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도 여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립 직후부터 오랫동안 장기집권 통치자의 치하에 있었다. 특히 초대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는 2016년 사망할 때까지 무려 26년 동안 집권하였으며 그가 사망한 이후로도 지금까지 정권의 2인자 미르지요예프가 통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르지요예프의 집권 이후 우즈베키스탄에 개혁적인 각종 조치들이 시행되면서 예전에 비하면 민주화 요소들이 도입되고 있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카리모프 정권 시절 총리직을 지내며 안디잔 학살을 지지했던 미르지요예프의 한계 특성상 어디까지나 정권 안정의 최우선을 목표로 개혁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우즈베키스탄에는 권위주의적인 요소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저번 중앙아시아 정치글에서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다뤘을 때 중앙아시아에서 왜 장기집권 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해 논했었다. 그 부분에서 보면 우즈베키스탄도 같은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인지라 다소 비슷한 느낌도 있을 것이고, 또 차이점도 존재할 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은 카리모프 사후인 2022년에도 이코노미스트 민주주의 지수 발표에서 조사대상국 167개국 중 149위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북한, 에리트레아와 비슷한 최하위권을 기록한 것이나 다름 없다. 이 정도면 옆나라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보다 훨씬 폭압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카리모프 정권은 무려 26년 간 지속되었고 지금까지도 권위주의적 요소들의 잔재는 상당한 편인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먼저 내가 중앙아시아 정세를 논할 때 항상 다루는 정치 문화에 대한 분석부터 해보자. 우즈베키스탄 지역은 지리적으로는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가 동서를 관통하면서 흐르는 강의 중간에 있어서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고 또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하라, 히바, 테르메즈 같은 실크로드의 동서남북을 연결해주는 교통 요충지를 가지고 있어서 무역에도 유리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반대로 뒤집어서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침략받기 딱 좋은 환경이라는 말이기도 한데 이러한 연유로 주변 강대국들은 우즈베키스탄 지역을 항상 노려왔다. 그 덕분에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독립할 때까지 주변의 강력한 정주 국가들과 유목 국가들에 의한 침략과 지배를 지속적으로 당해왔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우즈베키스탄 민족은 자신들의 지역을 침략한 자들을 스스로 몰아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조차도 본인들이 쟁취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연방 붕괴로, 말 그대로 독립"당한" 것에 더 가까웠다. 역사적으로도 제정 러시아가 침략해올 시절부터 우즈베키스탄인들은 우즈베크 3칸국으로 분열되어 있어서 저항을 제대로 못한 전례가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역사의 일부분인 근현대사에만 우즈벡 민족의 존재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티무르 왕조를 무너뜨린 자들이 지금의 우즈베크 민족의 출발점이지만 정작 교육기관에서는 티무르를 몽골계가 아닌 투르크계로 가르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외부의 침략과 지배를 지속적으로 받은 우즈베키스탄은 애초부터 역사적인 관점에서 장기집권 체제 지속가능성이 아주 좋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것의 연장선으로 봐보면 우즈베키스탄에 이때까지 나타났던 체제가 군주제와 소비에트 체제 밖에 없었다는 사실 역시 권위주의 체제 지속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우즈베키스탄인들은 사실상 기존의 통치자가 죽어야만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나는 체제를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경험해왔었으며 2016년에 카리모프가 사망하고 미르지요예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될 때까지도 주체적으로 통치자를 스스로 세워보지 못했다. 당장 똑같이 민주주의 경험이 매우 부족한 권위주의 체제인 옆나라 카자흐스탄만 봐도 1986년 고르바초프가 기존 카자흐 공산당 서기였던 쿠니예프를 경질하고 러시아계인 콜빈을 임명하자 카자흐인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결국 나자르바예프로 교체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우즈베키스탄에는 쿠데타든, 민중 혁명이든 통치자에 저항하여 왕, 칸, 공산당 서기, 대통령을 스스로 교체해본 적이 없었으며 결국에는 과거처럼 현재에도 후임자가 계승하면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 훤히 보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2,000년 넘게 스스로 정권을 역성 혁명이든, 쿠데타든, 민중 혁명이든 무너뜨려본 적이 없던 우즈베키스탄인들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런 체제에 문제의식을 느낄 만한 건덕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할라(Mahalla)라는 농경사회에서 발달한 지역공동체의 개념 또한 우즈베키스탄 장기집권 체제 유지 요인 중 하나다. 