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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Feb 01. 2024

소비에트 작전술 - [完]: 소련군에서 러시아군으로

대조국전쟁 이후부터 소련 붕괴까지

https://youtu.be/VTzHj-R9McA?si=bjEacllIdwNVXIY-

소련군은 1945년 이후 교리와 편제에 있어서 4개의 구분되는 기간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45년 전쟁이 끝난 후부터 스탈린이 죽는 1953년까지의 기간으로 이때 소련은 부대의 일부를 해산했지만 전쟁 기간에 발전된 전술적, 작전적 교리와 편제를 계속 동일하게 유지했다. 두 번째는 1953년부터 1967년까지다. 이 시기는 소련의 지상군이 핵 무장 부대에 의해 뒤로 후퇴했다. 이 기간 중, 소련 육군은 규모가 축소되고 제병협동의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고 핵 공격에서 살아남아 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전차 위주의 부대를 선호했다. 세 번째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인데 당시 소련은 지상군을 다시 재건하고 강력한 제병협동 기계화전을 수행하기 위한 준기를 했다. 마지막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경험과 다양한 신무기가 소련군의 구조에 영향을 끼친 1980년대 후반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은 핵무기가 없었고 따라서 자신의 기계화 재래식 부대를 유럽 우발 상황에 대비하여 개선하려고 했다. 그 당시 이것이 미국의 핵 독점 상황에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스탈린은 1948년까지 총 500개가 넘는 사단 규모의 부대를 대략 175개 사단으로 감소시켰다. 그러나 평화시 소련 육군의 사단급 기갑 및 기계화 부대는 이 기간 동안 사실상 39개에서 65개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전쟁 당시 전차군단은 전차사단이 됐고 기계화 군단은 기계화 사단이 됐다. 각각의 새로운 사단 구조는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반영하여 전차, 자주포, 보병, 포병, 그리고 방공을 연대 수준에 통합시켰다.


동시에, 소련군은 남은 소총병 사단(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을 차량화시켰다. 1945~1949년 부대 해산으로 인해 남은 부대 모두를 수송차량과 함께 완전히 무장시켰다. 소총병 사단에 인가된 트럭 수는 1944~1946년 간 세 배로 증가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최초 유치한 모습의 소련 장갑수송차량은 BTR-152 시리즈로 1945년 말부터 생산되었지만 전차사단의 차량화 소총병연대의 경우는 195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트럭에 탑승했다. 결국 공업생산능력을 되살린 후에야 모든 보병을 장갑수송차량에 탑승시킬 수 있었다. 파편과 소구경 화기로부터 일부 방호력을 제공하는 트랙화된 BTR-50부터 이내 많은 수의 BTR-60 시리즈도 생산되었다. 트랙 차량은 생산 및 운용 비용 문제와 차륜 차량보다 속도가 더 느렸다는 점 때문에 결국 소련군은 트랙 및 차륜 인원수송 차량을 혼합하여 유지시켰다.

게임 아르마 3로 재현한 냉전 당시 소련군. 참고로 저 군복은 공수부대 중심으로 보급된 KLMK 위장복이다.

1963년 모든 소총병 사단은 어느 종류건 장갑차량에 탑승했으나 정작 너무 성급하게 매우 커다란 차량으로 표준화했다. 각 BTR은 반개 소대를 운반했기 때문에 정비에 문제가 있거나 전투에 손상을 입으면 전체적으로 소대급 전투 효과가 감소됐다. 이러한 기계화는 소련 교리의 커다란 변화 배경에 따라 나타났다.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재래식 지상부대가 국가 전략에 덜 중요하다는 입장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추세는 1959년에 최고에 달했다. 이러한 개념의 변화 중심에는 주코프와 소콜로브스키 원수가 있었으며 그는 1952~1960년까지 총참모장을 지내면서 핵전쟁의 현실 속에서 지상군을 개조하여 이에 적응시키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부대는 지휘통제가 더 잘되기 위해 보다 규모가 작아져야 했고 핵무기의 효과로부터 방호를 받기 위해 장갑이 더 좋아져야 했다. 따라서 대조국전쟁 당시의 재래식 야포에 의한 공격준비사격은 급격히 감소했으며 대신 핵 타격으로 적의 방어를 박살 낸 다음 기계화, 기갑 위주의 부대를 전과확대 부대로 운용하자는 견해가 교리로 채택되었다.


