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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Jul 31. 2023

일본군은 결전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나?

실패한 전쟁사-외전

https://youtu.be/lxPSJvEWRvI?si=jYTYANLQ2r78LWrg

https://brunch.co.kr/@a346abd5a67a4ed/449

태평양전쟁에 대해 전에 한번 정치적, 내부적 배경에 대하여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사보섬 해전이라던가 미드웨이 해전의 카가 항모에 대해 잠시 얘기하고 갔었지만 구체적인 전투에 대해선 다루진 못했다. 뭐 전투의 세세한 전황으로 들어가면 이 분야에 널린게 전문가이기에 그 정도까지 파고들진 않을 것이고 대신 단기전을 원하던 일본이 과연 태평양전쟁 초기의 주요 결전에서 이겼다면 그들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또 이 글 속 고찰을 통해 단순히 일본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걸 넘어 당시 일본 군부 상층부의 대미전 작전 계획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도 짚어보고자 한다. '실패한 전쟁사'를 쓰면서 군사적인 부분은 최대한 제외하고 정치적, 역사적, 국제적 맥락에서만 다뤘는데 이번 글은 정치적 배경 그런 거 없이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얘기해보겠다. 

불가능한 하와이 점령


야마모토 사령장관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한 이유 중 하나는 하와이 점령을 위한 발판 마련이었다. 또한 존 스테판의 <Hawaii under the Rising Sun>에서도 일본군은 예전부터 하와이 침공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으며 1942년 9월까지도 하와이에 대한 상륙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만약 일본군이 미드웨이를 점령했다면 하와이까지 진출하는게 가능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예측 가능한 조건 하에서는 당시 일본군은 절대 하와이를 점령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인데 먼저 막강했던 미군의 하와이 방어 전력을 봐야 한다.

1942년 4월 하와이 주둔 미군 지상병력은 6만명이 넘었고 육군항공대는 8,900명이었다. 거기다가 미 육군은 빠른 시일 내 육군 지상군과 항공대 규모를 11만 5,000명까지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참고로 이 수치는 해군 전력은 제외한 결과이다. 대부분의 병력은 오아후 섬에 주둔했는데 이 섬은 기동방어전을 펼치기에 좋은 지형이었다. 반면 일본군은 하와이를 점령하는데 필요한 전력을 3개 사단에 4만 5,000명이라고 보고 있었는데 이건 턱 없이 적은 병력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일본군은 7,000km가 넘는 곳을 가로질러 이 규모의 병력을 수송할 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고 설령 어찌 저찌해서 섬을 점령한다고 해도 워낙 본토와는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라 보급을 충분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 해서 수송 선단을 확보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일본군은 미군의 방어를 뚫고 상륙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군에게는 상륙작전 지원에 필요한 함포 사격이나 항공지원에 대한 교리가 없었고 오아후 섬의 크기와 미군 방어선의 깊이를 생각해보면 우회기동은 불가능하기에 정면 공격만 가능했다. 당연히 과달카날의 사례처럼 저 상황에서 정면 돌격했다간 바로 박살날테니 성공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다. 더욱이 일본군은 항공모함들로만 하와이의 제공권을 얻어야 했다. 약 2,000km나 떨어진 미드웨이에서 하와이 상륙 작전을 지원하는 일은 말도 안되니 말이다. 거기다 일본군 기동부대는 전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도 수주일 동안 적대수역에서 전투를 하며 적을 굴복시킬 수준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942년 4월 하와이에는 275기의 작전기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늘어가고 있었다. 또 새러토가와 와스프가 작전기들을 추가로 수송해올테니 일본군은 항공모함 6척을 죄다 끌고 왔어도 하와이 주둔 미군기와 비슷한 수의 비행기들을 가지고 전투를 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하와이 해역에서 항공모함들이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보급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1941년 12월 이후 일본군 점령지들에 공업지대가 전무하다는 부분도 눈여겨 볼 만하다. 당장 독일만 하더라도 체코슬로바키아 공업지대와 프랑스 파리, 생나제르 조선소, 루마니아의 유전지대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태평양 지대에서 구축함 이상의 군함을 만들 수 있는 조선소가 없었다. 규슈 이남의 일본군 점령지 중 쓸 만한 드라이독은 기껏해야 싱가포르 정도가 전부였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획득한 자원들도 일본으로 싣고 가야만 완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치명적인 문제점이었다. 거기다가 일본 본토의 공업지대는 1930년의 군비 확장 기간 동안 생산한계점에 도달해 있었고 생산잠재력이 충분한 미국과는 달리 일본은 단기간 내 설비를 확충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무리하게 확장했던 남태평양 지역은 자원 획득 관점에서 불모지였다.

