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이때까지 썼던 일본 정치 관련 글들을 천천히 하나씩 읽어봤다. 오타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오류를 수정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내 글이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 지도 한번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다. 보고 나서 느낀 점은 한마디로 상당수의 글들이 일본 정치 덕후들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너무 어렵게만 썼었다는 것인데, 물론 일본 정치 자체가 한국에서 생각 외로 깊게 파고드는 경우가 잘 없기에 그렇게 보이는 부분은 있을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도 다들 아는 뻔한 사실을 대단한 것인 양 포장하거나 그걸 쉽게 요약해서 글을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해서 일본 정치 관련 글들이 기본적인 바탕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가 갈 수 있는 구조였던 것도 있다.
그렇지만 너무 그런 글만 쓰면 웬 오타쿠 놈이 혼자 아는 지식만 가지고 씨부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가 있어서, 한번 여러 가지 재료들을 종합해서 일본 정치를 잘 모르는 초심자도 이해할 만한 일본 정치 글도 가끔씩 써보고자 한다. 한마디로 일본 정치 가이드 글도 생각날 때마다 올린다는 것인데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일본의 의회제도와 선거 특징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해보려고 한다.
1. 일본의 의회제도
민주제를 채택한 국가에서 정부 형태는 입법과 행정의 관계에서 기본 원리를 기준으로 크게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로 구분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의 정부형태는 이 두 제도의 요소를 혼합하거나 변형하여 만든 것이며 대표적인 사례가 대통령제, 의원내각제의 절충안과 비슷한 느낌이라 할 수 있는 이원집정부제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은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중의원 465석(소선거구 289석, 비례대표 176석), 참의원 248석(지역구 148석, 비례대표 100석)으로 총 710석의 양원제를 도입한 국가이다. 참고로 양원제를 시스템으로 두는 국가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70여 개국에 이르고 있다.
일본이 양원제를 처음 받아들인 것은 메이지 신정부 시기로 1872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천황에게 제안했던 게 기원이다. 당시의 국회의원 선거 자격은 납세자에 한해서만 투표권을 부여했기에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는 전체 일본인의 1%가 끝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토지세로 참정권을 얻은 지주들이 대부분이라 이권 카르텔 형성에 취약했다. 이런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후 납세자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보통선거운동이 일어났으며 최종적으로 1925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 와서 납세자격을 폐지하고 보통선거법으로 개정하여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절정을 이뤘다.
그러다가 패전 후 GHQ는 일본의 민주화와 함께 전전 시대의 특권계급을 옹호할 이유가 없다며 단원제를 제안했으나 일본 정부는 제1의회에 대한 견제 기능으로 제2의회가 필요하다고 하며 양원제를 유지했다. 또 양원제는 의안의 심의에서 신중과 공정을 기할 수 있고 국회다수파의 전제와 횡포를 방지하여 국민의 권익을 옹호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단점으로 이중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심의가 지연되고 국고가 낭비되는 데다가 책임소재까지 불명확하기에 정부에 대한 의회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한편 일본에서의 안정 의석은 한국의 과반 의석과는 다소 다른데 예를 들어 중의원에서 의결한 법안을 참의원에서 과반대로 거부할 수 있지만 참의원에서 거부된 법안을 중의원에서 다시 의결하고자 할 때는 중의원 3분의 2 의석수가 있어야 통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의원 과반에 중의원 3분의 2 이상이면 절대 안정 의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고 참의원에서 과반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해도 중의원에서 3분의 2만 넘으면 참의원에서 아무리 반대해도 원하는 법률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하지만 참의원이 과반이 안되는데 중의원마저 3분의 2가 안 되면 여당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1-1. 