1957년 8월 21일, 핵보유국이 된 소련에서 2단계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 발사되고 SSBN이 출현함에 따라 1959년 소련 정부는 전략 로켓군이라는 별도의 조직을 창설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전략 로켓군은 모든 조직, 즉 중거리 대륙간 탄도 미사일부터 두 개의 군사 대학, 수 개의 군사 교육기관, 과학연구소 및 기관, 그리고 2개의 미사일 및 우주 발사장을 갖추었다. 최초의 사령관으로는 포병 원수 네덜린이 임명되었으며 특히 흐루시초프 시대에는 전략 로켓군이 전통적으로 소련군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던 지상군을 밀어내고 중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던 시기였다. 실제로도 1960년 1월 소련 최고 소비에트 제4차 회의 연설에서 흐루시초프의 발언에 따르면 그는 핵무기와 미사일이 현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 수단이라고 강조하면서 많은 종류의 재래식 무기들이 빠르게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말미에는 소련군이 3분의 1로 감축(수치상으로는 360만에서 240만으로)돼도 전투력은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무기의 화력은 병력 감축을 대체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편제 영역 개편을 살펴보면 주코프는 소총병 군단 본부, 다루기 힘든 기계화 사단, 걸어서 이동하는 소총병 사단, 그리고 아직 잔존하던 기병부대들을 없앴다. 이로써 차량화 소총병 사단이 기계화 및 소총병 사단 모두를 대체하게 되었으며 1958년까지 단지 세 가지 형태의 사단만이 소련 부대 구조 속에 남게 됐다. 바로 전차, 차량화 소총, 공정 소총병 사단이 그것이었다. 1943~1945년 당시 커다랗고 다수의 군단을 보유한 야전군과는 대조적으로, 제병협동군이 2개 또는 3개의 차량화 소총병 사단 및 1개의 전차사단으로 편성됐다. 전차군은 3개 또는 4개의 전차사단을 보유했으며 미사일을 장비한 포병과 방공부대들이 소련군의 재래식 야포를 대체했다. 다만 새로운 장비의 유입과 군의 전체적인 규모 감소가 그렇다고 모든 부대의 차량화를 의미하진 않은 게, 예외가 공정사단이었다.

냉전 시절 소련군 장비들

1960년대 초, 신속한 돌파와 종심전투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소련군 지휘관들은 제한된 규모의 공중기동성 운용을 검토하게 됐다. 1951년 초 스탈린은 24명을 수송할 수 있는 헬기를 설계하라고 명령했고 이 설계가 성숙될 무렵 헬기 수송에 대한 옵션 및 교리가 발달되기 시작했다. 헬기는 낙하산 투하 작전에 만연되는 문제인 병력 분산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지만 초기 소련군은 이러한 종류의 작전에 지상부대를 운용하기보다는 헬기 수송을 재래식 차량화 소총병 대대의 추가적인 임무로 국한했다. 장갑차량을 뒤에 둔 채로, 이러한 대대들은 대전차, 방공, 포병 및 공병부대를 배속받아 적의 후방으로 투입되기로 되어 있었으며 결국 착륙지대에 헬기는 대대 특수임무부대와 남아 있다가 필요시 추가적인 전술적 기동성을 제공하는 것이 표준적인 운용 모습이 되었다. 다만 무장헬기는 수송헬기를 에스코트하는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와 함께 흐루시초프 시대 동안은 전체적인 제병협동 개념이 당시 소련군에서 미래의 전쟁을 핵전쟁이라고 결론 내리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즉 이 시기에 소련군은 지상군을 일반적으로 핵 타격 후에 잔적 소탕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특히 보병과 재래식 포병은 당시 편제 속에서 규모가 감축되었는데 일례로 1947년 당시 표준적인 기계화 군은 2개의 전차 및 2개의 기계화 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이 사단 안에 있는 기동 연대들은 보병부대 통합에 따라 군 안에 총 34개의 차량화 또는 기계화 보병대대가 있었다. 반면에 1958년 전차군은 단지 4개의 전차 사단으로 편성됐고 차량화 소총병 대대는 편성에서 제외됐다. 이 차량화 소총병 대대들은 이전에 전차 연대에 소속되어 있었던 대대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전차군은 단지 12개의 보병대대만을 지니게 되었다. 전략 로켓부대를 강조한 흐루시초프 특성상 소련군의 재래식 부대들은 주목을 크게 받지 못한 채 전체적인 전투력과 각각의 편성의 규모가 전쟁 후 최저 수준인 140개 사단으로 저하됐고 각 사단의 규모는 소규모로 편성됐다.


