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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Dec 21. 2023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 전후 체제의 총결산

현대 일본 정치의 분기점

https://youtu.be/y_8-ZFKGdEE?si=Kzbbo-8p35H6Rpmz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한국에서는 그리 존재감이 큰 일본 총리는 아니다. 물론 과거 1980년대 집권기에는 전두환, 레이건과 함께 한미일 삼각관계의 한 축이자 "지한파"로 많이 언급되었고 오늘날에 국내에선 보통 일본 우경화의 시발점을 제공한 총리로 평가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카소네 총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한 전후 총리였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한일 양국 관계에서 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가 집권할 당시의 한일관계는 좋았었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에 비해 묻혔을 뿐인지 그닥 좋은 평가는 못 받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적어도 일본 정치사에서만큼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총리라고 할 수 있다. 본인 스스로 연설에서 밝혔듯이 나카소네의 가장 큰 의의는 "전후 체제의 총결산"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나카소네 퇴진 후 다시 다나카파 계열의 보수 본류로 권력이 넘어갔지만 그의 재임기간은 요시다 시게루와 이케다 하야토가 만든 전후 체제가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과도기 역할을 했다. 또한 1980년대 일본 경제의 호황기이자 쇼와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총리 중 하나가 바로 나카소네 야스히로이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전후 일본이 지금 일본이 되는 것에 있어서 굉장한 영향을 끼쳤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나카소네는 요시다-이케다-사토-다나카로 이어지는 보수 본류 정치인들의 시대 인식과는 전혀 다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임기가 짧아서 묻힌 보수 방류 총리인 하토야마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와 약간 더 비슷했다. 나카소네는 국제성을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내셔널리즘의 복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의 국가주의는 국제협조주의로 승화되어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이 국제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9조를 중심으로 한 헌법개정이나 자주 방위 강화가 필요하다는 국가주의의 복권 그 자체였다. 이것은 보수 방류에 속한 나카소네가 요시다 독트린의 근본을 재검토하는 걸 최종 지향점으로 삼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카소네 내각의 구호는 "전후 체제의 총결산"이었다.

1985년 1월 나카소네 총리가 전후 체제의 총결산을 표방하고 국제국가로 나아겠다고 선언했을 때 당시 상황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냉전이 다시 격화되던 때였다. 그래서 나카소네는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미일동맹을 공고히 하는가 하면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발언권을 키우고자 했다. 다만 나카소네가 개인적으로 다소 강경한 우익 성향이 있었던 것과는 별개로 이는 전전 시대로의 복고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의 외교 원칙을 보면 일본은 자신의 국력에 걸맞는 대외 활동을 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발신을 통해 세계사 조류에 맞는 능동적인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카소네는 먼저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한일관계는 김대중 납치 사건과 교과서 역사왜곡 문제로 악화일로였는데 이때 나카소네는 세지마 류조를 전두환에게 특사로 보내 자리를 마련하고 1983년 1월 한국에 직접 방문했다. 이로써 한미일 삼각관계의 재구축을 핵심으로 한국의 경제 협력 요구를 받아들여 40억 달러 차관도 제공했다. 미국과의 관계에선 "불침항모론", "대소련 3해협 봉쇄론" 등의 수사를 구사하면서 미일동맹을 재확인하였고 이는 소련의 위협 증가를 명분삼아 일본이 국제 안보에 대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정치적 의사를 보여주는 목적도 있었다. 동시에 대미무기기술공여 조치를 하여 미국을 만족시켰다.


1983년 6월 소련은 SS-20 중거리 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하였다가 논란이 되자 아시아에 배치하려 했다. 이때 나카소네는 소련의 SS-20 배치 반대를 표명하면서 일본 정상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무대에서 적극적인 군사 문제 발언을 이어갔다. 결국 8월 소련은 극동 이전을 철회하였고 이후 나카소네는 미일동맹, 국제국가 노선을 더욱 이어갔는데 여기에 그해 9월 소련 공군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사건이 터진 게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인 28명을 포함해 총 269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당초 소련은 관여를 부정했으나 방수한 소련군의 통신기록을 일본 방위청이 공표하여 소련 격추 사실을 밝혔다. 만약 자위대의 방수기록을 공표한다면 일본 정보수집능력을 소련에 공개하게 되는 리스크를 짊어지게 됨에도 말이다. 아무튼 이와 같이 나카소네는 역대 일본 총리들과는 달리 경제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국제 무대에서 정치, 군사 문제에 대한 전략적인 판단에 동참하는 적극성을 보임으로써 일본의 국제적 역할 향상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레이건과 나카소네

