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은 6.25 전쟁에 있어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사건이다. 이 일을 계기로 북한군의 후퇴와 국군 및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었으며 특히 그해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인천상륙작전은 국군이나 유엔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초반에 밀려난 굴욕을 만회하고 다시 북진하여 북한 지역까지 통일하게 될 가능성이 보여지던 하나의 분기점인 전투였다. 물론 그 후에 압록강까지 갔다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밀려나 결국 38도선 부근에서 휴전을 맺게 되었지만 어쨌든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고 박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어느정도 영토 수복을 이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인천상륙작전이 재미있는 것은 2차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나 이오지마 전투만큼 상륙 측의 피해가 크진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상륙작전은 앞서 언급한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변이나 이오지마가 잘 보여주듯이 상대 측에서 방어 대비가 철저했을 경우에는 피해가 커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고 인천상륙작전으로부터 불과 약 5년 전인 태평양 전선의 오키나와에서 미군이 겪었던 것만 해도 비록 승리하긴 했으나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게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미군 피해는 딱히 크다고 볼 수도 없으며 비교적 꽤 순조롭게 진행했다. 그렇다면, 당시 인천을 점령하고 있었을 북한군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손 쉽게 털린 것일까?
먼저 이 부분을 확실히 하고 가자면 김일성은 당시에 미군의 후방 상륙 가능성을 인지 자체를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50년 7월부터 8월 동안 북한군이 점령한 남한 지역의 해안에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8월 29일 김일성은 자신의 연설에서 유엔군의 상륙 가능지점으로 인천, 초도, 남포, 안주, 철산, 다사도, 동해안 및 원산, 함흥, 신포를 열거했다. 또한 지금까지 남한 점령지역 후방 경계 책임을 맡고 있던 전선지구경비사령관 박훈일 중장을 인천지구경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인천에서 장항까지 서해안 지역 경비를 맡겼다. 다른 지역들은 각 도에 창설한 5개 경비여단들이 해안선과 후방경계를 책임지게 하였고 박훈일은 방어 시설 공사를 9월 15일까지 마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계복을 입은 북한군 그러나 9월 초부터 작전의 우선권은 상륙 방어가 아닌 낙동강 전선으로 할당되는 바람에 인천상륙 가능성에 대한 대비는 소홀해지게 되었다. 이미 8월 중순에 일본의 사가미 해안에서 상륙작전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저런 안일한 태도를 취한 것인데 문제는 그걸 그냥 가능성으로만 받아들이고 시기가 언제인지, 또 규모가 얼마인지는 차후에 입수할 생각을 안한 것이었다. 게다가 서해안 현지의 북한군 장교들은 상륙 가능성을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당장 인천-김포 해안 경비를 맡은 제107연대장 최한은 인천 상륙 가능성을 제기하며 예하부대에 주의를 줬었고 무엇보다 상륙 하루 전 미군 폭격과 인천에 대한 함포 사격을 보고 상륙 실시 가능성을 점쳤다. 그러나 여기서 상륙의 규모를 예측하는 것에 실패하였는지라 북한군 측은 유엔군이 저렇게 대규모로 몰려올 것이라는 예상 자체를 못했다.
다 떠나서 애초에 북한군의 서해안 방어 대비 자체가 너무 허술한 수준이었다. 당시 인천과 서해안 지역의 북한군은 인천항에 주둔한 제64해안연대, 그리고 월미도에 76mm 포 3문과 37mm 포 2문으로 증강된 해군 육전대 2개 중대가 있었으며 강화도와 인천-김포 해안 경비를 맡은 제107경비연대, 인천항 남쪽 서해안 방어 담당 부대인 제106경비연대가 있었고 인천항 방면의 경우 76mm 포 7문과 고사포 6문이 있었다. 인천지역의 방어진지에는 34개의 토치카가 준비되었으나, 진지 공사는 낙동강 전선에 모든 역량을 쏟아붓던 상황상 자재 지원이 부족하여 40~50%만 진행된 상태였고 해안부터 항구까지의 접근로에 26개 부유기뢰가 설치되었다. 제107경비연대의 훈련도나 장비는 매우 떨어지는 수준이었고 다른 부대인 제106경비연대의 경우는 8월 말에 충청도 해안에 배치되어 버렸다.