그러다가 1964년 흐루시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축출된 이후부터 소련군에서 다시 변화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유연반응전략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움직임으로 이 교리는 가능한 분쟁의 전체 스펙트럼 속에서 전투할 수 있는 부대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게릴라 전에서부터 완전한 재래식 전쟁, 그리고 핵전쟁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해 소련군 장교들은 재래식 제병협동전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고 특히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독일과의 전투를 치르면서 벌어졌던 군사적 실책들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소련군 지휘관들은 기동단과 전방분견대라는 소련이 기계화 전과 확대 및 추격을 수행하는 요체 개념에 주목했는데 비록 기동단이라는 용어 자체가 완전히 기계화된 소련군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았지만 그 기능은 재래식 소련 전술과 연관성이 컸다.

소련-아프간 전쟁에서의 Mi-24 헬기

소련군 편제는 이러한 교리적, 역사적 관심을 반영했다. 1970년대 소련군 전차연대는 기계화보병과 재래식 포병대대를 보유했다. 이 부대들은 주코프 시대에 사라졌던 부대들로 여기서 아마 매우 중요한 사항은 일부 소련군 사단들이 "새로운" 편성부대인 독립 전차부대를 보유했다는 것이다. 서구 측에서는 이것을 순수한 전차 대대로 보았고 사단장의 추가적민 예비대로 생각했다. 그러나 대조국전쟁에 소련이 새롭게 관심을 가졌다고 본다면 독립 전차대대는 모든 미래 전과 확대 및 추격 작전을 위해 특수하게 편성된 전방 분견대의 핵심 부대였을 것이다. 따라서 흐루시초프 실각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소련은 제병협동 전투의 교리 및 편제로 다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서 기계화 발전을 위한 10년을 잃어버린 반면, 소련은 새로운 세대의 장갑전투차량을 개발했고 오래전부터 유지되어 온 종심전투 그리고 기계화 제병협동 교리를 완전히 실행하기 위한 헬기를 발전시키게 되었다.


한편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에서 대전차 유도무기만으로도 막대한 수의 전차들이 파괴되는 일이 벌어지자 소련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총참모대학원이 발간한 책자는 보병의 대전차 교전능력의 효율적이고 급격한 향상과 기동화된 유도 미사일의 지속적인 발전으로 40년대 전장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전차와 전폭기의 결합은 결정적인 전술요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재미있는 사실을 여담으로 하나 더 말하자면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전략무기 제한협정(START-I)의 일괄 서명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상호관계 속에서 전략적 안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면서, 쌍방이 전략무기 제한협정을 통해 전략공격무기를 대응타격할 수 있는 적극적-방어적 대안을 최소한 10년간 협정 대상으로 삼았다는 성격이 다소 존재한다.


1970년대 전반기에는 1930년대 종심작전 이론의 창조자들에 의해 기초가 세워진 공격적 작전-전략 개념이 더욱 발전되었다. 파블롭스키 대장은 "소련 지상군의 수준 높은 전투력, 소련 지상군이 보유한 강력한 장거리 타격수단 그리고 모든 전투조직의 기동성의 급격한 향상은 향후 종심공격 작전의 이론과 실제의 수행을 위한 유리한 조건을 조성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지상군은 다른 군종과 상호협조 하에 자신이 보유한 수단으로 적의 전체 작전의 종심에 화력타격을 가하고 대조국전쟁의 마지막 단계보다 더 빠른 템포로 더 깊은 종심으로 전략적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다"라고 평가했다. 바레니코프 대장의 경우는 당시 증대하는 방자의 기동성과 기동력으로 작전적 예비와 전투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와 함께 전위대(독립연대급 및 사단급 부대)는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며, 광범위한 전선에 걸쳐 적의 후방에서 용감하고 결정적인 행동으로 공간지역, 중요한 목표, 교차로, 도로 및 적 철수로상의 장애물을 장악해 작전의 성공적인 전개를 위한 조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즉 공격작전의 성공 보장을 위해 기습의 의미가 강조되었다는 얘기.

1980년대 소련 전선군 체계

1970년대 중반에는 종심작전 이론의 발전에서 새로운 용어인 "입체작전"이 유르폴스키 중장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공격작전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방어지대를 통과하여 지상군 집단 일부를 공중투하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예비역 소장인 스미르노프는 지상군의 입장만으로 공격작전을 검토하는 것은 단편적인 고찰과 잘못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현대의 공격작전은 모든 군사력과 군종의 합동적이고 복합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며 입체작전 개념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결과적으로도 1970년대 말에 작전기동집단(OMG) 개념이 형성되었고 장비가 채택되면서 입체작전 이론 옹호자들은 패배했다.