따라서 일본군의 하와이 점령은 불가능한 목표였고 적어도 당시 일본의 역량으로는 접근도 힘들었다.

일본군의 미드웨이 점령 가능 여부에 대한 고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해전에서 승리했다 쳐도 이미 미국 쪽에서 미드웨이에 미 해병대 약 3~4천명이 병력들을 화력을 강화시키고 방어선을 잘 구축 해놨는데다가 일본군은 합동작전능력이 부족한 상태인지라 상륙 성공은 무리라고 본다. 또한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상 상륙시 함포 지원은 중순양함들 위주로 맡게 되는데 일본 해군 중순들은 화력이 떨어지는데다가 지상포격 경험이 잘 없어서 명중률이 좋지 않을게 뻔하고 심지어는 함정과 상륙부대 통신에 관한 교리도 없었다.

거기다가 미드웨이 지형상 조수간만의 차가 20cm 밖에 안되기 때문에 상륙부대들은 해안선에 180~360m 정도 떨어진 곳에 상륙주정에서 내려서 산호초와 미군의 화력을 뚫고 걸을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저런 곳에서의 전투는 미군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미군은 타라와 전투 때 상륙장갑차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해상 지원도 나름 넉넉하게 받았기 때문에 상륙에 성공할 수 있던건데 이런 곳에서 상륙작전을 할 때에는 상륙장갑차가 있느냐, 없느냐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무엇보다도 미드웨이는 방어가 잘 되어 있는 곳 중 하나였다. 방어 시설들의 상당수는 강화 콘크리트로 세워졌고 병력들을 위한 참호와 포대도 잘 은혜되어 있었고.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공격대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미드웨이 내 미군은 눈에 잘 띄는 몇몇 시설만 피해를 입었고 파괴된 중포도 없었고 사상자도 별로 안나왔다. 당연히 해전을 어찌저찌 해서 이기고 몇번 더 폭격 때린다고 해서 쉽게 무너질 곳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해안가는 철조망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지뢰까지도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대 전차용 급조 폭발물까지도 추가로 있었다고 한다. 즉 상륙하는 측은 난사되는 기관총 탄과 퍼부어대는 박격포 탄들을 받으면서 지뢰밭을 지난 뒤 철조망을 뚫은 후에야 섬 내부에 진입할 수 있다는 얘기. 근데 정작 일본군 상륙부대가 보유한 무기는 고작 소총, 척탄통, 기관총 정도가 전부였었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만 보더라도 미군의 방어선은 미드웨이보다 급조된데다가 더 허술했었다. 그런데도 이치키 선발대는 테나루 강 전투에서 해병 1개 대대를 상대로 700명 이상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사실상 궤멸되었으며 피의 능선에서도 가와구치 지대가 무턱대고 돌격하다가 600명이 사망한 채 패배했는데 이것만 봐도 일본군이 상륙한 다음에 무슨 꼴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그러니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이겼다고 해도 함정과 상륙부대 길의 통신체계가 전무하고 상륙장갑차도 없는 상태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당시 끌고 나온 전력으로는 해전까지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상륙은 글쎄다...? 아마 산호초 지대에서 미군의 화력 집중을 받아서 싹 다 궤멸되고 해상에서 함포 지원하려던 중순들도 자칫 하다간 해안포 맞고 뒤로 빠질 수도 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건 나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일본군은 해전에서 몇번 승리했더라도 하와이 이전 미드웨이에서 대패했을 것이다.

보론: 미드웨이에 대한 오해


6월 4일 20~25분에 일어나 승패를 결정지은 미군의 급강하폭격 직전에 일본 항공모함들은 총반격을 위해 몇 분 내로 공격대를 발진 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나?


- 사실이 아니다. 미군이 급강하 공격을 시작했을 때 일본군은 30분 후에나 공격대를 발진시킬 수 있었고 비행 갑판에는 항공기가 몇 기 없었다.


알류산 작전은 미 함대를 진주만에서 유인하려는 고도의 술책이었다?


