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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슨 Feb 07. 2024

기술관료주의의 방식으로 성공한 소비에트 모델

소련의 경제 성장 과정 속 포드주의식 대량생산체제가 끼친 영향

https://youtu.be/wjQGpudph_8?si=r4PbZrKsbDhiDO5S

소련의 경제 성장을 얘기할 때 좌우할 것 없이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면 바로 철저한 공산주의 이념에 입각한 경제 운영 방식이라는 얘기다.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좌파 진영 측에서는 소련의 경제 성장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토대로 하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다소 이념에 경도된 듯한 교조적인 분석을 내놓고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우파 진영 측에서는 소련의 경제 방식이 공산주의적이었기에 성장을 했어도 인민들만 갈려나갔다고 비판한다. 둘이 내리는 결과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지만 그럼에도 소비에트 모델에 대한 공통적인 의견 일치가 있다면 바로 방법론에 있어서 철저하게 공산주의 이념을 따른 정책이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약간 다른 문제 제기를 해보려고 한다. 소련이 공산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국가이고, 또 이념성이 크게 두드러지긴 했지만 1930년대 동안의 경제 성장 모델의 방법론에서 공산주의 이념의 영향만 있었을까라는 부분을 말이다. 소련이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지인 만큼 다들 소련의 모든 부분들에 대해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단편적인 차원으로만 분석하려고 하는데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소련의 경제 모델, 그중에서 레닌-스탈린 시절의 경제 모델은 특히나 공산주의 이념이라는 관점에서만 분석할 수는 없다. 애초에 원류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경제적인 방법론이 많이 모호하게 언급되어서 현실 정치에서 사회주의 국가 실험을 성공시키려면 다른 이념의 정책 모델의 영향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창기 소비에트 경제 형태가 완성되는 것에 있어서 레닌에게 실제 비전을 가져다준 커다란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독일의 전시 생산 체제였다. 아이러니한 점이라면 독일인들도 전쟁 전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에 흥미를 느끼고 이를 전시 동안 자신의 국가에 적용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닌이 최초로 임명한 산업 최고 책임자는 전직 민셰비키 출신으로 독일식 중앙 관리 개념을 열렬히 숭배하던 인사인 라린이었다. 게다가 레닌 본인이 썼던 소책자인 <좌익 소아병과 소부르주아 정신에 관하여>라는 것을 보면  "그렇다. 독일인들에게서 배우자! 역사는 지그재그로 진행하며 구부러진 길을 간다. 독일인들은 현재 야만적 제국주의와 함께 나아가고 있지만 규율, 조직, 단결된 노동 원리를 구현하고 있으며 그것은 더없이 현대적인 기계, 엄정한 회계와 관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히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이다"라는 독일식 모델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부의 실세이자 현대적인 총력전, 전시 동원 체제의 개념을 설계한 에리히 루덴도르프

레닌의 말에 따르면 독일의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었다. 그렇기에 초창기 소비에트의 경제 형태가 완성되는 것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부의 실세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였다. 루덴도르프가 대전기 동안 총력전 체제 하에 내세웠던 "전시 사회주의"는 총력전의 핵심이 결국 자원을 얼마만큼 동원해서 얼마만큼 조직해내느냐의 문제가 관건임을 잘 보여줬는데 당시 소련은 적백내전을 비롯해 적대적인 서구 열강의 개입에 둘러싸인 상황이었는지라 비록 반동적일지라도 일단 승리하기 위해서는 루덴도르프식으로 통제력을 확고히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실제로 루덴도르프의 전시 사회주의 모델은 소련뿐만 아니라 훗날 나치 독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일본 제국의 군부 등에도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는 방식이었다.


사실 이에 앞서 레닌은 마르크스의 모호한 사회주의 경제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국가가 산업 경제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추론했었다. '전위 엘리트'가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해야 했으며 레닌은 정치 문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주의를 신뢰했다. 정확히 이런 목적에서 기구를 만들었기 때문에 산업에서도 중앙의 통제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리하여 소비에트 러시아는 거의 중앙 집권화된 계획경제를 실천하게 된 것이고 마르크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에서 사용할 방법론으로 가져온 것이 루덴도르프의 국가자본주의였던 것이다. 이는 레닌이 표현한 야만과 싸우기 위한 야만적인 무기의 활용하고도 맥락상으로 맞닿은 지점이며 그렇게 소비에트 러시아 초창기에 완성된 경제 형태는 루덴도르프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방식에서 차용된 요소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재미있는 부분이라면 사회주의 혁명 성공 직후부터 소련 지도부는 부르주아적이라 여겨져 온 테일러주의 방식에 대한 기존의 부정적인 노선을 누그러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톱워치, 동작연구, 규범 설정, 성과급 같은 테일러주의 핵심 요소들을 연구하고 훈련하는 중앙노동연구소가 알렉세이 가스테프의 주도 하에 창립되었다. 이 연구소 안에서 수천 권의 테일러주의와 노동과학 출판물 전집류를 외국에서 입수한 것을 토대로 번역되었다. 그러다가 총체적 난국에서 미국의 기업가 헨리 포드의 <나의 삶과 일>이 러시아어 번역본으로 소련 국내에 들어왔는데 반응이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오시프 에르만스키의 기록을 보면 이때부터 테일러의 후광이 사라지고 헨리 포드라는 또 다른 기업가의 방식에 대중들의 관심이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서술되고 있다.

