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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Nov 18. 2023

현리 전투 참패는 과연 유재흥 장군의 책임인가?

진짜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투지경선 문제였다

https://youtu.be/hvQCCGaLRV4?si=0av_ShiVZLvWLMJw

사실 호국 보훈의 날인 6월에 기념으로 쓸까 생각했었던 글을 이제야 다시 써보겠다. 바로 현리 전투에 대한 유재흥 장군의 책임론인데 이 전투는 한국군 역사상 가장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되었으며 하필 당시 지휘관이었던 사람이 유재흥 장군이었기에 그에게 책임이 더더욱 쏠리는 것도 있다. 특히 유재흥 장군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 친일파 딱지 씌우기도 너무 좋은 환경이라 한동안 그는 계속 "무능한 친일파 군인"이라는 박한 평가를 받아왔었다. 또 뭣보다 현리 전투 때문에 전작권이 미군한테 넘어갔다는 낭설도 곳곳에서 퍼져있는 상태. 심지어 일각에서는 자기 부대를 버리고 도주한, 그야말로 한국군판 무다구치 렌야급의 졸장으로 비하하기도 하는데 진짜 그렇게까지 유재흥이 까일 만한 이유를 난 모르겠다.


현리 전투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1951년 5월의 공산군 공세에서 국군 제3군단이 중공군, 북한군 3개 군단의 공격을 받고 방어에 실패하여 하진부리 부근까지 후퇴한 사건이었다. 5월 공세는 중공군 54만 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세였으며 이때 중공군은 미 제10군단 우측의 국군 제5, 7사단,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수도사단, 제11사단을 공격목표로 했는데 그 중 집중 린치 대상은 강원도 인제 지역의 국군 제3군단이었다. 국군 제3군단은 중공군 2개 군단과 북한군 1개 군단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전투 발발 직후 국군 제7사단이 정면에 집중 공격을 받는 와중에 중공군 제20군단 예하의 제60사단 제178연대 제2대대가 국군 후방으로 진출해 국군 제3군단의 주요 보급로인 오마치고개 일대를 장악해버렸다.


오마치고개 피탈 후 퇴로를 차단당한 국군은 5월 17일까지 현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곧 이어 현리에는 국군 제3사단, 제9사단, 군단 직할부대, 제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 등 많은 병력들이 혼재했고 17일 17시 30분경부터는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때는 이미 2개 사단 규모의 중공군이 오마치고개와 참교 일대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국군 제3군단은 전방의 압력과 후방의 위협에 압도되어 부대가 분산된 채 산악지대를 따라 60km를 후퇴하였고 5월 20일 하진부리에 집결한 병력은 제9사단이 40%, 제3사단이 34.3%에 불과했고 철수 과정에서 국군 제3군단은 지휘 체제가 와해되었다. 주요 장비들은 거의 다 파괴당하거나 유기했고. 이 사건은 국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남게 되었으며 당시 제3군단의 군단장이 유재흥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지금까지도 화살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유재흥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는 게 옳을까? 나는 여기에 반대하는 게 그 이유 중 하나는 미 제8군의 책임 역시 만만치 않게 크기 때문이다. 당시 미 제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는 중공군의 배치 상황으로 보아 다음에 있을 적의 공세는 5차 전역 1단계 작전처럼 서부 또는 중부지역의 의정부-서울, 북한강 통로, 그리고 춘천-홍천 축선이 주공이 될 것이라 보았다. 다만 중공군은 공세 방식의 패턴에서 보듯이 당시 전선의 돌출 상황이나 국군 부대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선정했는데 사실 서울 점령 때야 정치적 목적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주공을 맡게 했지만 중공군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유엔군의 화력이나 기동성이 제한되는 중-동부 산악지대가 주공으로 더 적합한 지역이었음은 분명했다. 게다가 미 제8군 사령부의 제공권 및 탐지능력이나 중공군 2개 병단의 준비기간이 촉박했음을 볼 때 중-동부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가 있을 것이라는 건 눈치채기 쉬웠다.


문제는 미 제8군이 공세 직전에 유엔군의 주력부대를 서부와 중앙 지대에 집중했다는 것인데 당연히 그에 따라 국군이 담당하던 동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허술해졌다. 그렇지만 미 제8군은 홍천 동쪽에 위치한 북한군의 병력이 미약하고 태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활용해 방어진지를 구축하면 국군 6개 사단이 주저항선 진지를 고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던 탓에 대규모 중공군의 신속한 이동을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알지 못했으며 공격 당일인 5월 16일 국군 제7사단과 미 제2사단 지역으로 각각 중공군 2개 군 6개 사단이 집중될 때까지 적의 기도와 규모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 판단이 국군 제5, 7사단이 돌파당했으며 또한 제3군단의 퇴로가 차단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당시 미 제2사단은 그래도 병력의 열세를 화력으로 극복하는 것이 가능했었지만 반대로 병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국군은 1개 사단으로 중공군 6개 사단의 공격을 저지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상태였다.


