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돕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남을 돕는 행위는 어떤 사회에서나 일종의 미덕으로 여겨지며, 우리의 내면에 깊은 만족감과 연대감을 일으킨다. 물론 진정한 도움은 우리가 충분히 가지고 있을 때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부족할 때도 나눌 수 있는 용기와 희생도 포함된다. 부족함을 느낄 때조차 나눔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 삶에 더 깊은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50여 년간 김밥을 팔아 모은 수억 원의 전 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40년간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고 세상을 떠난 김밥 할머니로 알려진 고(故) 박춘자 할머니를 애도하는 따뜻한 뉴스가 전해졌다. 더군다나 집에서 발달장애인 11명을 친자식처럼 직접 보살폈다는 박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월세 보증금조차 기부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개인의 행위를 통해 더욱 풍성해진다.
김밥 할머니처럼 어려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을 돕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연결은 우리가 또 다른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를 지지해 주는 힘이 되고, 나아가 우리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준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나누고 도울 때,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진정한 도움이란 단지 물질적인 나눔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시간, 관심 그리고 사랑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때로는 말 한마디, 따뜻한 포옹,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김밥 할머니가 친자식처럼 나누어준 따뜻한 사랑처럼.
톨스토이도 말년에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명상을 통해 얻은 글 모음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우리는 누구를 도와주기에 앞서 근원적으로 서로에 대한 인류애(사랑)를 가져야 하는 것이 ‘모두의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서로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데는
돈도, 선물도, 좋은 충고도
심지어는 노동도 필요 없다.
사랑이면 충분하다.
사랑을 키우고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은 모두의 책임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무리 정신적인 가치가 중요하다고 해도, 실제로 물질적인 돈이 무엇보다 절실할 때도 있다. 내 수중에 돈 한 푼도 없이 오늘의 끼니와 밀린 월세를 걱정해야 한다면, 학교에서 수업료를 낼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움을 동시에 느껴보았다면, 월급을 받자마자 마이너스 통장으로 빨린 듯이 돈이 빠져나가고 한 치 앞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무력한 상태를 경험해 보았다면, 돈이 말라버린 그곳도 일종의 사막이다.
이런 사람을 제대로 도와줄 여력이 없을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진정한 도움의 마음이 있다면 직접적인 돈의 도움은 아니더라도 어떤 방법 정도는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끊임없는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주어 좀 더 버틸 수 있게 해 줄 수는 있지 않을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남보다 무엇을 더 가졌는지를 잘 몰라서.
자신이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넘쳐나고 있음에도 그 사실조차 잘 인지하지 못해서.
자신이 많이 가지고 누리고 있음에도 나눌 줄을 몰라서,
어떻게 살아야 더 의미 있는 삶인지 누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서.
어쩌면 물질적으로 크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남을 돕는 마음은 활짝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그렇고 그런 삶을 의미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어려운 시절에 남에게 도움을 받아보아야 언젠가 남을 돕는 선순환적 행동이 나오는 법이다. 클레어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불우하게 자랐지만, 주변의 많은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오던 석탄 판매상이자 다섯 딸의 아버지인 펄롱이 주인공이다. 그는 자기 보호 본능과 용기와의 갈등에서 고심하다가 마침내 수녀원 석탄 창고에 갇혀 있는 한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나오며 세상에 맞서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항상 고심하는 내게 펄롱의 다음과 같은 유의미한 말은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공부는 계속하고 싶은데 학비를 댈 수 없어서 포기해야 하는 이를 목격했다면,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데 부모가 없는 어린아이가 내 눈앞에서 울고 있다면.
어느 시대에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꼭 있다. 또 이들을 도우려는 이들도 꼭 있었다. 우리는 당시의 사회적 관습과 법칙에 따라 자기 자신을 우선 보호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면서 사회의 약자나 어려운 여건에 놓여있는 누군가와 마주하기를 알게 모르게 꺼리고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우선 나부터 살아야 하니까. 주인공 펄롱이 가족의 안녕을 위해 그토록 가족 중심으로만 치열하게 살아왔듯이.
물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모든 이들을 나 혼자 도울 수는 없다. 자칫 도우려는 나의 어떤 의도가 왜곡되어 전달될 수도 있고, 괜히 큰소리쳤다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고 공염불에 그치고 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오지랖 넓은 놈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래도 나 혼자만이라도 남을 도와주는 행위는 계속 진행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면.
돌아보니, 나도 많은 이들로부터 숱한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고, 나 또한 어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도움이 되는 행동도 조금은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혈기 왕성했을 때 형성되었던 어설픈 가치관들도 이제야 어쭙잖게 하나씩 정립해 가는 인생 3막쯤 되는 여정에 도착해 보니, 비로소 내가 잘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눈에 보이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범위와 한계도 분명하게 알게 된다.
경륜과 나이만을 앞세우는 꼰대가 아니라, 간절히 원하는 누군가의 눈높이에서 진정 도움이 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려 한다.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그들을 잘 도와주어 그들이 잘 되는 것이 바로 내가 행복할 수 있음도 이제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김밥 할머니처럼 그렇게 숭고하고 위대한 도움은 못 될지라도 소소하지만, 누군가에게 진정한 도움이 되는 순간순간들을 자주 맞이한다면 내 삶 또한 좀 더 풍요로워질 것 같다.
혹여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그들이 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면, 단지 “It’s my pleasure!”라고만 답할 수 있다면 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