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6ZqWyXOM_Q?si=KZ4eCx1MsPgSB3DA
초기 소련군의 전략적 작전은 적에 대한 최초 타격 및 동원 완료 이후 수행해야 하는 전쟁 초기의 계획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서남전선군 및 서부전선군 좌익은 중요한 원료, 식료품, 특히 석유에 대한 독일의 접근을 차단하고 발칸 및 독일의 주요 동맹국들을 타격하기 위해 크라코프 방향으로 주타격을 가한다. 다음에는 북부 및 서북방향으로 적의 주요 부대집단을 섬멸시키고 폴란드와 동프로이센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공격을 전개한다. 서북전선군과 서부전선군 우익의 2개 군은 방어를 실시하다가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면 수발카 지역을 장악하고 브레스트 서부지역과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활동하는 적 부대를 견제하기 위해 인스탄부르크(체르냐홉스크), 알레쉬타인(올쉬틴)을 타격한다. 최초 공격단계에 서남전선군과 서부전선군 좌익 주력은 류빈스키-산도미르스크의 적 집단군을 섬멸시키고 5~10일간 공격하다가 다음에는 켈리체와 크라코프로 이동하면서 20~30일간 필리차강으로 공격하여 오데르강 상류로 진격한다.
소련군 지도부는 타격집단군의 편성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평시 전개지역 벨리스톡스키와 르봅스키 돌출부에 전투 장비를 잘 갖춘 기동부대를 배치했다. 이 배치는 곧바로 적을 포위할 수 있는 위치를 점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소련군의 공격작전의도에 부응했다. 한편으로는 적이 성공하는 경우, 이 두 개의 소련군 부대가 종심 깊은 포위 위협에 놓일 수 있다는 것도 지적되었다. 소련군 총참모부는 공세이전이라는 목표에서 출발하여 강력한 최초 타격을 보장하기 위해 제1제대에 전선군 주력을 집중하는 방안을 계획했다. 이러한 배치는 결정적인 목표를 가진 강력한 공격이라는 요구에 전적으로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즉, 스베친 학파 몰락 이후로 소련군 총참모부의 방어계획은 부차적인 역할만 부여된 셈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직후인 1941년 6월 22일자 소련군 총사령부 최초 지령인 서북부, 서부, 서남부 및 남부전선군의 군사 소비에트에 내리는 "지령 3호"를 보면 이러한 소련 정치, 군사 지도부의 작전, 전략적 방침에 따른 공격적 성격이 명확하게 반영되고 있음이 보여진다. 특히 나치 독일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부전선에서 소련에 대한 군사행동을 감행한 이후에 나온 것이 지령 3호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제는 이 지령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행동들이 소련군의 위치를 불리하게 만들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고 여기에는 과거 스베친이 지적했던 적극성을 위한 적극적인 사고가 작전, 전략적 합목적성의 심오힐 고찰보다 크게 작용했다. 결국 적의 영토에서 곧바로 군사적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적을 국경 근처에서 정지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어느 특정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깨달은 소련군은 그 이후에 비로소 전략적 방어라는 목적을 수립하게 되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전황 지도와 스몰렌스크 전투의 소련군 1941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로 인해 소련군은 순식간에 패배를 거듭하며 모스크바까지 밀려났다가 다음 해 초에 가서야 겨우 침공군의 진격을 약간 뒤로 물리게 하는 수준까지 회복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군은 다시 반격 준비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전차군단을 1942년 4월에 창설했다. 이것은 전차가 주를 이루는 편성이었으며 소련은 이것을 야전군의 기동화된 전과확대부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특히 1942년형 군단은 사실상 사단급 규모였기에 1942년 5월 국방인민회의는 독일의 전차군단 같은 정도의 거대한 부대 편성을 위해 일부 현존하는 전차군단을 전차군으로 통합했다. 이러한 1942년 전차군은 거의 즉흥적으로 기갑, 기병, 보병부대들을 조합하여 만들어졌던 특성상 공통된 진출 속도를 가질 수 없었고 운용 교리도 부족했다. 더욱이 1942년 여름 최초의 전차군은 하나의 팀으로 작전하기에 훈련 상태가 충분하지 않았다.