참의원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 GHQ는 비민주적인 귀족 제도를 없애면서 기존의 귀족원을 폐지하고 참의원으로 바꿨다. 이때까지는 참의원은 귀족원에서 명칭만 바뀌었지 초기까지는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학식 경험자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당파성은 강하진 않았으나 1982년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서 그때부터 정당 간의 정쟁의 장으로 변화했다. 오늘날 참의원은 법률상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할 수 없으며 국회 내에서 중의원과 참의원의 의견 충돌 시 중의원의 의견이 더 우선권이 있어서 다소 밀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각종 예산과 조약, 내각총리대신의 지명에서 중의원과 의견이 엇갈릴 경우나 참의원이 일정기간 내 의결하지 않을 경우에는 중의원 의사대로 국회의 의사가 성립이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일본 국회에서 참의원의 중의원에 대한 견제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고 지금은 오로지 신중한 심의진행이라는 측면만 남아있어서 "참의원 무용론"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의원이 해산 중이고 내각이 긴급 국회를 요구할 상황에서는 참의원은 중의원을 대신해 국회의 기능을 수행해야 하기에 존재 의의는 여전하다. 참의원은 중의원과는 달리 6년의 임기를 보장받는데 그러나 6년마다 참의원 전원을 선출하지는 않는다. 대신 3년에 한 번씩 절반을 정기적으로 교체하는 선거를 하기 때문에 총선이 아닌 통상 선거라는 명칭이 붙는다. 또 재미있는 점은 참의원 선거 정국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출마해 당선되는 사람을 개선 의원이라고 불리고 이번 선거는 쉬고 3년 후의 선거를 기다리는 의원들을 비 개선 의원으로 부르는데 이들 수는 각각 딱 절반인 124명이다.
그리고 입후보의 난립을 막기 위해 지역선거구 입후보자는 3백만 엔, 비례대표 입후보자는 6백만 엔을 공탁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참의원 선거는 2022년 제26회 선거였는데 이 선거에서 뽑힌 124명은 차후에 있는 2025년 선거는 비 개선이 되어 건너뛰고 2028년 선거에서 다시 나오게 된다.
1-1-1. 귀족원
귀족원은 오늘날 참의원의 전신으로 일본 양원제에서 상원 격에 해당하는 집단이다. 제국 시절 일본은 화족들이 특권 계층으로 존재하는 귀족 사회였기에 귀족원은 황족, 화족, 칙임의원 등 기득권 사회 최상위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황실은 일본 천황가의 친척이었기에 만 20세가 된 황족 남성들은 정원과 상관없이 자동으로 귀족원의 종신 의원으로 있을 수 있었다. 1884년 화족제의 제정은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도와 공헌도를 기준으로 공후백자남(公候伯子男)의 5개 작위를 부여하고 이중 공후 작위는 자동적으로 종신임기의 귀족원 의원이 될 수 있도록 특권과 세습 권한을 부여했다.
백자남 작위의 경우는 선거를 통해 귀족원으로 선출될 수 있도록 했고 임기는 7년이었다. 이 제도는 1947년 일본국 헌법 제정에 의해 기존의 제국 헌법이 완전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칙임의원이란 국가에 공헌한 바가 크거나 학식이 높은 30세 이상의 남자, 또는 국세를 많이 낸 자 등을 말하는데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이완용의 조카 한상룡, 백작 송종헌, 고종의 생질 이기용, 훗날 친일파가 된 윤치호 등 7명이 귀족원에 임명된 케이스였다. 한편으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치에 입문하지 못한 지방 다이묘들과 무사 계급의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 270명의 다이묘와 500명의 무사 계급 인사에게 귀족원 자리를 내준 적이 있었는데 이게 의외로 좋은 방법인 게 당시 일본의 제도상으로는 귀족원의 동의 없이 정부조직 개편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위의 안전성이 확고히 보장되어서 불만을 사그라들게 할 수 있었다.
