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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Dec 22. 2023

사쓰마 번은 어떻게 막부를 이길 수 있었는가?

사쓰마 번과 막말기에 대한 고찰

1. 19세기 사쓰마 번 재정 개혁의 의의


사쓰마 번의 재정 상태는 갈수록 열악해져 갔다. 애초에 세키가하라 전투 때 시마즈 요시히로가 도요토미 측인 서군 쪽에 섰었기에 그들과 싸웠던 도쿠가와 막부 입장에서는 사쓰마가 그리 좋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지휘관인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 본진인 8만 동군의 포위망 속에서 뚫고 오사카를 거쳐 사쓰마에 귀환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어쨌든 도쿠가와 쪽과 싸웠었기에 전후 처분을 면하진 못하였다. 결국 시마즈 가문은 더 이상 저항을 이어가기보단 에도 막부에 복속되는 것을 선택했고 그 결과로 사쓰마는 도자마 번으로도 남을 수 있었다. 물론 이는 도쿠가와의 입장에서도 가마쿠라 막부 시절부터 수호직, 수호 다이묘, 전국 다이묘로 이어지는 위용이 있는 사쓰마를 힘으로 복속하긴 어려우니 현실적으로 타협한 것이었다.


아무튼 사쓰마에 대한 경계심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던 막부는 견제하기 위한 카드를 계속 던졌고 그때 어수전보청이라는 막부가 다이묘에게 위탁하는 대규모 토목사섭을 꺼내 들게 된다. 그것도 토목사업 중 가장 어려운 공사인 하천 개수공사를 말인데 그것이 1754년부터 1755년까지 건설된 삼천분류공사이다. 이 공사에서 현장에서 요구되는 토목사업 경비 대부분은 사쓰마의 몫이었고 당연히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사쓰마 번의 재정 상태는 극도로 열악하기까지 했는데 우선 에도 대화재 당시 사쓰마 번저 복구 비용도 컸을 뿐 아니라 2년마다 반복되는 참근교대 비용, 1637년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 출병 등 돈이 쓰일 일이 너무 많았다. 결국 그러다가 돈을 빌리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고 막부로부터 공사 명령이 내려진 1753년의 부채는 66만 냥에 달했다.


공사라는 무리한 명령을 따르면서 사쓰마 번의 재정과 인명 희생은 커졌다. 이때부터 아마 사쓰마는 자신들에게 막부가 가혹하게 대하는 이유를 정치력 부재라고 결론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재정 위기 난국 속 등장하는 다이묘가 있었는데 바로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장인이자 사쓰마 8대 번주였던 시마즈 시게히데였다. 그는 도쿠가와 가문 하고도 접점이 큰 인물이라 사쓰마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을 타파하는 것에 앞장섰으며 그중 하나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사쓰마 번으로의 출입 제한을 완화한 것이었다. 또 사쓰마의 문화 수준을 향상하기 위해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1773년 번교인 조사관과 연무관을, 이듬해인 1774년에는 의학관, 1779년에는 천문관을 가고시마 성하에 창설하여 학문 창달에 힘썼다. 더 나아가 막부의 허가 하에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에도 방문하여 외국 서적들까지도 수입했다.


그러나 1829년까지 부채가 500만 냥으로 늘어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시게히데는 번 재정의 개혁을 위해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는데 그게 바로 즈쇼 히로사토였다. 우선 즈쇼히토는 500만 부채부터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나섰다. 당시 사쓰마 번의 석고는 72만 석이었지만 화산회토라 생산성이 낮은 데다가 태풍, 화산 폭발 등 자연재해가 빈번했던 탓에 실제 수확은 32만 석, 실제 번의 가용 예산은 13만 석에 불과했다. 따라서 당시 500만 냥의 부채는 사쓰마 번이 아무리 커다란 번이라고 해도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고 이에 즈쇼는 1835년 돈을 빌려준 상인들을 겁박하여 250년 무이자 할부 상환이라는 방편을 고른다. 이는 말이 좋아 할부 상환이지 실질적으로는 떼먹는 것이었고 상인들의 반발도 컸으나 시마즈 가의 지지 하에 계속 밀어붙여졌다.


