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과거사 청산의 롤모델로 꼽히는 국가는 보통 독일과 프랑스다. 특히 프랑스는 과거사 청산이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이를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한국과 비교하면서 부럽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최소한의 친일파 단죄도 못한 한국 입장에서는 비시 프랑스 최고위급 인사들에게 줄줄이 사형선고를 내리고 약 10만 명의 대독 협력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프랑스가 부러워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의 사례는 부역자 숙청이 엄격하고 단호하고 철처했다는 성격 때문인지 일본에게는 독일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프랑스를 본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과연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과 우리나라의 친일파 문제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것이 애초에 프랑스의 경험과 우리의 경험이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지배 및 점령의 성격, 지배 기간의 차이부터가 완전히 달랐는데 일본은 조선을 명백히 식민지로 점령하고 있었지만 1940년에 나치 독일을 프랑스를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식민지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는 독일보다도 훨씬 큰 식민제국을 가지고 있었으며 독일은 이를 딱히 건들지 않았다. 대신 자국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1942년 11월 이전까지는 적어도 독일군은 프랑스 영토 전체를 점령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남쪽 절반 지역은 비시 프랑스 정부가 통치했다. 나중에 후술 하겠지만 비시 프랑스는 일반적인 괴뢰 정권하고는 성격이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에 비해 일제는 우리를 36년간이나 지배했지만 나치 독일은 1944년까지 단 4년만 프랑스를 점령했을 뿐이었다. 점령기간이 길수록 협력자가 증가할 것이고 협력의 조건 자체 및 동화의 정도, 체념과 순응의 정도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1944~1945년에 두 나라의 해방된 방식과 양상은 완전히 달랐다. 우리의 해방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갑자기 이루어졌지만 프랑스는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이듬해 5월 8일 독일의 항복에 이르기까지 여러 달에 걸친 전투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해방 과정에 프랑스 국내의 레지스탕스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것인데 반대로 우리는 광복군을 비롯한 무장세력이 해방 과정에 전혀 개입하지 못했다. 그러니 프랑스가 해방 후에 대독 협력자 숙청을 벌이기가 우리보다 훨씬 더 조건상 유리했고 우리는 반대로 매우 어려웠다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방식은 마냥 깔끔하지도 않았다.
페탱 원수와 히틀러 한동안 프랑스인들이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했던 흑역사인 비시 프랑스는 1940년 6월 패전에서 출발했다. 6주 만에 심각한 패배 위기에 몰린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던 페탱을 중심으로 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정식으로 "휴전"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이 휴전협정으로 프랑스 영토의 북부 절반 이상이 독일군의 점령에 들어갔고 그래서 남부의 프랑스 정부의 수도는 비시가 되어 "비시 프랑스"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비시 프랑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일반적인 괴뢰 정권과는 성격에서 좀 차이가 있었다. 물론 괴뢰 정권과 달랐다고 해서 온전히 주권을 행사하거나 나치에 협력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처음부터 끝까지 협력했고 주권을 점점 잃어가는 쪽이었다.
애초에 비시 프랑스는 독일 당국이 세운 꼭두각시 정부와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프랑스인 스스로가 세운 정부에 가까웠다. 정부 각료 선임도 초기까지는 독일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았으며 "비시 체제"의 성립은 휴전협정 발효 후인 1940년 7월 10일 국민의회 투표로 결정되었다. 그날 비시에 모인 상, 하원의원들이 찬성 596표, 반대 80표, 기권 17표로 페탱 원수에게 비시 프랑스의 권한을 위임했다. 즉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비록 공화정의 자살을 선택했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 자체는 어쨌든 합법적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프랑스혁명 이래 유지되어 온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덕목은 비시 프랑스가 내건 민족혁명 이데올로기의 "노동, 가족, 조국"으로 바뀌었다.
비시 프랑스의 국가적인 협력은 나치 독일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여 유럽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페탱 원수의 판단에서 나왔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휴전협정을 통해 엄청난 액수의 독일군 주둔비용을 낮추고, 프랑스군 포로를 송환받고, 점령지역과 자유지역 사이 분계선의 장벽을 낮추고, 더 나아가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이 목표였다. 중장기적으로는 어차피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둘 테니 그리하여 독일이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의 유럽이 탄생할 것이고, 그러한 유럽 질서에서 프랑스가 서열 2위를 차지하기 위해 독일을 밀어주자는 것이었다. 물론 정작 독일은 협력이라는 대등한 파트너 사이의 관계를 고려조차 하지 않았으며 히틀러는 비시 프랑스에게 협력의 대가로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양보할 의사가 없었던 것은 함정이지만.