1-2. 중의원
중의원은 사실상 일본 의회제도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권한은 참의원보다 강력한데 예를 들어 예산안 심의나 신임 수상 지명, 조약 체결 심의에서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 또 중의원에서 가결된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었다고 곧바로 중의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닌데 우선 양원협의회라는 기구를 통해 의견을 조정하다가 계속 불일치할 시에는 중의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이 다시 가결하여 통과시키면 법률로 확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참의원 입장에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중의원이 강력한 이유는 바로 아베 신조나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같은 총리급 인사들이 대부분 중의원 의원들인 것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래도 중의원이 총리를 견제하는 방법은 있다. 만일 집권여당과 총리의 정책 실패로 민심이 악화될 경우에 내각 불신임안을 가결하여 내각 구성원 전원을 사퇴시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내각은 10일 이내에 총리부터 장관들 모두가 총사퇴를 할지, 아니면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지 정해야 한다. 사실 내각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여당 대표인 총리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정한다고 보면 된다. 반대로 내각이 갖고 있는 중의원 해산권은 의회의 내각 불신임권에 맞서 내각과 의회 간의 힘의 권형을 위해 부여된 권한인데 다만 어디까지나 국회 해산의 의미는 중의원으로 한정되어 있고, 참의원은 해당되지 않는다.
보통은 총리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경우로 중의원 해산 카드를 꺼내 들기에 선거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면 사실 꺼낼 수가 없다. 일본 헌법에서는 내각의 승인 아래 국가원수인 천황이 중의원을 해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일본국 헌법 1조는 천황을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만 내세우고 있기에 사실상 국회해산권은 총리의 권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중의원 임기 4년이 제대로 지켜진 적을 찾기가 힘든 수준이며 허구한 날 정치적 이슈에 따라 해산하다 보니 예산 소모도 많다. 물론 이는 의원내각제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중의원 해산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총리가 당권을 장악하는 수단으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게 현실화된 게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우정 해산"이었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는 우정 사업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지방 농산어촌 지역구를 둔 자민당 의원에게까지 항의를 받았는데 결국 중의원 통과 후 참의원에서 부결되는 참사가 벌어진다. 이때 고이즈미는 참의원 반대에도 중의원에 우선권이 있다는 걸 이용하였고 대책으로 안건을 되돌려 다시 표결에 부치기보단 중의원 해산으로 "헤쳐 모여"로 극복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중의원 해산 이후 선거 공천에서 고이즈미는 대놓고 반대 파벌을 기득권으로 몰아세워 배제시켰고 선거 결과 당시 480명 정원 중 자민당이 296석이나 차지하게 되었다. 물론 이건 고이즈미가 "극장 정치"를 하던 괴짜 총리였기에 가능한 발상이었지만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총리가 갖고 있는 국회 해산권은 얼마든지 적절히 활용한다면 여당의 일인자로서 전권을 장악하는 빠른 길이 될 수도 있다.
중의원이 해산되면 사실상 전원이 의원직을 상실하기 때문에 해산한 날로부터 40일 이내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국회를 구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일본 정치를 돌아보면 국회에 의한 내각 불신임보다는 내각에 의한 중의원 해산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특히 전후 총리의 상징이던 요시다 시게루는 아예 재임기간 동안 4번이나 국회를 해산할 정도였다. 하지만 중의원을 해산하려고 할 때 각료 중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해산을 포기해야 한다거나, 그 각료를 해임시킨 후에 해산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은 존재하기에 물론 진짜 무작정 총리 마음대로 해산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1-3. 내각총리대신
일본 총리는 원칙적으로 국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표를 얻은 국회의원을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하고 이후 천황이 의례상 임명식을 하는 절차를 통해 선출된다. 쉽게 설명하자면 국민이 국가원수를 선출하는 게 아니라 국민의힘 의원들이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지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좀 더 나아가자면 일본에서 총리 선출 과정에서의 국회의 지명은 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집권여당 당수인 총재가 곧 총리로 지명된다고 이해하면 편하다. 이러한 방식은 의원내각제라는 정치 체제 하에서 통용되는 방법 중 하나로 대통령제와 크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총리 지명 절차에서 중의원과 참의원의 대립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냐는 의문도 있을 텐데 이 상황에서 우선권은 당연하게도 중의원에서의 의결에 있다. 때문에 중의원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의 총재 혹은 대표가 총리로 지명되며 그래서 오랫동안 집권해 온 자민당의 총재는 차기 총리감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국민이 직접 총리를 뽑는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역기능으로 작용하여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소수당 대표도 총리로 선출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우리에겐 "무라야마 담화"로 잘 알려진 일본 사회당 소속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총리가 되면 곧바로 각료를 임명해 내각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입법부와 행정부를 밀착하는 방법을 쓰나 삼권분립 취지가 다소 퇴색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하다.
