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서는 최근 한강교 폭파에 대한 일종의 재평가 바람이 불고 있는 중이다. 특히 보수 진영에서 그러한 느낌이 강한 편인데 만화가 윤서인이 운영하는 인라이트 스쿨이나 윤할...아니 윤루카스라는 유튜버는 저때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한강 인도교 폭파를 애써 옹호하는 이유는 사실 다른 건 없고 진영논리로 이승만이라는 전직 대통령을 깎아내리는 것에 맞서다 보니 저러는 것인데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둘째 치더라도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을 옹호하는 건 솔직히 너무 오바한 것이라고 본다. 단순히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민간인 죽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실익적, 전황적 관점에서도 국군과 대한민국 정부에게 도대체 어떠한 도움이 되었냐는 말이다.
사실 한강 인도교 폭파의 가장 큰 문제는 폭파했다는 것 그 자체보다도 폭파를 시작한 시점과 수뇌부의 무능이 빚어져서 저런 참극이 벌어졌다는 것에 있다.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던 채병덕 소장은 26일 오전까지 "서울 사수를 위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의정부를 지켜야 한다"며 예하부대를 독려했다. 그 시점에서 한강 이북에서는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제1사단이 북한군 제1, 6사단, 제203전차연대를 개성-문산 방면에서 막아내고 있다거나 포천시-동두천시-의정부 일대에서 유재흥 장군의 제7사단이 북한군 제3, 4사단, 제105전차여단을 상대로 분전을 치르는 등 남침에 맞선 국군의 저항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채병덕의 이러한 발언은 국군의 항전 의지를 잘 보여주는 듯 했으나...
문제는 국군 수뇌부가 북쪽으로 이동시킨 사단들이라는 귀중한 자원을 어떻게 방어전에 투입해야 좋은 효과를 얻을가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뭐, 이건 전쟁 전 육군은 최대 훈련이 고작 연대급 훈련이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어쩔 수 없던 측면도 있긴 했지만. 하여튼 채병덕 참모총장은 일단 무너지는 전선을 어떻게든 틀어막겠다는 생각에만 골몰해서 후방에서 전개한 부대들을 도착하는 순서대로 즉시 의정부에 투입하라고 명령했는데 이것은 마치 방화선을 구축하여 근본적으로 불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단지 물 한 양동이씩 거센 산불을 향해 뿌려대기만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결국 이러한 예비대의 축자투입은 의정부 방어 실패를 넘어 서울 함락과 국군 주력의 소진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한강교 폭파 이후 사진 그 상황에서 6월 27일 10시에 창동방어선이 무너지자 북한군의 서울 진입은 시간 문제가 되었고 결국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해 국가 지도부들은 서울을 몰래 빠져나왔다. 그러자 채병덕은 어쩔 수 없이 방침을 바꾸어 서울 사수 결심을 번복하고 육군본부를 시흥으로 이전하여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저항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막상 한강 이북에서 고군분투하던 부대들의 효과적인 철수 작전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의정부축선으로 남하한 전쟁 발발 직후의 북한군은 제3, 4사단, 그리고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2개 연대였지만 그에 비해 국군은 제7사단과 후방에서 긴급 전개한 제2, 5사단, 그리고 수도경비사령부의 4개 사단이었다.
