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초기 우리는 북한군의 진격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며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사실 이는 국군의 태생적인 한계상 어쩔 수 없었던 부분도 있는게 당시까지 군은 실전 경험은 커녕 최대 훈련이 고작 연대급 훈련이었던 상황상 당연히 훈련도도 매우 낮은 상태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전에 글에서 한강교 폭파 사건을 군사적 실책으로 언급하고 갔지만 아무런 경험도 없는 신생 군대였던 당시 국군이 더 좋은 판단을 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인 면이 있다. 그렇기에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 당시 일본군, 만주군 출신자들로 구성한 것도 지금 기준에서는 친일파 등용처럼 보일 수 있어도 당시로써는 더 나은 방안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아무튼 국군은 이렇게 시작부터 매우 미약한 기반에 시작했으니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에 비하면 북한군은 적어도 국군보다는 훨씬 더 우위인 조건에서 출발했다. 기본 병력부터 19~20만이었고 전차도 242대, 야포 726문, 함정 110정, 전투기 211대였기에 전차부터 단 0대에 불과한 국군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또한 병력 측면에서도 국군은 다 긁어모아도 10만 명 정도가 전부였지만 반대로 북한군은 19만 명 정도는 베이스로 가지고 출발했다. 그리고, 북한군 규모가 국군의 병력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는 것과 그들이 풍부한 베테랑인 것처럼 6.25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빠르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북한군의 주력이 국공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오늘날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족들은 일제 패망 이후 국공내전에서 진작부터 중국 공산당의 편에 섰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3년 간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은 모두 6만 3,000명 정도이며 특히 연변 지역에서는 3만 4,855명이 참전했다. 한편 북만주 지역에서는 조선족 18만 7,000명 중에서 1만 2,600명이 참전했고 이러한 조선족 병사들은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에서 개편된 조직인 조선 의용군이라는 이름 하에 국공내전에 참여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 국공내전이 진행되면서 조선 의용군 부대들은 상당수가 중국 인민해방군 제164사와 제166사에 편입되었고 그 외 동북 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임표가 이끄는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제4야전군에 배치되어 천진, 하남성, 북평, 호북성 등으로 진출해 국민당군을 상대로 추격 섬멸전을 벌였다.
국공내전 당시 사진 특히 연변으로 진출했던 조선 의용군 제5지대와 연변 출신 조선족 부대들은 대부분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 38군, 40군, 43군, 47군 등에 배치되어 양자강을 건너 하남, 광서, 광동, 호남, 사천, 귀주 등지에서 국공내전이 종결될 때까지 국민당군을 공격했다. 이러한 조선족들의 국공내전 참전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사실상 남침을 위한 북한군의 훈련장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중국 공산당과 함께 국공내전에서 싸웠던 조선족 부대들은 북한군 창설 당시 엄청난 기반이 되었으며 남침 당시 군 지도부 인사들 중 상당수가 국공내전에 참전했었던 조선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소련파는 소련군으로 참전한 자보다 관료 출신들이 더 많았고, 남로당은 조선 공산당이 뿌리인 특성상 군사 경험이 전무하였고, 또 만주파는 동북항일연군 같은 게릴라 전 위주였는데다가 비교적 소수였기 때문에 그나마 북한군 창설 당시 실전 경험이 있던 베테랑들은 당연히 국공내전 참전자들이었다.