총리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아마 집권 여당의 유력 파벌의 수장이 되는 것일 거다. 파벌은 정당 내부의 또 다른 정당으로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55년 체제 동안의 자민당의 경우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파벌의 수장은 소속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배분하고 협력을 통해 계속 조직을 관리해 가야 하고 그 대가로 소속의원들은 수장이 총리에 취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상호 통제 관계가 생겨난다. 특히 내각의 정무차관이나 각료대신 등 중요 보직을 배분받기 위해서는 주류 파벌에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재선 하기 위해 실력자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보다 많이 챙겨야 하다 보니 이합집산 과정에서 파벌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기시다 내각의 경우를 보면 총리인 기시다는 굉지회고 아베파(세이와 정책연구회), 헤이세이 연구회(모테기 도시미쓰 등)와 연합하여 타 파벌에게 내각 보직들을 분배하고 있으며 고노 다로, 고이즈미 신지로 같은 반대 파벌 인사들도 일단 주류 파벌이기에 한직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민당에서 성공하려면 파벌에 속하는 건 당연하다.
파벌 정치의 장점은 폭넓고 다양한 의견의 수렴이 가능하다는 것과 또 당내에서 중요한 정책을 합의할 때에 시간을 단축하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또 파벌은 자민당 내에 여러 개의 정당들이 존재하는 개념이었고 자민당이 수십 년 동안 독주하는 상황에서 일종의 내부적으로 내각을 견제하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즉 한국에서는 후진적인 구태 정치로만 평가받고 있지만 의외로 특정 세력의 독점을 그동안 막아온 덕분에 우경화에 제동을 거는 부분도 분명하다는 셈.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직체계가 수직적이라 의원 간 수평적 의사소통이 진 되지 않는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아무튼 이렇게 총리로 임명될 수 있다면 헌법에 총리의 임기가 규정되지 않은 상황상 이론적으로는 중의원 선거에 맞물려 있기에 여기서 임기가 짧아지다 못해 하타 쓰토무처럼 64일 만에 물러날 수도 있고 아니면 잘 활용해서 아베처럼 3연임에 성공하여 최장수 총리가 될 수도 있다.
2. 어떻게 정책이 결정되는가?
일본의 정책 결정은 55년 체제 이후로 큰 틀에서 보자면 족의원, 관료, 이익단체를 중심으로 한 "철의 삼각동맹"이라 불리는 강력한 카르텔 중심 하에 이뤄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족의원은 베테랑 의원이라 표현할 수 있는데 이들은 관료와 협력, 경쟁을 반복하며 정책 형성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경제계에서는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이 결정되도록, 다른 족의원들에게는 정치자금이나 득표에 도움이 되도록 로비를 벌이고 반대급부를 제공받는다. 아마 이 족의원의 행보들이 일본 정치가 금권 정치이자 부패 정치라는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에 가장 크게 일조했을 것이다.
