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뉴스보다가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피습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재명은 생명에 지장 없이 병원에 이송되어 회복 중에 있는 상태다. 2022년 대선 당시 민주당 현직 대표였던 송영길이 피습당한지 거의 2년 만에 또 거대 정당 대표가 괴한한테 피습당한 것인데 특히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마치 과거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선거 유세에 나갔다가 커터칼에 피습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재명 대표가 겪은 일은 사실 정치인들에 있어서 간혹 가다가 발생하기도 하는 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 정국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2022년도 일본에서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직 총리인 아베 신조가 총 맞고 죽은 사건이 연상된다는 반응도 보이고 있다. 이 사건도 선거 정국에 벌어졌으며 아베의 죽음이 자민당에 동정표로 흘러간 부분도 없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재명 피습 사건과 비교했을 때 아베 사망 사건보다는 1960년에 있었던 "도쿄 찌르기 사건"을 떠올렸다.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 습격당한 당사자가 거대 야당의 대표였다는 것, 비슷한 시기에 거대 야당에서 분당의 조짐이 있었거나 현실화 되었다는 것, 또한 무엇보다 피습 당시 주무기가 칼이었다는 것 등이 마치 도쿄 찌르기 사건을 연상시키는 점이라고 볼 만한 여지가 있다.
도쿄 찌르기 사건 이전인 1959년 참의원 선거 당시 일본의 제1야당이던 사회당은 목표였던 100석에 훨씬 못 미치는 84석을 얻었고 이에 사회당 우파이던 니시오 스에히로 등이 계급정당론을 비판하고 나섰다. 니시오는 계급정당론 등의 용공 통일전선과 안보조약 개정 전면 반대 투쟁 노선을 비판하면서 국민 정당화를 주장했고 또한 사회당 좌파가 주도하는 공산당과의 협력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당내 주류파인 스즈키파는 계급정당론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상황에서 니시오 스에히로가 안보조약 문제로 사회당 좌파와 크게 부딪히면서 사회당 좌우파는 분열되었다. 결국 니시오에 대한 좌파의 제명 움직임이 구체화되자 그는 국회의원 32명을 데리고 정식으로 탈당하여 이어서 동반 탈당한 가와카미파 12명과 손잡고 이듬해인 1960년 1월 민주사회당, 즉 민사당을 창당하였다.
일본 혁신 정당(좌파 세력)의 계보
한편 자민당에서는안보투쟁으로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물러서고 그 뒤를 이어 요시다 계보의 보수 본류 세력인 이케다 하야토가 정권을 장악했다. 도조 내각의 각료였고 또 우익적인 성향이 강했던 기시와는 달리 이케다는 소득 배증 계획을 앞세운 경제우선주의 노선을 표방하였는데 1960년 중의원 선거는 그런 이케다의 주장이 국민들에게 신임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일종의 선택의 장이기도 했다. 이 시기 비록 민사당이 분당되어 떨어져 나갔지만 안보투쟁으로 기시를 끌어내렸다는 것으로 인해 자신감이 치솟던 사회당은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위원장으로 내세워 이케다 및 자민당의 경제 문제와는 차별화되는 안보 문제를 중심 의제로 당 차원에서 제기하여 선거를 치루고자 하였다.
아사누마 이네지로라는 인물에 대해 잠깐 설명하고 가자면 그는 과거 전전 시대 사회대중당이라는 좌파 정당에서 활동하였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사회대중당이 일본 군국주의 체제 수립 후 대정익찬회에 편입되자 거기에 들어가 친군부 인사 겸 국가사회주의자로써 중일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를 공개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앞장섰다. 그럼에도 도중에 잠시 공직을 그만뒀던 탓인지 부역 혐의로 전범재판이나 공직 추방을 당하는 일은 면하게 되었으며 전후 사회당이 창당되자 그곳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온건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사회당 우파 성향을 자처하면서도 동시에 친중, 친북, 반미 성향을 보이는 등 당내 우파와 중간파 사이의 포지션으로 자리잡았고 사회당 우파들이 탈당할 때도 민사당에 가지 않은채 남았다.