또한 나카소네 내각은 1985년 9월 방위청만의 계획이던 "59중업"을 "중기방위력정비계획"으로서 정부계획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GNP 1% 틀이 미국의 안보편승론의 근거 중 하나가 되는 가운데 나카소네는 방위정책이 국제정세에 의하여 변화였기에 GNP 1% 틀이 불합리하다 판단하여 1987년 예산에 GNP의 1%가 넘는 1.004%로 책정했다. 나카소네의 입장으로는 1% 틀의 돌파는 "전후정치의 총결산"의 일환이었으며 방위 문제에 대한 그의 적극성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심지어 이란-이라크 전쟁의 격화 속에 나카소네는 미국의 요청에 응하여 해상자위대 함정을 페르시아만에 파견하려고 했었는데 이를 막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정권 내부의 고토다 마사하루 관방장관이었다. 즉 나카소네는 당시까지는 방위 문제에서 1945년 이후 역대 총리 중에서 가장 강경한 쪽이었던 것이다.


1985년 8월 15일에는 나카소네가 전후 총리 자격으로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당시 국내외에서 논란이 벌어지자 후지나마 관방장관 아래에 있었던 사적 자문기관을 통해 간담회를 설치하고 논의를 위탁해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다음해부터는 나카소네 총리가 참배를 다시 중지했는데 이는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카소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역대 일본 총리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할 만한 전례이자 명분이 생겼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21세기 총리들도 참배했다가 주변국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야스쿠니 참배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논쟁에 방아쇠를 당긴 중대한 사건이었다.


나카소네가 표방한 전후 체제 총결산의 한 축이 국제국가 만들기였다면 다른 한 축은 바로 신자유주의 개혁이었다. 1945년부터 일본은 일관적으로 국가 주도의 재정 확대 노선을 이어왔었고 이 때문에 고속 성장을 누렸지만 관료주의 폐단이 심해지는 한계도 있었다. 그래서 나카소네는 국가가 주도하는 경제로부터 탈피해 민간 부문을 활성화하기 위해 민영화, 규제 철폐를 통한 시장경제 활성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은 1,2차 오일 쇼크 이후 불황 시대 속 공공사업비가 현저하게 늘어나 1980년도 행정 투자 총액이 일본 국내총생산의 11.9%에 달하는 수준이었고 또한 1973년도 이후 예산에서 증가하기 시작한 보조금 총액은 일반회계예산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안정성장을 위한 공채발행액은 다나카 정권 당시 4조 엔으로부터 계속 늘어나서 미키 타케오 내각 때인 1975, 1976년에는 8조 5,000억 엔, 후쿠다 타케오 내각 당시인 1977, 1978년에는 7조 7,000억 엔,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 때인 1979, 1980년에는 7조 4,000억 엔에 이르러 공채 발행 총액은 7조 6,000억 엔에 달했다. 따라서 재정 재건의 중점은 세출 억제로 옮아갔다.

국철 분할 민영화

총리가 된 나카소네가 행정개혁의 일환으로 먼저 한 것은 전전공사 개혁이었다. 적자를 내고 있던 국철과는 달리 흑자인 공기업 전전공사의 개혁은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1982년 10월 전전공사 신도 총재와 전기통신노조 위원장인 야마기시의 회담에서 노조 측이 양보함에 따라 민영화는 급물살을 탔고 중간에 절충하여 15년 간에 걸쳐 9만명에 대한 대폭 인사 감축 계획 시안을 토대로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철 민영화는 조금 난감했는게 1964년 300억 엔이던 국철 적자가 1981년에 누적 적자 1조 엔을 넘긴 것이었다. 대부분의 장기 채무가 차입급 변제나 이자 지불에 사용될 정도였으니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욱 곤란한 것은 국철노조가 사회당의 최대 지지기반인 총평 소속이었다는 것이며 그렇다고 개혁을 안 하기엔 41만 3,00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데도 수지 개선이 없는 상태였다.


나카소네는 이 과정에서 임시행정조사회, 국철재건감리위원회 등을 활용했는데 이는 단순한 브레인이나 행정심의회 역할을 뛰어넘는다. 관료제나 이익 단체는 물론 족의원이나 파벌의 영수가 장악하고 있는 여당이나 국회에 직접 투입되었다. 이들은 총리의 후광을 배경으로 각종 매스컴을 이용해 여론을 자기편으로 삼아가면서 이해관계 조정이나 의사 결정을 추진하였다. 즉 기득권익이 지배하는 보수 본류의 연합에서의 합의협성형 정책 과정에 "개혁파" 총리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파고들어간다는 구도를 연출하는, 말 그대로 보수 방류 전환 무대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실제로 나카소네는 내각 기능의 강화에 착수했는데 1986년 기존의 내각심의실이 내각내정심의실, 내각외정심의실로 분리되고 내각조사실이 내각정보조사실로 강화, 또 내각안전보장실도 설치되었다. 즉 국가 기구 안에 총리 관저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나카소네였고 이 기반을 토대로 고이즈미 준이치로도 "대통령형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카소네와 전두환

