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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Dec 10. 2023

고르바초프: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재앙

이상주의자의 헛된 망상이 불러온 대참사

https://youtu.be/OK9e1zJI2JE?si=yb4J7UqUvyE2q7yr

" 무엇보다도 우리는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20세기의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

- 2005년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연설 中 -


고르바초프는 아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인식이 좋은 소련 지도자일 것이다. 당장 스탈린은 북한 정권 수립 및 6.25 남침과 연관된 문제 때문인지 평가가 좋아질 여지 자체가 생기지 못하고 있으며 레닌의 경우에는 그나마 반감이 덜하지만 일각에서는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을 학살하고 한국 독립운동 세력들을 붉게 물들게 만든 원흉으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브레즈네프나 흐루시초프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학창 시절 때 세계사 시간에 잠깐 들어본 게 전부일 것이고 안드로포프나 체르넨코는 그냥 공기 수준이다. 사실 이는 한국에서 소련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은 분위기도 한 몫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망한 나라인데다가 존재한 기간 동안에 우리 입장에서 적국으로 존재한 나날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나마 한국에서 인식이 괜찮거나 혹은 나쁘지 않을 만한 지도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마지막 서기장 고르바초프일 것이다. 고르바초프 당시가 한소수교가 있었을 때이기도 했고 또 88 서울 올림픽에 소련이 참여하는 역대급 해프닝도 있었다. 특히 소련의 서울 올림픽 참여는 북한에 대한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많이 활용되니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일들이 연 이어 벌어졌을 시기의 소련 지도자는 고르바초프였기 때문에 소련이라는 나라에 대한 반감부터 드는 우리 입장에서도 고르바초프만큼은 다소 호감으로 보이게 될 수밖에 없던 것도 있다. 게다가 일각에선 고르바초프와 동시대 중국의 지도자였던 덩샤오핑은 천안문 시위를 전차로 밀어버렸지만 적어도 고르바는 소련이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국민에게 총을 겨누지는 않았다며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88 올림픽 속 소련 참가와 한소수교라는 환상(?)이 있는 우리 입장을 배제하고, 적어도 고르바초프에 의해 통치되었던 구 소련과 후신인 러시아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는 그래도 과연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 나는 매우 회의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고르바초프가 지금까지도 주목을 덜 받는 건 그 이후의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옐친이 말아먹은 수준이 너무 심각한 스케일이라 그렇지, 고르바초프라고 해서 잘했다고 할 부분이 없는 건 그와 마찬가지다. 즉 고르바초프는 이미 망해가던 중인 소련을 관짝에 집어넣은 장본인이며 그 뒤를 이어 옐친이 다신 관 뚜껑을 열지 못하도록 못을 박게 만든 환경을 조성한, 러시아 입장에서는 진짜 최악의 지도자였던 인간이었다.

먼저 고르바초프는 1960년대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못 이해한 탓인지 이상주의로 인한 환상에 빠져있는 인간이었다. 이걸 비교해보자면 스탈린 이후의 소련 지도자들인 1894년생인 흐루시초프, 1906년생 브레즈네프, 1914년생 안드로포프 등은 소련 역사 속 거대한 소용돌이를 겪으며 살아왔던 사람들이었고 그렇기에 소련 체제가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강한 힘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목표를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걸 불가피하다고 보는 현실주의자들이었다. 물론 흐루시초프는 다소 무른 면이 있었지만 브레즈네프와 안드로포프만큼은 비록 내키지 않더라도 무력을 주저 없이 사용하는 충격요법이 때로는 필요하다고 보는 강단이 있었고 이것이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소련 체제를 유지하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다른 소련 지도자들과는 달리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시대 이후의 정치인 세대로써 1968년 소련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공으로 인해 체제에 대한 회의감을 본격적으로 품기 시작하다가 이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구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을 품게 된 케이스였다. 즉 다른 소련 지도자들보다 특유의 강단이 매우 부족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1985년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취임과 함께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이름의 개혁 정책은 너무 갑작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고르바초프는 레닌을 도덕적 우상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가 본 레닌의 모습이란 이상적인 비전에 따라 무작정 급진적인 해법을 선택하는 혁명가였다. 물론 실상은 스탈린이 증언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레닌은 완고한 이상을 이루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것 정도는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인민이 서방 록밴드 음악을 자유롭게 듣는 사회를 원하는 고르바초프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스타일의 노련한 정치가였던 것이 진짜 "진실"이다.