아무튼 니시오파의 탈당 및 민사당 창당 이후 사회당의 위원장이 된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안보투쟁의 열기를 그대로 이어가 자민당 정권 자체를 심판할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1960년 당시 중의원 선거였다. 그러나 1960년 10월 12일 아사누마 위원장은 자민, 사회, 민사 3당 공동의 TV 연설회에 참여했다가 야마구치 오토야라는 일본 우익 소년의 칼에 찔려 죽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도쿄 찌르기 사건이다. 이 사건은 가뜩이나 선거를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벌어졌고 거기다가 하필 피습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거대 야당인 사회당의 위원장이었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매우 컸다. 게다가 결국은 실패로 끝난 박근혜, 송영길, 이재명과는 달리 결국 아사누마는 사망했으니 더욱 더 그렇다.
도쿄 찌르기 사건 당시 찍힌 사진
" 아사누마 이네지로, 당신은 일본의 적화를 도모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으나, 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의 책임과 방중을 즈음한 폭언과 국회 난입의 직접적인 선동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 여기에서 나는 당신에게 천벌을 내린다. "
- 황기 2620년(1960년) 10월 12일 야마구치 오토야 -
아사누마를 칼로 찔러 죽인 범인은 야마구치 오토야라는 당시 청소년이었던 우익 행동가였다. 그리고 그가 스승처럼 따랐던 사람이 바로 아카오 빈이라는 인물인데 잠시 그에 대해서 알아보자. 아카오 빈은 사실 전전 시대에는 원래 사회주의 진영에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고향인 나고야에서 도카이 농민 조합회나 나고야 임차인 동맹 등을 조직해 활발히 좌익 운동을 전개했으나 활동자금을 지역기업에게 요구했다는 이유로 동지들에게 비판받은 후 완전히 전향했다. 그 후 아카오는 국가사회주의자인 다카바타케 모토유키 등과 함께 적색 노동절에 맞서 황거 앞에서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하는 건국제를 이끌며 일종의 "천황제 사회주의자"로 진화했다. 다만 우익으로 전향했음에도 아카오는 전쟁은 소련을 이롭게 할 뿐이라며 개전에는 부정적이었다.
전후 대일본애국당을 창당한 아카오 빈은 자주헌법 확립, 재군비, 공산당 박멸, 사회당 타도, 부패 보수당 숙청, 반국가적 자본가 응징, 적화 세력에 의한 모략적 반미 투쟁 분쇄, 전쟁 희생자 구원 등을 주장하며 일본 반공우익 진영의 핵심 인사가 되어 적극적인 투쟁에 앞장섰다. 당시의 일본 우익은 비교적 온건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는 조직우익 혹은 관념우익과 암살 등 과격 행동을 동반하는 행동우익으로 나뉘었는데 대일본애국당과 그곳에 속한 아카오 빈, 야마구치 오토야는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도 아카오 빈은 거리 선전을 돌아다니며 "적색혁명인가, 일장기로 세상을 바꾸는 운동인가!"를 선전차 위에서 소리쳤다.
재미난 건 대일본애국당은 전전 시대의 우익이나 이후에 등장하는 미시마 유키오 및 방패회 같은 민족파 신우익들과 결이 다르게도 일장기와 성조기를 같이 다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즉 과거 전전 시대 혈맹단이나 사쿠라회, 황도파 같이 "쇼와 유신"을 추구하는 면모는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미일동맹 관계라는 큰 틀에서 민족주의라는 "이상"보다는 반공주의라는 "현실"을 내세우며 오로지 반공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표로 삼았다. 그들이 미일안보조약을 지지하는 것은 지금 안보를 파기하면 소련군에게 순식간에 침략당한다는 이유였다. 물론 아카오는 미국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지만 반공을 이유로 손 잡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었고 의외로 반공이라는 목적을 위해 한국과 우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 양국이 독도 문제로 다툴 때면 "그딴 섬은 폭파시켜버리면 돼!"라고 한 것이고.