- 사실이 아니다. 미드웨이 작전과 동시에 개시된 알류산 작전은 미군이 다른 곳에서 바쁜 기회를 활용하여 목표물을 차지하려는 의도였다. 알류산 작전은 알류산 열도의 점령이 목적인 독립된 작전이며 전략적으로 시기가 정해진, 미드웨이의 양동작전은 아니었던 셈.


미드웨이로 이동하던 중 야마모토가 미드웨이 해전 결과를 바꿀 수도 있는 정보를 나구모에게 주지 않음으로써 미드웨이에서 일본군을 기다라는 위협을 전혀 몰랐다.


- 이것도 사실 아니다. 야마모토가 나구모아 직접 교신하진 않았지만 기동부대는 도쿄의 제1연합통신대로부터 적시에 모든 정보를 받을 능력이 있었다. 전투 전 적정평가는 나구모가 대부분의 주요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왜 나구모가 이 정보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는지는 미스테리.


만약 6월 4일 아침에 일본군이 2단 색적을 실시했다면 미 해군 기동부대를 발견해 승리했을 것이다.


- 맞는 말인데 1942년 당시를 기준으로 일본군이나 미군이나 2단 색적을 교리에 포함시키지 않았기에 정찰계획은 선택지에 없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나구모가 기울인 노력은 도네 4호기 발함 지연으로 실패했다.


- 도네 4호기 발함 지연과 기장의 독단으로 나구모는 예상보다 일찍 미 함대를 발견했으며 정찰 실패는 일본 잠수함들이 초계선에 늦게 도착하고 K작전이 실패, 특히 지쿠마 1호기가 6시 15분 전에 미 함대를 발견하지 못한 탓이다.


나구모가 육용폭탄으로 무장을 교체하지 않았다면 발견 즉시 미 함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 틀린 말. 미군을 발견했을 때 예비공격대는 비행갑판에 배치되지 않았다. 배치작업에 걸린 시간을 고려했을 때 도모나가가 돌아오기 전에 나구모가 공격대를 발진시켰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미군이 끊임 없이 공격했으므로 도모나가가 돌아오기 전에 전 적시에 공격대를 비행갑판에 배치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미군의 공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는 직위기기 발함과 착함을 반복했기에 갑판 위의 공격대 배치가 불가능했다..


일본 해군 항공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 사실이 아니다. 비록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를 잃었지만 즈이카쿠와 쇼카쿠, 운류급 같은 정규 항모를 포함해 치토세급, 호쇼급 등 경항모, 그리고 다이호 같은 장갑항모도 다수가 있던 상황이다. 다만 정예 조종사를 상당수 잃은 것은 사실이고 이후 솔로몬 제도의 장기 소모전을 거치며 일본 해군 항공대의 정예는 박살, 레이테만에서 사망선고를 받는다.

과달카날 전투는 애초부터 잘못 되었다


과달카날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은 32,000명으로 전사자가 12,500명, 부상을 입고 죽은 장병이 1,900명, 병으로 죽은 장병이 4,200명, 실종 장병이 2,500명이었다. 이에 비해 미군 희생자는 총 병력 60,000명 가운데 전사자가 1,000명, 부상자가 4,245명이라는 일본군에 비해 굉장히 적은 희생을 치뤘고 아사한 미군 장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과달카날의 해전과 선단 호송 작전에서 일본 해군은 구축함 19척 침몰, 손상 88척이었고 항공기 손실도 약 850기에 달했는데 이는 미드웨이의 피해를 복구할 기회조차 날린 셈이다.


미군에게 과달카날 전투는 상당히 중요했다. 만약 여길 확보한다면 더슨 비행장을 활용해 뉴기니의 미군과 호주의 해상 수송로를 위협하는 일본군 거점을 공격할 수 있었다. 동시에 과달카날 섬을 라바울 공략의 발판으로 삼아 일본 본토를 노릴 수도 있었고. 그러나 일본은 어디까지나 태평양의 듣보잡 섬보다 중국 대륙에서의 충칭 공략이 더 중요했다. 대본영의 입장에서는 충칭과 인도양 방면을 공략한다면 미국의 해상 지원로를 차단하고 라바울과 뉴기니 동부에 역점을 둘 수 있다. 따라서 해군의 솔로몬 해역 작전은 육군으로서 딱히 중요하지도 않았고 제2부 제6과 주임참모 스기타 이치지 중좌는 태평양보다 소련령 극동지역과 인도차이나가 더 중요하다 했다.