마할라는 정확한 유래는 없지만 11세기 문헌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며 중동의 이슬람 공동체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단순히 종교, 민족, 신분을 중심으로 한 단일 목적 집단이 아니라 이를 모두 수용하는 생활 공동체라는 얘기. 지금까지도 전통이 유지되고 있는 마할라는 비정부 지역공동체의 특성을 보이기에 조직과 기능이 정부의 행정조직과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동체의 수장은 '오크소콜'으로 불리고 구성원 가운데 지식, 연령, 경험들을 고려하여 주민들이 선출한다. 또 오크소콜을 중심으로 "마할라주민회의", 그 산하에 "마할라위원회", "교육자문", "복지위원회", "여성위원회", "감사위원회"가 존재한다. 그리고 공동체의 주요 정책은 회의로 결정되는데 주요 기능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경조사 지원, 공동체의 전통 및 예절 교육, 의료와 복지, 공동체의 사업 실현 등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다가 마할라는 소련 시대에 그 성격이 조금 변화한다. 특히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으로 농촌의 마할라는 집단농장에 흡수되었지만 그래도 오히려 전통적인 혈연 관계 중심의 씨족 사회와 마할라는 집단농장 정책을 통해 광범위한 지역 파벌로 발전할 수 있었다. 결국 이를 봉건적 잔재라며 탄압하던 소련 당국도 마할라의 존재를 수용하면서 대신 지역 공산당 위원회가 오크소콜을 직접 지명하여 구성원들이 선출하게 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대응책을 선택했다. 다만 그 덕분에 소련 시대에도 마할라의 전통적 기능은 끝까지 유지되어 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우즈베키스탄에서 마할라는 실질적으로 가버넌스 개념의 비정부 조직의 탈을 쓴 정부 통제 조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마할라가 우즈베키스탄 장기집권 체제에 끼친 영향은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은 오늘날 오크소콜은 정부의 통제 하에 있고 그들이 구성원들 동향 파악이 신속하게 됨은 물론이고 반상회 같은 "회의"는 정부 정책 홍보로 이용되기에 반정부 조직으로 발전할 여지가 아예 없게 되었다. 특히 대선과 총선에서는 정부의 지시를 받은 오코소콜과 마할라 집행부가 구성원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어서 반정부 정치 행위가 불가하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는 한 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마할라 구성원으로 자동적으로 가입되는 구조라서 만약 다른 곳으로 이사가면 기존 마할라에서 탈퇴되고 다른 지역 마할라의 구성원이 된다. 그렇기에 전국 어디로 가더라도 정부의 통제와 감시는 피할 수가 없다.
중앙아시아 지역답게 가부장제 역시 장기집권 체제 영향을 주는데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즈베키스탄은 역사적으로 침략과 지배에 시달려왔었는지라 피통치자들이 농경과 유목집단의 씨족 및 부족 구성원으로 존재하여 보호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우즈베키스탄에서 가부장제 전통은 소련 시대에서도 끝까지 생존하여 이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즈베키스타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 구성에 대한 통치자의 지배를 가족 구성에 대한 가장의 지배로 인식하고 있으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이 피해주는 결정을 해도 가족 구성원들이 묵묵히 따르는 것처럼, 최고 통치자에 대해서도 설령 불만이 있어도 대놓고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출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즈베키스탄만의 가족주의 관점으로 카리모프 사후 미르지요예프의 후계자 계승을 분석해보자면 이는 곧 가장이 죽고 맏형이 가장 노릇을 하게 되는 가부장제 관습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인 셈이다.
씨족 문화의 경우는 당장 카리모프가 지작-사마르칸트 연합 파벌이라는 특정 씨족 집단의 후원을 통해 대통령이 된 시점에서 장기집권 체제에 끼친 영향을 전부 다 설명이 가능하다. 카리모프는 사마르칸트 파벌의 주라베코프의 후원을 받았고 반대로 미르지요예프는 카리모프의 후원으로 중앙 정치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씨족 문화는 초창기 카리모프 정권의 안정성을 보장해줬는데 기본적으로 씨족의 후원을 받은 피후원자가 대통령이 되면 씨족을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지역의 장기적인 정치적, 경제적 성장 기반을 마련받는 대가로 막대한 후원을 해서 정권을 유지시켜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다가 만약 피후원자가 자신들의 씨족에 어긋나는 행보를 보일 경우에는 1999년 카리모프를 겨냥해 사마르칸트 파벌이 타슈켄트 테러를 일으킨 것처럼 보복 시도를 당할 리스크도 있었다.