인천 후방 내륙지역에는 잡다한 행정부대와 신편 부대들이 존재했다. 서울 지역에는 1개의 신편 전차연대가 있었고 수원에는 아직 창설 중에 있던 제70독립보병연대, 그리고 1개의 독립전차연대가 있었으나 이들은 인천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또한 서울 지역에는 위수 부대인 제18보병사단이 8월 말에 창설되어 훈련 중에 있었는데 나머지 서울 시내 부대들은 전선사령부 직속 공병대대나 제31서울경비연대, 철도관리대대 같은 행정이나 경비 수준 단위가 끝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도 북한군은 어떻게든 낙동강 방어선을 반드시 뚫고 부산까지 밀고 들어간다는 생각에만 꽂혀서 후방 침투 가능성을 인지하고서도 놓쳐버렸고 이는 9월 공세가 실패한 상황에서도 후방에 있던 나남부대, 제98독립연대를 낙동강 전선 보충병력으로 긁어모아 투입하는 삽질로 이어졌다.
낙동강 방어선의 9월 공세 당시 상황 사실 엄밀히 말해 낙동강 전선 형성 당시부터 북한군은 부산 점령 목표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지고 있는 상태였다. 애초에 전쟁 초기부터 유엔군 공군에 의해 제공권을 상실하여 전선의 공격부대 뿐만 아니라 후방의 예비대까지도 큰 타격을 입었고 병참선의 신장과 교량, 도로 등이 파괴되어 보급 지원도 극히 제한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선 부대의 야포와 박격포는 개전 초기와 비교하자면 3분의 1로 감소했고 T-34 전차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보병과 전차의 협동공격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렇듯 북한군의 병참선이 유엔군의 전략 폭격으로 파괴된 상황 덕분에 북한군 사단의 전투력은 반토막 났으며 7월 15일까지 206톤이었던 북한군 1개 사단의 1일 평균 보급량은 8월 15일 51톤까지 줄어들었다.
그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북한군은 남한 지역에서 이른바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약 47만명을 낙동강 전선의 총알받이로 써먹었다. 의용군이 북한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했는데 실제로 당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사단 병력의 3분의 1이 남한 지역에서 차출된 인원이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또한 강제로 징집된 남한 사람들 중 30만명이 수송 노무자와 철도 및 도로 보수 노무자들이었다. 그 결과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이전인 8월부터 이미 작전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고 병참선에서 과도한 신장과 전력의 고갈로 기본적인 식량, 탄약 보급까지 제한받게 되었으니 사실상 부산 함락은 커녕 여기서 군이 붕괴하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즉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으면 북한군이 부산을 함락시켜 적화통일에 성공한다는 것은 8월 이후부터는 현실성이 아예 없는 소리로 실제로 인천상륙작전 이전부터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은 조금씩이나마 방어에서 공격으로 태세를 전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9월 15일,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그리고 이때 북한군 지도부의 대응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대책 없는 꼬라박기식 공세만큼이나 그들의 총체적 무능함을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이미 중국 측은 9월부터 자발적으로 낙동강에서 철수하여 군 주력을 보존한 후에 적을 끌어들여 분할 및 타격하라는 조언도 하였지만 김일성은 전혀 귀 담아듣지 않고 오로지 낙동강 방어선 돌파에만 혈안이 되었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에 들어와있는 소련 군사고문단을 통해 김일성에게 4개 사단만이라도 북상시켜서 서울 주변의 방어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결국 김일성은 2개 부대만 북상시켰다. 참고로 스탈린은 4개 사단 북상으로 못해도 약 3만은 모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정작 김일성의 명령으로 올라온 부대는 제105땅크사단과 제9사단 소속 제87연대 뿐이었고 병력은 대략 3,000~4,000명 안팎이었다. 이는 오로지 김일성이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한 것을 너무 가볍게 봤기 때문일 것이다.
