 외, <일본 우익의 어제와 오늘>, 동북아역사재단, 2008

박훈,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민음사, 2014

김세진,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호밀밭, 2018

박영준 <해군의 탄생과 근대 일본>, 그물, 2014

박영준, <근대 일본의 “전쟁(戰爭)”개념과 그 전개: 전쟁관의 변화와 대응 정책론의 전개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원 부설 동북아연구소, 동북아연구 27(1), 2012

남영우, <하야시 시헤이의 생애와 업적 : 『三國通覽圖說』과 부도의 독도를 중심으로>, 동북아역사재단, 해양영토연구 1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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