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afRGnWZeedo?si=4SBoXq6kw8j0byro
일본 육해군 대립 문제는 과거 제국 시절 일본군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절대 모를 수가 없는 문제다. 게임 <제독의 결단>에서도 해군이 뭘 하려고 하면 육군에서 제동부터 걸고 나서는 장면들이 종종 묘사되는데 이는 단순히 매체 속의 픽션만은 아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시기 동안 육군과 해군은 서로 엇갈릴 때가 매우 많았으며 특히 과달카날 전투에서는 육해군의 반목으로 인한 폐단이 드러나다 못해 대참사로 이어지기도 할 정도였다. 물론 육해군 대립의 기원이 아무리 막부 시기 별개의 번국이던 조슈, 사쓰마 전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과 별개로 대전기 육해군의 대립이 전쟁 수행에 끼친 악영향은 심각한 수준이었던 걸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처음부터 양 군이 따로 놀고 있던 것을 방치할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대 일본에서는 양 군이 각각 독립되어 있던 탓에 의견 조율이 굉장히 어려웠고 모든 군대를 총괄할 지도기관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전시 대본영을 제외하고는 상호 간의 계획을 공유 및 논의할 기회가 잘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게 1880년대 동안 군부 내에서 있던 논의인 "통합참모본부 구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좌절되었지만 나름대로 혁신적인 시도였고 또 해프닝의 전말을 보면 흥미로운 지점도 많다. 이 글에서는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제기되었던 통합참모본부라는 구상이 어떻게 논의되고, 결과적으로 어떤 식으로 좌절되었는지에 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
통합참모본부 구상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1882년까지 가야 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임오군란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내부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졌다. 이에 대해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친청파 축출을 위한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일본 정부는 무력을 써서라도 정변을 도우려 하였으나 아직 청나라 군사력을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부터 일본 정부는 계획적으로 군비 확장에 나섰고 그동안 치안 유지용인 군사력을 대외 팽창을 위한 것으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먼저 육군력의 중심인 보병연대는 1878년에 15개였지만 1884년에 3개, 1885년에 4개, 1886년에 5개, 1887년에 1개가 추가되어 총 28개까지 확대되었고 1888년에는 기존 6개 진대의 폐지 및 보병연대의 상급기관으로서 제1사단부터 제6사단까지 사단제로 개편하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군 군복(출처: 大日本帝国陸海軍 軍装の変遷~歩兵・海軍陸戦隊編~) 사단은 기존의 진대와는 달리 담당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1개의 전략 단위로서의 기동성이 더 강조되었다. 이는 명백히 대외 전쟁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둔 조직 개편이었다. 일본 육군의 상설 사단은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던 1894년에 제1사단부터 제6사단과 근위사단을 합쳐 7개 사단을 이루어 일본 군대의 주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국가예산(일반회계)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율의 경우 1868~1877년까지는 평균 15.9%였지만 이후 확장되면서 1878~1882년까지는 평균 17.3%로 상승했다. 1883년 이후로는 20% 이상이 되었고 해군력도 점차 근해의 제해권 확보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결과적으로 1888년부터 1832년까지 5년간의 군사비 비율은 평균 28.2%에 달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 사이의 기간이었던 1884년 유럽 시찰은 일본 육군의 방향성이 프랑스식 군제에서 독일식 군제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 막말기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은 영국식을, 막부 육군과 해군은 각각 프랑스식 및 네덜란드식을 채택하였고 프로이센식을 채택한 것은 사가 번뿐이었고 이후 통합된 일본군은 군제가 좀 뒤죽박죽이었는데 이때부터 사실상 독일식 군제 하의 육군을 일관되게 지향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비슷한 시기 반주류 세력인 소가 스케노리, 타니 타테키, 토리오 코야타, 그리고 훗날 을미사변의 주범이 되는 미우라 고로까지 4인의 중장은 1881년에 연명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독일식 군제 도입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또한 4인의 장군은 야마가타 등의 주류파와는 달리 프랑스식 군제와 방어 중심 전략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 한 반주류파와 가쓰라 다로, 가와카미 소로쿠 등의 주류파와 의견 차이는 곧 군비 논쟁으로 확전 되었다. 우선 당시 군제 개혁의 일환으로 징병령이 시행된 상황에서 미우라의 의견은 주류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는 병역 기간에 대해 현역은 1년이면 된다고 하였으나 가쓰라, 가와카미는 3년도 짧다고 주장하였고 또 미우라의 병역 단축론은 민병 구상을 바탕으로 하였던 반면 가쓰라, 가와카미의 경우 민병 구상 자체를 배척하며 사단제를 지지하였다. 이는 미우라가 지지한 군제가 고정적 방어가 중심이 되는 "호향군"이고 가쓰라, 가와카미가 지지한 방식이 공세 전략적이었기에 입장이 갈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쓰라와 가와카미는 적군의 내습을 막고 국외중립만 지키는 것은 2등 국가 밖에 못 되는지라 외국으로부터 얕보이지 않기 위해 "타국을 좌우할 수 있는 군대"를 키워야 한다고 했는데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는 국토방위를 넘어 아시아 패권 경쟁에 뛰어들 만한 역량을 갖추는 것이었다.