북진하는 국군 더욱 심각한 문제는 9월 21일, 23일, 25일 잠시동안을 제외하고 9월 20일부터 29일까지 낙동강 전선사령부, 군집단사령부와 북한군 지도부가 있는 최고사령부 간의 통신 연락망이 두절되었던 것이다. 결국 전선의 전황에 무신경했고 또 적시에 명령을 내리지 못했던 나머지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14개 사단은 그대로 포위망에 빠져버렸다. 게다가 북한군은 남한 지역 점령 후부터 후방에서 무작정 예비연대들을 확충해댔고 그 결과가 수많은 포병 전력과 장비들이 분산 배치됨으로써 오히려 수만 많고 사단 한 개당 전투력은 보잘 것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 체계 자체가 심각한 혼란에 빠지면서 무소용이 되었고. 어쩌면 김일성이 그 놈의 낙동강 방어선 돌파하고 부산 점령하겠다는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던 상황상 북한군은 낙동강에서의 주력 부대 철수 시기를 놓치고 파멸적인 결과가 오는 건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인천상륙작전이 끝난 후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면서 북한군이 대규모로 후퇴한 것은 다들 알텐데, 오늘날 북한에서는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 중공군 개입 이전까지의 전황에 대해 조국해방전쟁의 2단계로 구분하면서 북한군이 "전략적 후퇴"를 통해 주력을 보존하고 새로운 후비부대를 편성해 반격을 준비했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전략적 후퇴와는 영 거리가 멀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데 실제 북한군은 당시에 전략적 후퇴를 통해 전열을 재정비하는 쪽보다는 사실상 패주하고 있는 패잔병 쪽에 훨씬 더 가까웠다. 국내에서도 가끔 북한의 이러한 주장들을 가져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어디까지나 전략적으로 후퇴한거지, 결코 패퇴하는게 아니었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솔직히 쉴드칠 걸 쉴드쳐야지....북한군 지도부가 6.25 전쟁 시절에 심각한 군사적 무능을 보였던 사실은 다른 곳도 아니고 스티코프나 라주바예프 같은 당시 북한에 있던 소련 측 고문 자료에 다 나와있는데 어디서 야바위를 치나?
아직 서울 수복 이전이었던 9월 26일 소련군 장성인 마트베예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암호 전문에는 당시 북한군의 상황이 괴멸 직전이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 서부(서울)과 남동부(부산)으로 파병된 북한군은 상황이 어려워졌다. 서울에 있는 적의 탱크부대는 충주지역에서 전과를 거두었으며 이로인해 인민군 제1군이 포위될 위험에 처해있다. 인민군은 주로 미 공군에게 큰 손실을 당하고 거의 모든 탱크와 대포를 상실한 채 힘겨운 전투를 하고 있으며, 수송시설 등이 크게 부족한 상태이다. 무기도 탄약도 부족한 형편이다. 통신체계가 마비되어 상부에서 하부로의 명령도 잘 전달되지 않는다. "
9.28 서울 수복 직후 중앙청에 태극기를 거는 국군 이 전문으로 보았을 때 북한군은 결코 전략적 후퇴가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군 공식 전사는 소백산맥을 통해 자강도로 북상하거나 태백산 줄기를 따라 38선 이북으로 넘어갔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의 진실은 뭘까? 일단 북측 주장으로는 10월 10일 기준 38선 이북으로 철수한 북한군은 93,000명이고 얼핏 보기에 많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병력은 긴급한 인원만 보충한 것이고 지역별로 7월에 동원되어 목총으로 훈련받던 독립연대들이 상당수였다. 게다가 이 수치가 순전히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후퇴한 수치로 보기도 조금 무리인 것이 9월 기준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이 98,000명이었고 이달부터 10월까지 2달에 걸쳐 잡힌 포로 수가 약 60,000명이었다. 또 11월에 추가로 잡힌 포로 수는 35,000명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북상에 성공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 성공한 케이스는 대부분 과거 의용군 명목으로 징집되었던 남한 지역 출신들일 것이고 따라서 9만명 가량이 전투병력 후퇴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북한군은 절대 조직적으로 후퇴한 적이 없었다. 문화부사령관 김두환의 보고에 의하면 후방과 연락이 단절되고 따라서 보급도 받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부대 전체 사기가 떨어지니 지휘관들이 사복을 입고 전장에서 사라지고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9월 29일 스티코프는 그로미코 외무차관에게 상부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의 혼란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김일성이 이전에 군대를 조직적으로 퇴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기강 해이와 명령불복종 등으로 인해 미군이 제1군을 차단했으며, 문경과 제천에서의 붕괴로 인해 제2군도 차단되었다. 김일성은 미군이 38도선을 넘어 진격해 올지에 관해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물었다. 본인은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북한이 38도선 방어를 위해 신속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
초대 북한 주재 소련 대사였던 스티코프. 그가 남긴 기록들은 훗날 한국 현대사와 북한사 연구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이어지는 보고에서 스티코프는 미군이 6개 사단과 2개 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을 완전히 차단하고 공주 지역으로부터 진출하여 7개 사단으로 편성된 제2군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고 하였다. 그는 서울은 유엔군에 의해 수복되었고 38선을 향해 진격하는 연합군에 반격할 준비가 있는 군대가 없다고 지적했다. 왜냐면 북한 지역에서 새롭게 편성된 부대들은 수송수단의 파괴와 부족으로 전선으로의 이동 속도가 매우 저하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때 스티코프는 김일성에게 실망감을 드러내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본국인 소련에 보내기도 하였다.