편제적으로는 1943년 1월이 되어서야 소련군은 마지막으로 확고한 전차군을 만들며 겨우 정비가 되었고 그 해 만들어진 6개 전차군은 남은 기간 동안 모든 소련의 공세 작전에서 최선봉 창끝부대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실제 편성은 다양했지만 1943년 전차군의 전형적인 모습은 2개의 전차군단, 1개의 기계화군단, 그리고 특수화된 지원 편성부대들을 갖는 것이었기에 각각의 군들은 사실상 군단규모의 전차군단이었다. 그리고 소련의 전차군은 극히 전차 위주로 편성되었는데 이는 러시아의 유럽 지역이 전차 운용에 적합한 개활지이고 독일에 비해 소련의 전차 손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기계화부대는 1942년 동안 전쟁 첫해의 교훈을 소화하였고 이것은 1942년 11월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한 소련군의 공세 효과를 크게 높여주었다. 특히 1941년 12월~1942년 1월 최초 반격이 너무 분산 실시되었던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스티브카(소련군 최고사령부) 주도 하에 좁은 공격정면에 전투력을 강하게 집중하여 적 방어선을 깨고 나아가는 방식의 "충격집단" 편성이 이뤄졌다.
1942년 10월 8일에는 스탈린 명령 제306호에 따라 보병의 연속적인 제파식 공격을 금지하였으며 지속적으로 장비 및 화력 부족 탓에 소련군은 모든 보병부대를 단일 공격 제대로 만들어 가용부대를 최대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전형적인 소총병 사단에서는 24개 소총병 중대 중 19개 중대를 정밀공격 시, 전방에 내세웠다. 나중에 독소 양측 모두 커다란 종심을 가지고 방어할 때 소련의 경우 자신들의 공격을 제대로 편성해 실시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1945년조 차도 얇은 독일 방어는 소련군 1개 제대에 의한 공격을 유발할 정도였기에 1942년 다른 명령은 보병 강습을 지원하기 위해 여전히 예속된 전차를 올바로 사용하기 위한 지시였다. 즉 보병 지휘관들이 아직 경험이 없었기에 이러한 모든 전차부대는 자신들의 지휘관 예하에서 집중적으로 운용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소련군 포병 소련이 돌파에 성공하자마자 기동 집단은 전과확대와 전면포위작전을 위해 공격해야 했다. 효과적인 전면포위는 기타 작은 전면포위들을 이 속에서 하게 된다. 각 야전군은 자신들의 기동집단을 사용하여 전차, 기병 또는 기계화 군단으로 구성되어 약 50km의 상대적으로 얇은 지역 종심 돌파를 이용해 전과확대 하고자 했다. 이러한 종심이 얇은 지역에서의 돌파는 독일 방어를 와해하고 적 예비대를 격퇴하거나 또는 인접 군의 유사한 돌파와 연결하려는 것을 목표한 것이었다. 동시에 전차군들은 전선군(집단군)과 같은 보다 상급 제대의 기동단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전차군들은 보다 깊은 독일 후방지역으로 돌파하여, 독일이 새로운 방어선을 만들기 이전에 도하지역 및 기타 중요지형을 점령하기 위해 기동 하려 했다.
이렇게 거대한 작전적 수준의 최초 소련 전면포위가 1942년 11월 독일군 6군의 스탈린그라드 포위였다. 독일이 포위되자마자 포포프 중장은 완전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4개의 전차군단을 이끌고 1943년 2월 독일 후방 깊숙이 공격했다. 비록 대부분의 부대가 독일군의 역습으로 격퇴되었지만 이 경험은 새로운 전차군들의 운용을 위한 모델이 되었고 이로써 독일의 기갑사단이 전쟁의 전반부를 결정했던 것처럼 이제 후반부에는 군수, 기술 및 종심 방어가 전쟁을 결정짓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이후로 신규 전차군이 창설되더니 1944년 동안에는 소련군의 규모가 점점 거대해지고 편제도 복잡해졌다. 전차군, 전차군단, 기계화군단. 수요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소총병 군단은 모든 야전군 편제에 재등장했고 소총병 사단들의 화력도 향상되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소총 여단들은 소총병 사단으로 승격되었고 소련군은 전투지원을 위해 모든 유형의 포병여단, 포병사단, 포병군단, 대전차여단, 대전차연대, 방공포병연대, 방공포병사단, 전투공병부대, 다연장로켓포연대, 다연장로켓포여단, 다연장로켓포사단, 자주포대대, 자주포연대, 자주포여단을 창설했다.