1838년 가로로 승격된 즈쇼는 재정 개혁 외에도 농정, 군정, 행정에도 손을 뻗쳤다. 이는 시게히데와 나리오키로 이어진 20여 년 동안 번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에 장기 개혁이 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하급 무사 출신들이라 할지라도 능력만 있으면 동원되어 훗날 막말기 사쓰마 인적 조직의 기반이 되었다. 실제로 막말기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유신지사들이 맹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즈쇼 히로사토의 재정 개혁과 후견자 시마즈 히사미쓰의 역할이 컸다. 특히 비슷한 시기 막부의 덴포 개혁은 실패한 반면 사쓰마 번의 재정 개혁은 그나마 성공한 편으로 기록되었는데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즈쇼였고 덕분에 막말 사쓰마 번의 정국 주도에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될 수 있었다.


물론 흑설탕의 경우에는 전매제를 실시해 농민들을 수탈한 면도 있지만 생산과 유동 과정을 개선하고 상인의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오히려 흑설탕의 품질 향상과 가격 상승을 꾀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류큐를 통한 중국 재화의 중계무역, 밀무역을 강화하고 옻나무와 닥나무 등 다양한 상품작물을 개발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즈쇼의 주도 하에 장기적으로 진행된 재정 개혁 덕분에 1840년경에 이르면 사쓰마 번의 예비비는 무려 200만 냥가량 축적되는 수준까지 오게 된다.

2. 시마즈 나리아키라와 사쓰마의 근대화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히사미쓰와 함께 사쓰마 근대화의 주역이었던 인물이다. 그는 특히 군사력 강화에 주력하였는데 철제 대포 주조와 서양식 함선 건조 사업이 대표적인 예시다. 이는 서양 함선이 류큐에 출몰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던 상황도 있었고 막부로부터 방비 강화를 명령받았기 때문도 있었다. 당시까지 일본의 대포는 청동포였는데 물론 절의 범종을 제작하는 기술로 청동포는 무리 없이 제작할 수 있었지만 원료인 동이 고가였던 게 문제였다. 그렇다고 철제 대포를 제작하기에는 일본의 기술이 부족하였는데 실제로 동보다는 철의 용융점이 높아 용해실의 온조를 높이는 기술이 필요했었다.


다만 이미 사가 번의 경우 반사로를 이용해 철제 대포 제작에 착수하여 1852년 시제품을 완공하였고 그들은 네덜란드 서적의 번역본을 이용해 만들었다. 사쓰마도 이를 본떠 가고시마 성내에 모형 반사로를 만들고 그것을 시험하면서 자체 기술을 축적하였다. 사실 본 적도 없는 반사로를 단지 책에 의존해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반사로의 기초공사에는 성벽 축조 기술을, 1,400도에 견디는 내화벽돌 제작에는 사쓰마 자기 기술을 도입하여 일본 기술도 같이 병행시켰다. 그 결과 실험용 반사로에 이어 1852년 본격적인 반사로가 제작되었고 1853년 용광로가, 1854년에는 산카이타이라는 포신 제작용 드릴이 완공되었다.


일본 내 철제 대포 제작의 선구자인 사가 번의 경우 일본산 선철을 사용했는데 품질이 좋지 않아 대형 철포를 제작하는 데는 적당하지 않았다. 사쓰마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자체 용광로에서 새로이 선철을 만들었으나 반사로 1호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리아키라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번사들을 격려 하여 2호기를 제작시켰고 결국 철제 대포 주조에도 성공하였다. 당시 집성관 사업은 사쓰마 번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물론 이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즈쇼의 재정 개혁으로 번의 재정이 풍족해진 덕분이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막부의 허가 하에 근대 해군을 만드는 작업도 실시했다. 페리 제독 내항 이전부터 사쿠라지마에 있는 작은 조선소에서 군함을 제작한 사쓰마는 1854년 12월 배를 준공시켰다. 이 군함은 추정 배수랑 370톤, 전장 약 30m, 포 16문을 탑재한 본격적인 서양식 군함이었으며 이듬해 막부에게 헌상해 "쇼헤이마루"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페리 제독의 내항 직후부터 막부는 미토 번이나 사쓰마 번, 사가 번, 도사 번 같이 대선 건조에 뜻이 있는 번들에게 군함 건조를 허락하고 장려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막말 막부 타도의 근간이 되었다.


