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백내전이 끝난 직후 소련 경제는 대혼란에 빠져 대규모 상비군 유지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1925년 붉은 군대는 전쟁 기간의 정점에서 10분의 1에 해당하는 562,000명 규모로 축소되었으며 기병과 일부 국경 군관구의 소총병 사단은 감편된 규모로, 대다수의 잔존 사단은 필요 전력의 일부만 남게 되었다. 이들 사단은 전시에 해당 지역의 예비역들을 충원하도록 되어 있었다. 1924~1925년에 채택된 이 체계는 정규 기간 부대와 지역 민병 전력을 결합하는 것으로 전시에는 140개 사단으로 확장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평시의 전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던 한계가 명백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소련군 1세대 지휘관들은 적백내전의 경험을 토대로 1차세계대전의 진지전, 참호전 대신 소수 병력으로 광대한 공간을 방어하는 양상의 군사 전략의 교훈을 터득했다. 이러한 전장 환경을 통해 소련 지휘관들은 승리의 원동력을 특정 지역에 적을 압도하는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과 더불어 산개한 적을 섬멸하기 위해 후방 진출, 돌파, 포위 등의 신속한 기동을 하는 것에서 찾게 되었다.
때마침 이 시기 소련은 과거의 적이었던 독일과 비밀 군사 협약을 체결하고 각종 협력 사업을 실시한다. 당시 독일은 한스 폰 젝트의 주도 하에 군대 재건의 발판을 마련하는 중이었지만 연합국의 눈을 피해 부대 단위 전술 훈련을 하거나 몰래 개발한 신형 무기를 테스트해볼 수 없었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전술과 이론을 훈련에 적용해 보기가 힘들다는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소련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부터 외교적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며 신생 독립국인 폴란드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라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의 주도로 건국 직후부터 혼란을 틈 타 대외팽창적으로 나서며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독일, 리투아니아와 영토분쟁 혹은 국지전을 벌였었기에 독일뿐만 아니라 소련에게서도 커다란 반감을 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소련은 독일의 제안을 당연히 수용했고 독소 비밀 군사협약을 넘어서 라팔로 조약과 베를린 조약까지 체결하며 사실상 우호관계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20년대 초부터 독일과 소련의 군사적 협력을 위한 접촉이 시작되었는데 이로써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제한되던 무기기술 개발 실험과 새로운 전술을 훈련해 볼 수가 있었고 그 대신에 군사 기술이 뒤떨어지던 소련은 독일의 첨단 군사기술을 도입해 볼 수가 있었다. 1922년 11월에는 독일의 항공기 제작 회사인 융커스가 항공기 생산 공장을 소련에 세웠으며 30년 동안 융커스가 비행기와 모터를 생산하는 대신 소련은 모스크바 근교에 땅을 임대해 주기로 계약을 맺었다. 융커스 사는 1923년부터 1924년 사이에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갔는데 소련에 설립된 공장은 독일 본토로부터 재정 지원과 원자재 공급을 받았다. 점점 협력이 강화되던 양국은 더 나아가서 군사 훈련에 있어서 서로 참관단을 교환하기도 했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현대전에 필요한 첨단전술을 습득하기 위해 양측 군인들을 상호 교환하여 위탁교육까지 받게 하였다. 칸잔에선 기갑학교훈련소 내 군사공동훈련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참관단 교환 과정에서 소련군 군사 저술가들은 적백내전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군사 교리와 이론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종심작전교리의 아버지, 미하일 투하쳅스키 장군 아마도 1920년대 시절 가장 중요한 소련의 군사 이론이라면 투하쳅스키와 트리안다필로프가 발전시킨 연속적인 작전에 관한 전략적 이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론의 토대는 1920년 폴란드를 상대했던 