프랑스 공산당원에서 친독 파시스트로 전향한 인사인 자크 도리오 그리고 한편에서 비시 프랑스 내부에는 페탱 원수의 국가적 협력에 반기를 드는 극단적인 협력행위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공산당에서 전향한 자크 도리오와 사회당에서 탈당한 마르셀 데아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이들은 프랑스 인민당, 인민민족연합이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창당하여 적극적인 친독주의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선전을 벌이는 언론인들과 문필가도 있었는데 로베르 브라지약,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 등이 존재했다. 이러한 협력주의자들은 비시 프랑스를 너무 미온적이라 비판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적대감 및 반공주의는 같이 공유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페탱 원수가 추구한 국가적인 협력은 실패했다. 어떻게든 줄을 서보려 했음에도 히틀러는 주권 문제에서 양보하지 않았고 1942년 11월에 연합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지역에 상륙하자 독일군은 재빨리 비시 프랑스의 자유지역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후부터 독일 측의 요구 수준은 점차 가혹해지는 것에 비해 보상은 갈수록 줄어들었으며 애초에 전혀 괴뢰 정권이 아니었던 비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질수록 말기에 가면 괴뢰의 수준에 가까워졌다. 비록 페탱 원수는 기회주의자가 아니었고 피에르 라발처럼 독일에 붙어 출세할 의도도 전혀 없는 고전적인 애국자에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그가 온전한 주권 회복이라는 이상을 위해 나치 독일에 대한 국가적인 협력을 추구한 것은 전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을 넘어 패전 후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던 그를 나치의 부역자라는 오명을 얻게 만들었다.
1944년부터 프랑스는 연합군의 상륙과 함께 점차 해방되기 시작했는데 대독협력자들에 대한 처벌이 제일 먼저 이루어진 장소는 재판소나 징계위원회가 아니었다. 바로 거리나 숲 속에서 부역자들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이후 사법적으로도 부역자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에 앞서 먼저 시작된 것은 초법적인 숙청이었으며 규모는 전국 단위였다. 특히 해방이 되자마자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일반 주민들은 여성 부역자들을 체포한 다음 머리를 강제로 깎이고, 때로는 옷을 찢거나 구타하고 그러한 상태로 거리로 끌고 다니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행위를 전국 곳곳에서 벌였다. 이는 1944년부터 1946년 초까지 15세 이상의 모든 연령대와 거의 모든 직업의 여성 약 2만 명이 그러한 응징을 당했으며 10만 명 이상이 거주한 도시에서 유독 심했다.
삭발식에 끌려간 프랑스인 여성들 그리고, 단순히 독일군과 애정관계 혹은 성관계를 가진 여성만 저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종류의 대독협력 여성들이 그러한 삭발을 당했다. 역사가 파브리스 비르질리의 분석에 따르면 관계가 차지하는 비율은 57%, 경제적 협력 20%, 정치 혹은 군사적 협력 11%, 밀고 9%였는데 이게 다 삭발의 사유였다. 이러한 삭발식은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해방일에 이르는 몇달 동안 숲에서 7,981명을 약식처형한 이후인 해방일 다음부터 진행되었다. 당국의 저지는 이미 삭발식이 끝난 후에야 진행되었지만 정작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삭발식을 벌이고 다니는 동안 도(혹은 시) 해방위원회 간부, 공화국 지역위원, 레지스탕스 출신의 새 권력기구 대표들은 이러한 행위를 대부분 묵인하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따라서 광란의 삭발식은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엄연히 정부 차원의 폭력이었다.
한편 사법적 숙청이 시작됨에 따라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던 페탱 역시 본인 스스로 프랑스에 입국해 체포되어 재판대에 서게 되었다. 1945년 7월 23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검사 측은 페탱의 사적인 문서들을 포함한 비시 프랑스의 중요한 문서들 다수는 한번도 참조하지 않고 고발장을 페탱의 공화국 전복 음모에 초점을 맞췄다. 모르네 검사에 따르면 전쟁 이전부터 페탱은 공화정 타도를 추구하는 극우 조직 "카굴"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해 라발 및 베강과 음모를 꾸몄으며, 휴전협정 체결 결과와 7월 10일 전권 위임 투표 모두 그러한 음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음모론은 제3공화국 주요 정치인들이 재판대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거짓으로 밝혀졌고 결국 모르네 검사 측은 1940년 7월 11일 이전 페탱의 범죄행위를 입증해내지 못했다.