특히 1943년 7월과 8월의 벨고로드-하리코프 공세는 소련군 공세 작전의 전환점이었다. 이때 소련군은 벨고로드-하리코프에서 스탈린그라드 이후 최초로 독일군 기동예비가 그들을 정지시킬 때까지 100km 이상 진격했으며 당시 소련군은 오로지 다른 추축국 군대는 제외하고 독일군만 상대로 교전했다. 소련군의 기동전력은 하리코프 서쪽 보고두호프와 악치르카에서 독일군 기갑사단과 5일에 걸친 조우전 끝에 적을 정지시켰다. 1943년 8월 이후로 소련군의 작전술과 기술은 이론과 실행 면에서 모두 성숙해졌으며 1943년 말부터 1944~1945년에 걸쳐 서서히 투하쳅스키가 꿈꾸던 이상에 근접해 갔다. 작전의 범위는 보다 확대되었고 각 병과의 조정은 보다 철저해졌으며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1944년 벨라루스 작전, 야시-키시네프 작전, 그리고 1945년의 비슬라-오데르 작전은 이러한 성과의 사례가 되었다. 공세는 오직 보급선이 지나치게 신장되는 경우에만 종료되었으며 재보급이 끝나고 탄약창을 다시 채우고 병력 보충을 완료하면 공세 재개에 나섰다.
1943년 여름 쿠르스크 전역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사전 계획된 전략적 규모 방어의 대표적 사례라는 것이다. 1940년대 동안 독일군은 신식 중전차(5호 전차 "판터", 6호 전차 "티거")와 전술, 기술적인 면에서 매우 우수한 전투장비인 신형 항공기 및 기타 장비로 보강되었지만 문제는 독일군의 가장 강력한 전차공격으로도 보로네즈스키 및 중앙 전선군의 종심 깊은 방어를(스텝 전선군의 상당한 지원으로) 뚫을 수 없었다. 쿠르스크 전역 이후 소련군은 공세 이전을 통해 전반적인 공격으로 전환하면서 전략적 주도권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소련군의 손에 넘어 오게 되었딘. 그때까지 위협적이었던 적, 즉 독일군에 대한 대규모 전략적 공격작전 단계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부터 소련군은 전략적 방어와 철수가 능숙하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1943년 쿠르스크 전투 속 소련군 T-34 전차 전쟁 막바지이자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이 시작이 되기 직전인 1945년 8월 당시 전선군의 가장 기본적인 부대는 제병협동군이 되었다. 1945년 기준 소련군 내 일반적인 제병협동군은 3개 소총병 군단, 7~8개 사단, 1~3개 포병여단, 대전차여단, 방공포병 사단, 박격포 연대, 통신연대, 전투공병여단, 2~3개 전차여단이나 연대 그리고 전차, 혹은 기계화 군단이었다. 전선군 수준의 지원부대가 이 편제를 강화했으며 제병협동군의 전력은 병력 80,000~100,000명, 전차 320~460대, 화포 1,900~2,500문, 자주포 100~200대였다. 재미있는 점은 소련군 편제에 특별한 전차부대와 포병부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독립 중형 전차연대(T-34 전차와 T-70 경전차 39대), 독립 중천차연대(IS-2 중전차 21대), 경자주포여단(SU-76), 중형자주포여단(SU-100), 중자주포여단 (SU-152)가 여기에 해당되어 소총병 사단과 군단, 전차군단과 전차군, 기계화군단에 배속되어 화력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즉 사실상 거의 모든 대규모 부대들은 중전차나 자주포 부대를 지원받았다는 얘기.