4차 중동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소련군의 행보에는 주목할 부분이 있었다. 바로 실질적인 최초의 보병전투차량(IFV)인 BMP를 야전에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서구의 전차와는 달리 소련의 전투차량은 낮은 실루엣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방어 차폐진지를 잡기가 어려웠으며 이곳에서 적과 교전하기 위해서는 포신을 낮춰야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군이나 미 육군의 방어 전술을 모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많은 총안구를 가지고 있는 특성상 8명의 보병 분대가 차량의 측방 및 후방에서 사격할 수 있는 BMP가 배치된 것이다. 다만 이것은 또한 소형 포탑을 지녔으며 그 위에 단거리 포와 ATGM 발사대를 장착하였는데 BMP가 고속 대전차탄에 맞으면 취약했는 것도 모자라 지휘관의 해치가 포탑 옆에 있어서 시야까지 가렸다. 더욱이 이 차량은 느린 탓에 차세대 소련 전차 T-64나 T-72와 보조를 맞추기 힘들었다.


물론 BMP만 보병차량으로 존재하려고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소련군은 1개의 BMP 연대와 2개의 차륜 병력수송 장갑차 연대를 지닌 사단 편성에 높은 우선권을 부여했는데 여기서 차륜 병력수송 장갑차는 1978년에 소개된 BTR-70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지휘관들은 BMP를 고강도 분쟁에서 탑승 보병전투를 위해 필수도구로 고려했다. 그 외의 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소련 장비의 추가적인 변화라면 바로 전통적인 포병 견인야포와 곡사포를 대신해 자주포를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주포는 기계화 부대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무기였고 이러한 포들은 장거리 간접화력 그리고 단거리에서는 대전차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직사화력을 모두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미군의 베트남 전쟁 경험도 교훈으로 삼아 헬기 전력도 강화되었다. 1973년에 중갑화되어 8명의 보병과 강력한 포 및 미사일을 운반할 수 있는 기종인 Mi-24 헬기(Hind A)를 야전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이를 기초로 Mi-24를 Hind D로 재설계하면서 공격 헬기 전력 육성 의도를 내보인 것이 그 사례였다.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의 공수군 스페츠나츠

위에서 OMG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오가르코프를 중심으로 이 개념 다시 화자 된다. 이것은 종심 깊은 전과확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 편성 부대로 2차 세계대전 시 전차군과 기타 기동집단의 전통 속에서 OMG는 적 후방지역을 돌파하여 적의 방어를 와해시키고 기선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는다. 이러한 유형의 기동은 적 핵공격에 대한 소련의 취약성을 감소시키는 부가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고 OMG의 신속한 이동과 소련군 및 적 부대가 혼재된다는 사실은 적으로 하여금 전술핵무기 사용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표준적인 소련 전차와 차량화 소총병사단들은 앞서 말한 추가적인 무기들을 갖추며 더욱 강력해졌지만 정작 다목적 부대로서 전통적인 전술, 지휘 및 통제 면에서 융통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오가로코프와 기타 OMG 옹호자들은 종심작전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특수화된 기능 단위부대들을 발전시키기를 원했다.


이것은 1944~1945년 전차여단의 구조와 유사한 모습이었다. 이러한 편성은 사실상 야전군 수준에 작전적 기동집단을 두기 위한 토대를 만들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소련 육군은 더 나아가서 작전적 기동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영구적인 제병협동부대를 창설하고자 한 셈이었다. 공격헬기와 공중강습보병은 이러한 종심작전에서 주된 역할을 수행하며 공중강습은 작전의 전통적 사고에 수직적 차원을 더한 것이었다. 저런 부대들은 기계화부대의 적 전선 후방 깊숙이 원거리 전과확대를 용이힌게 할 의도로 운용되며 헬기는 고정익 전폭기보다 더욱 즉각 대응이 가능한 화력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공중강습 부대들은 도하 지점, 애로지역 그리고 기타 지상부대 전진을 방해하는 지역을 확보한다. 다만 새로운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헬기는 별도의 공군 부대 편성 하에 작전하는 대신에 육군부대에 통합되어야 했고 따라서 1980년대 동안 소련군은 공중강습여단을 대폭 확대한다. 이들의 구조는 대체로 4개 대대의 공정 소총병을 포함하고 있었고 대대 중 1개 또는 그 이상이 공중기동이 가능한 BMP의 자매 격 차량인 BMD를 가지고 있었다.


