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어
베빗 콜의 <엄마는 내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는 2003년 출판사 <세일 쥬네스>에서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한 어린이 그림책이다.
인생은 작은 비밀들로 가득하다. 작은 생쥐와 누가 닮았을까? 어른들은 왜 귀와 코 안에 털이 있는 걸까, 때론 바위보다도 더 매끈한 머리를 가지고 있고 말이야? 어떤 어른들은 잘 때 왜 자신의 이빨을 컵에 담아 놓을까?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좋아하는 걸까? 아이는 궁금한 게 많은데 엄마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이에게는 매일매일 새롭다. 새롭게 발견한 것에 대해 엄마가 미리 알고 설명해 줄 일 없다. 이제부터 아이는 궁금증에 대해 엄마에게 물어볼 것이고 엄마는 하나씩 하나씩 설명해 줄 것이다. 아이는 아이가 상상하는 만큼 이해할 테니까 말이다.
인생에서 늘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일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또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작가 베빗 콜은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 조차 궁금할 수 있는 인생의 자잘한 비밀들을 아이의 질문 형식으로 그림책에 담고 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정답은 없다. 늘 질문하고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 그것밖에는.
질문, 자신에게 말 걸기
한나 아렌트는 그의 책 <한나 아렌트의 말>에서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유를 하는 것인데, 그것은 전문적인 사유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은 오로지 사유할 수 있는 존재이고 심사숙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할 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는 확신에만 의지한다,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씻고, 세수하고, 커피 마시고, 핸드폰 보고, 일하러 가고, 담배 피우고, 다시 핸드폰 보고, 점심 먹고, 커피 마시고, 다시 담배 피우고, 일하고,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와 밥 먹고 다시 또 담배 피우고, 또다시 핸드폰 보고 그리고 잠드는 일상을 살면서 우리는 왜 늘 같은 날을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 매일매일 같은 일상인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늘 사유한다. 자신에게 질문하고 누군가에게 질문한다. 사유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겐 늘 하루하루가 낯설고 새롭다. 궁금한 게 무척 많다.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질문한다. 그러나 대답은....
그림책 <엄마는 내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호기심에 가득한 아이는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적절한 시기에 엄마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대답을 말이다. 그리고 아이는 또한 준비하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소소한 비밀들을 이해할 준비 말이다.
실상 부모는 아이가 질문할 때, 아이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 때문에 아이의 질문이 뜬금없다고 생각할 때나 당황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러나 아이의 질문은 늘 적절하다. 부모가 한 번도 질문해 보지 않은 일상에 대해 아이는 충분히 질문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다면, 언제든 적절한 시기에 대답하면 된다. 왜냐면 질문했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대답할 이유는 없다.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책
<엄마는 내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은 엄마가 미리미리 가르치듯 아이에게 설명해주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아이가 궁금해하기도 전해 ‘이런 것은 알아야 해’하며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의미다. 엄마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질문이 생길 수 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선행학습이 일상이 된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엄마가 한 번도 이야기를 안 해줄 수가 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은 또한 아이의 입을 통해 “엄마가 적절한 시기에 설명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이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덧붙인다. ‘이해’는 질문을 갖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적절한 기회이다. 이해 없이 배움은 없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이 그림책이 그래서 더 흥미롭다.
이 그림책은 앞서 밝혔지만, 2003년도에 프랑스어로 출판된 책이다. 작가 베빗콜은 그림책 엄마 아빠의 이혼을 다룬 <따로따로 행복하게> (1999년)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꽤 알려진 작가이다.
아이의 상상은 질문이 되고....
2003년 프랑스에서 번역 출판된 20년 전 그림책이지만, 아이가 던진 질문을 보면 지금까지도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이 그림책을 보는 즐거움 중에 하나이다.
이 그림책에서 아이가 던진 몇 가지 질문만 가져오면, 먼저 아이는 “자기가 왜 학교에 가야 하는지 엄마는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반면, 엄마는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는데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베빗 콜의 그림을 보면 엄마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여자 고등학교에 다닌 것 같다. 검은 수녀복을 입은 수녀는 화가 나 있고,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학생은 자신의 배를 감싸고 학교를 나서는데 무척 흐뭇해하는 표정이다.