고르바초프는 서구의 지도자들, 특히 독일의 헬무트 콜이나 미국의 레이건, 영국의 대처,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같은 이들을 소련 공산당의 늙고 구태의연한 영감들, 동독의 호네커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같은 구태 정치가들에 대비되는 생동감 넘치는 활기찬 자들로 인식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가 최종적으로 꿈꾸던 궁극적인 목표는 때로는 양보를 하면서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소련 내부의 교조주의를 깨부수고 오랜 염원인 서구로 소련이 편입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는 오산이었으며 1985년 시점에서 급진적인 서구화보다 중요한 문제는 더 급한 위기인 경제의 고질병 해결이었다. 당시 미국과 사우디의 합의로 석유 증산이 이루어지며 위기가 시작되었는데 특히나 소련은 부족한 식량을 수입하기 위해 석유 수출로 번 경화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유가 하락은 직접적인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60년대 이후 소련의 석유 생산을 책임져주던 서부 시베리아 유전의 생산량까지도 감소하는 형국에 접어들었다.


이에 고르바초프가 꺼내든 경제 개혁 프로그램은 바로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가속화"라는 정책이었다. 말 그대로 소련 산업의 주력인 과학 기술과 중공업에 막대한 자원을 투자해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소련에게 지금 당장 필요했던 것이 추가적인 자원 투입이 아니라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지를 배우는 일, 시장 원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제도적 설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미 브레즈네프 시절에 실제 경제가 암시장과 지역 당 관료의 막후 조정을 통해 작동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보니 추가적인 자원 투입은 그냥 돈 낭비에 불과했고 그 점에서 차라리 스탈린 시대의 경제 전환 해법인 외국 기업과의 전면 합작이 훨씬 더 나은 선택지였다. 그러나 문제는 고르바초프는 노련한 정치가였던 스탈린과는 달리 대책 없이 성급한 정책을 지르고 보는 이상주의자였다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1986년 4월에 터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안 그래도 짧아지던 소련의 명줄에 굉장한 타격을 입혔다. 공교롭게도 1986년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 역사적 고점을 찍은 석유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한 해였는데 1970년대 중반 배럴당 약 60달러였던 유가는 1980년에 120달러를 상회했다가 1985년 말 급락하기 시작하여 80년대 말까지 40달러대를 유지하게 된 것이었다. 그 결과 소련의 연간 GNP 성장률은 흐루시초프 시대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고 연방 붕괴 1년 전인 1990년에는 마이너스 2.3%를 기록했다. 인구학적 전망 역시 전체 소련 인구 중 러시아인 비율이 1989년까지 50.7%대로 내려오게 되었으며 인구의 노령화가 진행되다 보니 연금생활자 3.000만 명과 콤소몰 청년단체 회원 수가 비슷한 지경에 이르었다. 물론 소련 지도부도 1987년 6월자 당 중앙위원회에 보고된 소련 경제 상황에 대해 고르바초프가 낭비, 비효율성, 부정확한 보고 등을 원인으로 지적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심각성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정작 제대로 된 대책은 내놓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건 사실 불가피한 면이 있었던 건 인정한다. 어차피 안 그래도 악화되는 소련의 재정을 계속 갉아먹는 주범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승기를 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소련의 우방국들에 미치는 정치적 파장이 심각했는데 그 결과 제3세계를 사회주의 건설로 인도하기 위해 뭐든지 해줄 수 있는 소련에 대한 위신과 신뢰되가 다 떨어지게 되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보는 이유는 미국이 무자헤딘 반군에게 최신 무기를 지원하면서 소련군의 소모와 출혈이 더욱 극심한 수준으로 1985년부터 강요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를 뒤집을려면 소련이 군대를 계속 증파했어야 했는데 문제는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결국 소련이 패배를 인정하고 철군을 완료하기까지는 4년이 더 필요했고 살짝 쉴드를 치자면 이건 고르바초프만의 책임이라고 보기 어려운 건 맞다.