공세 시작 이후로도 미 제8군이 제3군단의 퇴로 차단시에 대해 적시적인 상황판단 및 조치가 미흡했던 것도 국군 제3군단의 붕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국군 제7사단 전방으로 중공군 2개 군이 집중되자 제7사단의 돌파상황에서 미 제10군단은 제5사단과 제7사단을 17일 10시에 "No Name" 선으로 철수시켰다. 당시 국군 제3군단은 제7사단과 제5사단의 철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고 때문에 그날 오전까지 철수하지 않음으로써 제3군단 좌측으로 3,000m의 빈틈이 생겨 미 제2군과 함께 측면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당시 미 제10군단에 의한 국군 제5, 7사단 철수는 미 제8군 차원에서 철수 시기 및 지역에 대한 검토 및 조정이 이루어졌어야 했으며 철수 지점을 최소한 제3군단 주보급로 전방에서 1차적으로 저지할 수 있도록 통제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저 상황에서 전투력 전환, 전투지경선 조정 등이 이뤄지지 못한 것도 패착 중 하나다. 당시 아군 상황에서 보면 상남리 일대 중공군 2개 사단과 후속하는 제20군, 제27군의 주력이 가장 큰 위협이었으니 최초 퇴로가 차단당할 시점에서 17일 오전 중에 제5, 7사단 철수보다는 제3군단의 퇴로 확보라는 측면해서 심각하게 상황을 인지하고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참고로 미 제2사단이 돌파되었을 때는 미 제9군단이 전투지경선을 조정하고 화력운용을 전환하는 등 적극적인 조치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미 제8군 사령부 차원에서 국군 제3군단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을 바탕으로 작전적, 전술적 조치를 실행했어야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엔군 측에서 전투지경선을 개판으로 짜놨었다. 당시 제3군단은 미 제8군 작전명령상에 명시된 군단전투지경선에서 창촌-율전리-방내리-상남리-현리로 이어지는 군단 주요 보급로 대부분이 미 제10군단 관할 안에 들어가 있었다. 반면 제3군단에게는 작전지역이 고작 내린천 연변의 용포-현리 구간이 끝이었다. 당연히 군단이 보유한 전투사단의 생사를 타 군단, 그것도 외국군 군단의 전투 결과에 맡긴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제3군단의 군단장 유재흥은 군단 예비병력인 제9사단 제29연대를 동원해 1개 대대로 오마치 일대를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 제10군단 군단장인 몬드 소장이 자기 관할 지역에 국군을 배치하지 말라고 계속 항의를 했다는 것이며 이에 유재흥 장군도 지지 않고 이 고개는 자신이 이끄는 군단의 생사와 연관이 되어있을 만큼 중요한 지역이라며 신경전을 벌이게 되었다. 즉, 현리 전투 참패인 전투지경선 문제를 만든 것은 미군 측이었다는 얘기이며 오히려 졸장이라 욕 먹는 유재흥 장군은 그 상황에서도 군단을 방어하기 위해 뭔가 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얘기다.


그리고 여기서 유재흥과 싸웠던 몬드 소장이야말로 2차세계대전에서부터 진정한 졸장의 행보를 이어오던 사람이었다. 손 쉽게 끝난 이탈리아 전선에서 3천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것은 물론이고 그 책임을 자기 부대에 있는 흑인 병사에게 돌린 답 없는 인간이 바로 아몬드였기 때문. 6.25 전쟁에 와서는 맥아더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함량 미달인 주제 미군에서 고위직을 맡았고 참고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과정에서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이나 그 규모를 유엔군이 오판한 것에는 이 양반의 책임이 매우 컸다. 특히 1950년 11~12월 북진 기간 동안 미 제10군단을 너무 분산시켜둔 덕분에 장진호 전투에서 미 제1해병사단이 꽤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현리 전투에서도 전투지경선 문제로 기싸움 벌인 것 뿐만 아니라 오마치 고개 피탈 이후로도 국군 제3군단에게 알리지 않는다거나, 자신의 미 제10군단 휘하였던 국군 제5, 7사단이 중공군이 몰려오니 일방적으로 패주하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등 사실 진짜 잘못으로 따지면 몬드 소장이 유재흥 장군보다 훨씬 더 중대한 실수들을 저질렀다.


