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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Dec 14. 2023

메이지 신정부의 핵심, 조슈벌(長州閥)

제국 시절 일본 정치, 군부에 있어서 번벌 세력의 흥망

https://youtu.be/wEUrovGJSZs?si=ba6QBkvG0fI4B81c

현재 야마구치 현으로 알려진 에도 시대의 조슈 번 지역은 일본 정치의 최대 변혁이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유신의 본고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슈는 에도 막부 타도의 일등공신인 것이고 실제로 유신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건 삿초동맹이 보여주듯이 사쓰마, 도사를 비롯한 몇몇 도자마번 다이묘들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메이지 유신 이후 정권과 군권은 막말에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연합을 맺었전 삿초도히(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출신들에 의해 독점되었는데 여기서 조슈 출신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았다고 봐도 될 정도다.


실제로 제국 헌법의 제정으로 내각제가 시행된 이후부터 하라 다카시를 중심으로 한 정당 내각이 설립되는 1918년까지 대략 30년의 기간 동안의 내각총리대신들을 출신 지역별로 분석해보면 답이 나온다. 조슈 출신들은 무려 10회(총 7,537일),사쓰마 출신이 4회(1,908일), 그 밖의 구게 출신이 2회(1,400일), 히젠 출신이 2회(1,040일) 집권했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총리대신 교체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총리의 부재로 각료 일부가 겸임한 경우를 제외하고 보자면 1대 이토부터 18대 데라우치까지 역대 총리의 재직기간을 합산하며 11,885일이 되는데 그 가운데 조슈벌, 즉 조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 등 4명의 수상이 합계 7,537일(전체의 63.4%) 동안 집권했다.


역대 조선 공사, 통감부 통감 및 부통감, 조선총독들의 출신지 또한 조슈 출신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먼저 초대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을미사변의 주범 미우라 고로는 당연히 조슈벌의 일원이었고 을사조약 이후 1대부터 3대 통감까지도 보면 이토 히로부미, 소네 아라스케, 데라우치 마사다케 모두 조슈벌 인사들이다. 특히 조선총독부로 전환된 이후 초대 총독이자 헌병경찰 제도 도입 및 무단 통치의 집행자로 우리에게 악명높게 알려진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조슈벌의 핵심인 사람이었고 3대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에 가서야 번벌 출신이 아닌 자가 처음으로 식민지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메이지~다이쇼 초기 조슈벌 대표 인사들인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다케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조슈벌의 핵심이라고 아까 말했는데 실제로 그는 자기 생애를 일본군과 함께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일본군, 특히 육군의 기틀을 다진 것은 메이지 유신의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데라우치는 육군을 통틀어 17명 밖에 없었던 원수 육군대장에 올랐던 사람이었고 러일전쟁, 을사조약, 한일합방 등이 사건들이 터진 한반도 식민지화의 분기점이던 1902~1911년의 9년 동안 제7대 육군대신으로 있었다. 그가 육군대신으로 재임하는 동안 마지막 한국 통감인 제3대 통감과 초대 조선총독을 지냈는데 조선총독을 재임하는 동안 헌병 경찰제도를 시행하고 "무단 통치"를 표방했던 것 덕분에 한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조선총독이자 악명이 높았던 총독으로 알려져 있는 상태다.


삿초도히와 조슈벌에 따른 정권 장악은 조선 외에도 타이완 식민통치에도 영향을 줬다. 1대이자 사쓰마벌인 가바야마 스케노리를 제외하면 2대부터 5대 총독인 가쓰라 다로, 노기 마레스케, 고다마 겐타로, 사쿠마 사마타 모두 조슈벌 인사들이었으며 특히 가쓰라 다로는 러일전쟁 당시 총리, 노기 마레스케는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 육군을 지휘했던 사령관이었다. 따라서 군권의 지배 또한 번벌에 의해 배분되었는데 먼저 일본 제국 기간 동안 원수로 임명된 29명 중 조슈와 사쓰마 출신이 각각 4명, 8명으로 다른 어떤 번보다 많았다. 거기다가 황족 출신 원수 7명을 제외하면 조슈와 사쓰마 출신 전체 원수가 절반을 넘었으며 또한 기간을 1918년 이전과 1919년 이후로 구분하여 보면 전자의 경우 모두 15명의 원수 중 황족 출신이 3명, 조슈 출신이 3명, 사쓰마 출신이 8명 등으로 조슈와 사쓰마 및 황족이 아닌 원수는 단 1명 뿐이었다.