소련의 군사적 실패와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에서의 독일의 공격 실패였는데 간단히 말해, 이들은 현대식 군대는 한 번의 결정타로 무너뜨리는 것이 너무나 규모가 방대하고 피해로부터 회복도 빠르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은 공격자는 일련의 연속적인 공세를 펴야 하며 각 공세는 직후에 적 후방에서의 신속한 전과확대로 연계되거나 방어자가 전력을 재정비할 때는 새로운 전투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보자면 당시 소련 군인들은 개별 전투 수준의 전술과 전쟁의 전략 사이에 위치한 용병술의 중간적인 수준인 "작전술"이라는 개념을 고안한다. 작전술은 전체 전략적 작전이나 전체 전역의 맥락에서 대규모 부대의 작전을 기획하고 조율하는 상급 지휘관들의 영역이자,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일련의 연속적인 군사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소련군의 이론가들은 종심 전투에 대한 전술적 개념을 완성하였고 1936년에 이르어 기술적 진보가 가속화되자 보다 큰 규모인 종심 작전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었다. 투하쳅스키와 다른 이론가들이 생각했던 개념은 단일 전선의, 전술적 종심 전투에서 적을 돌파하는 대신, 100km 이상의 작전적 종심 돌파와 전과 확대였다. 이러한 노력은 1936년 <야전 규정>으로 최정점에 달했으며 보병을 최고의 전투 병과로 보는 대신에 투하쳅스키는 모든 가용한 병과 및 무기 시스템을 두 부분의 전투 속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을 구상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가 생각한 종심 작전의 핵심은 최신식 무기를 사용하고 적의 방어선을 최대한 종심에서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적이 적시에 새로운 방어선을 재구축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에 있었다.
종심작전은 먼저 제대로 편성된 부대들을 좁은 전선으로 공격시켜 보병, 포병 및 대전차 무기를 지닌 방어자의 재래식 방어체계를 깨고 들어가는 것이다. 공격부대의 포병과 박격포는 적 방어 포병, 특히 대전차포를 제압하고 포병의 탄막 뒤를 후속하면서 수 미터 보병에 앞서서 전차는 안전하게 철조망을 뭉개고 진출하여 기관총 진지 유린 후 기타 저항 종점을 제거한다. 여기까지는 1918년 시절 교리와 비슷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적전방 방어체계 와해 후 전차가 보병의 전진속도에 엄격히 묶이는 것이 아니라 돌파하기 위한 국지적으로 발생된 기회의 이점을 이용하여 적 예비대, 포병, 지휘본부 및 보급소를 공격하게 된다.
이 행동은 동일한 규모의 두 번째 전투 부분에서 반복되는데, 이 부분에서는 종심 깊은 공격을 통해서 적을 와해시키고 파괴시킨다. "기동집단"은 기병, 기계화부대 또는 이 양개로 구성되어 속도 있게 전과확대하여 적 측면을 포위하거나 또는 적 후방에 도달하기 위해 돌파구를 확장시킨다. 목표는 적 방어종심 전체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인데 이것은 전통적인 정면공격과 장거리 포병사격, 기동부대에 의한 깊은 종심 돌파, 그리고 중요지형에 대한 폭격 및 공정부대에 의한 공격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연막 및 기만작전은 공격자의 실제 의도를 적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투하쳅스키의 이러한 전술은 다른 나라 육군의 전술과는 달랐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과 이후에 독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서방 육군은 기본적으로 준비된 적의 방어선을 돌파할 때 보병을 지원하는 용도로 전차를 활용했다. 반면에 소련의 전략적, 전술적 이론은 기계화 부대가 세련된 제병협동 부대로서 기능하도록 하였다. 전차가 앞장서고, 포병과 공병의 지원을 받는 보병이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면 그 사이 항공 전력이 후방을 강타하고 뒤이어 대규모의 독립적인 공수부대와 기갑 전력이 투입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도 하에 전차는 3개의 각기 다른 제대로 편성되었는데, 첫 제대의 전차는 보병의 돌파 선도, 다음 제대 전차는 초기 돌파 후 단거리 전과확대 실시, 마지막 제대 전차는 대규모의 제병협동 기계화 부대로 운용되어 적의 잔존 부대 추격과 포위에 나서게 되어있었다.