관료의 경우는 정치가의 의향을 받아들이는 대신 예산 획득이나 경쟁에서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을 약속받는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는 관청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이익단체의 경우에는 대표적인 것이 경단련이다. 경단련은 일본 최대의 경제단체로 정치자금 모금을 일원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부의 무역정책이나 우주 개발 등에 정부의 자문에 응하는 자문기관과 상임위원회도 구성되어 있다. 그 외 노동협상과 노동문제에 관련하여 경영자 측의 단합을 도모하는 닛케이렌(2002년 경단련에 흡수) 재계의 여론을 형성하는 경제동우회, 그리고 일본상공회의소 등이 이익단체와 정치가 사이의 연결고리를 맡는다.
이 철의 삼각동맹은 어떻게 관계가 이어질까? 먼저 이익단체는 족의원에게 표를 모아주거나 후원금을 주고 족의원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익단체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추진, 이때 족의원은 관료의 정책 형성에 압력을 가한다. 이렇게 모은 표와 돈의 거래를 통해 일종의 정치적 거래를 하는 것이다. 세부적인 프로세스는 관료가 주도하여 만든 정책을 당 내부에서 사전협의를 통하니 입안한 후 국회에서 통과시키면 이제 족의원과 이익단체는 입안된 정책에 협력하는 이해관계로 묶이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 내용은 어디까지나 55년 체제에나 그대로 적용되었던 부분이고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이 들어선 후부터는 탑다운 방식으로 바뀌면서 총리관저가 주도하게 되었다. 원래는 각 성청의 중견 관료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기획, 입안하고 여러 프로세스를 거쳐 각의 정책 결정을 하는 바텀업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총리관저가 주도하는 탑다운 방식인 것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내각부의 기능을 강화했는데 이는 지나치게 권력화된 관료정치의 폐해와 부조리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고이즈미는 2001년에 바로 기존의 정무차관직을 폐지하고 그 대신 대신(장관) 밑에 정치가인 부대신직을 새로 신설하고 기존 정무차관에 해당하는 직책에 정무관을 뒀다. 물론 이는 전부 정치 임명직으로 부대신과 정무관을 3명까지 둘 수 있다. 이렇게 개혁을 통해 직위상으로는 대신이 넘버 원, 부대신이 넘버 투, 그리고 정무관과 사무차관이 넘버 쓰리로 간주되게 하였는데 고이즈미는 이 방식으로 한 부처에 정치가를 대폭 투입시켜 관료 조직을 상대로 정치적 리더쉽을 발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일본 정책 결정 과정이 관료 주도에서 정치 주도로의 전환이 이뤄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이후 관료 정책을 너무 성급하게 한 일본 민주당 정권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존재하다가 무너지고 12년 말에 다시 자민당이 재집권해 아베 내각이 들어섰다. 아베는 고이즈미로부터 정치를 배운 사람답게 어떠한 공지도 없이 중요 정책들이 총리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결정되어 발표되는 관저주도의 탑다운 방식을 고집했다. 이는 아베가 전통적인 자민당의 정치수단과는 성격이 다른 "측근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으로 자민당 특유의 파벌 정치가 퇴색해 가고 총재 중심 구조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아베는 정보를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 관료들도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19년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였다. 당시 경제산업성은 무역 분쟁의 소지를 언급하며 신중론을 펼쳤지만 결과론적으로 아베의 최측근 참모들로만 이뤄진 총리관저의 주도로 "싸움은 첫 한 방이 중요"하다며 극비리에 결정되었다.
물론 기시다가 집권한 이후 다시 관료 집단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긴 하지만 과거 55년 체제의 철의 삼각동맹만큼 그들이 정책 입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보단 단지 실행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상황은 크게 바뀔 것 같지가 않다.
3. 일본 선거의 특징
3-1. 후원회
일본에서는 정치자금을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걷을 수 있는 후원회라는 조직이 있다. 후원회는 후보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선거운동 조직으로 공직선거법 제199조에 따라 정치자금 기부를 목적으로 선관위에 등록된 정치단체다. 후원회의 지정권자는 의원 및 의원 선거 후보자, 예비후보자와 지자체장 선거 후보자, 당 대표 경선 후보자 등이 대상이라고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또한 후원회는 정당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사실상 정당의 하부조직을 담당하고 있으며 한 번의 모임에 1인당 3만 엔 이하로 세금 계산서를 발급해주고 있다.