과거의 조슈번이었던 오늘날 야마구치 현은 일본 정치계의 거물급 총리들을 많이 배출했다. 오른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사토 에이사쿠, 가쓰라 다로, 아베 신조

육군 및 해군 대장도 조슈와 사쓰마에 따른 군권 장악이 두드러졌다. 일본 육군의 대장은 모두 134명이었는데 그 중에 황족 출신이 9명, 조슈 출신이 19명, 사쓰마 출신이 15명으로 이들 셋의 합계가 전체의 3분의 1이었다. 특히 번벌 정치의 영향력이 짙던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초기(1918년까지)에는 황족과 조슈, 사쓰마 출신 대장은 26명으로 전체 48명의 과반을 차지했다. 쉽게 말해 1918년까지 임명된 육군대장 가운데 절반 이상이 황족이거나 조슈, 사쓰마 출신이었다는 얘기다. 해군 대장의 경우 제국 기간 동안 모두 77명이 임명되었는데 특히 메이지 시대 및 다이쇼 초기까지 임명된 해군 대장 가운데 대략 3분의 2는 사쓰마 출신에 조슈는 1명도 없었다. 즉 육군은 조슈, 해군은 사쓰마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조슈, 사쓰마의 전근대적 일본 군권의 지배는 계속 이어지는가 싶었지만...


그러던 중 1918년 시베리아 출병이 실패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고 군의 위상이 추락하면서부터 조슈-사쓰마 양대 파벌의 군권 지배 구도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 육군에서는 전쟁에 대한 인식 변화와 군 장비 개선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총력전이라는 개념이 1차세계대전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군부는 더 이상 일본이 장래에 수행해야 할 전쟁은 군부만의 전쟁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각 분야에서 수행하는 총력전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위해 군의 근대화를 주장했다. 당대 일본군은 외양적으로는 21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일본육사 13기생이었던 고바야시 준이치로가 말하듯 체질적인 개선 문제가 시급한 상태였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전쟁에 대응할 수 있는 전법, 병력, 장비의 채택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던 시기였다.

1930년대 "쇼와 군벌"의 양대 축 통제파와 황도파. 위의 두 명은 나가타 데쓰잔과 도조 히데키(통제파), 아래 두 명은 아라키 사다오와 오바타 도시로(황도파)

이때 총력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군의 편성과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는데 이게 곧 군인 신분의 결정권을 독점하는 번벌을 타파해야 한다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총력전 체제의 확립과 군 장비의 근대화가 시급한 상황에서 일본 군대는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봉건적 유물이라 할 수 있는 특정 지역 출신에 의한 독점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육군만 해도 시조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시작으로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다나카 기이치로 이어지는 실력자들의 지배 기간 동안 조슈 출신들이 육군을 장악하고 이들 모두 육군을 배경으로 육군대신과 총리대신을 지내며 폐쇄적인 환경을 강화시켰다.


한편 다이쇼 시대에 접어들면서 군의 실권을 장악한 조슈, 사쓰마 출신이 아닌 육군대학 출신 참모장교들 사이에서 인사 쇄신의 목소리가 나왔고 그 효시는1921년부터 시작된 육사 15~17기의 영관급 장교 모임 일석회였다. 그 중심 인물이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참모장교인 육군성 소속 나가타 데쓰잔이었고 이어서 육사 18~25기이자 훗날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이시와라 간지,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총리가 되는 도조 히데키 등 여러 비(非) 번벌 출신 참모장교들을 중심으로 쇄신운동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쇄신운동은 1922년 조슈벌의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사망과 함께 더욱 힘을 얻어가며 육군 지배 구조의 전통을 무너뜨렸고 마침내 조슈벌 최후의 실력자 다나카 기이치도 수용, 1924년 후계 육군대신으로 오카야마 현 출신의 우가키 가즈시게를 지명했다.


우가키는 인사 쇄신과 함께 무기 근대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당시 관동 대지진의 피해로 군비 확장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는지라 대신 필요한 재정을 군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즉 군비 축소를 통한 군의 근대화를 시도했다. 우가키는 4개 사단을 통째로 없애는 방식으로 장병 3만 3,900명, 말 6,000마리를 감축했고 그 예산으로 전차와 고사포 부대, 비행연대, 산포 대대, 통신, 자동차학교 등을 신설해 군 장비 기계화에 발종을 걸었다. 이러한 우가키 대신의 근대화 노력은 번벌 정치를 청산하려는 정당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전술 및 전략 변화와 군장비 후진성 개선을 이유로 중견 장교들의 지지까지 받았다. 그러나 우가키의 군축으로 소속 부대를 잃은 청년장교들은 그를 부패 정치인과 결탁한 군인으로 규정하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그렇다면 군부가 아닌 정치판에서의 번벌 세력은 왜 무너지게 되었는가? 그 답은 1916년 10월 19일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총리 취임하여 조슈벌의 영향력 건재함을 과시하던 시점부터 있었다. 그가 총리가 되었을 무렵, 세계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시점이었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데라우치 내각은 서구의 요청을 받아들여 1918년 8월 12일 시베리아 출병을 개시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군권에 이어 정치 권력에서 조슈벌의 약화를 불러왔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은 병력을 계속 증강하여 7만 2천명까지 확대하였고 이를 통해 바이칼호 동쪽의 소비에트 붉은군대를 격파해 이 지역에서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자리잡게 하려는 목적이 가장 큰 이유였다.