한편 해군은 미 해군 함대 주력을 솔로몬 해역 부근으로 유인한 뒤 격파해 전쟁을 끝내려 했는데 결전을 성공시키려면 항공 기지인 과달카날을 탈환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 해군도 미군의 상륙을 예측하지 못했고 태평양의 각종 섬 제도를 둘러싼 공방전을 어떻게 펼칠지 연구가 딸렸다. 일본군에게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전략상 밑그림과 현실 인식은 없었으며 당연히 육해공 합동 작전이 이뤄질 수 없는 구조였다. 따라서 이치키 분견대, 가와구치 지대, 아오바 지대, 제2사단, 제38사단 등의 전투 부대를 순차적으로 투입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과달카날 전역의 일본 육군은 병참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한마디로 보급이란 적에게서 빼앗거나 현지에서 조달하는 식이었다. 해군 역시 주요 목표가 미 해군 기동부대를 격멸하는 것이지 보급 물자를 수송하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과달카날 섬이 라바울에게서 560마일 떨어져 있고 중간 거점도 없어서 제로센 21형으로 선단을 호위해도 과달카날 섬 상공에 떠있는 시간은 15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송선단이 미 해군 항공대 전력에 노출되었고 그나마 오던 보급마저 바다에 수장되었다.


위에 미드웨이 점령이 불가능한 이유 얘기하면서 미군의 상륙작전 교리에 대해 잠깐 얘기했는데 더 부연 설명하자면 무선 통신 시스템으로 소통한 후 중요 거점을 포격, 폭격 하는 식이었다. 미 해병대는 포탄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해군 포격 관측원과 항공 요원을 배치했으며 또 각 전투 조직은 정보 시스템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조직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며 시간 대응이 가능했었다. 육해공을 통합해 목표를 집중 공격하기 위해 미 해병대는 시대를 앞서가는 정보운용체제와 고성능 통신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효과적인 통신 시스템도 없고 통신도 긴말하지 않아 신속성이 떨어졌다. 공동의 목표에 집중하고 조직을 통합 운용해야 할 상황에서도 육군과 해군은 따로따로 전투를 벌였다. 공군과 해군 전력은 짧은 시간 동안 띄엄띄엄 투입되었고 보급도 필요한 수요의 3분의 1만이었다. 결정적으로 과달카날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전혀 변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폐쇄적으로 변해갔지만 그에 비해 미군은 M1 개런드, BAR 같은 무기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적의 벙커를 파괴할 위력을 갖췄지만 무게 때문에 정글에서 운용하기엔 제약이 있던 81mm 박격포와 개활지에만 효과가 있었던 중대 단위의 60mm 박격포를 대체할 수단으로 정글 전투에서의 야포의 위력을 활용하였다. 미군 야포의 위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특히 해병대에서 75mm 곡사포를 애용함으로써 입증되었다.

동해해전 당시 연합함대의 기함이었던 전함 '미카사'

왜 저렇게 결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1905년에 있었던 러일전쟁, 그 중에서도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던 동해해전을 파악해야 한다.


러일전쟁 당시 벌어진 동해해전(1905년 5월 27,28일)은 일본 연합함대 90척의 전투함정과 29척의 러시아 함대가 맞붙은 대전투였다. 이때 러시아 해군은 해전의 주역인 기간 병력, 거포의 수에선 다소의 우위에 있었으나 함대 내에 신구함이 잡다하게 섞여있었고 중 구경포의 수, 발사 간격 시간 등 종합적인 포 전력은 좀 뒤떨어지는 듯한 부분들이 꽤나 많았었다. 반면 일본 해군은 대포의 발사속도에 있어서 우세했고 함교에서 오는 포술장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일제 사격을 진행할 정도로 교리가 잘 잡혀있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 해군은 각 대포가 따로 사격을 진행했기 때문에 탄착의 확인, 사격 데이터 수정에서 차이가 발생했고 이는 곧 명중률 문제로 이어지고 말았다.