1920년대 포드 자동차의 자동화 생산라인

아무튼 헨리 포드의 <나의 삶과 일>은 1924년 레닌그라드 출판사에서 초판이 출판된 후 두 달 만에 2쇄를 찍었고 10년 만에 10개 새 판본이 출판되어 8만 부 넘게 팔렸다. 1926년 소련에서는 포드의 또 다른 책 <오늘과 내일> 번역본 3종이 동시에 출판되어 경쟁을 벌이고 이후 더 다양한 판본이 재출간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테일러의 재미없는 훈련 교본들을 제치고 포드의 책들이 예상치 못하게 소련에서 꽤나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물론 그와 함께 라브로프, 야코프 발터 등 소비에트의 논평가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날카로운 메스로 무장하고 포드식 생산의 성과와 그의 보수적인 정치철학을 분리해서 보며 비판도 만만치 않게 하였다. 포드의 생산 방식에 깊은 관심을 가진 에르만스키조차도 포드의 책을 가지고 비판할 때 포드 공장의 노동 착취를 적극 비판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숨기려는 산업적 봉건주의의 술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생산 근대화에 관한 한, 포드주의는 테일러주의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소련 내 엘리트들도 부정하지 않았다. 포드주의는 합리적인 생산의 미래가 생물적 요소에서 무생물적 요소로, 노동자에서 기계로, 사람을 합리화하는 데서 생산체계 전체를 완성하는 데로 이동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테일러주의는 조만간 생산력 발전을 저지하게 될 터였지만 반면 포드의 혁신은 기계화와 작업배치를 위한 기술 및 조직 개선에 관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비에트 노동과학 연구진이자 에스만스키의 동료인 로젠블리트는 "포드가 20세기를 대표한다면 테일러는 여전히 18세기에 갇혀 있다"라고 평했다. 그렇게 소비에트 근대주의자들은 포드사의 T형 모델과 같은 제품 표준화로 생산량과 품질이 조화로운 대량생산을 꾀해볼 수 있고 기계화와 특수목적 공작기계를 토대로 작동하는 흐름 생산의 원리를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특히 조립라인 체계 채택은 효율적인 운송은 물론이고 속도를 포함해 전체 생산공정에 대한 "자동 조절"까지 약속할 수 있었다.


지속적인 시험, 제어 그리고 검사 과정은 생산공정과 더불어 원자재와 에너지의 효율적 사용을 보장했고 극대화된 농업 분업과 그에 따른 기술 수준의 분화 역시 유익한 것이었다. 소비에트 기술관료들은 이러한 조치들이 수공업에 기반한 원칙들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주관주의, 전통, 관례, 비밀주의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대체해 나아가는 시작점으로 여겼다. 이러한 포드주의의 작업배치는 하향식 계획과 행정적 미세 조정을 선호하는 소련 당국의 성향에 잘 부합했으며 포드주의의 여러 요소 중 특히나 소련 엘리트들의 마음에 가장 든 것은 바로 복잡한 공급망과 무수한 생산공정을 원활하게 동기화하는 조립라인이었다. 가스테프의 의견에 따르면 조립라인은 인간과 물질 사이의 "조화와 조정의 원리"를 표현한 것으로 조직가라기보다는 가속기였다. 즉 원자재 공급에서 생산공장에 이르기까지 생산과정의 모든 요소는 강력한 컨베이어로 조정되고 모든 경제 영역을 원활하게 연결하는 컨베이어 원칙은 산업을 분산해 결국 도시와 시골 사이의 경계를 허물 것이라는 얘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포드가 하나의 산업 분야에서 성취했다면 소련의 산업 합리화는 전체 경제에서 이뤄질 것이었다.