비록 화력은 북한군에 비하면 열세였지만 당시 미아리 고개를 경계로 하여 대치 중인 피아간의 병력 규모는 비슷하였으며 만약 이들이 안심하고 시가전을 치를 수 있도록 지원 조치를 하다거나 혹은 안전하게 한강 이남으로 빼내어 새롭게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대안 계획이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국군 수뇌부들은 그저 대통령이 도망가니 안전지대로 피신한 게 끝이었기에 그러한 대안을 생각해내지 못했고 결국 국군 역사상 최악의 무책임한 지휘의 절정인 6월 28일 02시 30분에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는 작전을 펼치게 된다. 이 작전은 아무런 통제나 대피도 없이 시행되었기에 피난민과 철수하던 몇몇 경관, 헌병대원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강 인도교 폭파 시점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은 T-34 전차는 단 2대에 불과했으며 국군의 대다수 주력부대는 여전히 한강 이북에서 치열한 교전 중이었다. 이때 한강 이북에서 작전 중인 부대들은 제1, 2, 5, 7사단과 수도경비사령부였는데 한강교가 하필 이때 폭파되어 버리면서 이들 부대의 철수로가 자동으로 차단되어 버렸다. 제1사단의 경우 28일 새벽 한강교가 폭파된 사실을 모른 채 반격으로 전환하여 위전리까지 진출해 최후 방어선을 다시 확보하고 지형을 활용한 축차적인 방어선을 이용해 방어전을 이어갔지만 다리 폭파와 함께 철수로가 차단당하면서 제1사단의 사단장 백선엽은 이산포와 행주나루를 이용해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한 뒤 30일까지 시흥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사단에게 자체적인 도하 장비는 물론 우발적인 상황에서의 도하 계획도 없었다는 것인데 결국 개인화기만 휴대한 채로 뗏목이나 민간 어선을 통해 개별적으로 도하할 수 밖에 없었다.
6.25 전쟁 초기 국군 강북에 있었던 다른 부대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강 이북에서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고 적과 싸우고 있던 국군 부대들의 퇴로가 차단됨으로써 강북에 있던 부대들은 중화기와 차량, 곡사포, 박격포, 기관총 등 대부분의 무기들을 유기한 채 나룻배 같은 소형 선박이나 심지어 수영을 해서 개인 및 소부대 단위로 한강을 도하해야 했다. 그러나 서부 및 중서부 전선에 투입되었던 105mm 곡사포 45문(총 91문) 중 한강을 도하한 것은 3문 뿐이었다. 그나마 광나루, 뚝섬, 한남동과 서빙고의 도선장, 마포, 및 서강 나루터, 행주와 이산포 나루터 등으로 도강한 장병들이 28일 밤과 29일 아침 사이 시흥과 수원에 집결했고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편성되어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게다가 한강교 폭파 이후 각 부대들이 도하하는 과정에서 국군의 부대 편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병력도 개전 당시의 약 10만명 가량이 2만 5,000명으로 급감하게 되었다.
차량의 경우에도 원래 보유한 차량 2,766대 중 1,318대, 휘발유 2만 갤런이 그대로 북한군의 손에 넘어갔으며 M1 개런드, 아리사카 소총류의 라이플 개인화기들도 1만 정 가까이가 방치되어 있다가 북한군이 노획하게 되어 훗날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의 전력에 기여를 하게 되었다. 참고로 군수지원 측면에서도 군량미의 상당수를 그냥 증발했던 건 덤이다. 윤서인이 그렇게 영웅으로 숭상하는 백선엽조차도 훗날 한강교를 순식간에 통보도 없이 끊는 바람에 당시에 제1사단 전투 병력의 60% 가량의 손실을 입었으며 모든 중화기를 포함해 대량의 장비들을 내놓고 올 수 밖에 없었다고 회고하면서 전쟁 초기 국군의 중대한 실수로 규정한 바 있었다. 이는 사망 전 가장 최근 회고록이자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에도 나오는 부분이다. 물론 백선엽은 채병덕이 실전 경험이 없었던 것을 근거로 그 당시 국군의 실력이 태생적으로 낮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보긴 했으나 그럼에도 큰 아쉬움이 남는 결정이자 중대한 실수라고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강교 폭파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과격하게 말하자면 "운빨"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첫번째 이유는 신속한 미군의 개입이었다. 개전 초기까지 국군은 의외로 지형을 활용한 방어선을 구축해 방어전을 이어가고 육탄공격으로 때로는 적 전차도 격파하거나 필요시에는 반격 작전으로 먼저 칠 때도 있었다. 이는 기습을 당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이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조직적인 저항을 지속하고 있던 상황에서 한강 이북에 대부분의 방어 병력이 버티고 있음에도 채병덕 참모총장은 너무 급하게 한강교를 폭파시키는 짓을 저질렀고 이는 자해였다. 