대선 해금 이후부터 사쓰마는 더 적극적으로 근대 해군 정책에 나섰다. 1853년 11월 나리아키라는 대선(범선) 13척과 증기선 3척의 건조 허가를 요청했고 완공 시 2~3척을 막부에 유상으로 인도한다는 조건으로 허가받았다. 이 중 오모토마루와 호즈이마루는 막부에 인도되었고 나머지 쇼텐마루와 만넨마루는 초기 사쓰마 해군의 주력함으로 사용되었다. 사쓰마 번사들도 교육생으로 참여했던 나가사키 해군전습소의 교관단장 카텐 데이커가 사쓰마의 함선을 보고 기록한 바에 의하면 비록 구식의 조선 기술에 의거하였지만 함포 12문을 장착한 배수량 1,000톤, 그리고 3본 마스트를 갖춘 서양식 범선 군함이었다고 평했다.


사쓰마는 1851년부터 증기기관과 증기선에도 관심을 보여 1855년 증기선을 건조했으나 실용성이 낮아 실패했다. 이 증기선은 1854년 나가사키 단기 전습에 파견된 사쓰마 번사들이 자체 증기기관을 장착해 제작한 소형 선박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에도 사쓰마 번저에서도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제1차 교육에 파견된 번사들이 증기선에 도전하였다. 자체 제작한 증기기관이 장착된 증기선은 운코마루라고 명명되었고 이 배는 1857년 가고시마로 회송되어 사쓰마 해군 함선의 일익을 담당하였지만, 나가사키 해군전습소의 네덜란드 교관단 평가처럼 성능은 초라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체 함선 건조와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참여를 통한 승조원 교육 의지는 일본제국 해군의 전신 사쓰마 해군의 뿌리가 되어 막말 정국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3. 시마즈 히사미쓰와 성충조


1859년 사쓰마의 실세였던 나리오키가 사망함에 따라 일개 가신이던 시마즈 히사미쓰는 이제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 현실에 당당히 끼어들 수 있게 되었다. 히사미쓰는 먼저 다이묘 가문의 친정을 구현하기 위해 인사 개혁을 단행했는데 특별한 자질도 없으면서 반개혁적이던 히사타카 일파부터 정리 및 히사나가를 수석 가로로 임명하면서 시작했다. 그 결과 고인이던 나리아키라의 개혁을 그리워하던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젊은 하급 무사들도 히사미쓰의 개혁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히사미쓰 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같은 시기 사쓰마에서는 하급 무사들로 이뤄진 정치결사인 "성충조"가 형성되었으며 1859년 이이 나오스케가 일으킨 안세이의 대옥에 반발한 이들이 주축이었다.


히사미쓰는 오쿠보와 편지를 자주 주고받았는데 이는 사쓰마 번의 실질적 최고 책임자조차도 하급 무사 집단인 성충조를 국정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태도는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히사미쓰의 정치적 유연성을 가감 없이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다이묘와 사쓰마 번이 나리아키라의 유지를 받든다는 것을 정식으로 표방하면서 결국 성충조의 기본 정신이 이제 번의 기본 방침(번시, 藩匙)이 되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번의 허락 없이는 성충조의 돌출 행위는 불가하다는 번과 성충조 멤버들 간의 합의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과격하게 양이 활동을 하던 조슈 번의 유신지사들과는 상당히 구별되는 면모다.


물론 성충조의 하급 무사들은 젊은 혈기가 있었기에 수차례 돌출 행동 계획을 상부에 건의했으나 실행은 거의 없었고 나중에 가면 딱히 등장하지도 않았다. 사실 성충조의 돌출 계획은 정의의 행동이라는 자기중심적 발상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구체적인 비전은 없었다. 이에 대해 시마즈 히사미쓰는 인내심과 상황 판단력을 가지고 번내 성충조 멤버들을 설득함으로써 국정을 담당하는 책임자로서의 자세와 함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보여 주었다. 이는 히사미쓰가 번주의 후견인이라는 소극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국부"로서 번정을 이끄는 적극적인 지도자임을 번내 가신들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까지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히사미쓰는 1862년 4월, 1,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상경한 이후로 1863년 3,10월 다시 상경하였다. 비록 사쓰마에선 국부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무관의 지방 무사에 불과한 히사미쓰가 중앙을 향한 대담한 정치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리아카라를 계승한다는 대의명분과 이에 대한 성충조 멤버들의 지지가 바탕이 되어 사쓰마 번의 국론을 통일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적 논란거리였던 양이에 관해선 한발 비켜서 개국을 불가피하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거국일치 체제를 통한 무비를 갖추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치 구상과 대외 방침이 사쓰마의 상층과 하층을 막론하고 번의 통일된 입장으로 인지되면서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고, 마침내 막말 정국에서 사쓰마는 정치의 핵심이 될 수 있었다.