또 양측의 신예 전함의 방어력을 비교해보자면 러시아 해군의 보로디노 전함은 152mm 이상의 부분이 17%, 152mm 미만의 부분이 31%, 장갑이 없는 부분이 52%였지만 일본 해군의 미카사 전함은 그 비율이 각각 29%, 40%, 31%로 잘 잡혀있는 편이었다. 이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중장갑과 방어력이 러시아 해군에 비해 우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속력에 있어서도 일본 해군의 전함과 장갑순양함은 평균 속력이 19노트였던 것에 비해 러시아 해군은 16.6노트 밖에 되지 않았다. 이렇게 종합적인 포 전력, 방어력, 속력 모두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보다 우위에 있었는지라 통일된 함대 작전으로 러시아 해군은 하루동안 전함 6척을 포함해 19척의 함정이 격침되며 완벽하게 패배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해 해전은 일본 해군의 전술 확립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동해해전 때 참전했던 자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해군대학교로 많이 나간다. 이때 간 인물로는 연합함대 작전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제2함대 작전참모 사토 데쓰타로, 제4구축대 사령 스즈키 간타로(2차대전 항복 당시 일본 총리)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각 함대의 포술장, 구축함장들도 이때 많이 학생으로 갔는데 이러면서 동해해전은 일본 해군에 있어서 완전무결한 전술의 모범이 된다. 얼마 뒤 동해해전의 교훈이 반영된 함대전투의 지침이 된 <해전요무령>이 개정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일본 해군은 선제공격과 집중을 통한 함대결전이 전쟁의 핵심이라는 발상을 본격화한다. 거기다가 분쟁을 국지화하고 제한된 목표를 추구하는데 있어 해군력이 분쟁의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화되면서 전쟁 이후로도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했다.

동해해전은 더 나아가 방어보다 공격이 우위에 있다는 믿음도 일본 해군 내에서 생겨나는데 공헌을 했다. 동해해전에서 일본 해군부대는 우월한 속력을 이용해 자유롭게 기동해 러시아 해군을 편리한 사거리에 놓고 공격할 수 있었다. 일본 해군은 특이하게도 장갑관통 능력은 떨어지나 작약량이 훨씬 큰 경량 주포탄을 이용하여 러시아 함정의 상부구조물과 지휘소를 파괴해 적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일본 해군은 이 경험을 토대로 적절한 거리에서 적군보다 큰 화력을 동원하면 수적 열세를 만회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고 이런 경향은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과 영국 해군이 충돌한 유틀란트 해전을 보면서 더욱 그런 경향이 심해졌다. 특히 최신 순양전함 퀸메리가 몇 발 맞고 어이없게 격침당한 일은 순양전함이 고속력을 얻기 위해 방어력을 희생시킨게 안좋은 결과를 불러왔다고 판단해 일본 해군은 그 후 거포의 탑재와 추가적인 중장갑화를 진행하며 주력함은 갈 수록 거대해져갔다.

어쨌거나 이러한 전훈들은 1941년 태평양전쟁 때까지 이어져왔고 그러면서 미국과 양 대양으로 싸울 수 없던 일본 해군은 우월한 기술과 일본 민족의 고유한 정신이 결합하면 이길 수 있다는 근거없는 믿음이 자생되었다. 그 결과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 함대 공격력 강화를 위해 열강 해군들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역할들, 예를 들면 교역로 보호, 통상 파괴, 상륙 지원 등은 부차적인 위지에 머물며 일본 해군은 1940년대까지도 러일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로지 속도, 거리, 화력에만 집착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러일전쟁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우선 지리적 무게중심으로 가는 길목만 지키면 되었던 러일전쟁과 달리 태평양전쟁은 광대한 태평양 전체를 활동영역으로 선택했다.


그런데도 일본 해군은 전쟁기간 내내 미드웨이에서, 그리고 어딘가에서 전쟁의 향배를 결정할 함대결전을 치를 기회만 찾아다녔고 미국 같은 나라를 결전 한번으로 굴복은 커녕 강화협상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고 그 결과 러일전쟁 당시처럼 결전에서 몇번 이기면 러일전쟁 당시 제정 러시아처럼 미군이 알아서 무너지고 루즈벨트가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라 착각한 채 전쟁에 임했다는 것이다.

결전은 커녕 최소한의 희망마저 날아간 레이테만 해전


레이테만 해전은 1944년이고 이때면 이미 일본 측의 피해가 누적되어 미일 간 생산력 차이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시점이었다. 진주만 공습이 벌어질 때 당시에만 해도 일본은 석유 금수 조치로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기 힘든 환경이었고 진주만을 공습했을 그 시점에서 웨스트 버지니아 같은 전함 뿐만 아니라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을 잡지 못했다. 그나마 산호해 해전에서는 렉싱턴 항공모함을 격침시키나 미드웨이에서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를 그대로 날려먹어버리며 무기 측면 뿐 아니라 항공 조종사 인력 소모도 심했다. 애초에 총력전 연구소 주장을 도조 내각이 수용했으면 진주만 공습 같은 짓을 안했겠지만.