청소년 소설 “열일곱 살의 아빠”(마거릿 비처드, 햇살과 나무꾼, 2008)를 보면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예기치 않게 아빠가 된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보면 아빠가 된 청소년은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보장을 받는다. 이는 임신을 했거나 부모가 된 학생을 학교에서 내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함과 동시에 임신을 했거나 부모가 됐다고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법이 1972년도에 마련되어 계속 시행하고 있고,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다. 더욱이 학생이 임신 2개월부터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생활하는데 불편하지 않게 여러 측면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연 최고 5,700유로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학생이 임신했다고 부모가 됐다고 차별받을 이유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들이 자립할 수 있게 더욱더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 학생인권이 암울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학생인권을 제한하면 그것이 비단 학생 인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의 인권은 왜 후퇴할까.
그림책 <엄마는 내게 말한 적이 없다>에서 역시 학교에 가는 것은 의무교육이라는 제도 안에 있고 임신을 하거나 해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스스로 그만두고 싶을 때는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아이는 작은 생쥐가 정말 치과 의사 선생님을 닮았다고 상상한다. 왜 작은 생쥐가 치과의사 선생님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작은 생쥐가 이야기에 처음 등장한 것은 17세기 프랑스의 마담돌노아의 옛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담돌노아의 옛이야기 <착한 생쥐>에서 생쥐는 정의롭고 용감하고 정감 있는 성품으로 등장한다. 때문에 불의의 나쁜 임금을 혼내주는데, 나쁜 임금의 베개 뒤에 숨어있다가 임금이 잠들었을 때 그의 이빨을 몽땅 뺀다. 또한 서양에서의 생쥐는 젖니를 뺀 아이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그 젖니를 모은다고 알려져 있다. 생쥐는 아이들의 하얀 젖니를 모아 모아서 그들의 성을 짓는데, 아이들의 젖니로 예쁘고 튼튼한 성을 지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양치를 좀 더 깨끗이 잘하라고 이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착한 사람이 되라거나 양치를 잘하라거나 하는 어찌 보면 약간의 마키팅 전략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이 그림책에서 생쥐가 치과선생을 닮았다고 하는 아이의 상상은 그림책을 보는 즐거움을 보태고 있다.
엄마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다르다는 것을 말한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자라면서 그 둘을 구별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세상엔 남자와 여자라는 성 구별은 아무 의미 없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성 정체성 존중이 우선이다.
난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다. 학기 초 교수들이 학생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보는데, 아직까지 이름에 남성과 여성의 구별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어서 이름에 남아있는 남성성과 실제 모습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같은 과의 그 학생은 지금은 자기가 원하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교수에게 요구했다. 그 학생은 자라면서 자신의 성 성체성을 확인했고,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단지 태어날 때 부여받은 이름에 대해서는 대학 첫날, 대학원 첫날에... 때마다 좀 번거롭지만 수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제 일을 하면서는 더 이상 수정을 요구할 일이 없을 것 같다. 프랑스어에는 여성과 남성을 구별하는 관사가 꼭 붙는데 특히 인칭 대명사의 경우엔 참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다를까 이미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남성 인칭 대명사 il(그) 나 여성 인칭 대명사 elle(그녀) 대신에 그 둘을 통합한 ile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ile 인 것이다. 참 현명하다. 이어 아이는 ”왜 어떤 남자들 혹은 여자들은 같은 성의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는지 “ 궁금해한다. 사랑에 국경이 없다는 옛(!) 말이 있다. 그 말이 옛말이 아니고 진리임을 거듭 확인한다.
아이는 또 ”왜 엄마 아빠는 그들의 방에서 나를 내쫓았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밤에 둘만 자주 외출을 하는지도 왜 이야기해주지 않을까”라고 질문한다. 그림책의 그림엔 엄마 아빠의 방에서 그들은 그들만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단, 둘만의 축제엔 아무리 사랑하는 아이라도 방해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 둘만의 시간이 자주 필요하다는 것에 아이는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다.
또 아이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모가 여럿 중에 한 아이를 선택할 수 있는지” 엄마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상 아이는 어떻게 아이를 입양하는지 모른다. 입양하는 과정에 대해 궁금해했을 때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아이는 지금까지 갖게 된 질문에 대해 엄마가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았았지만, 그러나 괜찮다고 덧붙인다.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자기 자신자신에게 말을 걸며 사유의 길로 들어섰다. 단지 엄마 혹은 아빠, 아이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그 누구라도 이러한 질문에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면 그것이 바로 아이가 원하는 답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디 아이뿐일까.