1979년부터 소련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장기 전투인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곳에서 소련은 다양한 공중기동 및 기갑여단을 실험했다. 이때 1982년 초부터 시작해서 소련군은 엘리트 공중강습 및 특수작전부대에 지나치게 의존했는데 이 부대들은 대대급으로 또는 이보다 작은 규모의 단위로 작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여기서 소련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그랬던 것처럼 전폭기와 특히 헬기의 화력에 크게 의존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프로그풋은 1940년대 이래로 최초의 소련 근접항공지원기로서의 역할을 실전에서 해냈으며 1980년에만 아프가니스탄 내 헬기 숫자는 10배나 증가했다. 그러나 반군인 무자헤딘은 노획한 대공 기관총과 SA-7 견착 대공미사일, 미국의 스팅어 및 영국의 블로우파이프 미사일을 획득해 사용하여 결국 소련군과 아프간 친소 정부군은 1987년 한 해 동안에만 150~200대의 항공기를 미사일로 인해 잃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군

소련의 군사사상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재래식 고정밀무기인 대전차, 방공, 대함 및 전자전 장비 파괴수단 등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가 1980년대 들어 전자전 역할에 대해 중요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더 강화되었다. 특히 해군이 적극적이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다양한 종류의 첩보수단을 비약적으로 다수 확보하게 된 것과 상당부분 관계가 있었다. 첩보수집 체계의 교란은 비록 단일 지휘부대라 하더라도 전투력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니 말이다. 지휘통치체제의 교란은 여러 제대가 군사장비를 직접 사용하는 것보다 더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지휘통제, 통신 및 정보체계와 수단에 대한 전자전 장비의 운용효과는 화력수단에 의한 타격효과에 뒤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새로운 재래식 초정밀 파괴무기의 발전 전망을 평가하면서 오가르코프는 전차와 항공기, 함정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에 의문을 제기했으나 정작 지상군에는 전반적으로 이러한 장비에 대한 과거의 시각이 지배적었으며 당시의 군사 지도자들은 전자전 수단에 당연히 쏟아야 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소련의 군사이론은 항상 소련의 실상보다는 앞서 있었다. 소련이 존재했을 때조차, 지휘관들은 계획된 것과 같은 기능을 갖는 새로운 부대를 위해 필요한 통신 및 컴퓨터 자산을 획득하기 어려웠다. 아프가니스탄과 기타 장소에서 초급 지휘관들의 기세를 높이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단과 여단은 높은 속도로 전과확대 작전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군단과 여단 지휘에 필요한 독립적인 판단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고르바초프 주도의 서구와의 화해 노력 시기에 편성된 소련 군사 관련 출판물들은 보다 가볍고, 방어적인 형태의 전쟁을 하자는 립서비스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군사 개혁의 노력이 지연되었을 뿐 끝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건 아니었다. 결국 소련 붕괴 이후 현실이 이론에 부합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신생 러시아 연방군은 소련 붕괴 직후 많은 최신 무기들과 부대, 시설들을 상당수 잃었으며 그 이후 러시아군은 병력과 장비를 거대한 부대구조의 일부분만이라도 보충하는데 쪼들렸다. 비선형적 전쟁과 정보전에 필요한 정교한 구조를 발전시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러시아군의 부대구조는 군, 사단, 군단 및 여단으로 뒤범벅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 Стрелковая дивизия은 엄밀히 따지자면 소총사단보다는 소총병 사단 혹은 보병사단으로 번역하는게 더 정확하다.


참고 문헌(시리즈 공통):


데이비드 M. 글랜츠, <독소 전쟁사 1941 ~ 1945>, 열린책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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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M. 하우즈, <제병협동부대 전술>, 연경문화사, 2013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지식의풍경, 2003

로버트 제비츠, <스탈린의 전쟁>, 열린책들, 2022

마크 힐리, <쿠르스크 1943>, 플래닛미디어, 2017

류한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붉은 군대 전투 역량의 실상과 허상>, 러시아연구소, 슬라브硏究 33(3), 2017

류한수, <“8월의 폭풍”에서 “사막의 폭풍”으로: 냉전 시기 미육군의 소련군 작전술 이론의 연구와 수용 과정>,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1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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