종심작전 발전을 위한 기계화 부대 편성도 1930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실행 단계에 들어섰다. 각 12,500명(전시에는 18,000명)으로 편성된 소총병 사단에는 1개 전차 중대 혹은 대대(57대의 경전차로 구성)가 포함되었고 각 기병 사단에는 1개 기계화 연대(64대의 경전차로 구성)가 배치되도록 선정되었다. 전차 여단은 각 소총병 군단이나 야전군 단위에서 일반적인 예비 전력으로 편성되었고 독립 기계화 군단은 적백내전 당시의 "기동 집단"처럼 적의 후방을 향한 전과확대에 투입될 전력의 역할을 맡았다. 각 2개 전차 여단과 1개 소총병 여단으로 구성된 이들 군단은 서방의 사단 편제보다는 규모긴 약간 컸다. 각 여단은 여러 병과를 망라하고 있었고 전차, 차량화 보병, 포병, 공병, 대공포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2년 가을 소련군은 독일군이 기갑 사단을 창설하기 3년 전에 최초로 2개 기계화 군단을 편성했고 1938년 6월 1일 기준 평상시 전력만으로도 1,500,000명에 이르는 대군을 보유한 집단이 되었다.
이러한 성장으로 인해 소련군은 보병지원도 가능하고 제병협동 기계화 작전도 가능한 편제를 완성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부대구조의 문제점은 컸다. 무엇보다도 소련 당국의 거대한 공업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대가 완전히 장비할 수는 없었으며 생산된 전차의 대부분은 장갑이 매우 빈약한 경전차들이라 방어력을 속도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전장 기동에 필수적인 무선 교신은 악명이 높을 정도로 심각했고 훗날 소련군 관계자들은 이 시기 가용한 장비를 보병지원 및 독립 편성부대에 분리하여 준 것과 작전 수준에서의 기계화와 공격 측면에만 집중을 둔 나머지 적어도 작전적 수준의 방어를 위한 훈련과 계획의 부족이 초래된 점을 비판했다. 그래서 1930년대 동안 연습이 자주 있었음에도 소련 기갑부대의 실력이 완전히 발휘되기 위해서는 몇 년의 기간이 더 필요했다.
또 전략적 공격작전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육성된 강력한 기계화 군단은 거대하고 육중한 구성체로서 두 개의 전차와 한 개의 기계화 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군단(병력은 37,200명)의 전차는 1,180대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총참모부의 계획은 이 군단의 무장을 완전히 충족시키려면 약 32,000대의 전차가 필요했는데 전쟁 전야까지 보유한 전차 수는 대략 22,600대였다. 이 중에서 508대의 KV 전차와 963대의 T-34 전차는 서부 국경 군관구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나치 독일 및 독소전쟁에 참전한 추축국 군대 전차들과 비교해도 매우 인상적인 전력이었다. 즉 적당하게 조직된다면 방어 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편제였다는 얘기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소련제 T-26 전차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대숙청이 벌어지며 군부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1937년 6월 스탈린의 지시로 투하쳅스키를 비롯해 8명의 고위급 장교가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이후 4년 동안 소련 당국은 적어도 장교단의 40%를 수용소에 보내거나 처형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 대부분은 연대 규모 이상의 부대 지휘관들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대부분의 경험 있는 계획수립가 및 지휘관들을 대거 잃게 되었다. 그 결과 부대 훈련과 전술에 재앙적 상황이 초래되고 1939년 겨울전쟁에서 아무런 동계전투에 대비 없이 소련군을 무작정 진군시켰다가 호되게 당했다. 당시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만네르하임 방어선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없었고 군 상층부가 유능한 장군보다 정치군인 밖에 없었기에 전쟁 중에 언제나 예측 가능한 공격만을 반복했었는데 결국 국력 차이 버프로 이기긴 했으나 생각 외로 커다란 피해를 입으며 국제적으로 위신이 추락하게 되었다.
