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봄이 오려나.
어제도 추웠던 이날의 낮 기온은 20℃나 되었다. 봄의 첫걸음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편안한 옷차림으로 느긋하게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이런 날씨가 그리웠는지 집 밖으로 많이들 나왔다. 아이들은 물론 반려견까지 유모차에 태워서. 지나치는 반려견끼리도 반갑다고 난리다. 맑은 하늘이 좋아서, 따사한 햇살이 반가워서 걷다 보니 3시간도 힘들지 않게 훌쩍 지나가는 3월 하순 우리 동네의 풍경이다.
봄은 참 좋다.
봄에 태어나서일까. 하여튼 내게 봄은 겨울 동안 죽은 듯 봉인되어 있던 생명체가 기지개를 켜면서 설렘과 함께 희망으로 다가온다.
각인된 나의 봄은 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산에서 나무해서 아궁이에 불 때며 지내던 한겨울 산속 탄광촌에서의 어린 시절에서, 군복 입고 수없이 돌아다니던 산속 진달래와 개나리꽃망울에서 먼저 발견되었다.
겨울을 잘 버티고 이겨낸 성장 느낌.
새로운 출발선상에 서 있음을 늘 알려주던 시간이 봄이었다.
헤르만 헤세도 “봄은 삶의 시작이다. 겨울의 죽음과 쇠퇴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과 희망을 잉태하는 계절이다.”라고 했다.
봄을 사랑했던 나는 첫 딸 이름도 보미 (봄의 연음)라고 지었다.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딸은 무난하게 꿈에 그리던 골프 프로선수가 되었고, 우리 가족에게는 늘 희망이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또 다른 길을 봄처럼 야멸차게 걸어가고 있다.
삶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
나는 지금쯤 아마 가을쯤 되는 여정을 걷고 있다.
이젠 수확의 기쁨을 즐기며 겨울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곧 다가올 겨울을 잘나기 위해 나름 준비도 하고 있다.
능력이 닿을 때까지는 일도 계속하려고 한다. 무료하게 보내는 것보다는 가치 있게 일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다. 어쨌든 적어도 자식들에게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부부 간병인보험에도 미리 가입하고, 이런저런 보험들도 재정리해본다.
나의 봄 시절은 어땠을까.
돌아보면 무엇이 정의로운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혼동 속에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 채 허겁지겁 살아온 것 같다.
나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으려 하기보다 변명 같지만, 집단 속에 파묻혀 소신 없이 어우러져 제대로 나를 찾아볼 틈도 없었던 시간이었다.
어쩌면 소신 없음이 소신처럼 되어버린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실패도 결코 실패가 아니라 먼 훗날 유의미한 경험의 축적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면, 그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도 훨씬 쉽게 이겨낼 수 있었고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봄은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는 희망의 서곡(序曲)이다.
그 암울하던 매 순간에도 봄 같은 희망의 불씨가 살아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지 않을까 하며 스스로 위안 삼기도 한다.
인생의 봄도 때로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기도 했다.
힘들어서 올해만 골프하고 그만두겠다고 했던 딸이 마침내 극적으로 KLPGA 첫 우승을 했을 때도 그러하였다.
무작정 전역 지원서를 던져놓고 이 사회에 아무 대책 없이 나왔던 그 순간에 찾아온 재취업의 소식 등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 같았던 그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났을 때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따사한 햇살과 부드러운 봄바람을 아마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동네를 산책하는 사람들의 행복해하는 표정에서도 이 한갓진 오후에 내게 다시 한번 생동하는 봄기운이 전달되는 듯하다. 올해도 그 추웠던 겨울을 이겨내고 어김없이 봄이 오긴 오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