레이테만 시점에서는 일본이 더 이상 이기지 못할게 너무나도 자명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해전에서의 패배와 손실은 저 밑까지 추락하게 되었다. 마리아나 해전에서 미군은 F6F 헬켓 포함 31대를 잃었지만 일본 해군 항공대는 기본적으로 200대가 넘었고 지상 기지 항공기 손실까지 합치면 250대를 넘었다. 이는 당일에 투입한 70%의 항공 전력이 하루 만에 증발한 것이며 말 그대로 '칠면조 사냥'을 당한 셈이었다. 물론 수백 대 항공기는 설비만 있다면 금방 메꿀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미드웨이 이래 역대 최악의 조종사의 손실은 인적 자원의 바닥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리고 레이테만 전투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 없었어도 애초에 결전은 커녕 판정승도 힘들었다. 즈이카쿠가 기함인 오자와 함대의 함재기는 108기가 끝이었고 이는 전쟁 초 연합함대 항공모함 1척분에도 못미쳤다. 미드웨이, 과달카날을 거치며 인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해진 이후로는 숙련도 부족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지만 대공 방위 능력조차 좋지 못했다. 제1항공함대는 빈약한 항공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특별 공격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게 그 유명한 '가미카제'의 등장이다.


거기에 더해 구리타 함대는 시부얀 해전에서 계획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 그 와중에 니시무라 함대는 계획보다 빨리 레이테에 돌입했으며 남과 북의 협공이라는 작전의 계획은 박살났다. 시마 함대 역시 아오시마, 나치 중순양함을 중심으로 하여 경순양함,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1수뢰전대 같은 2류급 함정들이 포진한 상대적으로 허약한 부대였는데 그 와중에 후퇴해버린다. 오자와 함대는 구리타 함대가 시부얀 해역에서 타전한 반전 전보는 수신했지만 이후 재반전하여 레이터를 노리겠다는 전보를 못받았다. 전투가 끝난 후 오자와 사령관이 회고하길 구리타 함대가 재반전 후 레이테 만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구리타는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적 기동부대를 추격하기 위해 레이테 만이 아닌 북방으로 반전해버리며 승부가 결정된다.


구리타 함대의 기함은 함대 측의 요구에도 야마토 전함이 아닌 아타고 중순양함이었다. 본래 아타고는 일본 해군의 선봉 지휘함이었고 야간 전투에 능했다. 그랬기에 새벽에 돌입 계획을 세운 이상 대형 전함인 야마토보다 신속한 중순양함이 기함인게 적절하다는 것이 연함함대 사령부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아타고가 작전 개시 후 팔라완 수로에서 미 잠수함 USS 다터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결국 야마토로 기함과 사령부 장교들을 옮긴다. 이때 구축함 기시나미로 사령부 통신 요원들의 상당수가 수용되는데 사정이 생겨 회항했고 야마토의 통신 요원으로 업무를 대체했건만 통신 업무와 연락에 차질이 생겨 함대 사령부의 통신 능력이 그대로 저하된다.


게다가 레이테만 해전에 출격한 구리타 함대를 포함 4개 일본 함대 사이에 무선 통신이 매우 좋지 않았던 탓에 부정확한 정보나 오보가 난무했으며 그 유명한 구리타 턴도 이것 때문에 벌어진 촌극이었다. 광범위한 시공간에서의 전투는 신경계 역할인 정보 통신 시스템이 효과적으로 기능해야 하지만 이 해전에 참가한 중순양함 하구로의 전투 상세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함대는 이 해전에서 기지 항공 부대, 제1유격부대(구리타 부대), 기동 함대 간의 협동 연계가 충분하지 못했고 통신 기능 장애는 작전 전개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일본군이 레이테만에서 기회를 잡을 방법? 없진 않았다. 근데 그럴려면 애초에 쇼고 작전 같은 걸 내놓지 말았어야지. 오자와 함대를 희생시켜 미 해군 기동부대 주력을 유인하여 구리타, 니시무라, 시마의 3개 함대가 두 방향에서 협공하며 들어간다는 것이 쇼고 작전이었는데 물론 미군도 홀시 제독이 황소의 폭주(Bull's Run)을 감행했기 때문에 레이테 만 주변까지 방어하기는 쉬운 상황이 아니었긴 하다. 그렇지만 진주만, 미드웨이 때부터 열세했던 일본군의 레이더, 무선 통신 등의 군사장비는 1944년까지도 여전했으며 전후에 큰 비난을 받은 구리타 턴조차 쇼고 작전의 딜레마에서 나온 것을 감안하면 작전 계획부터 다시 세워야 결전은 못해도 판정승은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어둠의 광복군'과 임팔 작전의 개같은 멸망