1차 세계대전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빈사상태에 빠졌던 일본에게 큰 기회였다. 전투의 대부분이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탓에 일본이 입은 직접적인 피해는 딱히 없었기에 군수품 주문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이 철수한 아시아, 아프리카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중화학공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이 시기 동안 일본은 수출이 크게 증대되고 동양 무역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으며 1922년에 이르어서는 미국, 영국 등에 이어 제3의 선박 톤수 보유국이 되어 조선업 강국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전쟁 특수로 호황을 누린 부분이라면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1914년 기준 111억 엔의 채무국가에서 1920년 기준 27억 7,000만 엔의 채권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출병은 그런 호황 속에서 악영향을 끼쳤는데 바로 쌀 소동이었다. 일부 미곡상인들은 전쟁이 나면 군량미가 필요할 것이고 미곡 가격이 올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가운데는 스즈키상회나 미쓰이 같은 재벌도 있었다. 사실 당시는 원래 호경기라서 미곡 가격이 빠르게 오르기도 했지만 문제는 이들이 미곡을 매점매석함에 따라서 시중에서 유통되는 미곡이 감소하여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18년 도야마 현에서 쌀을 반출하지 말고 적정한 가격에 판매하라는 요구가 집단으로 터져나온 것이 언론의 보도를 타면서 전국 각지에서 도시 서민들이 미곡 상인이나 대상인들을 습격하는 이른바 "쌀 소동"을 벌인다. 쌀 소동은 50일 동안 지속되었고 전국적으로 아오모리, 이와테, 아키타, 도치기, 오키나와 등 5개 현을 제외한 나머지 현에서 모두 발생하였고 참가 인원은 대략 수백만명 정도였다.

쌀 소동에 대한 1918년 7월 말~8월 초 당시 언론들의 보도

당시 총리였던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언론보도 통제를 실시하여 쌀 소동과 관련된 보도를 금지하고 군경을 동원해 무력으로 폭동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 일변도 정책은 민심이반을 불러왔고 결국 데라우치 총리의 사퇴로 이어졌다. 이후 하라 다카시를 중심으로 한 정당 내각이 수립되었고 이때부터 민중의 권리의식 고양으로 인해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보통선거운동 등이 활발해진다. 또 무단통치의 상징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일선에서 물러남에 따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문화통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고 미곡 공급의 근본적인 개선을 위해 한반도에서 쌀을 증산하는 "산미증식계획"이 시행된다. 그렇게 하라 다카시 내각 이후 번벌 정치는 후퇴하기 시작했으며 다나카 기이치를 끝으로 조슈벌 번벌 정치는 막을 내리게 된다.


결과적으로 1918년 하라 다카시 내각의 수립과 조슈벌의 뿌리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사망으로 다이쇼 시대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메이지의 잔재인 번벌 정치가 막을 내리고 정당 정치 국면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조슈-사쓰마 파벌에 의해 지배되던 군부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우가키의 쇄신으로 번벌 세력의 군부 독점을 크게 누그러뜨리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 이면에는 이 시대를 거치며 육군 안에 통제파와 황도파가 형성되어 1930년대 동안의 "쇼와 군벌" 투쟁의 발단을 불러오는 영향도 있었다. 또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면 번벌은 비록 부패했어도 이후의 군부 집단에 비하면 적어도 통제력은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외교론자에 문민 정치인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물론이고 얼핏 보기에 주권선-이익선 문제로 강경파로 알려진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가쓰라 다로조차도 러일전쟁에 한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었다. 다나카 기이치 역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경멸하는 제국주의자였지만 그나마 군의 원로였기에 군부의 폭주를 어느정도 억눌렀었고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도 한일합방에 적극적이었다는 점과는 별개로 필요 이상으로 외부로 팽창하는 것에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구시대 인물인 다나카 기이치 사후 조슈-사쓰마 번벌의 와해는 결코 군의 현대화로 이어지지 못했고 곧바로 "쇼와 군벌"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더욱 퇴보하는 결과만 가져온다. 그런 점에서 조슈벌은 그들로 인해 식민지배를 받은 우리 입장에서는 좋게 보일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국가 운영에 대해서는 합리성이 있었으며 최소한 이성적인 방향에서 제국주의 정책을 설계한 것은 맞다고 본다. 다 떠나서 주권선-이익선 개념을 만들고 그에 따른 전략을 단계대로 나눠 입안한 것부터 조슈벌은 자신들의 팽창 범위와 국력에 대한 한계를 나름대로 인지하고 있었음이 보이는 증거이고 오랜 시간 실세로 군림해온 덕분에 국가운영 스타일이 노련했다. 물론 "쇼와 군벌" 인 통제파도 나가타 데쓰잔이나 이시와라 간지 같은 브레인이 존재했었지만 결국 그들이 죽거나 밀려나니 남은 인사들은 스기야마 하지메나 도조 히데키 같이 무능한 인간들 밖에 안 남은 나머지 진짜 나쁜 의미에서의 군"벌"에 적합한 사례가 되어버렸다.


참고 문헌:


허수열 외, <조슈 이야기>, 지식산업사, 2023

쿠로노 타에루,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논형, 2015

한상일, <쇼와 유신: 성공한 쿠데타인가, 실패한 쿠데타인가>, 까치, 2018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4

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서해문집, 2018

구태훈, <일본제국흥망사>, 히스토리메이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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