이처럼 경제적 오작동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고 고르바초프 역시 급진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웃긴 건 정작 당시에 제일 필요하고 시급했던 개혁인 가격 개혁은 안 했다는 것이다. 국가 보조금으로 지탱되는 낮은 소비자 가격을 올리지 않고서는 재정을 구할 수도 없었고 경제 주체들이 효율화에 전념하도록 등을 떠밀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민생 개선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 상황에서 가격을 인상했다가는 개혁의 정치적 기반이 무너질 수도 있다며 끝까지 유보했고 대신 추진한 것이 국영 기업 전체에 대한 국가 감사였다. 그러나 이조차도 수많은 국영 기업 제품들이 납품 기준 미달로 통과하지 못하는 바람에 공급 사슬 작동 자체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이는 고르바초프가 기초적인 거시 경제 이해도 없었다는 걸 방증한다.


이외에도 고르바초프는 개별 사업체에게 자율성을 부과하는 정책도 펼쳤는데 이는 과거 소련 초기 중앙집중 관료제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레닌 시기부터 도입한 방식이었다. 조합원들은 필요한 만큼 오래 노동력을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개인 기업처럼 운영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기존 조합들은 여러 제약 사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신생 조합은 상업 부동산 시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어떤 부동산을 이용할 것인지 등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했다. 고르바초프는 서구에 대한 환상이 있었지만 본인이 공산주의자라는 자각은 남아있어서인지, 생산성 혁신 및 경영 효율화라는 새로운 시장경제 규칙은 익히려고 들지 않았으며 따라서 적절한 제도적 장치와 준비 없는 개혁은 경제적 재난만 더 키울 뿐이었다.

글라스노스트의 경우도 봐보면 정말 소련이 왜 무너지다 못해 관짝에 들어갔는지 바로 이해가 가능하다. 1987년 고르바초프는 "민주화"를 개혁 목표에 추가했는데 이건 자칫하다간 야당이 창당되어 더 이상 공산당만을 유일한 합법적인 정치 공간으로 있게 못하게 할 수도 있는 자충수였다. 이어서 실시된 1989년 인민대표대회 자유 선거에서는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발트 지역 공화국들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언론의 자유도 한쪽에서는 자유주의적 목소리를 키웠지만 또 다른 이면에서는 반유대주의, 국수주의, 네오나치 관련 운동들에 대한 기폭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글라스노스트 실시는 각 공화국들이 열정적인 민족주의에 압도당해 모스크바의 어떠한 지도에도 점차 반응하지 않게 되는 일의 발단이었다.


처음으로 소련 체제에 반기를 든 지역은 오늘날의 발트 3국이었다. 글라스노스트로 인해 공산당의 역사에 대한 독점이 풀리면서 발트 3국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동유럽 분할 협약이었던 몰로토프-리벤도르프 조약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소련의 점령 후 대대적인 숙청 작업과 발트 출신 반체제 인사들의 투옥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쏟아졌다. 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된 분리주의는 곧 바로 인접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로 불이 붙어버렸다. 또 한편에서는 소련의 점령 이후 묻혀있던 각 민족끼리의 원한 관계가 부활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골치 아픈 지역은 러시아 남부의 캅카스 지역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다투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그 주인공이었는데 볼셰비키가 들어온 이후 두 민족의 갈등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봉합된 것에 불과했고, 때마침 글라스노스트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니 폭발한 것이었다.


먼저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자기들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가 불만이었다. 반대로 아르메니아인들은 소련과 터키가 맺은 카르스 조약의 결과로 아르메니아계가 다수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이 아제르바이잔에 귀속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고르바초프가 개방한 표현의 자유 덕분에 이 얘기를 공개적으로 꺼내는 것이 가능해졌고 수면 아래 묻혀있전 민족들 간의 증오 감정은 다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분쟁의 발단은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공산당이 아르메니아 SSR로 귀속을 결정하고 그들이 수락한 것이 시작이었는데 이 일을 시작으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 대규모 폭동 사태가 벌어진다. 소련군이 진입하여 사태를 간신히 진정시켰지만 두 민족은 서로 모스크바가 상대의 편을 들어준다며 비난하며 사실상의 전쟁 상태로 돌입했다. 더 큰 문제는 이 흐름이 옆 지역인 그루지야에도 번지는 바람에 여기서도 압하지야, 남오세티야 등 소수민족들이 조지아로부터의 분리 및 러시아로의 귀속을 주장하며 소요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여기에 해결책을 내놓긴 했었다. 자신은 브레즈네프와는 달리 무력 사용을 안 하는 지도자라고 자부하던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모스크바의 권한 상당수를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게 만들었다. 분리주의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던 공화국들, 대표적으로 중앙아시아 지역 공화국들이 자치권 확대를 보고 독립을 괜찮은 선택지로 고려하게 만든 것이었다. 즉 중앙아시아 지역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러시아인들의 은근한 무시를 받으며 살아왔는데 고르바초프의 이 조치로 마침 독립한다면 주권 국가의 대통령이자 민족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얻게 해준 셈이다. 실제로 보면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투르크메니스탄의 니야조프 등 중앙아시아 신생 독립국의 초대 지도자들은 죄다 공산당 지역 지도자 출신들이다.