나는 내 장교들을 영리하고, 게으르고, 근면하고, 멍청한 네 부류로 나눈다. 대부분은 이 중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리하고 근면한 이들은 고급 참모 역할에 적합하다. 멍청하고 게으른 놈들은 전 세계 군대의 90%를 차지하는데, 이런 놈들은 정해진 일이나 시키면 된다. 영리하고 게으른 녀석들은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으므로 최고 지휘관으로 좋다. 하지만 멍청하고 근면한 놈들은 위험하므로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

- 쿠르트 폰하머슈타인에크보르트 독일 육군 상급대장 -


임팔 작전, 어둠의 한국 광복군(?) 모전 구렴야(무다구치 렌야)가 거대한 똥을 싸서 다 말아먹는 바람에 일본의 패망을 앞당겼다고 알려져있다. 실제로 무다구치 렌야는 스기야마 하지메, 도미나가 교지와 함께 일본 군부의 3대 오물이라 불렸으며 이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루거우차오 다리 사건으로 병사가 하나 실종되자 독단적으로 국민당군에 공격 명령을 내린 것도 그가 한 일이었다. 이런 걸 보면 렌야는 무능한 주제에 높은 이상을 가진 자였다는게 맞는 것 같다.


렌야가 영국군을 얕잡아 본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근거가 없진 않았다. 1942년 말레이와 버마 전역에서 영국군은 남방작전을 개시하며 쳐들어온 일본군 앞에서 무력하게 패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문제는 8만 6천 명이라는 상대의 절반으로 두 배의 영국군을 공격한다는 발상은 누가봐도 이상했다. 무다구치가 그렇다고 대책이 있던 것도 아닌게 병참선을 위한 도로 공사는 부진한데다가 제공권도 없었고 물자랑 보급 체계의 역량만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임팔 작전은 3개 사단에서 아사자만 4만명에 전사자만 3만 2천명이었고 겨우 1만 2천명만 귀환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도조 히데키는 임팔 작전을 1944년이 아니라 1942년에 했어야 했다고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기에 어떻게 되었을지 난 예측을 못하겠다. 그러나 회의론을 보자면  임팔을 1942년에 공격한다 해도 보급 역량이 이미 남방작전과 중국 대륙에서의 작전들로 인해 한계에 치달은 일본제국에서 이를 원활히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봤을 때 병력이 많다 쳐도 임팔에서의 현지조달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를 공격하는건 불가능하다고 육군에서도 판단한게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육군을 엄호할 항공함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데 1942년 시점에 일본은 태평양에서 미국과 사생결단을 하고 있었다.


다만 찬성론 측에서는 1942년 시점에서 인도 근처 재해권은 연합군이 쥐지 않고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1942년부터 인도 내에서 반영 폭동이 빈번히 발생하여 영국군이 투입되더니 1943년에는 극심한 흉년으로 100만 명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는 걸 근거로 1942년에 버마를 점령한 직후 단숨에 인도까지 침공했다면 약화되었던 동아시아의 영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임팔 작전은 결과적으로 실패해 3개 사단의 증발로 인도 점령은 커녕 버마 방위 태세까지 조져놨으며 결정적으로 1942년 당시에 임팔 침공 계획이 논의되었을 때 반대했던 것은 도조 히데키도 오바타 노부요시도 기무라 헤이타로도 아닌 무다구치 렌야 본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임팔 작전 가지고 대체역사 얘기하는게 쉽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맺음말: 애초에 승리는 커녕 협상조차 불가했던 전쟁


" 연구에 대한 제군의 노고가 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책상에서 이뤄진 연습으로 실전이라는 것은 제군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청일,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겼다. 그 당시에도 삼국간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일본이 일어선 것이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계획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생각하지 못한 것이 승리를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제군의 성과는 단순히 탁상공론이라 부를 수는 없겠으나 그 의외성이 반영되지 못했다. 제군은 이 책상연습의 결과를 경솔하게 발설치 말라. "