국공내전이 끝난 이후,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부대들은 북한 지역에 들어와 북한군의 정규부대로 개편되기 시작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제166사는 북한군 제6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사단장은 조선족이자 전쟁 초기 호남 평야 석권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장성인 방호산이었다. 인민해방군 제164사는 1948년 10월 장춘 함락 후 장춘에 주둔하다가 1949년 7월에 마오쩌둥의 명령을 받고 북한의 나남 지역에 배치되어 김창덕을 지휘관으로 하는 북한군 제5사단으로 개편되었다. 국공내전이 거의 마무리될 쯤에는 하남성 정주에 있는 15,000명의 병력들이 김광협의 지시 하에 원산으로 이동하여 북한군 제7사단이 되었고 한편 제4야전군 47군에 편성되어 있던 2,500명의 조선족 부대는 1950년 4월, 조선 의용군 제3지대 참모장 출신의 이권무를 사단장으로 하여 북한군 제4사단 18연대가 되었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1950년 6월 25일 남진한 북한군 보병연대 21개 중에서 47%에 해당하는 10개 연대가 만주의 조선족 부대였다. 6.25 전쟁 이전에 대략 5만 5,600명 정도가 북한 지역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즉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 병사들 6만 3,000명 중에서 전사한 3,500명과 중상자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거의 대부분 북한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족 부대의 입북이 6.25 전쟁의 발발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으며 실제로 연변 조선족 출신 북한군 병사들은 최전선에서 전투 임무를 부여받고 남진 과정에서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자처했었다.
6.25 전쟁에 참전한 조선족 당장 북한군 지도부 구성만 봐도 이를 바로 알 수가 있는게 당시 고위 지휘관 중에서도 총참모장 강건을 비롯하여 2개 군단의 군단장(1군단: 김웅, 2군단: 김광협 및 무정), 10개 사단 중 6개 사단의 사단장(1사단 최광, 2사단 이청송, 4사단 이권무, 5사단 김창덕, 6사단 방호산, 12사단 전우)들이 바로 해방 후 만주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국민당군에 맞서 싸우며 실전 경험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6.25 전쟁 당시 참가한 병력들과 주요 지휘관들을 보면 조선 의용군이나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족 부대 출신자들이 매우 많이 포진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고 서울대 병원 학살로 악명 높은 제105땅크여단의 지휘관 류경수의 경우 소련군 출신이지만 배경은 역시 조선족이었다. 당시 전쟁 초기 북한군의 47%에 해당하던 조선족 부대 출신자들은 중국에서 수년간 많은 훈련을 받았기에 국군은 물론 기존의 북한군보다도 훨씬 더 높은 저력을 갖고 있던 베테랑들이었고 실제로도 남침 초기 북한이 승승장구한 것은 이들의 공이 컸다.
6.25 전쟁 초기 조선족 부대들의 역할은 서울 점령 외에도 대전 전투와 호남 평양 우회돌파 작전에서도 알 수 있다. 대전 전투에서는 제105땅크사단과 제3사단, 제18연대 등이 참전하여 김일성으로부터 근위 칭호를 수여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제18연대는 조선족 부대 그 자체였던 곳이었다. 이 전투에서 제18연대는 우회를 시작하여 대전-금산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낭월리와 세천터널을 점령해 미 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하였고 20일부터 북한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퇴로 차단 후 제18연대 쪽에서 미리 파견한 민간인으로 위장한 정찰대는 화력 유도 및 미군 상황을 보고하였고 이로써 북한군은 대전 남쪽과 동남쪽의 도로를 차단하고 대전 서쪽에서는 갑천일대에, 대전 서북쪽과 북쪽에서는 대전으로부터 각각 5km 지점에 진출함으로써 미군을 몰아넣고 대전을 완전히 포위하는 것에 성공했다.