소련의 내부 체제가 저렇게 무너지고 있다 보니 외부 공산권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1956년의 흐루시초프나 1968년의 브레즈네프와 같은 무력 사용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자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의 시민들은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동유럽 국가들은 1980년대 이래로 소련의 막대한 에너지 지원과 서유럽 국가들의 차관이 아니면 경제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태였는데 문제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그 빚을 갚아줄 능력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소련 입장에서는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해 역으로 동유럽 지원을 줄여야 할 판이었다. 이 상황에서 동유럽 공산당의 통제력은 심각한 수준으로 약화되었다.


구 공산권 붕괴의 책임 역시도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서 소련이 모든 영향권을 상실하는 데 순순히 동의하는 대참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건 서구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으로, 당연하겠지만 소련 지도자가 순전히 이상주의만 바라보고 공산권 전역을 포기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것도 그 동유럽 위성국들은 나치를 분쇄하는 과정에서 소련인 2,700만명의 희생으로 얻는 "값진 땅"이었으니. 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마 고르바초프는 이때 국내 상황이 개판났으니 차라리 국제무대에서 성공하여 국내 문제를 덮자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또 거기다가 고르바초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반감을 느꼈던 사람인만큼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거고 대신 차라리 소련을 서구 문명에 복귀시키자는 이상한 망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와중에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 문제 처리에서 러시아 역사상 가장 최악으로 남을 결정을 해버렸다. 당시 독일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제로 냉전 이후 시대를 설계할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과거 스탈린이 냉전의 판도를 설계하면서 루즈벨트, 처칠과 체스 게임을 벌인 것처럼 고르바초프도 그래야 했으나... 그는 정작 미국 부시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독일인의 자유의사에 맡겨야 한다"고 해버렸다. 오죽하면 고르바초프 본인보다 이 말을 들은 미국 측 대표단이 더 당황했을 정도였다. 고르바초프의 계산은 동유럽 문제에서 양보하면 그에 맞게 미국과 서구도 소련과 협력하며 경제 지원을 해줄 것이라고 봤지만 그게 불가능한 일인 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리하여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어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고 동유럽 공산권 진영이 붕괴되는 그 순간까지 소련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기껏 얻은 소득이라고는 나토가 동유럽이나 통일된 독일로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구두" 약속이 끝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통일 독일이 나토의 핵심국이 되고 이어서 동유럽 국가들 상당수가 나토에 가입 후 MD 체계에 스스로 들어오면서 최악의 악수가 되어버렸다.

