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이제서야
지나간 사랑에게 시간을 쓰는 것은 다가올 완벽한 사랑에게 그 얼마나 크게 미안한 일인가.
09 오이 샌드위치
당신은 닭도리탕의 닭가슴살이 가장 좋다고 했다.
난 닭도리탕의 닭가슴살이 퍽퍽해서 싫어했다.
우리는 음식 궁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비 오는 날 아삭한 오이가 투박하게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먹는 게 좋다고 했다.
나는 비 오는 날 아삭한 오이가 투박하게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먹는 걸 좋아했다.
우리는 음식 궁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10 두 번째
아직 유효하다면, 사랑에 빠지지 말라.
단 한 번이라도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나면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어떠한 방법을 써도 그 이전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11 오래된 기억
오래된 목욕탕의 타일 틈새에 씻겨지지 않는 때처럼,
놓아줘도 될 낡은 생각들이 한 켠에서 사라지지 않을 때가 있다.
저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기억의 먼지들을 날려 보내겠지만
내 경우엔 그게 낚시를 가장한 멍 때리기였던 것 같다.
해 질 무렵 지빠귀가 조로롱거리는 강가에서,
녹색 캐미라이트 불빛을 내보내는 낚싯대, 그리고 나, 돌무더기와 강물, 물에 담긴 달 하나, 그 뒤론 산기슭, 그 뒤로 펼쳐진 하늘, 그리고 구름, 별들.
물고기를 잡고 싶은 것도 아니고, 야영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강물 흐르는 소리, 뻐꾸기 우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밤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그 광경 속에서,
내 안의 묵은 기억들을 꾹꾹 눌러 담아 강물에 같이 흘러가길 기다렸다.
녹색 불빛만큼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