- 도조 히데키 총리 -


일본의 군사적 역량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육군만 하더라도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한 후에 상층부가 무능해서 그렇지 하급 장교들과 부사관은 꽤 유능하다고 평했었다. 특히 해군은 척수, 톤수에서는 미국을 능가하고 함재기 수에서는 영국을 능가하는 규모의 항모 전단을 구성할 정도로 비록 주력함에는 투자를 줄였지만 항모에서 만큼은 상당히 공격적으로 투자했었다. 당장 태평양 전쟁 초기에 연합함대를 주도하던 제1항공함대는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에다가 1941년 11월에 쇼카쿠와 즈이카쿠까지 추가되어 항모 7척을 하나의 기동부대로 운용하는 세계적으로도 획기적인 부대였다.


이처럼 일본은 충분히 강한 나라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태평양 전쟁기 동안 그동안의 성과가 무색하게 온갖 추태를 부리며 처참하게 패망했고 오늘날 히틀러를 비판하면서도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를 좋아하며 그들의 전투를 높게 평가하는 이들은 많지만 반면에 일본군은 실제 참전장병들의 회고록에서 상당히 쓰레기 같았던 군대로 묘사되는 등 일본인에게서도 평가가 극악인 집단이다. 남방작전과 사보섬 해전에서 일본군이 보여준 작전술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허를 찌르는 대담함을 보여주는데 실제로 미군조차도 쉽게 이기진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일본군은 과소 평가할 대상은 아니라고 볼 수 있지만 문제는 부조리와 경직된 구조였다.


개전 직전 총력전 연구소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일본은 반드시 미국에게 질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또 일본 특유의 정신주의 문화가 일본군의 체질 개선을 방해하고 있고 아무리 남방 지역에 자원이 있다 한들 연합군이 수송로를 끊으면 그만이기에 소용이 없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못지 않게 미국의 양키 정신도 만만치 않다고 하였고. 어떻게 보면 그렇게나 폐쇄적인 국가인 일본 내에서도 저렇게 현실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학자들과 관료들이 있었다는 건데 군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그대로 공습을 감행했다.


태평양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조선, 만주와도 만주사변의 만주 전체와도 심지어 중일전쟁의 중국 대륙보다도 훨씬 넓은 곳이었다. 당장 일본 본토에서 하와이까지는 지나치게 멀었으며 운좋게 진주만 공습에 성공했지만 그 넓은 대양에서 결전을 낼 장소를 직접 고르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군은 2차세계대전의 다른 국가 이상으로 육해군의 갈등이 최고조였고 육군 출신 총리 도조 히데키조차 미드웨이 해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한참 후에야 알았을 정도로 정보 공유나 협력이 개판이었다.


이것이 일본이 태평양에서 승기를 잡을 결전을 할 수 없었고 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던 요인이었다. 물론 미드웨이와 레이테만을 얘기하며 말했듯이 장비와 보급 등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나 그것의 향방을 결정하는 요소는 조직 문화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P.S. 사진 속 씹덕 사진은 칸코레, 즉 '함대 컬렉션'이라는 풀네임을 가진 게임인데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 군함을 모에화한 캐릭터들이 나옴. 출시한지 10년이 넘은 게임이라 2018년 이후로 난 안하고 있는데 칸무스라 불리는 캐릭터들은 취향에 맞아서 배박이질은 계속하고 있음.


참고 문헌:


노나카 이쿠지로 외, <왜 일본 제국은 실패하였는가?: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 주영사, 2009

야마다 아키라,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어문학사, 2019

권성욱, <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꺽다 1928~1945>, 미지북스, 2016

조너선 파셜 외, <미드웨이 해전: 태평양전쟁을 결정지은 전투의 진실>, 일조각, 2019

존 톨랜드, <일본 제국 패망사: 태평양전쟁 1936~1945>, 글항아리, 2019

박재석 외,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2005

도베 료이치, <역설의 군대>, 소명출판, 2020

야마모토 시치헤이,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글항아리, 2016

마크 힐리, <미드웨이 1942>, 플래닛미디어, 2008

버나드 아일랜드, <레이테 만 1944>, 플래닛미디어, 2008

권주혁, <헨더슨 비행장>, 지식산업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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