철의 장막의 붕괴는 소련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까지도 증발시켜버렸다. 서구 여행의 전면 허용으로 수많은 이들은 공산당 고위 관료들만의 특권인 서구 관광에 나서서 미국과 서유럽의 밝은 풍경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결과 자유시장과 자본주의는 번영을 가져다 오지만 소련의 공산주의는 끔찍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열등한 체제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이 중심에는 훗날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보리스 옐친이 있었다. 1990년 공화국 선거에서 러시아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옐친은 곧 이어 러시아 SSR 대통령 직위에 몰랐고 공화국 내에서 징수한 세금을 소련 정부에 전달하지 않았다. 러시아 SSR은 소비에트 연방의 핵심 공화국으로 영토의 77%, 1989년 기준 전체 인구의 51%, 순재화 생산량 5분의 3을 차지하는 지역이었는데 당연히 러시아 SSR이 이렇게 배째라 식의 태도로 나오면 연방의 유지는 힘들어질 것이고 내부에서는 자연스럽게 고르바초프의 소련 정부와 옐친의 러시아 정부로 불안정한 "이중 권력" 구조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소련은 더 이상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1991년 3월 소비에트 연방 존속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전체 투표자의 77%가 "동등한 주권을 가진 공화국으로 구성된 새로운 연합"을 지지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주권국가연합(CIS)의 모체이며 고르바초프는 옐친으로부터 소련을 구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카자흐스탄 공산당 서기 나자르바예프를 만나 신연방 조약 체결을 논의했다. 만약 성사되었다면 연방이 유지되는 선에서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주권" 공화국에 광범위한 자치권이 부여될 것이고 공산당의 권력 독점이 무너졌을 것이다. 어쨌든 9개 연방 잔류 공화국들은 회의 결과 "소비에트 주권 공화국 연방"을 설립하는 조약을 합의했지만 옐친의 압력으로 연방은 연합의 의미로 변한 것은 물론 그 합의 와중에도 우크라이나 SSR과 카자흐스탄 SSR 등의 공화국들은 자기 지역 내 소비에트 기능을 막후에서 조용히 계속 탈취하며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연방 유지를 위한 최후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사건인 1991년 8월 쿠데타가 벌어졌다. 소련 공산당 보수파인 겐나디 야나예프, 드미트리 야조프, 세르베이 아흐로메예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계획 자체가 어설펐던데다가 이미 서구의 단맛을 본 시민들이 격렬히 저항하면서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이 과정에서 옐친은 러시아 SSR의 영웅으로 급부상한 것은 물론이고 그가 공화국 영토 내 공산당 활동을 중지시키면서 연방 존속 가능성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이 입게 되었다. 한편 우크라이나에선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90%가 독립에 찬성하면서 분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미국의 허버트 부시 대통령은 이에 소련 존속 지지를 표명하며 "자멸적 민족주의"에 경고했으나 의회의 압박과 우크라이나 측의 로비로 물러나며 소련 내 공화국들의 독립을 막는 외부의 변수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식물 대통령이 된 고르바초프가 사임한 이후인 1991년 12월, 벨라베즈스카야 숲에서 각 공화국들의 정상들이 모였다. 회의의 참석자는 우크라이나의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벨라루스의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 등으로 이날 소련의 해체가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독립국가연합(CIS)이며 이로써 70년 동안 존재해온 인류 최초의 거대한 사회주의 실험은 고르바초프와 옐친 두 인물에 의해 총 한 발 쏘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탄생한 러시아 연방은 소련을 계승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크렘린에는 낫과 망치 대신 삼색기가 대신 걸리게 되었다.

연방 붕괴 이후로도 소련 해체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했었다. 구 소련 내부에 쌓여있던 모순이 폭발한 결과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독립하자마자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중앙아시아 지역 역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지에서는 각각 나자르바예프, 카리모프, 니야조프-베르디무하메도프 같은 지도자들이 몇십년이나 장기 집권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 역시 소련 해체의 충격타를 그대로 맞았던 탓에 1990년대 동안 경제 불황에 시달려야 했으며 옐친의 무능을 본 러시아인들은 대안으로 푸틴을 선택하게 되었다.


또 내부적으로 체첸 전쟁으로 큰 곤혹을 치러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더 넓게 보자면 남오세티야 전쟁, 유로마이단 사태, 크림반도 합병 및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CIS 권역의 최근 사건들은 모두 구 소련 붕괴 속의 혼란과 후유증이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시작점은, 뭐 전적은 책임은 아니지만 고르바초프의 이상주의와 성급한 개혁이 불러낸 참극이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고르바초프조차도 자신의 급진적인 페레스트로이카보다는 민주화를 용납하지 않았던 중국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 더 옳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고르바초프의 개혁 모델은 조금도 재평가할 여지가 없는 대실패이자 러시아 입장에선 최악의 참극을 불러온 방향성이라 봐도 무방하다.


참고 문헌:


임명묵,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프시케의숲, 2023

쉴라 피츠패트릭, <아주 짧은 소련사>, 롤러코스터, 2023

블라디슬라프 주보크, <실패한 제국 2>, 아카넷, 2016

마이클 돕스, <1991: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모던아카이브, 2020

이홍섭, <소연방의 경제개혁과 체제변동: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초프 개혁의 비교>,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 40(1), 2000

최태강, <고르바초프의 국내정책과 외교정책의 연계>, 슬라브학보 제9권, 1994

김남섭,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냉전 체제의 종식>,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9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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