비록 직접적으로 참전한 전쟁은 아니었지만 스페인 내전의 경우도 소련군 당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선에서 관여했던 스페인 내전을 거치며 이와 관련된 작전적, 전술적 문제들을 고찰하는 각종 저작들이 나왔으며 이러한 것들은 대체로 전차와 항공기 같은 군사 장비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저자들은 전차와 항공기의 점증하는 역할을 의미 있게 평가하면서도 포병의 역할이 감소하는 대신 오히려 증대하였으며, 폭격기가 포병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부분에서 결론들을 나름 균형적으로 내렸다. 또 그들은 스페인 내전 진행과정에서 비교적 적은 수의 항공기(1,200~1,500여 대) 및 전차(500~600여 대)가 운용되었으며 대규모 기병, 기계화 및 공수부대가 사용되지 않았고 작전적 예비의 운용과 철도와 항공기의 대량 수송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 전쟁 경험의 제한된 의미와 특수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소련군의 군사, 전략 계획 발전에 기계적으로, 그리고 현학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전차부대의 편성에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계화 군단의 해체는 중대한 실수로 판명되었으며 1939년 폴란드와 1940년 프랑스에서 실행된 독일군의 작전에서 이런 형태의 부대가 결정적인 요소임이 드러났다. 1940년 6월에 들어서서야 기계횐 군단을 창설한다는 때늦은 결정이 다시 내려졌다. 결국 1941년 여름 독일이 작전술의 높은 수준을 확실하게 대규모로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의 대숙청과 더불어 이후의 소련군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을 포함한 실수의 결과였으며 특히 전장에서 가장 필요했던 45mm 및 76mm 포의 생산이 히틀러 침공 직전에 중단되었다.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새로운 대규모 포의 생산은 시작조차 되지 못했던 것도 컸다. 침공 당시 독일군을 포함한 추축국 군대들은 체코슬로바키아제 전차를 포함해 구식 장비들이 많이 포진되서 있었기에 45mm 및 76mm 주포는 이런 전차들 뿐만 아니라 그보다 신형들 상대로도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할힌골 전투 당시 소련군 BT-7 경전차 그렇지만 투하쳅스키 숙청 이후부터 독소전쟁 발발 사이의 기간 동안 소련군이 아무런 성장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투하쳅스키의 추종자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은 당시 일본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팽창하는 것을 우려하던 스탈린의 명에 의해 극동 부대 사령관이 되었다. 또 시베리아와 극동의 소련군은 대숙청의 영향을 받은 마지막 부대들이었기에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1939년 극동 지역의 할힌골 강 주변에서 일본군과 무력충돌이 벌어졌는데 이에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은 496대의 경전차, 426대의 기타 장갑차량, 679대의 야포 및 박격포, 그리고 5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집중하고 수 천대의 트럭으로 대량 보급을 실시하며 대응에 나섰다. 이는 러일전쟁을 생각하며 소련을 얕보던 일본에게 예상외의 움직임이었다.
주코프는 먼저 고전적인 양익포위를 실시하고 북과 남쪽으로부터 동시에 일본군을 포위했다. 우선, 중앙에서의 일련의 소련의 돌진 공격으로 일본 방어부대를 무력화시켰다. 그러고 나서, 양 측익에서 공격해 나인가 일본 제23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의 일부를 완전 포위했다. 소련의 공격은 전차와 기관총 직사화력을 사용하고 또한 협조된 포병화력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보병 공격을 보호했으며 일부의 경우 보병은 장갑차량의 외부에 탑승하여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시간을 단축시켰지만, 차량과 탑승 보병을 적 집중 화력에 노출시켰다. 일부 소련 지휘관들은 주코프의 계획을 실행하기에 상상력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일본군의 저항을 우회하는 것 대신에 반복적인 정면 공격을 대응했다. 이렇듯 1939년 할힌골 전투의 경험은 독소전쟁 직전에 소련군의 종심작전교리의 탁월한 적용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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