경제 정책의 성공도 카리모프, 그 뒤를 이어 정치적 후계자 미르지요예프까지 집권하게 되는 요인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점진적 개혁정책을 표망하면서 체제이행 초기부터 상당한 경제 안정성을 보였으며 폐쇄적인 경제정책은 오히려 2007~2008년 세계적인 금융 위기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카리모프 정권의 지배를 공고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때 폐쇄적인 경제정책으로 취한 방안 중 하나가 자국산업 보호와 다각화를 도모하기 위한 천연자원 부문 기업을 제외한 대규모 공기업 육성이었고 덕분에 비교적 대외충격을 덜 받으며 주변국보다 높은 성장세를 이어갔다. 특히나 카리모프의 최대 경제 성과는 바로 연 8%의 성장률을 지속시킨 것이었으며 또 사회적으로 120여 민족이 거주하지만 민족분쟁 한 번 일어나지 않는 국가로 만든 것도 업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카리모프 사후부터 경제성장률이 효율성 저하로 인해 둔화되어 5.3%가 되었고 안정기였다는 그의 집권기 동안에도 고성장의 이면에는 높은 물가상승률, 높은 실업률,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의 공존 등 부작용들이 만만치 않았던 나머지 후임자 미르지요예프는 취임하자마자 경제 개혁을 선언하며 방향성을 틀기도 했다.
그렇지만 카리모프 정권기 경제 정책은 의외의 신기한 특징도 있었는데 구 소련권 국가 중에서도 침체 와중에 사회안전망을 나름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사회적 조력을 한 것이 장기집권을 위한 가능으로도 활용되는 마할라 제도였다는게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우즈베키스탄은 독립 이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보건과 교육에 GDP의 10%선은 꼭 지출하였기에 소련 붕괴의 충격타로 사회안전망이 붕괴된 다른 CIS 국가 꼴만큼은 면했다. 경제성장률이 아직은 높지 않던 체제전환기에도 우즈베키스탄은 심한 생산축소를 겪지 않았으며 실제로 1992~1995년 동안 누적하여 18.4%가 줄어들은 GDP는 1996~2001년 사이에 26.2%나 상승하여 피해를 완전히 메꿨다. 게다가 이러한 실적들이 쌓이면서 수입대체정책과 산업정책 등을 통해 주요 생산품에 대한 자급자족, 자립을 달성하게 되었으며 이는 2008~2009년 금융위기 상황 속에서도 옆나라 카자흐스탄과는 달리 역으로 외부수요 증가에 힘입어 각각 9.6%, 9.0%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르지요예프 취임 직후에는 경제 성장세가 비효율성 문제로 둔화되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카리모프의 이런 정책들이 있었던 탓에 외부의 충격에 덜 취약한 경제 구조가 완성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카리모프가 복구해낸 우즈베키스탄의 경제적 기반은 후반에 내려가다가도 미르지요예프가 집권한 이후로 정책에 조금 변화를 주면서 다시 살아나는 중이다. 우즈베키스탄 경제재정부는 2023년 경제성장률을 5.3%로 예측했으며 2025년에는 6%까지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또한 2023년에는 국가 GDP가 약 940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비록 어느정도 기반을 쌓는데 기여했지만 이제는 한계점도 명백한 전임자 카리모프의 노선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주며 기업에 대한 지원, 각종 절차의 간소화, 새로운 제도들과 변경되는 노동법 개정을 시행하여 외국인 투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의 정책들을 앞세웠다. 그래서 러우전쟁과 세계적인 경제 둔화가 있었던 2022년에조차 GDP 800억 달러 이상 증가, 80억 달러의 직접투자 유치, 수출 190억 달러 달성 같은 성과들을 이룰 수 있었고 때마침 전쟁의 장기화 속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의 지정학적 가치를 더 높였다. 그러니 올해 7월의 우즈베키스탄 대선에서 미르지요예프가 87.05%로 재선에 성공한 것도 이 정책 기반 기여가 컸다는 얘기.