야마구치 오토야는 그런 아카오 빈의 연설에 감화되어 정치깡패로 영입된 우익 청소년이었다. 야마구치는 매우 열정적이었던 나머지, 일교조 대회 같은 좌파들의 집회에 난입하여 때려부수는 것 정도는 다반사로 벌이던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검거 경력은 십수 회에 달하는 수준이었으며 실제로 저 당시에는 야마구치 오토야 뿐만 아니라 정치깡패로 분류되는 임협계 우익단체들이 일본 공산당이나 노동조합을 폭력으로 때려잡았으며 좌파들도 마찬가지로 쇠파이프나 사제 무기를 들고 테러하는 바람에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일들이 1960년대 동안 매우 잦았던 상황이었다.물론 야마구치 오토야의 행보는 본인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엄청나게 과격한 수준이었기에 사실 아카오 빈 정도면 차라리 온건하게 보일 만한 여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긴 하다.
아카오 빈과 야마구치 오토야
그런데 야마구치 오토야는 도쿄 찌르기 사건 직전 대일본애국당을 탈당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아카오 빈보다 훨씬 더 과격하고 급진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대일본애국당에 폐가 될 것이라는 요지로 실제로 그 직후 바로 도쿄 찌르기 사건이 터지고 아카오 빈이 경찰 수사를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야마구치 오토야는 사건 당일 자민당, 사회당, 인사당 3당 당수가 참석한 TV 연설회 현장에 가서 아사누마 위원장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한지 5분이 지났을 때 뛰쳐나가 단도로 아사누마의 가슴을 찔렀다. 피습 대상인 아사누마 위원장은 깊이 30cm의 상처가 났고 대동맥이 끊어지는 바람에 거의 즉사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이 도쿄 찌르기 사건을 둘러싼 사건의 전말과 주범인 야마구치 오토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사누마 이네지로라는 거대 야당 대표의 사망은 선거를 앞둔 일본 사회에 매우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는 자칫하면 선거 판세가 사회당으로 동정 여론이 집중되어 자민당에 불리해지는 방향으로도 갈 수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자민당 총재이자 일본의 총리인 이케다 하야토의 대처는 매우 현명했다. 사건으로 인한 불만이 자민당에 향할 것을 우려한 이케다는 곧바로 신속한 대응에 나서서 국가공안위원장을 즉시 파면하는 동시에 이케다 본인이 임시 국회에서 스스로 추도 연설을 하고 장례식까지 가서 눈물을 흘리며 아사누마 애도 및 폭력을 규탄하는 조사를 직접 읽었다. 이케다의 이러한 행보는 사회당과의 이념 대결, 특히 전임자인 기시 노부스케가 벌여놓고 간 안보 문제가 정치 전면에 부상하지 않고 국민들의 관심이 경제 문제에 가게끔 유도하는 전략의 면모도 있었다.
1960년 제29회 중의원 선거 결과
선거 결과는 안보투쟁의 여파와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인한 동정 여론 속에서도 자민당이 296석을 얻으며 의석 중 절대 안정 다수를 먹었다. 반면 사회당은 145석을 얻었는데 이는 1958년 선거 당시보다 증가한 의석 수였지만 그다지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로 심각한 패자는 사회당에서 분당되어 나갔던 민사당이었는데 그들은 선거 전 40석의 의석에서 선거 후 17석으로 줄어드는 대참사를 겪었다. 아마 자민당은 경제 우선주의 전략으로, 사회당은 안보 문제와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일본 국내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었던 것에 비해 민사당은 이번 선거 정국에서 썩 각인될 만한 모습을 못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민사당이라는 정당 자체가 사회당과 대판 싸우고 나간 집단인만큼 도쿄 찌르기 사건 속 아사누마 위원장의 사망은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으니 말이다.
이재명 대표의 피습은 도쿄 찌르기 사건과는 달리 사망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아사누마 위원장처럼 그가 거대 야당의 대표였고 하필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훗날 도쿄 찌르기 사건의 주범 야마구치 오토야는 감옥에서 "報国, 天皇陛下万歲"(칠생보국, 천황 폐하 만세)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공교롭게도 송영길 피습 사건의 주범도 감옥에서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다. 또한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린 이케다 하야토 총리처럼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바로 규탄 성명 및 병문안 암시 발언을 남긴 것도 그렇고. 물론 당연히 두 사건의 공통점 만큼이나 차이점도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뭔가 두 개를 비교할 때 묘한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