페탱을 상대로 한 검사의 고발장은 공화국 전복 음모 외에도 대통령 선거 폐지, 카굴과 그 밖의 반체제 집단과의 연관성, 패전 상황에서 반역적 정책을 취한 것, 독일과 비슷한 법률을 프랑스에 입법한 것, 망명자들을 독일에 넘긴 것, 독일에 물적 및 인적 자원을 제공한 것, 인도차이나를 일본에게 넘긴 것 등의 죄목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고발장의 절반이 페탱의 공화국 전복 음모 및 히틀러, 프랑코와 공모했다는 내용이었지만 검사는 증거를 못 찾았냈고 이에 보다 못한 변호인 파얭이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때 모르네 검사의 답변은 실제 음모가 두드러졌다는 것은 아니고 음모 이전의 검토 수준을 말했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그 후에 검사 측은 마지못해 공화국 전복 음모를 죄목에서 제외했다.
1차 세계대전의 영웅에서 전범이라는 오명을 쓰는 상황까지 추락했던 필리프 페탱 원수 그렇게 되어 남은 죄목은 프랑스가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고 영국과의 약속을 깨트렸느냐의 여부, 그리고 비시 프랑스가 1940년 7월 10일 투표에서 공화국에의 쿠데타를 벌였다고 볼 수 있느냐의 여부였다. 검찰 측 증인은 정전협정 자체를 반역행위로 규정하였지만 정작 적법한 국가 행위라는 증거만 쏟아졌다. 변호인 측은 프랑스가 분명히 패전하였으며 정전협정 때문에 정부가 유지되고 북아프리카와 식민제국이 독일에게 넘어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독일이 독일군 2명 살해의 보복으로 민간인 인질 100명을 죽이겠다고 선언했을 때 페탱이 히틀러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자신이 인질이 되어 제일 먼저 처형당하겠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독일로 보낸 인적, 물적 자원 수준이 나치 점령 하의 유럽 전역에서 가장 적은 수준이었던 것, 유대인 추방 또한 가장 적었음을 상기시키며 변론의 내용을 덧붙였다.
재판 방식도 형식과 절차를 중시하는 영미식 사법절차와는 차별화되는 매우 프랑스러운 것이었다. 증인들은 판사의 제지를 거의 받지 않고 말을 길게 늘어놓을 수 있었으며 주재 판사는 보통 "아는 것을 우리에게 들려주시죠"하는, 많은 말을 권장하는 듯한 태도로 증언 시작을 지시했다. 아주 짤막한 통고만으로 증인이 소환되었고 때로는 자신들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는 할 말이 있다는 요청을 받아들여 증언이 이루어졌다. 배심원들은 증언을 가로막고 증인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고 특히 증인이 피고에 유리한 듯한 늬앙스를 말을 하면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당연히 재판은 이른바 "답정너"식이었으며 페탱의 진짜 혐의를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닌 그를 역사의 심판 대상으로 오로지 단죄하기 위함이었다.
1945년 8월 14일 재판이 끝나고 판사들이 숙의에 들어갔을 때 배심원 중 하나이자 좌파 인사였던 페트뤼스 포레는 페탱의 국내 정책은 반동적이고 보수적이었다고 비판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재판은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정치 재판의 전형이라며 혐오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포레는 페탱이 프랑스를 배반하지 않았으며 고등법원이 페탱이 정적들인 특성상 공정한 재판이라고 볼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또 숙청 과정은 비이성적으로 이루어졌고 언론은 페탱에 불리한 기시만 쓰도록 통제되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비밀 투표 결과 사형 찬성 14표, 반대 13표가 나왔고 대신 고령이라는 특성과 드골의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집행연기가 결정되었다. 이후 페탱은 종신형을 감형받고 일드와라는 대서양의 작은 섬에 실려갔다가 그곳에서 1951년 7월 23일, 97세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되었다.