또 카리모프가 적어도 정치적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우즈베키스탄인들에 한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다름 아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준동은 때려잡았기 때문이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텐데 아랍의 봄이 낳은 최악의 결과만 봐도 그런 소리는 함부로 하기 힘들 것이다. 카리모프 본인은 이름에도 "이슬람"이 들어갔지만 그와는 정 반대로 소련 공산당 출신답게 무신론자였고 따라서 집권 초기부터 종교적 가치보단 민족의 역사와 언어를 더 집중적으로 강조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나라 밖에서는 타지키스탄 내전이 벌어지며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나타날 조짐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인데 만약 우즈베키스탄 내로 이슬람 극단주의가 유입된다면 민족 간의 분쟁이 터지고 정치적 안정이 물 건너갈 것이 워낙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 때문에 나는 카리모프 정권은 폭압적이고 반인권적이라고 서방 세계로부터 비판을 받는 부분도 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강경책을 고수함으로써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여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세속주의 원칙과 치안을 모두 지켜냈다는 공도 존재하는 등 여러모로 복합적인 정권이라 평하고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정권에 대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위협은 여전히 존재했다. 1999년 2월에는 수도 타슈켄트에서 테러가 벌어져 13명의 사망자와 1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극단주의자들이 유입되어 연계 및 같이 공동으로 움직이는 정황도 발견되었다. 이에 카리모프는 강경히 탄압하였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온건한 무슬림을 분리시켜 대중vs테러리스트 구도를 만들어가서 당시까지 가장 중요한 내적 갈등인 지역 균열을 덮어버리는 일타쌍피를 이뤘다. 물론 정권 안정을 위해 과격하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을 탄압한 것도 있었고 실제로 이 과정에서 카리모프의 지지 기반이자 오랫동안 우즈베키스탄을 지배해온 지역 네트워크에 근거한 씨족 파벌들이 와해되는 바람에 1인 독재 체제를 굳히기도 하였다. 다만 그래도 일반 주민 입장에서도 성과가 있었다면 이슬람이 무슬림 형제단마냥 정치세력화되어 아랍의 봄 당시의 중동 꼴이 나는 것만큼은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우즈베키스탄은 무슬림이 많으면서도 강한 세속주의 성향을 보이는 국가로 남은 수 있었다.
제3세계 국가들의 정부가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군부에 의한 쿠데타인데 카리모프 정권부터 미르지요예프에 이르기까지 우즈베키스탄의 대통령들은 군부를 아주 잘 다뤘다. 카리모프 정권이 군부를 능숙하게 다루는 걸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2005년 학살극으로 유명한 안디잔 사태였는데 이 당시 정부는 군 부대를 동원하여 해당 지역 전체를 봉쇄하고 신속히 시위대를 진압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 측이 발표한 사망자 수치는 187명이었지만 국제사회는 이에 말이 안 되는 수치로 왜곡했다고 카리모프를 인권 탄압 독재자로 비난하였다. 그렇게 시위 진압에 군부를 이용하였던 카리모프였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도 견제책을 날리는데 바로 국방장관 카디르 굴야모프, 합동군 총장 이스마일 에르가셰프, 동부군관구 사령관 코시말리 아흐메도프 등을 포함한 군부 지도부를 다 사태 책임을 명분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카리모프는 안디잔 사태로 이슬람 극단주의, 정권 반대 세력을 억누르면서도 사태 종결 후에 견제구를 날리며 군부와 사마르칸트 같은 씨족 파벌들을 상대로 정권이 우위임을 확실하게 보여줬는데 그 결과 우즈베키스탄은 다른 제3세계와는 달리 쿠데타가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없었으며 정권 안정성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종합해보자면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나라와 민족이 가진 고유한 특성과 카리모프-미르지요예프 시기의 경제 성과,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억압을 통한 세속주의 원칙을 지켜낸 행보, 쿠데타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군부에 대한 확실한 통제력 등의 요인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장기집권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2023년 대선에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상황이라 만약 이후 한 번으로 제한된 연임에도 또 성공한다면 2037년까지 최장 14년을 더 집권할 수 있기에 앞으로도 별 일이 없다는 전제 하에 장기집권 체제는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미르지요예프도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지도자인 것은 사실이나 그것과는 별도로 그는 재임하면서 카리모프 시절의 노선에 나름대로 커다란 변화도 주고 있기에 적어도 앞으로는 권위주의의 틀은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유를 어느정도 보장해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블루 오션으로 각광받는 우즈베키스탄을 만든 카리모프라고 해서 어두운 면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경제정책 모델이 다른 구 소련권 국가들에 비해 순항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속 가능한 고도성장의 경로에 올려놓는 것에 실패했으며 카리모프가 일으킨 안디잔 사태는 솔직히 쉴드가 불가능한 학살극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시위대 측이 다수의 무슬림들이 연계되어 있는 건 사실이고 또 사태의 악화에 따라 폭동적 성격으로 점차 변화해간 측면은 있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진압이 과한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어쨌든 안디잔을 기점으로 카리모프 정권이 씨족 파벌 위주의 집단지도체제에서 1인 독재 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를 때려잡는 것은 두번째 명분이고 실제 목적 중에는 정치적 이득이 컸다고 본다.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카리모프의 철권 통치는 경제 개발을 성공시키고 우즈베키스탄에 이슬람 극단주의가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오랫동안 안정 상태를 유지시켰던 장점도 컸지만 그 대가로 인권 탄압도 빈번히 발생하는 어두운 면도 있었던 양면성이 극명하게 공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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