" 예전에 그(김일성)는 아무런 문제 없이 군을 조직적으로 후퇴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내에는 군기문란과 명령불복종 사례가 만연하여 적은 아군 제1군집단을 분단시키고 문경과 제천을 돌파함으로써 제2군집단마저도 분단시키고 있다. "
결국 10월 1일이 되어서 스탈린은 주 북경 대사를 통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중국 측의 지원 및 개입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낸다. 재미있게도 이 전보를 보면 당시 소련 측은 오늘날 북한이 주장하는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북한군의 전략적 철수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못 박고 있다.
" 모스크바는 이미 지난 9월 16일 미군의 제물포 상륙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북한군 제1군, 제2군을 북쪽의 후방과 차단시키려는 목적을 띠고 있다고 북한 동지들에게 경고한 바 있다. 모스크바는 남쪽으로부터 4개 사단을 신속히 이동시켜 서울 북쪽과 동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점차 남쪽에 있는 군대의 주력을 북쪽으로 이동시켜 38선을 지킬 것을 권고했었다. 그런데 제1군, 제2군 사령부는 부대를 북쪽으로 이동시키라는 것에 대한 김일성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으며(다만 이 부분은 정보 부족인지 살짝 오류) 이로 인해 부대가 차단당하고 포위당하게 된 것이다. 서울 지역의 북한 동지들에게는 반격을 가할 수 있는 부대가 없으며 38선을 향한 길은 이미 열려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
38선을 돌파한 국군 이후 스탈린은 "철수 작업은 중요한 일, 즉 지휘관들을 북쪽으로 철수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 상황에서는 남쪽에 남아 있는 부대들에게 우선 지휘관들부터 단체로든 개별적이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북쪽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해야 하고 이 지시를 이행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북한 지도부에 지시했다. 이는 다른 의미로 보자면 일단 급한 불부터 끄라는 말로 당시 북한군에게는 부대 편제를 유지하면서 북쪽으로 철수할 정도의 여력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전략적 후퇴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어떤 꼴이 되었는지만 알아도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중공군이 개입하기 직전인 10월 20일 스티코프가 소련군 총참모부에 한 보고는 오늘날 전략적 철수를 통해 전열을 정비했다는 주장이 있는 당시 북한군의 상태가 실상은 어떤지 잘 보여주고 있다.
" 인민군의 마지막 부대와 기관이 평양을 떠났다. 적에 대한 저항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만주에서 건너온 중국군 덕분으로 총사령부가 압록강 쪽으로의 적 진출을 저지하려 하고 있다. 또한 낙오된 인민군 부대와의 통신 재개도 시도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령관과 장교들은 부대에 대한 통솔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다. 사실상 인민군 부대 전원이 몰살됐거나 전원이 포로가 된 상태이다...(중략) 김일성은 현재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이며 정부도 군대도 통제할 수 없는 정도이다. "
종합하자면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한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전략적 철수라기보단 일방적인 패주에 가까우며 스티코프 같은 소련측 인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애초부터 전략적 철수를 할 정도의 여유조차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한 번으로 군대 자체가 붕괴 위기를 맞는 등 이런 파멸적인 패배의 책임은 김일성과 북한 지도부에게 있다. 차라리 중국 저우언라이의 조언이라도 듣고 낙동강 방어선을 축소하여 병력을 절약하고 절약된 사단 몇 개를 서울로 투입해 후방 예비부대들과 함께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을 방어하는 사이에 신속하게 낙동강 방어선 부대들을 북쪽으로 이동 후, 유리한 지형에서 방어선을 형성하여 차후를 기약하는게 아마 북한군의 현실적인 환경을 고려했을 때 가장 최선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과 그 이후에 북한군이 보인 추태는 결과적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남북한에서 미군과 이제 막 개입한 중공군으로 옮겨가게 하였으며 6.25 전쟁이 미중 간의 국제전으로 발전하게 하는 것의 시작이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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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창일 외,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김철수, <그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미디어, 2013
서상문, <6.25전쟁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6
김광수, <인천상륙작전과 북한군의 대응>, 육군군사연구소, 군사연구 (130), 2010
김광수, <낙동강전선에서 패배이후 북한 인민군의 재편과 구조변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59호, 2006
이상호, <인천상륙작전과 북한의 대응- 사전인지설과 전략적 후퇴에 대한 반론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59호, 2006
김대성,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요인에 대한 군사전략적 분석 - 기동전략과 소모전략을 중심으로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106호,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