4. 사쓰에이 전쟁 이후 사쓰마 번의 근대화와 혁신


사쓰에이 전쟁으로 사쓰마 번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겉으로 보기에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해안 포대는 거의 파괴 수준의 피해를 입었고 집성관의 대포제작소를 포함해 가고시마 성, 사찰, 민가 등 시가지 전체의 1할 가량이 소실되었다. 특히 전년부터 이해 봄까지 사쓰마 번이 구입한 증기선 3척이 모두 소실되었는데 그 가격이 무려 7만 5,000파운드에 달했다. 게다가 막부의 유유부단함과 요시노부의 변심으로 시마즈 히사미쓰의 상경도 끝나버렸고 그가 외유를 마치고 7개월 만에 돌아왔을 때 가고시마에는 수많은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사쓰에이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영국과의 강화회의는 1863년 11월에 배상금 2만 5,000파운드 지불로 결론이 났고 그 대금은 막부로부터 빌려 지불하였다. 물론 당연히 막부로부터 빌린 그 차입금은 결국 사쓰마는 갚지 않았다. 아무튼 사쓰에이 전쟁은 재산 측면에서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그 피해 복구와 새로운 군비 확충을 위해 많은 노력과 투자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또한 장차 있을 수 있는 조슈와의 대결 및 국내 정변 등을 대비한 새로운 군제 개혁이 요구되었다. 히사미쓰는 귀환 직후부터 시가지와 군사력 복구에 매진하였다. 특히 사쓰에이 전쟁에서 영국군의 무장 상태에 압도당했다고 판단, 이때까지 쓰던 구식 총포를 버리고 후장식 소총과 장거리 사격이 가능힐 암스트롱 포의 구입에 나섰다. 또 2차 조슈 정벌 이후인 1866년에는 육군과 해군 지휘계통을 개편했고 대대와 소대 개념을 수용했다. 1860년대 전반에 걸쳐 사쓰마는 영국을 통해 엔필드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을 도입하였는데 이는 프랑스군을 롤모델로 삼은 막부군이나 프로이센군을 롤모델로 삼은 사가 번과는 달리 확실하게 영국식 군대를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사쓰에이 전쟁 이후 사쓰마 번 근대화의 방향성은 자체 개발보다는 구입 쪽으로 전환되었다. 어쩌면 금문의 변, 1차 조슈 정벌 등의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향후에 벌어질 내전이 점점 앞당겨지는 하루라도 빨리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비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쓰마는 사쓰에이 전쟁 당시 치고박고 싸웠던 어제의 적인 영국과 거래를 통해 1864년부터 1865년까지 11척의 증기선을 구입하였는데 이는 다른 번들뿐만 아니라 막부의 구입량보다도 훨씬 더 많았던 수치였다. 조정의 중심지 교토와 막부의 중심지 에도(도쿄)에서 엄청 멀리 떨어진 사쓰마로서는 신속하게 물자와 병력을 수송해야만 하였기에 해군력 증강은 필수였다. 다만 사쓰마는 1865년을 기점으로 어느정도 해군력이 갖춰지자 라이플 구입에 집중하였고 그에 비해 막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취임과 함께 육해군을 포괄하는 전반적인 군사력 강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사쓰마 번은 1864년 10월부터 증기기관과 서양식 공작기계를 갖춘 기계공장을 가공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사쓰에이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집성관은 완전히 복구되었다. 또한 양학교에서 교육받은 인재 19명을 중심으로 유학생단을 꾸려서 영국으로 파견했는데 당시까지 해외 도항이 금지된 상황이었음에도 가능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쓰에이 전쟁 때 들이받고 싸웠던 영국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쓰마가 저렇게 세력이 강성해질려면 재정은 어떻게 모았나라는 생각도 들텐데 이러한 재정 뒷받침에는 기존의 중국과의 중계무역, 류큐와 가고시마 사이 섬들의 사탕 전매사업 수익 등도 있었지만 주전 사업의 역할이 컸다. 이는 1855년 나리아키라 때부터 계획이 있었는데 그는 류큐 무역을 위해 오키나와 섬에서만 통용되는 화폐의 주조를 막부에 신청하여 허가가 내려지는 즉시 같은 크기의 동전을 밀주해 사쓰마의 재정을 확충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구상은 1862년에 히사미쓰의 상경 이후 막부로부터 1년에 100만 냥씩 3년간 300만 냥의 주전을 허락받으면서 어느정도 실현되었다. 막부가 이를 허가하는 걸 보류했던 이유는 류큐 통보의 형태와 중량이 덴포 통보와 같았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데 사쓰마는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류큐 통보른 만들고 덴포 통보를 밀주하여 통영시켜 엄청난 수익을 보았다. 당시 통용되던 간에이 통보 1문 동전 6매로 100문에 통용되는 덴포 통보 1매를 만들 수 있으니 그 차이는 엄청난 수익이었다. 결국 막부의 우려가 현실이 된 셈이고 이렇게 재정이 다 채워졌기 때문에 사쓰마 번은 본격적인 도막 운동에 나설 환경이 갖춰질 수 있었다.