나카소네가 심의회를 적극 활용하고 자민당 내 족의원들의 협력을 받은 결과 최종적으로 국철 민영화는 성공했다. 1985년 재건감리위원회는 경영 형태를 민영화하여 여객 부문은 전국을 6개사로 분할하되 화물 부문은 전국 1사로, 1987년 실질적 잉여 인력 4만 1,000명을 3년 내에 재취업 알선, 처리할 채무 총액은 37조 3,000억 엔 중 토지 매각으로 보상할 수 없는 16조 7,000억 엔은 국민 부담으로 하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1986년 11월 국철 개혁 법안이 설립되어 다음해에 분할 민영화까지 이뤄지게 되었다. 이러한 국철 민영화는 동JR과 서JR로 분활됨에 따라 조직이 이분되고 예산주의가 아닌 결산주의로 전환하여 예산 확보를 위한 투쟁보다는 업무의 효율성과 생산성 제고가 주관심사로 바뀌게 하여 민영화된 노조들을 제1야당 사회당의 지지기반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 한 때 55년 체제 속 제1야당이었던 일본 사회당은 서서히 죽음을 맞이 하게 되었다.


나카소네는 전후 체제의 일 막을 내리고 다른 단계의 이행을 확실하게 시도했다. 무엇보다 나카소네는 자민당으로 대표되는 보수와 사회당으로 대표되는 혁신 간의 대결 구조를 총체적으로 전환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민영화를 통해 사회당이 대표하고 있는 국가재정 의존적 구조를 타파하는 동시에 미일동맹 강화를 통해 사회당 정책의 비현실성을 드러냄으로써 보수 우위의 결정적인 구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전후 체제의 총결산이란 자민당과 사화당의 경쟁구도로 남마있는 전후 체제의 모습을 확고부동한 자민당의 우위 체제로 전환하고자 시도한 것이었다. 비록 거품 경제의 붕괴로 1993년 호소카와 내각이 수립됨에 따라 자민당은 다소 암흑기를 걷기도 하였지만 어찌 되었건 지금은 일당우위제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으니 전후 체제의 총결산은 결과적으로 성공하였다.

아키즈키 호위함 DD-117 스즈쓰키(すずつき)

또 대외적으로 나카소네의 국제국가 노선은 신국제주의 노선이기도 하였다. 참고로 나카소네의 노선은 요시다 노선에 대한 한정적인 수정이었는데 요시다는 안보 및 방위 문제는 미국에 맡긴 채 경제 대국 건설에 집중했지만 나카소네는 경제 대국 일본의 목표가 달성되었다는 전제 하에 국제 무대에서 외교적 발언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간 것이다. 즉 정치, 군사적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서 나카소네의 시도는 경제중심주의적인 요시다와는 궤를 달리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카소네의 국제국가 노선은 하토야마 이치로나 기시 노부스케의 복고적, 전통주의적 보수주의와도 달랐다. 전전 체제로의 복귀나 군사 대국 일본의 복원이 아닌 자유주의 진영에서 미국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려는 시도였다.


또 신자유주의 개혁 노선은 재정적 조치를 동원해 분배를 위주한 기존 일본의 국가자본주의 정책에 변화를 주어 재정지출의 축소, 행정개혁, 민영화 등을 통해 공적 부문의 비대함을 줄이고 민간부문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조치는 요시다-이케다-사토-다나카로 이어지는 55년 체제의 상징이던 국가 주도형, 국가 의존적 경제 운영을 시장주도형 경제 체제로 바꾸고 국가자본주의, 케인스주의적 색채를 벗어나려는, 다시 말해 자민당 내 보수 본류 노선에 대한 본격적인 수정 시도였다. 다만 나카소네가 밀턴 프리드먼 류의 철저한 신자유주의 이념을 신공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중간 단체의 존재나 역할을 중시한 집단주의적 일본형 다원주의를 이상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고이즈미보다도 한정적인 수단으로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이용한 면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이처럼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정권 스스로 내걸었던 "전후 체제의 총결산"이라는 구호답게 전후 쇼와 시대가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가기 전의 과도기적 단계 역할을 하였으며 55년 체제의 지배 계급인 보수 본류가 몰락하고 보수 방류가 부상하게 되는 분기점이기도 했다.


참고 문헌:


박철희, <자민당 정권과 전후 체제의 변용>,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정구종, <일본의 국가전략과 동아시아 안보>, 논형, 2016

요시쓰구 고스케, <미일안보체제사>, 어문학사, 2022

나카노 고이치,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2016

나카소네 야스히로,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 시공사, 2001

나카소네 야스히로, <보수의 유언>, 중앙북스, 2011

마고사키 우케루,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메디치미디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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