원래 후원회란 유권자들이 후보자의 당선을 돕기 위해 금전적인 지원을 하거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이지만 유권자의 자발적 후원회라는 것은 명분이고 실제로는 후보자 자신이 출신지, 현주소, 친척, 동창회, 직장 등 인맥을 이용해 조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래서 후원회가 클수록 정치적 영향력과 그에 따른 기대감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현직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후보자들은 후원회 조직을 가지고 있다. 후보자는 전통적으로 후원회 회원의 관혼상제에 참석하고 각종 회식이나 운동회, 단체여행 등을 주선하기도 하고 입학, 취직, 융자 등 선거구민에 대한 다양한 사적 서비스까지도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비서관이 선거구에 상중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이것이 일본 정치가들이 부정부패 혐의에 휘말리게 되어 정치 전반이 금권정치화되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후원회의 회장이나 간부는 경제적 타산에 민감한 후보자 지역의 건설회사 사장이나 부동산업자가 차지한다. 일본의 건설업계는 대부분 하청 방식이기에 지역 건설업자들이 중앙의 대규모 건설업체로부터 공사를 하청 받도록 거기에 맞춰서 관료들은 개발 공사를 발주한다. 그래서 후원회에서는 공공사업이나 보조금 등의 이권을 다른 후보자나 기업에게 건네주지 않기 위해 그 의원이 은퇴하거나 사망하더라도 후원회가 계속해서 의원의 친족을 후보로 내세워 지원해 준다. 이는 거액을 투자해 놓은 이익유도형 기반을 타인에게 건네주는 밑진 장사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3-2. 지반, 간반, 가방
우선 지반은 한국어로 바꾸자면 "연고"라 할 수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불쑥 나타나 입후보해도 지지 기반이 없으면 국회 입성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후원회가 힘을 발휘하는 것이며 후보자는 자신의 지역구에 후원회를 조직하여 기반부터 다지고 시작한다. 일본 국회의원 중 세습 의원이 유독 많은 것도 여기에 기인하며 즉 선대가 평생을 갈고닦아온 지역구와 후원회 조직, 자금을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아 선거전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신인 정치가라 해도 그것만 있다면 당선 확률이 높아지는데 이처럼 지역구에서 확실히 득표하기 위해서는 지연, 혈연, 학연 등으로 연결된 인적 네트워크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간반, 즉 후보자의 "간판(지명도)"다. 후보자 자신이 지역구의 단체장, 지방의원 등을 역임한 경력이 있으면 선거에서 유리하듯이 얼굴과 이름이 얼마나 알려져 있는가가 중요하다. 일본에서는 참의원 선거구의 경우 도도부현 단위로 매우 넓게 퍼져있는데 그렇다 보니, 참의원 선거에서는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스포츠 선수, 탤런트, 가수 등 연예인이 각 정당에 스카우트되어 입후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다. 물론 그럼에도 일본 정치에서 가장 좋은 간판은 도쿄대 졸업 후 재무성(구 대장성)에서 근무한 경력인데 이와 맞먹는 수준의 간판은 아무개 의원의 아들이라는 것 정도밖에 없다.
세 번째는 가방, 즉 파벌 정치의 쇠퇴와도 연관이 깊은 자금 문제다. 자금이 넉넉한 가방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붙은 비유적 표현인데 선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니 후보자가 이를 얼마나 조달할 능력이 되느냐가 관건이다. 특히 과거 중대선거구제 시절에는 같은 당에서 복수 후보자가 동일 지역구에 입후보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가방의 역할이 매우 절대적이었다. 즉 자금이 없으면 선거를 치를 수도 없지만, 당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그 때문에 세습 정치인일수록 선거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고 각복전쟁 시기 다나카 가쿠에이가 돈줄을 쥐고 이를 이용해 소속 의원들을 모으고 관리했었던 것은 일본 정치 속 어두운 면을 잘 보여준다. 결국 55년 체제 말기에 가서 선거 시 돈이 많이 드는 구조적 문제 탓에 정치와 기업의 유착이 심각해지다가 리쿠르트 사건, 사가와규빈 스캔 등의 사건들이 연달아 터져 1993년 정권 교체가 벌어지는 원인까지 될 정도였다.