1945년 당시 소련군의 공세 작전 수행에 관한 기본적인 교범으로 "야전요무령-44"라는 문서가 있었는데 이게 공세 전투의 기본적 원칙에서 나아가 소련군이 어떻게 광범위한 지리적 상황과 전술적 상황에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지 총체적으로 담고 있는 일종의 교과서였다. 야전요무령-44는 제병협동 전투의 특성을 명확히 하면서 현대전을 모든 병과의 대규모 참여로 규정하고 있는데 따라서 지휘관들이 "보병과 화력체계를 최대한 그리고 동시에 전투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참여시켜야 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적을 압도하기 위해 모든 전투력을 끌어내려면 전력은 종심에서 제파화되고 각각의 제파는 독립된 임무를 받아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소련군은 전력을 공세를 선도하는 제1파와 그들을 강화하는 동시에 공세를 확대하는 제2파 등 총 2개 제파로 구분했다.
야전요무령은 전차부대의 작전에 대한 특정한 조항을 명문화했다. 야전군 사령관들은 소총병 사단들에 독립전차여단과 독립전차연대를 배속했고 전차여단과 연대는 소총병 사단 수준에서 보병과 함께 밀접히 공조해 적 보병을 격파했다. 야전군 사령관들은 중전차부대를 적의 강력한 요새화 지대를 공략하는데 투입해 보병 및 공병과 밀접하게 연계해 활동하게 했으며 야전요무령에서 전차여단과 연대의 분산운용은 금지된다. 전차군단은 전선군이나 야전군의 작전술적, 전술적 부대였고 전차 군단의 임무는 침투를 성공시키고 적의 측면을 향해 추격해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기계화군단 역시 전선군, 야전군의 작전술적, 전술적 부대였으며 기계화군단은 전차군단보다 더 많은 차량화소총병부대를 보유했다. 또 특별히 명시되지 않은 사항이지만 전차군은 대개 전선군 소속이 되어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만주 전략 공세에서 침투를 완수하고 전술적, 작전적 성공을 확대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당시 뤼순 203 고지에 오른 소련군 해군보병대 병사들. 참고로 뤼순은 과거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가 일본에게 굴욕을 맞본 곳이었다. 군단과 야전군은 강력한 중곡사포 집단을 장거리 포병집단과 파괴 포병집단으로 구성했다. 이 집단들은 군단과 야전군에 장거리 화력을 지원하거나 공세 활동의 진행을 방해하는 요새화된 적 방어지역 파괴에 동원되었다. 사단 수준의 전차예비집단과 대전차예비집단은 실제 사단급 이상의 모든 부대에 배속되어 적의 반격을 격퇴하기 위한 추가적인 공세력의 원천이 되었다. 공세가 군사적 승리의 원천임을 강조하는 야전요무령-44는 정면공격 수행 준비에 대해 공격 전력은 적보다 전력과 특히 주공 축선에서 면에서 앞설 것을 강조했고, 돌파하는 동안 포병과 공군이 적지 종심에서 적을 공격할 것을 주문한다. 뒤이어 전차와 기계화부대는 야전군 및 전선군의 기동 집단으로서 침투 수행을 위해 초기 돌파를 확대하고 정면공격의 전 국면에서 다양한 병과(공수부대 등)가 적의 후방을 혼란시켜 적 지휘 통제를 박살내고 적 예비대 이동을 봉쇄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야전요무령-44는 만주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마무리 공세를 수행하는 소련군에게 전술적 지침을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1945년 8월에 실시된 만주 전략 공세 작전에서 소련군은 3주간의 작전 일정에서 가벼운 손실만 입은 채 70만 규모의 일본군을 압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초기 성공을 확대하고 일본군의 계획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갑전력 위주의 선견대를 모든 수준에 배치해 일본군의 방어종심 깊숙이 투입시켰다. 선견대가 곳곳에서 구멍을 낸 결과 일본군의 방어는 응집력을 잃었으며 이후 주력, 선견대는 제병협동군 본체에서 지형에 맞게 조정되어 작전을 수행했다. 선견대는 방어를 무너뜨리고, 산산조각내고, 마비시키고, 다음 목표로 향했으며 그 결과 소련군의 만주 전역에서의 승리는 전략적, 작전술적, 전술적 기습의 효과를 강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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