드라마 <녹두꽃> 속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 결과적으로 군비 논쟁에서 힘을 얻은 것은 가쓰라, 가와카미 쪽이었는데 그 이유는 육군의 핵심 인사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군비 확장을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류파인 가쓰라 다로와 오야마 이와오는 독일 군사고문 멕켈의 의견을 수용하여 군단사령부로서의 감군부를 폐지하고 교육통할기관인 신 감군부(이후 교육총감부)를 설치하여 육군성, 참모본부와 대등하게 천황에 직속하게 하는 방향을 추진했다. 동시에 사단을 전략 단위로 정하였다. 이렇게 제도심사위원회가 감군부 폐지 및 신 감군부 설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육군분의"라고 불리는 의견 대립이 벌어지게 된다.
우선 신 감군부의 설치에는 사단제로 이행하기 위한 조례, 신 감군부의 조례, 검열조례, 진급조례라는 4개의 조려를 함께 검토해야 했지만 문제는 가쓰라가 그전 단계에서 감군부의 폐지를 서두르면서 다른 조례보다 검열조례와 진급조례를 개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검열조례에 대해서 지금까지 감군부장이 칙령에 의해 검열사가 되어 검열했는데 감군부의 평시 업무를 육군성으로 옮기면서 육군상의 명령 하에 진대사령관이 검열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진급조례에 대해서는 좀 더 복잡했는데 위관급 진급이 시험 성적 순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한 사람 중 선임 순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이 방식은 사관학교 출신들에게는 불리한 것이었고 반대로 근무 연수가 길면서 학력이 떨어지는 선임 장교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개정, 특히 인재발탁에 지장이 생기게 될 역진제도에 소장 장교들은 거세게 들고 일어섰고 이에 군제개혁에 반대하는 소가와 미우라는 그들의 불만을 모아 저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육군분의"의 본질은 야마가타의 육군 장악의 일환이었는데 실제로 소가 중장이 참모본부차장에 취임한 이후 이 일이 벌어진 것을 생각하면 요컨대 이들 권한을 신 감군부의 장인 감군에 내정된 자신과 맹우인 오야마 육상이 나누어 가지려 한 것이었다. 결국 이 분의는 총리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조정되었는데 이토는 진급조례는 가쓰라 등 육군성의 원안대로 하되, 검열조례는 저항세력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감군부를 부활시키는 조건을 붙이는 것으로 타협하게 된다. 이후 1886년 7월 소가는 참모본부차장에서 육사교장으로, 미우라는 쿠마모토 진대 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일본 육군의 전통적인 라이벌인 해군 그리고 이때 육군분의와 거의 동시에 육군 내에서 전개된 권력투쟁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게 바로 "통합참모본부 구상" 문제였다. 그 발단은 18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이 해 카와무라 스미요시 중장이 해군도 육군과 동일한 군제를 채용하여 해군성에서 독립한 해군참모본부를 설치해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 시초였다. 이에 대해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육주해종"의 국방체제론을 전개하여 해군참모본부의 불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게 태평양 전쟁 때까지도 해소되지 못했던 육해군 대립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으며 여기서 다음 해 주영공사관 주재해군무관이자 사쓰마 번 출신인 쿠로오카 타테와키가 카와무라의 주장에 동조해 해군참모본부 설치를 넘어선 육해군 통일 지휘체계인 통합참모본부 설치를 제안하며 논쟁에 불을 제대로 지피게 된다. 이와 같은 조직이 당시까지 세계에서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의 근대적 군사지도자로서의 선견성이 대단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육군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가쓰라 다로였다. 당시 참모본부 관서국장이던 가쓰라는 참모본부는 육군만의 독립적인 기관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통합참모본부 구상에 대놓고 반발했다. 그의 주장은 말 그대로 육군과 해군의 임무는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고 상호지원이란 서로가 자신의 직책을 다하는 것이므로 합병의 필요가 없다는 식의 본질에 벗어난 지엽론이었다. 당장 일본의 지형적 특성상 외정은 물론 국토방위에서도 육해군의 긴밀한 제휴는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계획 및 명령을 통일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이를 위해 양군의 군령기관을 한 사람의 장 아래 두는 통합참모본부는 가장 나은 구상으로 가쓰라가 지적한 사무 번잡 등의 문제와는 비교 불가한 의의가 컸다.