이로 인해 국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까지 편제가 와해되어 저항 능력을 크게 상실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만약 미군이 제때 개입하지 못했다면 진짜 위험해졌을 수도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북한군 전차부대 그리고 다른 이유이자 그래도 한강교 폭파 사건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라면 그건 순전히 김일성이 병X짓해서 그렇게 된 것도 있다. 먼저 김일성은 한강의 전략적 중요성을 전혀 몰랐다. 전쟁 초반에 기습 남침으로 주도권을 쥔 것 뿐만 아니라 고속 기동부대인 제105전차여단을 가지고도 그런 것인데 6월 27일 무렵에 김일성을 한강교 점령 대신 중앙청을 비롯한 서대문형무소와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려버린다. 일찌감치 빈약한 전력을 가진 덕분에 국군이 막기 힘들었던 T-34 전차를 상당수 가진 제105전차여단은 마음만 먹으면 한강 인도교를 점령하여 한강 이북에 남아있던 국군 전력을 모두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도섭 장비가 넉넉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저런 실책을 저지르다가 그 타이밍에 국군 지휘부가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덕분에 누가봐도 국군이 조급하게 너무 빨리 저지른 병크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군의 진격을 지체시키는 순기능을 낳기도 했다.
북한군의 소련 군사고문당장 라주바예프 중장은 전투결과 분석 보고서에서 "인민군 각 사단장들이 서울에서 퇴각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을 점령하지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모호하게 행동했다. 또한 제105전차여단 예하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라고 상황을 질타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은 북한군이 좀만 더 전략적으로 움직여서 한강교를 주요 시설보다 먼저 확보했다면 국군의 퇴로가 차단되어 섬멸적 타격을 입혀 주력을 조질 수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결국 북한군은 국군을 포위해 섬멸하는 군사적인 목표보다 서울 인민위원회를 설치하는 등의 정치적 행보를 더 우선함으로써 저렇게 진격이 지체된 것도 있다.
1956년 소련군 총참모본부의 한국전쟁 분석도 당시 북한군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소련군 총참모본부가 꼽은 공격속도 둔화의 원인은 북한군 총참모부의 지휘 결함으로 총참모부가 직접 사단을 통제하려 한 점, 북한군 제1, 2군단 간의 단결력 부족, 적절한 통신수단 부재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북한군 예하지휘관들은 상급 및 인접부대와 협조된 통신지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예하부대에도 적극적으로 지휘통제하지 않았으며 정찰임무도 게을리했다고 지적했다. 만일 북한군이 서울 방향의 국군을 포위 섬멸했다면 그로 인해 북한군에는 아주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고 이후 작전은 더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게 소련군 측의 평가이기도 했다.
사실 한강교 폭파가 전략적인 관점에서 필요한 일이긴 했다. 철수 작전시 적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조치는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국군 병력 상당수가 한강 이북에서 지연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무작정 다리부터 끊어버린 게 최악의 실수였던 것이다. 이게 진짜 큰 문제는 한강교를 끊은 결과가 미군사고문단(KMAG)조차도 한강 이북에 고립되어 버리는 최악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며 만약 이때 김종오 대령과 제6사단이 춘천에서 북한군 2군단의 공세에 무너졌다면 그대로 후방 포위 당해 국군 주력이 다 궤멸 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대로 남쪽까지 빠르게 다 뚫릴 게 뻔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한강교 폭파는 군사적 관점에서도 최악인 결정이었으며 미군이 신속하게 오지 않았거나, 김일성이 헛짓거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제6사단이 춘천 전투에서 패배해 전멸 당했다거나 했으면 국군 주력에 더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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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라주바예프 저, 전현수 외 역, <소련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25 전쟁 보고서 제1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