한편 북한군 제1군단 소속이자 방호산이 이끄는 부대인 제6사단은 다른 제1군단 주력 부대들이 대구를 향해 진격할 동안 603 모터사이클연대와 함께 서해안 방면을 따라 남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6사단은 7월 19일 아침부터 미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금강을 도하했으며 개별 정찰부대들을 격파하며 그날 오후 늦게까지 만경강까지 성공적으로 남진했다. 이어서 제15연대는 20일에 김제를, 같은 날 제1연대는 전주를 점령했다. 21일에는 드디어 광주까지 점령했고 이후 연대 단위로 흩어져 목포와 여수를 점령했다. 그리고 7월 25일 순천에 집결하면서 호남 지역 점령을 완료했다. 미 8군은 항공 정찰을 강화해왔지만 7월 20일 이후 호남 지역으로 내려오던 북한군의 행적을 장마로 인해 잠시 놓쳤고 그 사이의 사흘 동안 북한군은 국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놀라운 기동을 벌여 경상남도 초입인 진주를 노릴 위치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북한군 5사단 제6사단과 제18연대의 우회 기동은 미군의 공간사에서도 성공적인 기동전이라 평가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4사단 제18연대는 대전 전투에서 하루밤 사이 40km의 미군 종심을 우회 기동하여 2개 도로 차단 후 매복, 습격 등의 전투행동으로 미 24사단을 무너뜨렸고 제6사단은 대전 전투가 거의 종료되는 시점에 국군의 최소 저항선인 전라도-경상도-부산 방향을 지향하는 대우회 작전을 감행하여 하루 평균 12km를 진격하였으니 말이다. 이는 과거 조선족 부대들이 전후방 구분이 없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의 소(대)규모 집단을 포위격멸하기 위해 우회기동, 퇴로 차단, 매복, 습격 등의 전투를 경험해봤던 것에서 기인한 방식이며 결국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은 전쟁 초기 무너질 위기의 한국에 치명적인 위협을 주는 분명한 "적"이었다.
한국 일각에서는 조선 의용대를 국군의 뿌리로 삼자는 주장이 그것도 문재인이라는 당시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적이 있다. 김원봉이 임정을 분열시키는 공작에 앞장서고 북한 정권 수립에 앞장선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 공산당에 들어가 개편한 조직이 조선 의용군이었고 그들이 조선족 부대가 되어 국공내전에 참전 후 북한군이 되어 남침에 앞장섰다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다. 난 그래도 홍범도나 여운형은 대한민국 입장에서도 꼭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지만 김원봉 같은 북한 정권 참여자나 정율성, 조선 의용군 같은 남침에 앞장선 조선족들을 항일이라는 명분으로 추앙하는 것은 솔직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으로 참전한 조선 의용군들은 일제에 저항한 독립군이고 뭐고 따지기 이전에 북한의 적화통일에 앞장서면서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동포들을 죽인 분명한 적들이었고 위협 대상이었다.
실제로 보면 서울 점령 때 밀고 들어온 부대이자 조선족 류경수가 지휘관이던 제105땅크여단은 서울대 병원에서 민간인과 부상자 1,000명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고 호남 지역에 진입한 방호산의 제6사단은 점령지 곳곳에서 인민재판을 벌여 무고한 사람들을 반동이나 우익 인사로 몰아가며 학살극을 벌였다. 일각에서는 조선 의용군 출신 병사들이 중국 공산당의 삼대기율 팔항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민간인 상대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깔끔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제6사단의 점령지이던 호남 평야 쪽에서 인민재판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을 생각해봐라. 특히 계속 말하지만 제6사단은 사단장부터 중국 공산당 팔로군 출신인 방호산이었고 부대 구성원의 거의 대부분이 조선족들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짝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라면 일본과 관련된 문제면 경술국치로부터 한참 이전인 조선 후기의 운요호 사건부터 가지고 난리를 치는데 놀랍게도 훨씬 더 가까운 역사인 1950~1953년 사이의 6.25 전쟁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단체로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대한민국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총부리를 겨눈 자들인 조선 의용대와 그 후신 조선 의용군을 독립군이라 치켜세우고 정율성 같이 평생 스스로를 중국인 혹은 조선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 사람을 우리가 먼저 찬양하지 못해 안달난 것도 좀 웃기다. 홍범도 흔적 지우지 못해 안달이 난 누구들처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아예 없었던 일처럼 생각하자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조선 의용군이나 정율성, 김원봉 같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 인간들만이라도 좀 거르자는 건데 그게 그리 어렵나?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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