1930년 당시 포드 자동차의 모스크바 공장 조립 라인

물론 도중에 1928년을 기점으로 소련에 포드주의를 들여온 기술관료 인사들은 계급전쟁에서 밀려나긴 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포드주의 옹호자들의 주장인 대량 생산은 수용되었고 공장에서 활약하는 당 소속의 젊은 적색 엔지니어를 급진적인 볼셰비키 근대주의자 그룹과 통합한 정치 연합이 1930년 최고 경제기관을 장악해 대량생산 및 서구 기술 이전에 기초한 산업화 전망을 다시금 단호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동안 소련에서는 트랙터와 자동차 공장, 화학 공장과 제철소 같은 거대한 생산기지들이 새로운 풍경을 시베리아에서 코카서스까지 만들어냈고 공장에서의 권위는 필요한 경우 유능하고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의 손에 집중되었다. 포드주의가 소련 개발 전망에서 의미 있었던 세 가지 측면은 첫째 자동차 대량생산은 기차에 과도하게 집중된 교통체계를 보완하고 산업 간 조정 및 자원 배분을 쉽게 만드는 유연한 동력 운송체계를 만들었다는 것이며, 둘째 새로운 산업 단지가 즉시 대량생산을 시작하고 많은 비숙련 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셋째 일각에서 선호하던 점진적인 농업 축적 전략이 대량생산을 중심으로 서구에서 자본재 대량 수입과 지식 이전이 채택되면서 거부되었다는 것이다.


1930년대 초반 스탈린이 내세운 "서구의 선진 경제를 따라잡고 추월하라"는 구호 아래 본격적인 산업 건설이 시작될 시기에 포드주의의 방식은 제대로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중공업 인민위원회에서는 빈곤 완화, 영양실조 해소, 1인당 소득 증대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 근대화론자들은 강력한 당 국가가 후진적인 거대 농업국가를 산업화한 강대국으로 만들 발전 전망을 우선적으로 수용해 이러한 맥락에서 포드주의를 소련 내 적응 작업을 대규모로 실시하게 되었다. 오신스키를 비롯한 모스크바 자동차회는 1928년 여름 소련 자동차 산업 건설의 협력자와 롤모델을 구하러 디트로이트로 방문하여 크라이슬러, GM, 포드사와 만났는데 이 중 포드사와 연결고리 생기며 교류 협정을 맺었다.


특히 이때 포드 계획 사업은 소비에트 산업화라는 더 큰 지형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했다. 투자 규모, 외환 지출,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이 생각하는 중요성 등 모든 면에서 자동차 거인은 드네프르댐, 쿠즈네츠크와 미그니토코르스크 철강-석탄 연합체, 스탈린그라드와 첼랴빈스크에 건설된 트랙터 공장 등 다른 5개년 계획의 거대 사업들과 나란히 순위를 차지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대외무역 인민위원회가 집계한 수치에 따르면 자동차 거인의 장치 수입 비용은 총 4,230만 루블이었다. 이는 마그니토코르스크 공장의 4,400만 루블, 스탈린그라드 공장의 3,500만 루블, 드네프르 개발의 3,100만 루블과 비견될 만했다. 또 포드는 최고경제위원회에 AA형 모델 트럭을 소련에서 제조 및 판매할 권리는 물론이고 차량의 설계, 생산에 관련한 모든 독점 기술인 설계도와 특허권, 기술명세서 등을 제공하기로 합의해 줬다. 그 외 합의 내용에는 연간 자동차 10만 대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 건설과 9년으로 예정된 계약 기간에 기술 혁신에 관한 내용 전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소비에트 엔지니어들에게 루즈 공장을 개방하고 포드사 전문가들을 소련에 파견한다는 것이 결정적인 요소였다.

1932년 소련 가즈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생산된 트럭

기술 이전 과정의 일환으로 기계설비 수입 역시 비중이 컸다. 1931년 5월 최고경제위원회는 니즈니 공장에 설치말 기계류 4,650대를 해외에서 들여오는 비용으로 자동차 제조국에 400만 루블을 지급했고 이 금액 중 3분의 2는 미국에서 주문한 기계 비용, 나머지는 유럽을 거쳐 들어오는 비용이었다. 당시 소련 공장들은 좋은 품질의 기계를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에 특수 공작기계들의 주문은 미국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1년 동안 포드 자동차회사가 400만 달러의 기계류를 소련에 공급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술 이전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인적 교류로 당장 훗날 소련 최초의 자동차 설계자들부터 상당수가 포드사의 디토르이트에서 교육 과정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가즈-51 트럭 개발자인 크라이거가 있는데 그는 1935년 소련 최초 승용차인 M1 개발 준비를 위해 미국으로 파견돼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런 점에서 소련 산업화 과정에서 숨어있는 또 다른 공신이 하나 있다면 공산주의 이념의 기준대로라면 미국의 부르주아 기업인 포드 자동차회사였던 셈이다. 생산자주의에 바탕을 둔 포드사의 기술 공개 원칙 덕분에 소랜슨과 임직원들은 소련 엔지니어들에게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접근 권한과 광범위한 복제, 관찰 기회를 부여하였고 기계 수급, 인적 교류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또 다이베츠가 디트로이트에서 러시아 중서부로 보내온 문서들은 가즈의 토대가 되었다. 비록 오신스키, 다이베츠, 디아코노프 등은 1937~1938년 숙청의 희생자가 되지만 1930년대 초 루즈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소련 엔지니어 및 숙련 노동자 집단은 디트로이트와 고리키를 연결하면서 미국에서 돌아온 후 중간 엔지니어 역할을 하다가 전쟁 중에는 가즈의 생산 흐름을 감독했다.