사쓰마의 대표 인사들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오야마 이와오, 도고 헤이하치로

5. 맺음말: 적을 이기기 위해 적을 배운 사쓰마의 지사들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어떤 세력도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막부를 이길 수 없도록 막번 체제를 고안했다. 당연히 이 설계도는 평안과 장수를 바라기 마련인 인간의 상식적인 욕구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거나 처벌받기 싫기 때문. 하지만 막부가 간과한 것은 이미 흑선내항으로 벌어진 내우외환의 위기에서 막부의 권위가 예전 같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구 흑선의 위협 앞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막부를 무찌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고유의 가치를 받기 위해 때로는 공무합체를 주장하여 막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뒤로는 언제든 칼로 목을 내려칠 수 있도록 근대화라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슈 번 양이지사들이나 도사근왕당도 마찬가지만 사쓰마의 지사들도 "도막"과 "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일본을 흑선으로 위협하는 서구를 모방하였다. 게다가 서구는 사쓰에이 전쟁에서 자신들과 치고 박고 싸웠던 "어제의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은 먼저 서양 무기를 수입했고 군대의 근대화를 위해 자신의 번내에서 작은 유신을 진행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 양이론을 어느정도 내려놓고 서양의 기술로 근대화를 이룬 후에 자주독립의 길을 가는 방향으로 급속도로 선회했다. 물론 사쓰마의 성충조 집단은 조슈의 유신지사들만큼은 아니어도 급진성이 강했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는 시마즈 히사미쓰라는 자신들의 충동을 제어해주고 이끌어 줄 리더가 존재하였으며 그 결과 막말기의 극후반부에 이르어 사쓰마는 일본 각 번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와 노련한 정치력을 과시하는 세력이 될 수 있었다.


https://youtu.be/vpIVppSOSzw?si=nugXQNI6VVKXWfR_


참고 문헌:


도널드 킨, <메이지라는 시대 1>, 서커스, 2017

박영준, <해군의 탄생과 근대일본>, 그물, 2014

박훈,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민음사, 2014

성희엽, <조용한 혁명: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건국>, 소명출판, 2016

성희엽, <일본 근대국가형성에 관한 학제적 연구>, 부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홍대선, <유신 그리고 유신>, 메디치미디어, 2022

조용준, <메이지 유신이 조선에 묻다>, 도도, 2018

박상후, <메이지유신을 이끈 카게무샤>, 프리덤&위즈덤, 2019

손일,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메이지 유신: 幕末의 풍운아>, 푸른길, 2017

손일, <사쓰마와 시마즈 히사미쓰>, 푸른길, 2023


같이 보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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