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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해용 May 07. 2023

짧지만 강렬했던 지리산 종주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드디어 실행하게 되었다. 바로 ‘지리산 종주’였다. 언젠가 꼭 해보리라 마음은 먹었지만, 그동안 하지 못했다. 마침 동행이 있어서 금요일 밤 기차를 타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새벽 4시부터 성삼재에서 노고단(1,507m), 반야봉(1,732m)을 거쳐 세석대피소에서 1박을 했다. 다음 날 장터목을 거쳐 마침내 천왕봉(1,915m)에 올랐다. 맑고 깨끗한 최상의 날씨였다. 법계사-중산리 하산코스를 끝으로 약 30여 km의 장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천왕봉 여정은 20대 젊은 날에 성철 큰스님을 뵙기 위해 밤새워 3,000배를 했을 때만큼 힘들었다. 수없이 반복되는 돌길, 바위길 계단과 내리막과 오르막길, 안전한 길과 험한 길들이 나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어리석은 자도 이곳에 오면 지혜롭게 된다는 지리산(智異山). 약 40여 시간 산속에서 머물면서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언제쯤이면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 자신을 사랑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등등. 걸으면서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지니 자연스럽게 스스로 해답을 찾게 된다. 과연 이름값을 하는 명산이었다.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인생은 숨을 쉰 횟수가 아니라 숨 막힐 정도로 벅찬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로 평가된다.’라 했다. 산속을 헤매었던 이틀 동안 내내 벅차게 기뻤고 행복했다. 병풍처럼 펼쳐진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 중 하나인 노고단 일출은 주변 구름바다와 함께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반야봉 부근 고즈넉한 노을, 촛대봉에서 바라본 아침 지리산은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신비한 섬으로 변해있었다. 천왕봉에서 바라본 하늘, 구름, 바위 그리고 풍파를 이겨낸 고사목들은 서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소설 『대망』에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언덕을 오르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어깨의 배낭은 시간이 갈수록 더 무거웠고 천왕봉 정상은 공간이 협소하여 오래 머물기가 어려웠는데 인생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과정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이다. 


정상 직전에서 힘들어하고 있을 때, 내려오던 등산객이 툭 던진 인사말이 새롭다. “이젠, 계속 하산하는 즐거움만 남았네요.” 생각해 보니 그러하였다. 인생길도 하산할 때처럼 얼마든지 즐겁고 재미있을 수 있다. 그 길 위에는 굳이 많은 돈도 권력도 성공도 중요하지 않으리라. 소소한 행복과 사랑만 있으면 되는 것을. 물론 적당한 건강과 가족의 사랑, 친구, 적절한 일거리 등이 있다면 그 행복은 더욱 커지겠지만. 아들과 딸의 배낭까지 메고 가는 아버지도 보인다. 저것이 아버지의 무게이겠지. 하산하는 길에 어떤 이는 “홀로 종주를 하니까 오히려 더 힘들다”라고 했다. 인생에 동반자도 필요한 이유이다. 


도심지를 벗어나 짧지만 강렬하게 보낸 이틀 동안 오롯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새벽하늘의 수많은 별들. 잠시 하늘에 별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망각하고 지냈나 보다. 자연을 다시 보았다. 돌멩이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오랜 풍파를 이겨낸 우리 민족성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 스쳐 지나가는 등산객들도 모두 지리산을 닮아있었다. 또 기회가 오면 지금보다 더 여유를 가지고 여기저기 피어있는 야생화도 천천히 음미해 보련다. ‘속도를 줄이고 인생을 즐겨라.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이 주위 경관뿐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게 된다.’는 에디 캔터의 말도 비로소 가슴에 깊이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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