1920년대 동안 가장 급진적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합리화론자들은 개인의 성과에 집착하는 테일러주의에서 기계화와 대량생산 흐름으로 강조하는 포드주의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1930년대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공급 병목현상, 부조리한 노동 정책, 숙청 기간 중 기술 인력에 대한 자체 정리해고에도 가즈의 생산성은 높아졌고 대략적인 조치들로 노동 생산성도 향상되었다. 1937년 가즈는 13만 5,000대가 넘는 자동차를 생산했는데 노동자 한 명이 평균 3대를 조립했다. 이는 확실히 노동자  명이 8.7대를 생산하는 1933년 포드사의 공식 기록보다는 낮은 수치였지만 노동자 한 명이 겨우 0.34대를 생산하던 1932년 당시의 가즈에 비하면 비약적인 증대였다. 이처럼 포드사식 공장 운영에 기초를 둔 흐름 생산은 1930년대 소련에서 대량생산의 보편적인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스탈린, 루즈벨트, 히틀러의 정책들은 기술관료적 근대성을 대대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놀랍게도 이러한 방식의 국가 주도 산업화는 소련, 나치 독일, 일본 제국 같은 전체주의 국가들을 넘어 1960~1970년대 한국에도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독일이 "인민의 차" 계획으로 폭스바겐을 설립하고, 일본이 GM, 포드를 쫓아내면서까지 도요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소련이 자동차 기술을 포드사로부터 받아내어 국산 승용차와 트랙터들을 대량 보급한 것처럼 한국 역시 기술의 토착화와 더불어 자동차 산업에서 시민의 차를 만들기 위해 현대자동차에서 최초의 국산 승용차인 "포니"를 내놓아 세계시장에서 한국 자동차 제조업체 성장의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포드주의의 생산방식과 국가 주도의 산업화는 독일, 소련, 일본, 한국을 가리지 않고 20세기 속에서 좌우 구분 없이 기존의 자유주의가 아닌 방법론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얻어야 할 추격 산업화에 대한 교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지속가능한 산업화를 위해 국가는 수입을 대체해 국내 시장에 재화를 공급하는 이상의 역할을 할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업은 일정 시간 학습을 마치고 나면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경화시장에 수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해외에서 들여온 자본과 값비싼 기술은 점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테고 곧 과도한 부채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남미의 수입 대체 산업화론자들이 빠져든 수렁이었다. 또한 서구 시장을 공략할 의도가 애초에 없던 소련에 예정된 운명이었다. 둘째 국제 경쟁력을 계속 유지하려면 단순히 외국의 모델을 모방하는 데서 벗어나 과감하게 자체 혁신으로 전환해야 한다. 21세기 초반 중국은 이러한 판단을 내리고 이후 외국 기업과 합작 투자에 집중하던 자국 기업에 핵심 부분에서 "자체 혁신"을 지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1930년대 자동차 대량생산은 전략 기술이었고 오늘날은 에너지, 정보처리, 생명 공학, 로봇 공학 같은 분야들 또한 고도로 정치화되어 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동시에 기업의 혁신 역량을 강화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경쟁력이 있는 상태로 남아있게 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참고 문헌:


스테판 J. 링크, <글로벌 포드주의 총력전>, 너머북스, 2023

폴 존슨, <모던 타임스 1>, 살림, 2008

제니스 미무라, <제국의 기획: 혁신관료와 일본 전시국가>, 소명출판, 2015

스티브 A. 스미스, <러시아 혁명: 1917년에서 네프까지>, 박종철출판사, 2007

쉴라 피츠패트릭, <러시아혁명 1917-1938>, 사계절, 2017

박계호, <남북전쟁의 성격에 관한 연구 - 북부의 총력전을 중심으로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8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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