비시 프랑스 정권의 2인자 피에르 라발. 이 사람은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사실상 이완용 취급을 받고 있다. 비시 프랑스의 2인자이자 의무노동제 도입, 레지스탕스에 대한 잔혹한 진압으로 악명 높은 부역자였던 피에르 라발에 대한 재판도 그가 쓰레기인 것과는 별개로 과정은 문제가 많았다. 예심은 급속히 처리되었고 라발의 변호인단은 선거 전에 재판을 끝내려는 것에 대한 항의 표시로 공판 첫날부터 참석을 거부했다. 특히 라발의 거침없는 변론에 분노한 일부 배심원들이 라발을 죽이라고 소리 지르고 난동 부리면서 라발이 퇴정되어 마지막 이틀간의 재판은 피고도, 피고 측 변호인도 없이 진행되었다. 너무 뻔하게 예상대로 라발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그는 사형 직전 음독 자살을 시도했다가 강제로 위세척을 당한 후 처형대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가벼운 부역자 색출 과정에서는 6만 9,000여 명이 법정에 서 4만 9,000여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이 중 무려 4만 6,000여 명이나 공민권을 박탈당했다. 공민권이 없으면 공직 추방과 참정권 상실, 변호사 교사 회사 대표 취업 금지 등 14가지 제약을 받게 되니 사실상 비국민 취급당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독일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이 20만명은 '기생충'으로 불리며 한동안 프랑스 사회에서 손가락질 대상이 됐다. 부역자재판소에서 총살당한 사람 중 페탱 못지 않게 논란이 많이 된 인물은 문학가 로베르 브라지약이었는데 오죽하면 대독 협력자 청산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좌파 지식인 알베르 카뮈가 직접 탄원서를 제출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요구는 거부되었고 2월 6일 브라지약은 총살되었다. 더 웃긴 것은 글로 확실하게 증거가 남은 문인들은 비교적 숙청되기 좋은 상황이었지만 정작 재계의 기업가들은 기준이 모호했던 탓에 대부분 관대하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프랑스의 대독협력자 숙청은 당시 프랑스인 116명 중 1명꼴로 부역자 혐의를 받을 만큼 규모가 컸다. 대략 12만 명 이상이 재판을 받았고, 그 중 9만 8,000명이 실형을 선고 받았으며, 약 3만 8,000명이 수감되었다. 또 약 1,500명이 재판 끝에 사형당했고, 8,000~9,000명이 재판 없이 총살되었으며, 약 2만 명의 여성 부역자가 삭발당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게 숙청은 전혀 공정하지 않았다. 숙청은 극히 불균등했으며, 처벌의 수위는 책임 정도에 비례하지 않았는데 일례로 언론인, 문인들이 공무원, 기업가들보다 더 강하게 처벌받았다. 그나마 처벌받은 공무원들도 지시를 내린 상급공무원보다는 지시를 집행했을 뿐인 하급공무원이 더 무겁게 단죄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며, 이 당시 프랑스의 과거 청산에 대한 회의 여론이 다름 아닌 프랑스 국내에서 생겨나고 있다. 1945년 당시에는 페탱을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 수치는 1950년대 이후 계속 하락하면서 1983년에는 31%가 처벌이 잘못되었다는 쪽, 또 다른 31%는 중립이 나왔다. 1994년 11월 조사에서 페탱 원수에 대한 평가는 프랑스를 배반했다는 의견이 22%, 선의의 오판자였다는 의견이 24%, 프랑스 이익을 수호하고자 했다는 의견이 30%로 나오며 점점 그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물론 그럼에도 2018년 마크롱 대통령이 페탱 원수를 영웅이라 치켜세우는 발언을 했을 당시에 프랑스 국내에서 논란이 일어나는 등 여전히 비시 프랑스 문제로 반감을 가진 사람도 적잖게 있지만 과거에 비하면 이것도 많이 나아진 것이다.
이처럼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은 마냥 본받을 만한 사례가 아니다. 애초에 36년 동안 지배당한 한국과 4년 동안 반(半) 괴뢰국이었던 프랑스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도 웃기지만 그걸 다 떠나서 프랑스 과거사 청산은 잔인하고, 만만한 놈 골라서 때리면서 대리만족하는 용도의 화풀이에 불과한 수준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프랑스는 어디까지나 나치 독일 밑에 자국이 지배당하던 시절 안에서 과거사 청산을 한 거고, 자기들이 외부 세계인 알제리나 베트남 등에서 저지른 식민지배나 악행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성도 없는 나라다.
참고 문헌:
이용우,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역사비평사, 2008
존 래프랜드, <나는 죄 없이 죽는다: 승자가 패자에게 강요한 정치 재판의 역사>, 책보세, 2009
이용우,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 푸른역사, 2015
박지현, <비시 프랑스, 잃어버린 역사는 없다>,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3
임지현 외, <대중 독재: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 책세상, 2004
이안 브루마, <0년: 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 글항아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