국군 제7사단(누차 말하지만 유재흥 예하 부대가 아니라 몬드의 미 제10군단 예하 부대였다)이 공세 시작과 함께 작살나버리고 살아남은 병력들이 후퇴해서 들어와 중공군의 공격을 보고했지만 정작 미 제10군단 사령부는 국군 제3군단에게 아무 일 없으니 안심하라는 보고만 남겼다. 저렇게 미 제10군단이 국군 제7사단의 방어선이 뚫리는 와중에도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중에 오마치 고개로 진출한 중공군 1개 중대는 순식간에 다음날이 되자 1개 연대로 급격히 증가했고 국군 수송트럭이 중공군에게 습격당한 후에야 몬드가 싼 병크를 유재흥이 뒷수습한다고 반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개 정상부에 중공군 1개 연대 규모 이상의 병력들이 매복하고 탓에 반격은 실패했고 그 후폭풍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유재흥이 주장한대로 진작에 제9사단 제29연대의 1개 대대를 동원해 오마치 고개를 방어하게 했다면 주요 보급로를 피탈당한 제3군단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결국 군단이 해체되는 수모를 겪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며 최초의 악화되어 거대한 대참사까지 이어지게 오마치고개의 상황을 미리 사전에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재흥이 중공군 공세가 시작된 이후에 포위망 안에 갇힌 국군 장병들을 버리고 비행기 타고 도망갔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건 명백한 헛소문이다. 정확히는 현리 전투 당시 일선 국군 부대 장병들 사이에서 퍼져서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지게 된 낭설이었고 이게 그럴싸하게 포장되서 퍼져나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애초에 군단장이 최전방에서 주둔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얘기이고 그 밑의 사단장급들만 해도 비행기 타고 지휘소나 사령부, 전선을 오가며 지휘하는게 기본이다. 당장 6.25 전쟁 당시 맥아더만 하더라도 도쿄에서 유엔군을 총괄했었고 백선엽이 사단장 시절 다부동 전투에서 권총 들고 돌격한 일화는 워낙 급박했던 상황 속에서나 가능했던 얘기였다. 당연히 사실만 따져보면 군단장급 지휘관들은 웬만해서 후방의 군단 사령부에서 근무하는게 보통의 상식이며 애초에 제3군단 군단 사령부와 전술지휘소는 당시 포위망 바깥인 하진부리에 있었다. 아마 유재흥이 군단 예하 사단장들과 작전 회의를 마친 후 비행기 타고 복귀하는 모습을 본 포위망에 있던 장병들 사이에 군단장이 우리들을 도망친다는 소문이 돌았을 것이고 이것이 곧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유재흥 탈주설의 주요 근거가 되었을 가능성이 100%.


전시작전통제권, 이른바 "전작권"이 주한미군에게 넘어간 것이 현리 전투에서 국군이 박살난 것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으나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전작권이 유엔군에게 넘어간 것은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을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에게 넘겼을 때부터였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은 주한미군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통권은 실질적으로 미군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현리 전투에서 패전한 이후 제3군단의 해체는 물론이고 육군본부가 일선 전투부대에 대한 지휘권을 박탈 당하면서 한국군만으로 구성된 군단이 편제상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따라서 현리 전투 패배를 계기로 한 제3군단 해체 이후 미군이 국군 야전부대에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전작권 이양 문제는 이미 진작에 이루어졌던 것이며 이러한 국군 제3군단 해체 작업 역시 전작권이 넘어간 상태였으니 미 제8군 측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렇듯 현리 전투에서 저렇게 무너진 건 전투지경선을 저따위로 구성해놓고 미군 부대라는 이유로 미 제10군단 및 무능한 알몬드 소장 편만 들어준 결과 공세 직후에 구멍이 뚫리게 만든 것은 미 제8군이었다. 그래도 알몬드는 참패 책임을 지고 군단장직에서 해임되었지만 정작 미 제8군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사과 한마디는 커녕 오히려 유재흥 장군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며 제3군단을 해체해버렸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오늘날까지도 현리 전투 이야기가 언급되면 밴 플리트 미 제8군 사령관과 알몬드 미 제10군단장은 거의 욕을 먹지 않는 반면 오로지 유재흥 장군만 비난받고 있다는 것도 있다. 이처럼 현리 전투의 책임을 유재흥 혼자 덮어쓰는 것도 모자라 그의 예하 부대이자 국군 전투부대만으로 구성된 제3군단마저 해체 후 미 제8군에 예속시킨 것은 당시 우리가 너무나 미약했던 약소국이었던 현실 속에서 미군의 실책까지도 우리나라 군 장성에게 책임 떠넘기기를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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