3-3. 세습 정치인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하나?
세습의원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아버지, 조부, 삼촌 등 3등친 이내의 친족 중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적 있는 금수저 출신의 현역 의원을 의미한다. 한국 정치에서도 과거 경기도지사였던 남경필이나 전직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정진석 의원 정도가 아버지로부터 지역구를 물려받은 경험이 있는 정치가였지만 사실 이건 우리나라에선 드문 케이스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은 세습이 대중화되다 못해 마치 일본 문화의 한 축인 양 암묵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당장 일본의 세습 의원은 중의원에서만 26%이고 자민당 소속 의원 중에서는 40%에 육박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세습 가능 이유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일본식 정치문화를 포함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후원회 중심의 이익유도형 정치다. 즉 지역구 주민은 후원회 활동을 통해 지지의원을 국회로 보내고 다시 지지의원으로부터 각종 편의를 제공받기 때문에 혹시라도 지지하는 의원에게 일이 생기면 그동안의 편의를 못 받게 되니 말이다. 게다가 앞서 세습 정치인들은 언급한 지반, 간반, 가방을 부모로부터 모두 받으니 선거에서 당선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뭐 어찌 보면 정치인 집안사람들에게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해온 탓에 정치 DNA가 흐른다고 봐야 하나?
그렇다면 왜 일본인들은 이러한 현상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가? 단순히 그들이 개돼지라서 그런가? 그렇다고 보기엔 지나친 국개론식 해석이기도 하고 너무 단편적이다. 진짜 이유는 일본인들의 고유의 문화에 있다. 일본에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오래된 우동집, 라멘집, 여관 등이 3대, 4대를 걸치거나 때로는 몇백 년에 걸쳐 운영되어 오는 곳도 많은데 이런 문화가 정치에도 영향을 줘서 세습 관행이 어느 정도는 허용되는 건 아닐까 싶다. 또 막부 시대부터 제국 시절까지 일본은 신분제 사회가 엄격했기 때문에 변화에는 다소 무감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세습 정치가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치 세습의 안착으로 신인 정치인들의 도전이 좌절되고 정치 활력의 역동성이 사라지는 문제점이 존재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의 세습을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그건 일본인들도 마찬가로 그들도 한국 국회의원 구성에 갸우뚱할 것이다. 왜냐면 한국은 과거의 안철수부터 오늘날의 윤석열에 이르기까지 조금만 유명해진다 싶으면 정치판에 기웃거리다가 국가 권력과 낯 뜨거운 동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그런 것은 없다. 한마디로 일본인들은 갑자기 유명해진 시인이 정치권에 들어오거나(도종환), 장사가 되었다고 씨름꾼이 공천을 받거나(이만기), 탈북자가 국회의원이 되거나(태영호, 지성호) 하는 걸 이해 못 하는 걸 넘어 일종의 코미디로 보인다는 얘기다. 그들의 생각에는 교수가 유명해지고 싶으면 학문적으로 뛰어나야 하고, 시인이 이름을 남기고 싶으면 죽을 때까지 명예롭게 시를 써야 하는데 갑자기 정치판에 뛰어드니 말이다. 이러한 세습 정치인의 문제는 무작정 개돼지라고 비하하기보단 한일 양국의 문화를 비교해 보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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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a.m.wikipedia.org/wiki/%E8%A1%86%E8%AD%B0%E9%99%A2 (일본어 위키피디아 "衆議院"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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