통합참모본부에 반대한 야마가타와 가쓰라의 본심의 첫 번째 이유는 보신 전쟁과 세이난 전쟁의 승전의 일등 공신은 육군이고 해군은 그저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인식과 더불어 독일식 군제의 특성이 완전한 육주해종이었던 탓도 있었다. 또 하나의 반대 이유는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이 미우라 고로 중장을 통합참모본부장에 임명하여 육해군 군비확장계획을 변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사정이 좀 복잡하다. 이는 1883년부터 개시된 일본의 군비확장은 1885년 약 379만 엔이 부족한 상황이, 1890년에는 1,300만 엔 부족이 예상되는 수준까지 오는 재원 부족 때문이었다. 따라서 심각한 재원부족에 직면한 상황에서 군비확장계획을 그대로 무리하게 밀고 나가기란 무리였지만 그렇다고 급변하는 극동 정세 속에서 군비를 신경 안 쓸 수가 없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훗날 을미사변의 주범이 되는 사람이자 초대 통합참모본부장 후보군으로 거론되었던 미우라 고로 여기서 이노우에가 내놓은 대안은 일본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소수의 군사력을 제공하면서 영국 혹은 러시아 어느 한쪽과의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이에 기초하여 이노우에는 육군이 2만 정도의 병력을 군축하고 해군은 국내 함정 건조 중지 및 해외 구입으로 전환하도록 하며 군함제조소와 병원 등을 통폐합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육군 주류에 저항해 경제적 군비론을 제창해 온 미우라 고로를 통합참모본부장에 등용하여 자신의 개혁에 시동을 걸 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즉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가 통합참모본부 설치를 추진한 것은 야마가타 주도의 군비확장 계획에 개입하여 경비삭감을 추진하려는 목적이 컸던 셈이다.
1886년 1월 20일, 각의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던 통합참모본부 설치는 이토와 이노우에의 일방적인 강행 덕분에 결정에 이르게 되었다. 3월 18일에 가서는 드디어 육해군 통합의 중앙군령기관으로서의 통합참모본부가 공시적으로 탄생하였다. 그러나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미우라 고로가 아니라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가 통합참모본부장에 취임했는데 이는 야마가타가 황족이 육해군 통합에 적합하다면서 미우라를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통합참모본부는 출범하였으며 육군부는 각 감군부. 근위, 각 진대의 참모부와 육대, 군용 통신대를 통할 및 해군부는 진수부와 함대의 참모부를 통할하게 되었다. 이러한 통합참모본부의 설치는 육해군을 통합하여 움직이기 위한 세계 최초의 이상적인 조직이었으나...
하지만 육군 주류파가 순순히 통합참모본부에 따를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본부장 임명 과정에서 천황이 취임을 희망한 미우라 고로를 쳐냈던 것부터 그들의 뒤끝이 만만치 않았단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1887년 3월에 가서는 설치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참모본부조례, 해군참모본부조례에 따라서 참군 관제가 폐지되고 해군참모본부는 해군참모부가 되어 해군성 예하로 복귀하였고 참모본부는 자연스럽게 예전처럼 육군만의 군령기관이 되어 통합은 완전히 파토되었다. 얼마 후 차장에 육군 주류파 가와카미 소로쿠가 복귀하게 되었고 추진 세력이던 이토와 이노우에마저도 삿초번벌체제 붕괴 우려를 이유로 야마가타파의 반격을 눈 감으며 획기적인 시도였던 통합참모본부는 권력투쟁 차원의 발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다시는 육해군의 군령기관이 통합되는 일은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육해군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어 전쟁 수행은 물론이고 국가전략에서도 서로 반대방향으로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즉 일본군은 근대화 되었지만 두뇌 집단인 참모본부만큼은 퇴보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처럼 통합참모본부 구상의 좌절은 삿초번벌의 잔재로부터 조짐이 생겨나던 일본 육해군 대립이 격화되는 것의 불씨 역할을 하였으며 아이러니한 점은 나중에 을미사변의 주범이 되는 미우라 고로가 이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공세적 방향성에 대항하여 방어적 전략을 지지하던 온건파적 입장이었던 것이다. 한국 국사 교육에서 미우라 고로는 그냥 을미사변 언급할 때 잠깐 지나가는 인물이자 민비 시해 원흉으로만 지목되는데 이런 인물이 의외로 야마가타의 대외 팽창 노선에 반발해 방어적 전략을 주장했다는 면모를 보면 나름 복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지점도 있다.
참고 문헌:
쿠로노 타에루, <참모본부와 육군대학교>, 논형, 2015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4
도베 료이치, <역설의 군대>, 소명출판, 2020
후지와라 아키라, <일본군사사(상): 전전편>, 제이앤씨, 2013
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서해문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